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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지
배하는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Edward Louis Bernays

프로파간다의 캡틴 아메리카 혹은 PR의 아버지

요약 테이블
출생 1891년
사망 1995년
국적 미국

민주공화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만 국민을 지배하는 관행과 의식은 그 사회의 권력자들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온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사회의 관행과 의식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방법으로 PR과 프로파간다를 선택했으며, 효과를 좀 더 극대화하기 위해 때로는 정보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지배로부터 과연 우리들은 자유로운가?

2009년 하반기 최고의 인기를 누린 텔레비전 드라마는 누가 뭐래도 〈선덕여왕〉이었다. 여러 장면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웬만한 정치학자의 통치론 강의를 능가할 만큼 탁월한 설전이 이어진 미실과 선덕(덕만)의 리더십에 대한 논쟁이었다. 덕만은 정치적 경쟁자인 미실이 차지하던 신권(神權)을 빼앗은 뒤 첨성대를 만들어 천문과 기상에 대한 정보를 백성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그러자 미실은 덕만에게 정쟁에도 규칙이 있다면서 천문기상에 대한 지식을 백성에게 알려주려는 것은 지배의 규칙을 어기는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으로 왕권을 세우고 조정의 권위를 세우겠습니까. 공주님! 세상은 종으로도 나뉘지만 횡으로도 나뉩니다. 세상을 종으로 나누면 이렇습니다. 백제인, 고구려인, 신라인. 또 신라인 안에서는 공주님을 따르는 자들, 이 미실을 따르는 자들. 하지만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공주님과 전 같은 편입니다. 우리는 지배하는 자들입니다. 미실에게서 신권을 빼앗으셨다면 공주님께서 가지세요. 그걸 버리고 어찌 통치를 하려 하십니까? 백성은 진실을 부담스러워합니다. 희망은 버거워하고요.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입니다. 백성은 떼를 쓰는 아기와도 같지요.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권력이 정보의 독점 혹은 지배에서 나온다는 미실의 지적은 현실 정치에서도 핵심을 이루고 있다. 과연 이들의 논쟁은 신정일치(神政一致), 전제왕정이나 귀족만이 지배계급으로 통치하던 과거의 이야기일까?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남녀노소, 빈부의 차이 없이 누구나 1인 1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의 시대, 인터넷을 통한 다중지성이 논의되는 세상, 누구나 여론의 주인공이 되고 누구나 뉴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웹2.0과 SNS의 시대, 피지배계급이나 이름 없는 대중이 주인이 된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이야기일까?

대중을 자발적 복종의 길로 이끈 사람

대중이 자기도 모르게 복종하도록 만든 사람, 에드워드 버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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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계몽사상에서 시작된 과학·이성·진보의 힘은 19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체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증기기관, 내연기관, 무선통신, 사진,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난 새로운 발명과 미국대륙횡단철도, 유라시아횡단철도, 대양 운송 등 철도와 기선의 출현으로 촉발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농업 사회의 낡은 체제를 파괴했고, 도시로 유입된 다수의 노동자 계층이라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생성시켰다. 이 같은 변화는 사회적으로 전통적 생산 수단을 현대화하도록 강요(문화적 재생산을 차단)했고 인구의 이동성을 높여 도시의 거대화를 초래했다. 자유주의·자본주의 모델이 끝없는 물질적 풍요를 약속했고, 언론·상거래·과학적 탐구의 자유·노동의 유동성과 확대된 선거권에 기초한 민주적 자치(自治)에 대해 각성한(영국의 경우 1867년 도시 소시민, 노동자, 1884년 광산노동자, 농민, 1918년 남성 보통선거, 1928년 보통선거 확립) 시대이기도 했다.

발전된 생산력은 세계 인구를 크게 증대시켰는데, 1900년 당시 16억 3,000만 명에서 2000년 무렵 60억으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산업화와 도시화,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대중의 의식 역시 크게 변화시켰고, 교육받은 중산층과 소수 기술노동자 계층의 대두로 새로운 형태의 매스미디어들이 등장했다. 이를테면 신문은 1700년대부터 소책자나 정보지 형태로 출발해서 18세기에 이르러 일간지가 일반화되었고 1840년대에 대중잡지가, 1920년대에는 라디오가, 1940년대에 텔레비전이 출현했다. 영국에서 대중적인 독자를 겨냥한 카툰 잡지 『펀치(Punch)』가 창간(1843년)되었고, 사진 출현 등으로 인해 범람한 포르노그래피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전통적 지배계층은 간신히 문맹을 벗어난 대중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가 하면, 한편으론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당시 영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이론가 M. 아널드(Matthew Arnold)는 대중의 출현을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대충 교육받은 다수가 아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소수가 항상 인류의 지식과 진실의 기관 구실을 해왔다. 말의 뜻을 충분히 새겨보면 지식과 진실은 결코 인류의 대다수가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지배 엘리트들은 대중사회의 도래를 기존 사회 체제의 붕괴를 초래할 위험 요소로 보았다. 자유주의 사상가 밀(John Stuart Mill)과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역시 확대된 민주주의(보통선거)로 인해 수적으로 증가한, 그러나 정치적으로 무지하고 무관심한 대중을 선출된 소수가 오도해서 민주주의가 변질되는 것을 새로운 전체주의적 횡포로 생각했다. 이런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이즘'들은 정치가 교양인의 일이었던 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상대방의 감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끈질기고 학구적인 의회 토론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고전적인 '이즘'은 그 사상을 뒷받침하는 철학과 그 이즘들의 강령을 검토함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파시즘은 대중정치 시대에 급조된 새로운 고안물이었다. 파시즘은 세밀하게 연출된 의식과 감정이 가득 실린 수사를 적절히 사용하여 사람들의 정서에 주로 호소했다.

