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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타 아키오

다른 표기 언어 Morita Akio , 盛田昭夫 동의어 소니 워크맨이 일으킨 개인주의 혁명
요약 테이블
출생 1921년
사망 1999년
국적 일본

요약 패전의 절망 속에 빠진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고, 일본은 물론 세계의 전자산업을 이끌며 Made in Japan의 신화를 쓴 소니의 창립자 모리타 아키오. 음악을 좋아했던 전자공학자이자 소니의 경영자였던 그가 어디에서나 음악을 듣고 싶다는 마음으로 개발한 워크맨이 초래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 맺기 방식의 변화는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가 미친 영향에 비견될 만한 것이다.

프랑스 영화감독 뤽 베송은 1990년 〈니키타(La Femme Nikita)〉로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할리우드에 진출해 감독한 첫 작품 〈레옹(Leon)〉(1994)이 전 세계 흥행에 성공하면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이 영화들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던 여성이 가혹한 현실을 경험하며 점차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두 편의 영화는 살인청부업자가 주인공이라는 점 외에도 기묘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소니(Sony) 워크맨(Walkman)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니키타(안느 빠릴로)는 마약에 취한 채 세상과 담쌓고 살아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다. 그녀는 함께 어울려 다니는 불량배 친구들과 약물을 훔치기 위해 깊은 밤, 문 닫힌 약국을 턴다. 친구들이 약국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동안, 그녀는 탁자 밑 좁은 공간에 들어가 앉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친구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꼼짝하지 않는다. 마침내 친구들이 모두 죽고 경찰관이 다가왔을 때 니키타는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경관을 쳐다본다. 그녀의 귀에는 워크맨 리시버가 꽂혀 있었다. 〈레옹〉에서 최고의 악역을 보여준 게리 올드만은 마약단속반(DEA) 반장이자 마약을 빼돌리는 부패 경찰 스탠스 필드로 출연한다. 언제나 귀에 소니의 노란색 이어폰을 꽂고 있는 그는 광적인 분노를 폭발시키며 마틸다(나탈리 포트만)의 가족을 몰살시키기 직전에도 마치 환청을 듣는 사람처럼 춤을 춘다. 이 영화들에서 워크맨은 세상과 단절한 인간을 표현하는 중요한 소도구로 사용되었다.

비디오 세상은 얼굴을 대면하는 상호 접촉을 싫어한다. 그것은 다만 기계와 상호 접촉할 것을 요구한다. 중심가로 걸어가 보라. 주변의 세상에는 무관심한 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라. 소니 워크맨과 유사한 사운드 기계들의 흥행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저 얼굴들을 보아라. 그들은 공허하다. 이어폰으로 듣고 있는 개인들은 모든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였다. 그는 스스로 사로잡힌 청취자인 것이다.

오늘날 카세트테이프를 사용하는 워크맨은 대부분 단종되었지만 소니에서 생산하는 소형 휴대용 전자기기들에는 옛 영화를 상기시키려는 듯 여전히 워크맨이란 상품명이 붙어 있다. 본래 워크맨은 1979년 소니에서 생산한 소형 휴대용 전자기기의 상품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3억 8,500만 대가 팔린(유사 제품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치를 가늠할 수 없는) 소니 워크맨은 오늘날 더 이상 단순한 상품명이 아니다. 비록 초창기엔 문법에도 맞지 않는 '저패니시(Japanish)'란 조롱을 받았지만, 워크맨은 이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당당히 수록되어 있다. 20세기 일상생활의 변화와 개인의 사유체계에 끼친 워크맨의 영향력은 단순히 사전에 등재된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워크맨이 초래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 방식에 대한 변화는 감히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가 인류에 미친 영향에 비견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 40년간 세계 전자제품 시장을 석권해온 소니와 모리타 아키오로부터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소니 워크맨 WM A602 모델

ⓒ Peter de Wit (FaceMePLS)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장으로 키워진 사람

소니의 공동 창립자이자 회장 모리타 아키오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소니의 창업주이자 최고경영자였던 모리타 아키오가 1986년에 펴낸 자서전 『메이드 인 저팬(Made in Japan)』의 서두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순간에서 시작된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오사카 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한 무리의 과학자와 기술자로 구성된 연구팀에서 열 유도 무기와 야간투시 사격 장비를 개발하던 24세의 젊은 해군 장교였다. 그는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듣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연구를 중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만약 미국인들이 원자폭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모든 분야에서 그들을 따라잡기란 애당초 틀린 일이니까 말일세."