대중사회의 출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사회주의는 대중을 각성시켜야 할 노동계급으로만 해석했고, 보수주의는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적대적 세력으로, 자유주의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교육받은 시민들만을 진정한 정치 세력으로 인정했다. 이들 정치 세력은 모두 대중을 정치권력의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양한 층위와 욕망을 지닌 대중을 이념적 프레임으로만 파악한 기존의 정치 이념들이 놓친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파시즘이었다. 파시즘은 대중의 각성된 정치의식을 위험하게 여기거나 무시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반대로 대중이 지닌 보수성(대중은 무산계급의 자의식과 더불어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 성향을 함께 지녔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회주의의 공백을 파고들었다. 자유주의는 파시즘에 대항할 만한 세력과 대안을 조직화해내지 못했고, 보수주의는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손쉬운 정치 세력으로 파시즘을 선택했다.

1928년 밀라노 궁 앞을 행진하는 파시스트들

사회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등 기존 정치 세력은 대중을 정치권력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정치 이념들이 놓친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파시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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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지배계급은 대중의 동의와 설득 없이 기존처럼 '좋은 집안 출신의 교육 잘 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명성과 존경'에 의지해 '국가를 통치하려는 지배 방식' 자체가 문제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로부터 좌우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정치 체제로 선택한 국가의 지배계급은 대중과 여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서는 더 이상 지배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 'PR의 아버지' 또는 '정보조작의 대부'로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바로 그런 시대에 태어나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와 지배 엘리트의 의지대로 대중을 '자발적 복종'의 길로 들어서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기초를 놓은 사람이었다.

프로이트의 조카로 태어난 에드워드 버네이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1891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일라이 버네이스(Ely Bernays)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여동생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라이는 부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일찌감치 스스로 앞길을 개척해야 했다. 혼외정사로 자식까지 두었기 때문에 일라이와 친구 사이였던 프로이트는 동생의 결혼에 반대했고 두 사람의 결혼식(1883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불편한 관계는 일라이가 부인과 어린 버네이스를 데리고 미국 이민길에 오르던 1892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로이트는 훗날 장성한 조카 버네이스가 자신의 주요 저서 『정신분석학 입문』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널리 알린 공로를 감사하게 여겼고, 버네이스 역시 심리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삼촌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적절히 활용했다. 또 그의 저서를 통해 접한 무의식의 세계를 대중 홍보선전 전략에 접목시켰다.각주1)

미국에 도착한 일라이는 맨해튼농산물거래소에서 곡물수출상으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애썼다. 생계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파묻혔고, 자수성가한 부모들이 흔히 그러하듯 자녀에게 엄한 규율을 강조했다. 어린 버네이스는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무능력하다고 여기며 한편으론 쉽게 역정을 내는 무뚝뚝한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은 부친 때문에 풍족한 환경에서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경기불황의 여파로 곡물시장이 위축되면서 상황이 악화되자 중도에 공립학교로 전학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버네이스는 처음으로 자신과 처지가 다른 노동계급의 자식들과 교육받게 되었다. 어쩌면 처지가 다르다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스스로 이들과 차별화를 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으로, 나는 세계적인 뉴욕의 다양한 부분과 접촉을 했다. 이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8B반에 있는 남자애들이 나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면서 혼돈을 느꼈다. 그들의 가족 배경은 나와는 달랐다. 나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탈리아, 러시아와 폴란드계 이민자 출신의 불우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보호받는 인생을 살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들은 내가 알고 지내던 아이들보다 거칠고 힘들게 살며 더 호전적이었다. 주먹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역할을 하고, 턱에 날리는 오른손 펀치 한 방이 토론을 끝내는 결정적인 도구였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졸업하기 직전, 1년에 불과한 짧은 공립학교 생활이었지만 이곳에서의 강렬한 체험은 그에게 세상을 이루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깊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엘리트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았고, 언제나 지배당하는 자보다 지배하는 자가 되기를 꿈꿨다. 고등학교에서는 다양한 클럽 활동을 하며 특히 교내신문과 도시역사클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극을 관람하러 브로드웨이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지내며 풍부한 교양을 쌓았다. 부친 일라이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농업문제 전문가가 되길 희망했지만 그는 그럴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1908년 코넬 대학 농업대학에 진학했다. 뉴욕의 고급주택가에서 성장한 그에게 미국 중서부의 농촌에서 성장한 학우들은 매우 낯선 존재였다. 그는 식물생리학이나 동물관리학 같은 농학 분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낙제만 간신히 면할 정도였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한 21세의 버네이스는 언론 분야에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하고 싶었다. 당시 미국은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이미 현대성의 모든 것을 갖춘 나라, 20세기 초의 미국