이 말에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시 일본이 민간인들에게까지 옥쇄(玉碎)를 강요하던 억압적인 분위기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군인으로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남들 몰래 단파 라디오를 입수해 어느 정도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는 것과 말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이 일화는 모리타 아키오라는 인물이 지닌 품성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자신만만하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서구의 문화와 기술을 접할 수 있었던 남다른 성장 배경 덕분이다.

아키오는 1921년 일본 나고야 근처의 고스가야 마을에서 질 좋기로 유명한 사케(청주)를 빚어내는 양조장의 당주 모리타 큐자에몽(盛田久左衛門)과 그 부인 슈코(收子) 사이에서 장남이자 15대 계승자(당주)로 태어나 커다란 정원과 테니스 코트, 운전사 딸린 자가용과 시중드는 하인이 있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슈코는 사족(士族, 무사 가문) 출신으로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버지 큐자에몽은 장차 양조사업을 이어받을 장남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장남만이 아버지와 겸상을 할 수 있는 봉건적인 가정 분위기 속에서 아키오는 어린 시절부터 미래의 경영자로 성장하도록 남다른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처음부터 사장이 되기 위해 태어났고 평생을 경영 일선에서 보냈다.

나는 항상 "너는 처음부터 사장이다. 너는 우리 가문의 장손이야.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나는 언젠가는 우리 회사의 최고경영자로서, 우리 가문의 당주로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또한 젊었을 때 거듭거듭 주의를 받은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네가 사장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하기로 결정한 것을 분명히 해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요구한 것은 끝까지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아랫사람들을 꾸짖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비난을 할 사람을 찾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배웠다.

봉건적 가부장 질서에 충실한 부친이었지만 그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서구식 경영학을 도입한 게이오 대학에서 수학할 만큼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적 인물이자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는 인물로 손꼽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1858년 설립한 게이오 대학은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게이오 대학은 당시의 국가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제국대학(帝國大學)에 대한 대안으로 설립되었으며,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개인의 발달을 중요시했다. 큐자에몽은 동생을 파리로 유학 보냈고, 서양음악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당시 자동차 한 대 값의 3분의 1이나 하는 거금을 들여 최신식 축음기를 구입하기도 했다.

큐자에몽이 구입한 신형 축음기는 이전의 축음기보다 월등한 음질을 들려주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아키오는 기계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었다. 수학과 물리학을 특히 좋아해 방과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집 안에 갖춰진 개인 실험실에서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등 온갖 실험을 즐겼다. 전통적인 가업보다 서구의 신기술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게 된 그는 부모를 설득해 경영학 대신 물리학을 전공했다. 고교 시절엔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으로 일본의 여러 곳을 비롯해 친척들이 사는 조선과 만주까지 여행했다. 그가 계획한 청소년기의 마지막 목적지는 미국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행은 10년 정도 뒤로 미뤄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한 그는 일선에 나가 개죽음을 당할 바엔 차라리 해군에서 무기 개발에 참여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그는 머지않은 장래에 함께 소니를 창립하게 될 이부카 마사루(井深大)를 만난다.

소니의 공동 창립자인 이부카 마사루

마사루는 기술혁신 분야를, 아키오는 경영과 마케팅 분야를 담당하여 소니를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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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카 마사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1908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그는 모리타 아키오보다 열세 살이나 많았지만 두 사람은 평생 친구로 지내며 변치 않는 우정을 쌓았다. 그리고 마사루는 기술혁신 분야에서, 아키오는 경영과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며 소니를 전후 세계 최고의 전자제품 메이커로 성장시켰다. 아키오가 어려서부터 경영자 수업을 받았다면 마사루는 학창 시절부터 '학생발명가 이부카'라는 평판을 얻을 만큼 엔지니어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대학 시절에 이미 축음기를 직접 조립했고, 1933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자신이 개발한 제품으로 발명 부문 금상을 받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장차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완전히 새로운 일본이 출현하게 될 것이며 그때는 자신들과 같은 젊은 기술자와 새로운 기업이 필요하게 될 거란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 남겨진 것은 폐허뿐이었다. 일본은 전쟁으로 국부의 약 25퍼센트를 상실했고, 주요 도시는 폭격으로 모두 파괴되어 도시 거주자 가운데 47퍼센트가 지붕도 없는 곳에서 살았다. 아키오와 마사루가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도쓰코(東通工)]'를 창업하던 1946년 무렵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달러에 불과했다.