미국의 20세기는 19세기 말에 이미 시작되었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산업, 농업혁명, 민주화, 중앙집권화, 도시화 같은 20세기적 특성(근대화)이 구체적 현실로 나타났다. 비록 청교도적인 엄격한 문화와 여성참정권 제한 같은 전근대적인 풍토가 공존하긴 했으나, 다른 국가들이 근대에 도달하기 위해 지불한 시련과 기간에 비해 미국은 독립전쟁 이후 2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양당 체제를 비롯한 합리적 근대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까지 미국이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현대성의 실험은 대규모 국제전이었다. 그러나 미국인 대부분은 유럽의 어떤 전쟁에 대해서도 미국이 초연하게 중립을 지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정책이라 여기는 강력한 고립주의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남북전쟁의 경제적 원인이 되기도 한 농업 분야의 발전은 영국의 산업혁명 과정 못지않게 잔인했다. 당시 미국 농업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농업 인구가 너무 많은 데 비해 농업 자본이 과소한 것이었으므로, 농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이가 토지를 빼앗기고 도시의 하층 노동자로 편입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아메리칸드림'은 비록 이민 1세대는 가난할지라도 그 이후 세대는 앞 세대보다 훨씬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주었다. 1900년 7,500만 명이던 미국 인구는 1920년에 이르자 1억 명을 넘어섰다. 구대륙에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이민과 아메리칸 드림이란 희망이 유지되는 한 미국은 산업적 역동성에서 유럽을 크게 앞지를 수 있었다.

20세기 세계의 모습을 변화시킨 위대한 발명, 이를테면 전화, 전등, 축음기, 내연기관 등은 대개 19세기 미국에서 나온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은 과학기술을 응용해 실생활을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헨리 포드는 1908년 최초의 조립라인 공장에서 포드 T형 모델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미국은 당시 산업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였고, 문화적으로도 야구, 래그타임(ragtime, 재즈의 전신인 피아노 음악), 보더빌(vauderville, 춤과 노래가 가미된 버라이어티쇼) 등 매우 독창적인 도시 문화가 창조되는 곳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버네이스는 『내셔널 너서리맨(National Nurseryman)』이란 원예 잡지에 취직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 확신이 없던 그는 얼마 뒤 잡지사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일했던 맨해튼농산물거래소에서 건초와 귀리 같은 곡물의 화물상환증을 작성하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화물선 관리인 자격으로 파리에 가서 곡물 무역에 대한 해외 전보를 해석하기도 했다. 사람들과 사귀기 좋아하는 활기찬 성격의 그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아버지의 도움으로 미래를 계획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912년 12월, 우연찮게 만난 고교 동창 프레드 로빈슨이 자신이 소유한 『메디컬 리뷰 오브 리뷰(Medical Review of Reviews)』와 『다이어테틱 앤 하이제닉 가제트(Dietetic & Hygenic Gazette)』의 운영을 도와달라고 하자 버네이스는 당장 이 제안을 수락하고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잡지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이었다. 때마침 이들의 야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투고가 들어왔다. 매독에 걸린 채 결혼해 매독이 있는 아이를 낳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외젠 브리외(Eugene Brieux)의 희곡 작품 〈손상된 상품(Damaged Goods)〉에 대한 한 의사의 비평이었다. 버네이스는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기대하던 문제적 비평, 사회적 의제를 환기시킬 수 있는 중요한 원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미국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 비견될 만큼 성에 대해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성적 접촉에 의해 전파되는 질병을 소재로 한 연극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남북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한 바 있는 앤서니 컴스톡(Anthony Comstock)이었다. 그는 1873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사회악근절협회를 창설하고, 의회에 압력을 가해 우편으로 피임 기구를 배달하거나 피임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컴스톡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금도 미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낙태'지만, 그는 '피임'까지도 음란정보로 간주해 여성 인권과 보건복지 향상을 위해 싸운 많은 이들을 고발해 감옥에 보내거나 자살에 이르도록 할 만큼 심한 모욕을 주었다. 심지어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인간과 초인(Man and Superman)』(1903) 같은 작품조차 관객들을 오염시킬 수 있다며 일반인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뉴욕시립도서관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컴스톡 법안은 1971년에 가서야 폐지되었는데, 버네이스는 이런 분위기에서 과감하게 잡지에 비평을 게재한 것이다.

1878년 유명한 불법낙태 시술자를 체포하는 앤서니 컴스톡을 그린 그림

컴스톡의 영향하에 있던 20세기 초 미국은 성을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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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한 사고(big think), 대중의 인식과 행동 양식을 변화시키는 PR

그의 의도대로 보수적인 독자들이 충격에 빠졌고, 이 비평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러자 다른 한편에서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버네이스는 예술 표현의 자유와 여성 인권을 옹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존 록펠러 2세(John D. Rockefeller, Jr.), 윌리엄 밴더빌트 부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부부, 진보적 교파인 뉴욕 유니테리언 교파의 존 헤인즈 홈즈(John Haynes Holmes) 목사 등 권위 있는 사회적 명사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20세기 초 미국은 대자본가에게는 이른바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불릴 만한 시기였다. 존 D.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등 미국식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거인 대부분이 이 시대의 인물이었다. 버네이스는 비록 유대인이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지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팔고자 하는 물건이나 상품을 직접 광고(advertising)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인식과 문화를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PR(Public Relation)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이후 그는 홍보를 대행하면서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했지만 구체적인 철학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행동 양식과 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런 자신의 철학을 '원대한 사고(big think)'란 말로 즐겨 표현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대중의 무의식에 한번 뿌리박힌 인식과 행동 양식은 언제나 새로운 사회적 통념, 즉 문화가 되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른 인식의 도전이 없다면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버네이스의 원대한 사고는 그의 선전 이론을 충실하게 따른 제자이자 독일의 선전상이던 괴벨스(Joseph Goebbels)에 의해 '원대한 거짓말은 대중을 믿게 할 수 있다'는 말로 반복되었다.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를 이룬다." 이 말에서 엿보이듯 버네이스가 생각한 국가 권력의 진정한 지배자는 대중이나 평범한 시민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정부는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대중의 의식과 습관을 지배하는 사회기구를 조종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때문이다. 예를 들어 5,000만 명을 대상으로 광고를 내보내려면 그 비용이 어마어마하다. 대중의 생각과 행동을 주도하는 지도자 집단을 설득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역시 엄청나다"며 젊은 공화국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이 누구인지 간파하고 있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국민 대다수의 여론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독립선언 이후 실제로 미국의 정치를 지배하고, 이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거의 언제나 소수 지배 세력의 이해였다.