아무런 희망도 긍지도 느낄 수 없던 시대, 이들은 일본 국민에게 꿈과 희망이 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소니를 창업했다. 회사 창립식에서 마사루는 10여 쪽에 달하는 설립취지서를 낭독했는데 여기에는 장차 소니의 기업 경영 이념이 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취지서에서 그는 '소니가 기술자에 의해, 기술자를 위해 세워졌으며 설립의 첫째 목적은 기술자들이 기술의 기쁨과 사회적 책무를 인식하고,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일터를 만드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추악한 이윤 추구를 배제하고, 규모의 확대만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장차 해외 최신 기술의 도입, 무선통신에 관한 자료를 두루 갖춘 도서관 운영, 전자기술에 대한 기본 지식을 일반에 계몽하는 강습회 개최 등도 함께 도모할 것이란 내용각주1) 을 담아냈다. 한마디로 두 젊은이는 전쟁 이전의 재벌들과는 다른 기업을 만들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트랜지스터 국산화로 시작된 일본의 전자산업

일본 기업의 역사는 곧 재벌의 역사였다. 에도 막부가 정국을 안정시키자 조닌(町人)이라는 상인 계층이 출현하면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재벌그룹 미쓰이(三井)는 17세기에 무사 출신인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稜)가 막부의 비호를 받는 직속 상인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막부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미쓰이 가문은 훗날 막부 타도 운동이 벌어지자 자신들을 비호해준 막부를 배신하고 신정부 인사들에게 막부 타도에 쓰일 군자금으로 금 1,000냥을 상납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정부 관련 사업의 막대한 이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미쓰비시(三菱) 역시 비슷하다. 1867년, 에도 막부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대정봉환(大政奉還)각주2) 으로 일본은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서 도사(土佐)번의 재정 관리 출신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가 도사번의 직영 물산회사를 차지하며 미쓰비시가 시작되었다. 미쓰비시는 1874년 일본이 대만을 침략하자 군수품 수송을 전담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06년에서 1910년까지 일본의 여러 기업들은 권력의 비호 아래 본격적인 인수합병을 벌이며 재벌 체제를 구축해나간다. 이처럼 재벌그룹들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던 이유는 권력과의 결탁 때문이었지만 제국주의 일본의 팽창 과정에서 일어난 대만 침략, 조선 침략,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 전쟁 특수 덕분이기도 했다. 전쟁을 돈벌이로 삼고 권력과의 유착을 통해 사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일본의 재벌들은 군국주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수수방관하거나 전쟁에 적극 동참했다.

전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일본을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정치·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본의 전통적인 기업 조직 '재벌(Zaibatsu, 財閥)'의 해체였다. 태평양전쟁 전까지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 등 4대 재벌그룹은 일본 전체 자본금의 2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몇몇 가문이 차지한 재벌그룹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한 결과, 자회사가 300여 개에 이르는 재벌까지 있었다. 1945년 11월, 연합군최고사령부는 4대 재벌의 해체 지령을 발령하고, 이듬해 8월에는 지주회사정리위원회를 설치해 다섯 차례에 걸쳐 4대 재벌을 비롯해 지방에 있던 23개 중소 재벌까지 해체하도록 한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던 이런 개혁 정책은 때마침 들이닥친 냉전과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미완의 상태로 중도에 종료되고 말았다. 재벌은 지금까지 그룹의 중추 역할을 해온 거대 은행들을 통해 다시 기업집단 형태로 통합되었는데 이를 '계열(Keiretsu, 系列)'이라 부른다.