버네이스는 잡지와 연극의 성공을 위해 성 담론을 상업적인 자극제로 이용하면서도 한편으론 매독과 공중보건, 치료에 대한 논란을 대의명분으로 하여 권위 있는 지지자를 구한 경험을 평생 동안 활용했다. 이를 계기로 언론홍보 대행인(press agent)이란 새로운 직업을 가지게 된 그는 이후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연극 〈키다리 아저씨(Daddy Long Legs)〉와 러시아발레단의 미국 홍보, 이탈리아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의 미국 공연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명성을 쌓게 된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갈등

1914년 뉴욕에서 일어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시위

20세기 미국 사회에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갈등이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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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가 끝나고 진짜 20세기가 시작되자 미국 사회에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갈등이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1905년 시카고에서 사회주의노동당의 대니얼 드 리언(Daniel De Leon), 서부광산노동자연합의 윌리엄 헤이우드(William Haywood), 사회당의 유진 뎁스(Eugene V. Debs) 등의 주도하에 미국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의 보수적인 지도와 자본주의 수용에 불만을 품은 서부광산노동자연맹, 통일금속노조 등 7개 단체 5만여 명이 참가하여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이 결성되었다. '워블리스(Wobblies)'란 별명으로 불린 이들은 미국 내 모든 노동자의 산업별 조직화와 자본주의 제도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혁명적 조합 운동을 확립하고자 했다. 미국의 산업자본주의와 노동자들이 처한 잔인한 풍경을 묘사한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소설 『정글(The Jungle)』(1906)과 소설을 통해 미국의 파시즘을 경고한 잭 런던(Jack London)의 『강철군화(The Iron Heal)』(1908)가 출간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11년 3월 트라이앵글 블라우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146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는 공장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공장 문을 항상 잠가놓았기 때문에 꼼짝없이 갇힌 여성들은 작업대에서 산 채로 타 죽거나 잠긴 비상구 앞에서 질식해 숨졌다. 이듬해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서 2만 3,000여 명이 참여한 섬유 파업이 일어났다. 수많은 여성이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거나 사회에 진출했지만 미국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투표권이 없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뉴욕 여성들은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11년 3월 25일 트라이앵글 블라우스 공장에서 노동자 146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공장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공장문을 항상 잠가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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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9월엔 록펠러 일가가 소유한 콜로라도 남부의 러들로(Ludlow) 석탄 광산에서 조합 조직가 한 명이 살해되면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이 시작되자 광부들은 회사가 제공한 광산촌 오두막에서 쫓겨났고, 록펠러 측이 고용한 자경단원들은 기관총과 라이플로 무장한 채 이들을 습격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늘어났지만 콜로라도 주정부는 광부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마침내 주방위군이 출동하자 광부들은 이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한 줄 알고 환영했다. 그러나 주방위군의 급료는 록펠러 측에서 지급하고 있었다. 해를 넘겨 1914년 4월 20일, 파업에 참여한 광부와 가족들이 임시로 설치한 천막촌을 향해 주방위군의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여자와 어린이들은 총격을 피하기 위해 천막 아래 구덩이를 파고 피신했는데, 해가 지자 주방위군은 천막촌에 불을 질렀다. 다음 날, 천막촌의 폐허 옆을 지나던 전화보선공이 한 천막 아래 구덩이를 덮은 철제 침대를 들추자 온몸이 시커멓게 타고 뒤틀린 채 숨져 있는 어린이 열한 명과 여성 두 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것이 훗날 '러들로 학살(Ludlow Massacre)'로 알려진 사건이다.

천막촌을 지켜보는 주방위군

콜로라도 러들로 광산에서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임시로 천막촌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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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사람만 3만 5,000명이었고 부상자는 70만 명에 이르렀다.각주2) 역설적이게도 러들로 학살을 계기로 록펠러 일가와 록펠러 재단은 미국을 대표하는 공익기업이자 사회사업가, 자비심 넘치는 자본가로 칭송받게 된다. 이 같은 인식의 전복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록펠러 일가가 현대 PR의 아버지로 에드워드 버네이스와 쌍벽을 이룬 아이비 리(Ivy Ledbetter Lee)를 고용해 이미지 개선을 위한 전략적 홍보를 꾸준히 펼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은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 경제적인 면에서는 자유자본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세계에서 가장 앞선 양당 중심의 공화정과 민주주의각주3) 체제를 갖추었지만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가혹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과 프로파간다의 캡틴 아메리카