전후 재벌 해체가 추진되던 공백기 동안 도쿄 지역에만 수백 개의 기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재벌기업들이 투자에 주춤한 동안 벤처 열풍이 분 것과 흡사한 열기였다. 벤처 거품이 빠지면서 이들 기업이 줄줄이 사라졌듯이 당시 일본에 세워진 대부분의 기업도 초반부터 만성적인 자본 부족에 시달리다가 창업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러나 아키오와 마사루가 설립한 도쓰코는 이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마사루의 장인 마에다 다몬(前田多聞)은 외교관 출신으로 미일 관계와 국제 정세에 정통했고 금융계에도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위 마사루와 야심만만한 동업자 아키오의 사업을 위해 제국은행의 만다이 준지로 회장 등을 소개해주었고,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또 대단한 부호였던 모리타 가문의 재정지원 역시 이들이 남들보다 좋은 조건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도쓰코가 성공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확실한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구에서도 제품화된 지 얼마 안 된 테이프레코더의 국산화에 성공했고, 때마침 불어닥친 영어교육 붐에 운 좋게 편승하면서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

패전 직후 일본 경제는 크게 두 번의 부흥 기회를 맞았다. 첫 번째는 제국주의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며 뿌린 씨앗이 분단과 전쟁으로 돌아오면서 얻은 기회였다. 한국전쟁 발발로 말미암은 전쟁 특수는 일본의 산업생산력을 급속히 팽창시켜 전쟁 이전 수준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었고, 개인 소비지출 역시 전쟁 이전 수준을 웃도는 규모로 회복되었다. 그 이후에는 지속된 냉전으로 인해 반공의 보루가 되어 전후 배상 문제에서도 특혜를 받았다.

두 번째 기회는 트랜지스터의 국산화를 발판으로 한 전자산업의 성공이었다. 전쟁 이전에 섬유산업은 일본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으나 다양한 합성섬유의 발명과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으로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전후 일본은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공업 제품의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여야 했는데, 비무장화가 추진되면서 오랫동안 군수에 의존해온 중화학공업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장기적으로 군사비 지출이 감소하면서 일본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으나, 중화학공업으로 선진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과 자본을 벌어준 것이 바로 소니였다. 소니가 트랜지스터를 국산화하면서 시작된 전자산업의 호황은 이후 일본 경제를 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여기서 잠깐, 트랜지스터(transistor)에 대해 알아보자. 1947년 미국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Wiliam Shockley) 등에 의해 처음으로 발명된 트랜지스터는 당시로서는 지금의 나노 기술에 필적할 만큼 최첨단 기술이었다. 트랜지스터는 부피가 큰 데다 많은 전력을 소비하던 진공관을 대체할 수 있는 놀라운 발명품이었지만 개발 당시에는 진공관과 비교해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진공관에 비해 소형이고 소비 전력도 적은 장점이 있었지만, 잡음이 많았고 기껏해야 가청 주파수 대역 정도만 증폭할 수 있을 정도로 주파수 특성이 좋지 못했으므로 산업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분야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다양한 트랜지스터들

1947년에 벨연구소에서 발명해낸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을 대체할 수 있는 최첨단 제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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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키오와 마사루는 직접 미국을 방문해 특허권 사용계약을 체결했다. 오늘날엔 '기술력의 소니'라고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소니는 이름도 없는 풋내기 전자업체에 불과했다. 소니의 기술자들은 고주파 트랜지스터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마침내 1955년 6월, 고주파 트랜지스터의 개발 및 국산화에 성공한다. 소니는 그해 8월 일본 최초의 트랜지스터라디오 TR-55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개발한 것에 비해 겨우 한 달 늦은 것이었다. 소니는 일본의 다른 산업 분야가 선진국 수준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동안 전자산업 분야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힘, 소니