1917년 4월 6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버네이스는 즉시 입대하고자 했으나 본인의 희망과 관계없이 신체검사 결과 평발과 시력적인 결함 때문에 입대할 수 없었다. 재검을 요청했지만 현역 전투병으로 입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미국인이며 163센티미터로 체격이 왜소했던 그는 조국 방위에 앞장서는 애국적인 국민이란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그가 이처럼 군에 입대하기 위해 노력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선전포고를 전후해 고조된 애국주의적 열기가 독일을 비롯한 적국 출신 시민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겼고, 전쟁으로 인한 경기 불황과 수요 감소로 일거리가 줄어든 데다 무엇보다 PR 능력을 전쟁과 정치에 접목시켜 보고 싶다는 야심이 그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정치는 미국 최초의 대기업이었다. 따라서 기업은 정치에서 모든 것을 배운 데 비해 정작 정치는 기업으로부터 생각과 제품의 대량 보급 방법을 별로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PR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PR은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라기보다 생산력 증대와 대중사회 출현이 겹쳐진 결과물이다. 모든 상품(특히 사치품)의 소비자가 확실히 결정되어 있던 귀족들의 장원 체제나 잉여생산물이 발생할 수 없을 만큼 생산력이 낮은 시대에는 광고가 전혀 필요치 않았다. 산업혁명과 도시화의 여파로 19세기에 이르러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실체적 거리가 멀어져 생산자들이 더 이상 이득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되면서 광고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광고에서 놀라운 혁신이 일어난 순간은 대개 대중이 구매 여력이 있음에도 높은 생산력 때문에 잉여생산물이 과잉된 상황에서 일어났다. 광고와 선전, PR이 위기를 맞이하는 순간은 경기불황 등의 이유로 수요 자체가 줄거나 결핍 상황이 초래될 때였다. 이런 결핍이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바로 전시(戰時)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이자 독립 이후 구대륙(유럽)의 정치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고립주의 전통을 무너뜨린 최초의 전쟁이었다. 더구나 윌슨 대통령은 1916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 없는 평화(peace without victory)'란 구호로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내세운 사람이었다. 윌슨은 참전 명분으로 "세계를 민주주의에 알맞도록 만들기 위한" 전쟁이라고 내세웠지만 많은 사람이 왜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먼 나라의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잃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은 이 전쟁이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의 결과로 촉발된 자본가 계급의 전쟁이라 규정하며, 왜 노동자 계급의 자식들이 그들 대신 총알받이로 나서야 하는지 의문을 표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만 약 400만 명의 젊은이가 징집되었고 이 가운데 11만 6,000여 명이 전사했다. 비록 전사자 규모 면에선 독일의 180만 명, 프랑스의 160만 명, 영국의 80만 명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단지 14개월의 참전 기간과 서부전선에만 투입된 미군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 인명 손실은 엄청난 것이었다. 전쟁에 반대하고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국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미 정부가 구사한 전략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우선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희생당한 루시타니아(Lusitania)호 격침 사건각주4) 을 이용해 대중의 분노와 애국주의를 격발시켰고, 다른 하나는 국수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대중과 권력을 동원해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을 비난하거나 테러를 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당시 노동계를 대표하던 유진 뎁스는 1917년 간첩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10년 징역에 처해졌으며 노동운동은 탄압받았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미국은 시시때때로 악명 높은 '적색 공포'에 시달렸다.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 U-20에 의해 민간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했다. 미국은 이 사건으로 대중의 애국주의를 불러일으켜 참전 명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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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가 좌절된 버네이스는 자신의 재능을 미국 정부의 전쟁 수행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정부가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과 우표 판매를 도왔고 신병모집 집회를 홍보했고 애국적인 음악축제의 홍보를 기획했다. 심지어 일반 음악회에서도 한 곡 정도는 반드시 군대에 대한 노래를 포함시키도록 했다. 이런 노력이 인정받은 덕분인지 아니면 전쟁 수행을 위해 선전 활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정부의 선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1918년 마침내 그에게도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조지 크릴(George Creel)이 이끄는 연방공보위원회(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 CPI)에 발탁된 그는 탁월한 선전 혹은 정보조작 능력을 선보였다. 그는 크릴을 비롯해 자신의 지적 영웅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등과 함께 독일 등의 적성국을 야만적인 거짓말쟁이로 호도했고, 미국은 언제나 진실을 전하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묘사했다.

당시 에드워드 버네이스와 연방공보위원회의 업적에 대해서는 히틀러마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것이 선전 능력에서 뒤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처럼 대단한 선전전을 치러냈지만 전쟁의 참혹한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선전(프로파간다, propaganda)'이란 말 자체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군 징병 포스터

버네이스가 참여한 연방공보위원회는 적성국을 야만으로, 미국을 진실로 포장하는 등 대단한 선전전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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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신앙이나 가치관 또는 관습의 체계적인 보급을 의미하는 '선전'이란 말은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가 바티칸의 구교 세력이 신교개혁파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한 종교 조직을 '신앙의 전파를 위한 교단(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18~19세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 언어권에서 선전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신념의 유포, 종교적 복음의 전파, 상업광고 등을 지칭하는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중립적인 의미였던 선전 혹은 프로파간다라는 말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말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가 전쟁의 진상을 왜곡하고 전쟁에 비협조적인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PR을 악용한 결과였다.

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온 병사들이 펴낸 회고록과 일기, 역사적 성찰이 이어지면서 정부의 선전이 얼마나 많은 것을 왜곡하고 대중을 기만해왔는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쟁을 이끄는 탁월한 전략가로 알려졌던 장군들은 시대에 뒤처진 전략을 맹종하며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기관총과 대포의 일제사격 앞으로 쏟아부었고, 열렬한 애국심에 대한 호소는 진보된 군사기술 앞에 대량으로 희생당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한 술수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전쟁이 민주주의 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친영국계 금융기업, 군수산업, 우익 집단 등 다양한 이익집단이 결탁해 명분도 없는 외국의 살육 현장으로 국민을 내몬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정부의 선전이 의도한 것은 적국 시민의 사기를 떨어뜨리기보다는 자국 시민을 전쟁에 좀 더 적극적으로 동원하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뻔뻔한 거짓말과 과장, 검열과 의도된 오보를 통해 전쟁의 진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민들은 분노했다. 전쟁에 대한 오래된 경구 가운데 하나인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진실"이란 말이 확인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정부의 선전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졌다. 다만 선전기관들은 '선전'이란 부정적인 말 대신 '공보'나 '국정 홍보', '대중교육' 같은 완곡한 표현을 선호했다. 선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꺼린 이유는 선전이 정보조작, 왜곡과 사실상 동의어가 되었으므로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이상과 양립할 수 없다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을 전후해 탁월한 선전전략가로 자리매김한 버네이스는 선전이란 말이 지닌 본래의 중립적인 이미지를 회복하고, 대중사회와 민주주의 정치체제 아래 선전이 지닌 힘과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1928년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펴낸다. 물론 출간의 진정한 뜻은 홍보전문가로서 자신이 지닌 투철한 직업관과 전문지식을 널리 알리고, 결과적으로 고객(client)들에게 에드워드 버네이스와 계약하라고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책은 의도대로 대단히 성공적이었는데, 유대인을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혐오하던 독일의 선전상 괴벨스조차 유대인인 그를 스승으로 초빙해서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할 정도였다.

여성을 흡연으로 이끈 자유의 횃불

"선전과 교육의 유일한 차이점은 실제로 관점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을 주창하는 것은 교육이고, 믿지 않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선전이라고 한다."

이 말에서 엿보이듯 버네이스는 원하는 메시지만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이 선전이라 불리든 교육이라 불리든 개의치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괴벨스도 비슷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선전은 정신적 인식을 전할 필요도 없거니와 점잖을 필요도 없다. 성공에 이끄는 것이 좋은 선전이다."

전쟁이 끝나자 버네이스는 전시에 사용한 선전 수법을 변형해 평화 시에 기업이 대중의 소비를 촉진하고 민주주의에 대처하는 데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언제나 투철한 민주주의자이자 남녀평등주의자였지만 이런 사상보다 우선했던 것은 선전가로서의 직업적인 본능이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능력을 발휘했는지 한번 살펴보자.

1922년 버네이스는 도리스 플라이쉬만(Dorris E. Fleischman)과 결혼했는데 자신에게 홍보를 의뢰한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신혼여행의 첫날밤을 보냈다. 투숙객 명부에 각자의 이름을 적을 때, 그는 아내에게 결혼 전 처녀 시절의 성을 적게 했다. 이 일로 버네이스는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었다. 우선 결혼하고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처녀 때 성을 고수한다는 이미지를 아내에게 심어 한창 유행하던 여권운동의 새로운 상징으로 만들었고, 자신을 남녀평등주의자로 홍보하면서 그와 동시에 호텔에는 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결혼생활을 지켜본 딸 앤은 "아버지는 어머니가 집 밖에서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집 안에서는 19세기식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다"며 버네이스가 생전에 단 한 번도 가사노동을 분담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담배 시장을 주도한 것은 주로 파이프 담배였고, 가늘게 만 궐련은 여성이나 피우는 담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전쟁 기간에 병사들이 참호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궐련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전후 남성의 흡연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담배회사들은 큰 수익을 얻었는데, 버네이스를 고용한 아메리칸토바코사는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성 흡연 인구의 증대를 원했다. 버네이스는 날씬한 몸매를 위해선 식후 달콤한 디저트 대신 담배를 피우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흡연 여성을 늘리기 위해 유명 패션 잡지의 편집자들에게 배우, 운동선수, 아름다운 여인, 사교계 여성의 마른 몸매를 부각시키도록 했고, 의료계의 권위자들을 내세워 담배가 구강을 살균하는 효과가 있다고 발언하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유명 레스토랑 디저트 메뉴에 담배가 포함되었고, 현명한 주부는 부엌 선반에 생활필수품으로 담배 놓는 곳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버네이스와 아메리칸토바코의 럭키스트라이크 PR 캠페인은 크게 성공해서 여성 흡연율이 높아졌다. 그러나 담배회사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활동하는 시간대의 상당 부분을 집이 아닌 외부에서 보내지만 남들의 눈을 의식해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담배회사는 여성들이 더 많은 담배를 소비해주길 바랐다. 그러자면 거리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어야 했다. 버네이스는 여성이 원하는 곳 어디에서나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권리를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상징으로 조작하기 위해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 퍼레이드를 기획하고 언론의 이목을 끌기 위해 사전에 세밀한 준비를 했다. 우선 시위에 참석하는 여성들은 날씬하고 매력적이어야 했고, 여권운동가가 동참해서 이것이 상업적인 PR이 아님을 보증해야 했다. 자신이 나서면 시위의 정체가 탄로 날 것을 염려해서 비서 버사 헌트(Bertha Hunt)의 이름을 빌려 사교계와 패션계, 여성계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시위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물론 시위를 위한 담배로 럭키스트라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메리칸토바코는 여성 흡연을 증대하기 위해 버네이스를 고용했다. 버네이스는 날씬한 몸매를 위해선 식후 달콤한 디저트 대신 담배를 피우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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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3월 31일, 드디어 맨해튼 5번가에서 수많은 여성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건은 곧바로 언론에 앞다퉈 보도되었고, 여성의 거리 흡연을 놓고 격렬한 찬반논쟁이 벌어졌다. 몇 주 뒤 브로드웨이의 극장은 남성 전용 흡연실에 여성의 입장을 허락했고, 5주가 흐른 뒤 뉴욕의 극장 대부분에 여성 전용 흡연실이 마련됐다. 하지만 버네이스 자신은 생전에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심지어 결혼 전에는 하루에 한 갑씩 담배를 피우던 아내도 남편의 반대로 담배를 끊어야만 했다. 어쨌든 아메리칸토바코의 럭키스트라이크 매출은 그 후 세 배 이상 올라 3,200만 달러의 순수익을 기록했다.