저유가와 경제부흥으로 일본 내수시장이 활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키오는 세계 시장, 특히 미국에 진출하지 못하면 일본 기업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삼류로 취급받는 '메이드 인 재팬'이 세계 일류 제품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미국 시장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 가족을 동반하고 미국행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외국 기업의 브랜드를 부착하는 조건으로 제품을 생산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자사 브랜드를 고집했다. 세계 시장에 '소니'라는 브랜드를 확립하지 못한다면 미국 시장에 발판을 마련하기도 전에 패배하리라는 생각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도쓰코란 이름으로는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해 1958년 소니라는 브랜드를 기업 명칭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1960년에 소니 아메리카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미국 진출이 성과를 내면서 일본 기업으로는 최초로 1970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 결실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소니는 점차 아키오 회장 개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판단에 의존하는 기업이 되어갔다. 그의 결정은 워크맨의 개발과 판매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베타 방식의 VTR을 고집하거나 미니디스크(MD)를 개발하고, 무리한 사업 확장과 철수를 반복하는 등 커다란 손실을 자초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아키오 회장의 카리스마를 거스를 수 없었고, 그를 비롯한 최고경영진은 이사회나 노조에서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았다.

아키오는 전문경영인으로서 걸출한 카리스마와 탁월한 리더십으로 소니를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소니는 항상 개척자다. 결코 다른 기업들을 뒤쫓아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소니는 항상 최고였고 언제나 최초여야만 했다. 첨단 기술력으로 무장한 소니 제품의 하드웨어라면 세계 어떤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자신감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소니는 1959년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텔레비전을 개발했고, 1979년 필립스와 함께 세계 최초로 컴팩트디스크CD를 개발했으며, 같은 해 워크맨을 세계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만들었다. 1980년엔 일본 최초로 CCD 비디오카메라를, 1986년엔 세계 최초로 8㎜ VTR을, 1990년엔 세계 최초로 8㎜ 캠코더를 개발했다. 원자폭탄 투하 당시 도저히 미국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던 아키오의 절망은 1988년 CBS레코드를, 1989년 컬럼비아영화사를 인수하며 서서히 오만으로 변해갔다.

사실 워크맨 개발 직전에 소니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비디오테이프의 표준경쟁에서 베타맥스 방식을 고집하다가 VHS 진영의 연합전선에 밀려 막대한 손실을 자초한 상황이었다. 필립스와 공동으로 개발한 CD를 이용한 제품들이 출시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소니를 구원한 것이 바로 워크맨이었다. 워크맨 개발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제품이 만들어진 직접적인 요인은 해외 출장길에 기내에서도 스테레오 음악을 듣고 싶다는 마사루의 개인적 소망을 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소니의 기술팀은 저널리스트용으로 설계된 모노 방식의 테이프 레코더 '프레스맨'의 녹음 기능을 제거하는 등의 개조를 통해 나흘 만에 스테레오 방식의 워크맨을 만들었다. 회사를 위기에서 구원한 최고의 히트 상품이 최고경영진의 요구로 만들어진 개인적인 장난감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일본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가 지닌 취약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소니의 베타맥스 포터블 제품

기술력의 소니라고도 하지만 베타맥스를 밀어붙이다가 막대한 손실을 자초하는 등 아키오의 카리스마를 견제하지 못해서 워크맨 개발 직전 사정이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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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녹음 기능조차 없는 워크맨의 상품성에 대해 반신반의했고, 시장조사 결과도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키오는 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시장조사가 잘 이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신만만해하기까지 했다.

"고객들은 무엇이 가능한지 모른다. 헨리 포드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들은 아마 '자동차가 아닌,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대중은 무엇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3만 대 이상 팔리지 않으면 회장을 그만두겠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1999년 미국 경제지 『포천(Fortune)』은 워크맨 개발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의사결정 가운데 하나로 선정해 당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주었다. 영국의 저명한 비즈니스 저널리스트 스튜어트 크레이너(Stuart Crainer) 역시 『75가지 위대한 결정』이란 책에서 모리타 아키오의 결정이 위대했다고 평한다. 그러면서도 아키오의 결정을 '운이 따른 선견지명'으로 분류했다.