거대 권력의 지배 아래 놓인 자유의지

일상의 어느 부분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들의 지배를 받는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이 양복을 구입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자신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자신이 선호하는 옷을 고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런던의 어느 이름 없는 멋쟁이 재단사의 명령에 따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 인물은 멋쟁이 신사와 왕족의 후원을 받는 어느 소박한 양복점의 과묵한 경영자다. 그는 영국의 상류사회 신사들에게 회색 대신 푸른색을, 스리 버튼 대신 투 버튼을, 지난 시즌보다 통이 4분의 1인치가량 좁은 소매를 추천한다. 이 양복점을 찾는 유명 인사 고객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버네이스가 했던 말의 핵심은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들에게 대중이 지배받으면서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미국인의 아침 식탁에 '베이컨과 에그'가 주요 메뉴로 오르게 만들었다.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미국인들은 아침 식사를 간소하게 먹는 추세였기 때문에 베이컨 매출이 저조해졌다. 베이컨 제조사 비치넛패킹(Beechnut Packing)에 고용된 버네이스는 다른 사람의 시장을 빼앗는 것보다는 시장 자체를 키우는 방식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저명한 의사들을 상대로 아침 식사 방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물론 기름진 베이컨을 먹는 것이 좋은지, 간소하게 먹는 것이 좋은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아침 식사를 든든히 하는 것이 좋은지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묻는 것이었다. 결과는 아침을 든든히 먹는 쪽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버네이스는 이 사실을 언론에 공표했고, 설문조사 발표 후 베이컨과 달걀의 판매가 급증하면서 베이컨과 달걀은 미국 어휘사전에 아침 식사의 대표 음식으로 등재되었다. 그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대신에 이벤트를 만들었고, 새로운 뉴스거리를 원하는 언론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주었다.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인사들의 보증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홍보전문가로서 그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갔다. 그는 본래 세안용으로만 이용되던 비누의 새로운 용도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1923년 P&G사는 아이들이 씻기 싫어하고 거추장스러워하는 비누의 소비를 촉진할 방법에 대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PR을 실시하기에 앞서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아이들이 비누에 대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태도를 먼저 개선해야 한다고 느꼈다.

1924년 그는 전국비누조각대회를 조직했고, 큰 상금을 걸어 언론의 주목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선 첫 번째 대회에서는 일반 조각가, 건축가 및 여러 분야 예술인들이 참가해 450킬로그램이 넘는 대형 아이보리 비누를 멋지게 조각하도록 했다. 이듬해 대회부터는 일반인과 학생들이 참여하는 국민적인 행사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비누 조각은 공립학교 미술시간의 정규 과정에 포함되었고, P&G의 비누조각대회는 1961년까지 37년간 지속되었다. 매년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비누 판촉행사에 동원되었지만 이들은 그저 독창성과 예술성을 겨루는 대회에 참가한다고 느낄 뿐이었다. 버네이스는 이외에도 재선을 앞두고 이미지 개선 작업이 필요했던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대통령의 대선캠프에 참가해 그의 이미지를 바꿔놓는 데 성공했고, 전기 발명 50주년 기념행사를 '빛의 황금 축제'로 명명하며 세계적인 축제로 이끌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프로파간다의 달인들

1933년 나치의 중요한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인 괴벨스는 독일의 유대인에 대해 파괴적인 캠페인을 진행할 때 그 수법을 유대계 미국인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책과 이론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버네이스의 책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1925)과 더불어 괴벨스의 서재에 잘 진열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버네이스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 어떠한 인간의 활동도 사회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반사회적으로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1932년에 베를린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뒤에 선 괴벨스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독일의 유대인에 대해 파괴적인 캠페인을 진행할 때 그 수법을 유대계 미국인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책과 이론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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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의 창시자라고 할 수는 없으나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자신이 일한 분야에서 투철한 직업의식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했다. 풍부한 교양으로 자기계발에 앞장섰고, 회사를 운영하는 데에도 탁월한 관리 능력을 선보였다. 그의 불타는 열정은 아직 미성숙한 분야였던 PR을 전문적인 영역으로 개척했고, 홍보를 직업을 넘어선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엘리트주의자로서 그는 미국의 정치가 어중이떠중이 같은 대중이 아니라 충분히 교육받은 지배 엘리트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애국자로서 미국이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선전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윤리성과 진실을 외면했다.