아키오는 모든 것이 점차 대형화되어가는 가전제품의 트렌드를 역류하는 방향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전자매체가 더 이상 가정을 중심으로 소비되지 않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결과였다. 예전에 집(house)이라는 공간은 기껏 해야 옷과 이불을 넣어두는 옷장과 라디오, 식기를 정리하는 찬장 정도가 살림살이의 전부였으나 소비 사회가 본격화된 오늘날의 집은 대형 텔레비전과 오디오가 결합된 AV 시스템, 냉장고, 에어컨, 컴퓨터, 공기정화기, 식기세척기 등으로 가득 차 마치 가전제품 대리점의 진열장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처럼 보인다. 과거엔 가족 구성원 모두 거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시청했지만 베이비붐 세대가 부모 세대가 되자 새롭게 출현한 신세대들은 자신만의 전자제품을 요구했다. 워크맨 이전 세대에게 포터블(휴대용, portable)이란, 가정이 아닌 야외에서도 '남들과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도구였지만 워크맨 이후 세대에게는 '나 홀로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를 의미각주3) 했다.

워크맨의 성공 신화에 가려 잊히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카세트테이프라는 음원 소스가 주는 매력이다. LP 음반의 음질보다 다소 뒤처질 수밖에 없었지만 카세트테이프는 LP가 줄 수 없는 강력한 매력을 워크맨을 통해 선사했다. LP에 수록된 음원은 소비자에겐 기성(ready-made)화된 리스트만 반복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카세트테이프는 녹음·복제를 통해 자신만의 선곡 리스트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경험은 훗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소비자들이 자각한 가장 중요한 권리이자 변화였다. 소비자들에게 소비적 주체라는 존재 방식을 자각하게 만든 것이 소니였다. 그러나 소니는 이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인터넷 네트워킹으로 무장한 소비적 개인주의자들의 역습에 무력해지고 말았다. 소니의 몰락은 아키오의 생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당시 소니는 승승장구하며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그는 이런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키오는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천황 다음의 영예라는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經團聯)] 회장직을 내심 원했고 비밀리에 이를 추진해왔다. 1993년 드디어 게이단렌 회장직을 제의받은 그는 평소 아침마다 즐기던 테니스를 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만다. 이날은 그가 게이단렌 차기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있기로 한 날이었다. 쓰러진 지 두 달 만에 일어나 또다시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GE의 잭 웰치 회장 등을 만났지만 그 뒤로는 하와이에서 장기간 요양해야만 했다. 그리고 1994년 11월 25일, 아키오가 소니 본사에 제출한 회장 사직원이 정식으로 수리되었다. 그가 소니 회장 재임 시절에 인수한 컬럼비아영화사(소니픽처스)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할 수 없어 상각 처리된 지 꼭 일주일 만이었다. 1997년 12월 평생 동지 이부카 마사루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99년 모리타 아키오 역시 급성폐렴에 걸려 뒤를 따랐다.

한국에서 극우정치인으로 유명한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

모리타 아키오는 그와 공저를 내기도 했다.

ⓒ 모리타 아키오는 그와 공저를 내기도 했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우뚝 솟은 소니와 일본 경제의 극적인 성공은 일본 국민과 모리타 아키오의 자신감을 회복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 기업들은 "더 이상 미국에서 배울 것이 없다" 또 "이제 더 이상 쫓아갈 목표가 없다"며 한껏 들떠 있었다. 이런 과도한 자신감은 때때로 주변 국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아키오 역시 워크맨 탄생 10주년에 즈음하는 1989년 일본의 극우파 정치인이자 소설가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와 함께 극우적인 내용이 담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No'と言える日本)』'을 출간하며 정치적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나중에 미국에서 이 책이 번역 출간되려 하자 아키오는 자신의 발언 부분을 모두 삭제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전쟁 전에 태어난 일본인으로는 드물게 어려서부터 서구 문화에 매우 친숙한 조건에서 성장했고, 일본의 최고경영자 가운데서도 가장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경영 마인드를 보여주는 기업인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매우 가부장적인 경영관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모리타 아키오는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 원인을 강력한 노조에서 찾았고, '가족'처럼 운영되는 일본식 기업 경영 방식이 일본 경제가 지닌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종신고용제'에 안주해버린 일본의 노동자들