그는 1995년 세상을 떠나기 전 흡연의 해악에 대해 깨우치고 담배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선전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후회하고 반성했어야 할 일은 유나이티드프루트컴퍼니(United Fruit Company)의 홍보(PR)를 대행하면서 저지른 정보조작(spin)과 그 결과로 초래된 과테말라의 민주정부 전복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쿠데타 이후 과테말라는 세계 최장기 내전을 치렀고, 그러면서 숱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새뮤얼 제머리」편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는 자신이 행한 수많은 PR 캠페인과 프로파간다에 대해서 그저 직업이었다거나 당시에는 제대로 된 정보를 알 수 없었으므로 실수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괴벨스의 선전 작업이 반드시 버네이스의 방식을 따랐다거나 그가 영감을 선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역시 "나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20세기 들어 전성기를 맞이한 대중매체는 이란성 쌍둥이이자 어둠의 자식인 선전과 함께 등장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정부가 주장하는 전쟁의 명분에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국가 권력은 제 의도대로 대중을 동원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20세기 후반부터 전쟁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정부나 군인이 아니라 전쟁홍보대행사의 몫이 되어가고 있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와 전혀 동떨어진 워싱턴에서 팩스와 전화(현재는 인터넷과 이메일)로 국제 여론을 유도하는 이런 방식은 윤리적으로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 그러나 뚜렷한 부정이 없는 한, 국제 분쟁을 사업 대상으로 선택한 PR 기업을 모두 나쁘다고 책망하기는 어렵다. 정보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 PR의 '전쟁터'가 지구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권력의 선전과 정보조작보다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는 오랜 기간 피 흘리며 만들고 지켜온 민주주의가 기업 권력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이다. 기업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기업은 충분한 비용을 지불할 능력과 의지가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상품의 민주화(Democracy of Goods)'를 누리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의 연령, 성별, 인종과 교육, 사회적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충분한 비용(돈)만 지불한다면 과거 귀족이나 누릴 수 있던 호사스런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대가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기업 권력은 과거 비판 이론의 근거지이자 생산지였던 대학을 장악했고, 지식인을 고용해 기업체 산하의 연구소(think tank)에서 권위 있는 지식을 생산하고 유포시킨다. 기업이 자본을 대고, 기업이 연구하고, 기업이 제공하는 정보는 자본이 장악한 언론을 타고 대중에 전달된다. 대중은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생태운동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는 이런 지식을 '정복당한 지식(subjugated knowledge)'이라고 부른다.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탐사보도 전문 기자 존 필저(John Pilger)는 1970년대 스탈린주의 독재 치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밀리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소설가 제네르 우르바네크(Zdenek Urbánek)를 만났다.

"독재 치하에서 우리가 서방세계의 당신들보다 한 가지 면에서는 더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되는 것은 선전과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선전의 이면, 보도의 행간을 읽도록 배웠다. 우리는 진실은 언제나 전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당신들과 다르다."

필저는 우르바네크의 이 증언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자유 사회에서 검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대외적으로 보자면 서로 적대적인 관계처럼 보이는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한목소리로 '자유를 위해 싸우자'고 말할 때 이들은 결국 한통속이라 말했다. 미실과 덕만을 횡으로 나누었을 때 같은 편이었듯이 정치와 기업, 언론과 지식인들이 모두 한통속이라면 과연 당신은 진실을 제대로 보고, 듣고,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엔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보여주는 대로 믿게 된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이룬다. - 에드워드 버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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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 교양인, 2005, 53쪽
  • ・ 래리 타이, 『여론을 만든 사람, 에드워드 버네이스』(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175쪽, 199~200쪽, 209쪽, 224쪽
  • ・ 마이클 하워드·로저 루이스, 『20세기의 역사』, 가지않은길, 2000, 213~218쪽
  • ・ 자크 바전,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 (2권)』, 민음사, 2006, 239쪽
  • ・ 에드워드 버네이스, 『프로파간다: 대중의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공존, 2009, 61쪽, 99~101쪽, 174쪽
  • ・ 제임스 트위첼,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청년사, 2001, 117~118쪽
  • ・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 (상)』, 까치, 2001, 44쪽
  • ・ 토비 클락, 『20세기 정치선전예술』, 예경, 2000, 7쪽
  • ・ 다카기 도루, 『전쟁광고대행사』, 수희재, 2003, 355쪽
  • ・ 이승선, 「[존 필저의 언론비평ㆍ①] 프로페셔널 저널리즘의 추악한 실상」, 『프레시안』, 2007년 8월 14일자

전성원 집필자 소개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새얼문화재단에 입사해 2012년 현재까지 『황해문화』에서 일하며, 평화박물관·space99 운영위원,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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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 저자전성원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 사람의 천재성이나 개성이 인류의 삶을 크게 바꿔놓는다. 헨리 포드에서 마사 스튜어트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근대화와 세계화의 영역에서 우리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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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에드워드 버네이스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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