실제로 일본 경제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일본 기업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바친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 종업원과 회사가 공동 운명체라는 일체감과 결속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노동자들은 일벌레란 야유를 참아가며 신기술 개발과 품질관리에 몰두했다. 사실 노사화합을 중시하는 경영 방식은 일본만의 것이 아니었다. 제조업이 산업의 중심 역할(포드주의)을 하는 구조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사회적으로 자본과 노동이 서로 타협하는 시스템[코포라티즘( corporatism)]이 요구되었다. 제조업 분야에서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선 상대적으로 임금 상승률이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임금 상승률이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는 대신, 일본 기업은 종신고용을 통해 노동의 안정성을 보장해주었다. 이런 방식의 경제 시스템은 모리타 아키오가 자서전에서 회고하듯 일본의 자본가 계급이 원했기 때문에 생긴 제도가 아니라 GHQ가 추진했던 노동정책의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종신고용이라는 안정적인 노동조건 아래에서 일본의 노동조합은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해졌고, 산업화된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 비해 일본의 노동조직은 국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훨씬 체계적으로 소외되었다.

평소 모리타 아키오는 "남의 밥그릇을 깨지 않는 것"이 자신의 경영철학이라고 주장해왔다.

"나의 경영 이념은 소니와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다. 특히 직원 행복이 나의 최대 관심사다. 그들은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를 소니에 맡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행복해져야 한다.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소니에서 근무해 정말 행복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소니도 다른 일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평생고용제를 유지했다. 소니가 특이했던 점은 아키오가 일본식 인재선발 제도를 지나치게 학벌 위주라 하여 1966년부터 이력서에 출신 학교를 적지 못하게 했다는 것과 일본의 전통적인 연공서열제 대신 실력 위주의 승진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가 직접 선발하고 가르친 경영 후계자들은 여러 면에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소니에서 바이오 노트북을 개발한 기획자 미야자키 다쿠마(宮崎琢磨)가 퇴사한 뒤 펴낸 책 『소니 침몰』에 이런 실상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겉으로는 학력으로 차별하지 않는다고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학력이 선발의 중요한 기준이었으며 경직된 인사 시스템과 무책임한 경영진 때문에 소니는 몰락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일본의 경제적 성공은 미일 무역 분야에서 엄청난 흑자로 이어진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 이른바 쌍둥이 적자로 인한 재정 손실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미국 정부는 1985년 9월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선진5개국(G5) 재무장관 회의를 개최해 미 달러화의 강세를 진정시키기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다.

달러 강세를 진정시키고 수출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엔화 강세 정책을 펼치기로 한 일본 정부는 외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 결과 엄청난 엔고 열풍이 불어닥치게 되는데 이것이 거품경제의 시작이었다. 금리 인하를 통해 자금 공급을 대폭 늘리는 금융완화 정책 때문에 시중 자금은 갈 곳을 잃었고, 이 자금들은 부동산 투기와 주식 열풍을 부채질하는 데 쓰였다. 소니 역시 이 시기에 CBS와 컬럼비아영화사를 인수하고 보험사업 분야에 진출하는 등 과거 자신들은 규모의 확대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며 재벌그룹과의 차별화된 기업 이념으로 내세웠던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 포기한다. 마침내 1991년 거품이 꺼졌을 때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란 장기불황의 늪으로 빠져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잿더미가 된 일본이 이룩한 고도성장의 뒤안길에서 노동자들은 정치적 목소리를 내거나 기업경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무런 정치적 권한도 갖지 못한 대신 이들은 빈부격차가 없는 사회, 일 억 일본인이 모두 중류 계층이라 자부하며 살 수 있는 '일억총중류(一億總中流) 사회'라는 신화에 안주해왔다. 그러나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세계 산업 구조가 제조업 중심에서 금융·서비스업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해가는 와중에 일본 기업들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비록 우리나라처럼 외환위기는 없었지만 장기간 지속된 경기침체 속에 일본 기업들은 종신고용제와 연공임금제를 폐지하고 경영 개선을 위한 구조조정에 나섰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강력하게 추구했던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은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던 일본을 미국 못지않게 심각한 실업 천국으로 만들었다.

워크맨 대 아이팟

소니 역시 이 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소니는 2003년에서 2005년 사이에 3만 명의 직원을 해고했고 이후 더 많은 노동자의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했다. 1990년대 이후 소니는 일본이 처한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이 되었다. 일본은 여전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세계 3위이며, 보유 특허 수도 미국보다 많다. 그러나 애플이나 구글처럼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이 없다. 소니 또한 한때 트리니트론 브라운관을 개발해 전 세계 TV와 방송 모니터 분야를 석권했지만, 차세대 TV의 핵심 부품인 LCD 개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후발주자 삼성에 추월당하는 등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에서까지 뒤처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부동의 1위로 여겨져온 미국 캠코더 시장에서도 삼성전자와 캐논에 1위 자리를 빼앗겼고, 뒤늦게 진출한 소프트웨어와 게임, 엔터테인먼트산업 분야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AOL타임워너 등과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며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자존심을 긁는 것은 소니를 대표하는 워크맨 같은 개인 휴대용 음향기기 분야에서 애플의 아이팟(i-pod)에 밀려 삼류 제품 취급을 받는 현실이다. 워크맨은 지난 20년간 휴대용 음향기기의 대명사였고, 수많은 경쟁업체에서 워크맨을 따라 제품을 출시했지만 무엇도 워크맨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니는 '대중은 무엇이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는 오만에 젖어 디지털 시대, MP3라는 변화의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워크맨의 뿌리를 흔들 MP3가 아날로그 음악을 대체할 디지털 음악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소니는 조악한 음질의 MP3 플레이어 대신 자신들이 개발한 고품질의 MD 플레이어가 시대의 대세가 될 거라 예상했다. 놀랍게 발전한 MP3는 초고속 인터넷 환경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역으로 기존 음반시장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MP3 다운로드는 그 자체로는 수익사업이 될 수 없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애플의 아이팟이다. 2001년 세상에 출현한 아이팟의 음질은 소니의 MP3 워크맨보다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아이팟에는 워크맨에 존재하지 않는 편리한 인터페이스 '아이튠즈'가 있었다. 아이팟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음반을 구입하는 대신 마음에 드는 음원을 골라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곧바로 다운로드해서 음악을 즐기는 신선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소니는 버그와 호환성 문제로 악명 높은 자사 프로그램 '소닉스테이지'를 고수했다.

아이팟은 이전의 아날로그 시대에 만들어진 전자제품과는 완전히 다른 발상에서 출발한 제품이다. 과거의 전자제품들이 하드웨어가 먼저 만들어진 뒤에야 그에 합당한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는 형태로 진화해왔다면, 아이팟은 먼저 MP3라는 소프트웨어의 형태가 만들어진 뒤 비로소 그에 적합한 하드웨어로 만들어졌고 이 둘을 아이튠즈라는 네트워크 미디어 프로그램을 통해 연결했다. 이 같은 변화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워크맨은 뛰어난 하드웨어적 성능을 갖췄음에도 아이팟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워크맨은 13년 만에 1억 대 판매를 기록했지만, 아이팟은 출시 5년 만에 간단히 이를 돌파해버렸다.

애플의 다양한 기기

소니 워크맨은 개인 음향기기 분야에서 애플의 아이팟에 밀려 삼류 취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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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에 사람들을 사로잡을 개인용 미디어 플레이어는 어떤 것이 될까. 이미 통신과 결합한 스마트폰이라는 형태가 빠르게 진화해나가고 있다. 소니는 워크맨이란 브랜드명을 고수하면서 새로 개발된 휴대폰도 '워크맨폰'이라 이름 붙였지만, 휴대폰 산업 역시 애플이나 구글 같은 소프트웨어 기반 업체의 지배권 아래 편입되어가는 실정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인터넷 기반 플랫폼을 갖추지 못한 하드웨어 기업은 소프트웨어 업체의 하청업체로 전락해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삼성전자가 소니를 추월했고 그 폭이 점차 커져가는 상황에 대단히 만족하는 분위기지만, 오래 전부터 소니를 목표로 해온 삼성전자 역시 하드웨어적 제조업체이기 때문에 기술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소니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니는 조악한 음질의 MP3 플레이어 대신 자신들이 개발한 고품질의 MD 플레이어가 대세가 되리라 오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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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위기를 겪으면서도 참아오던 소니 이사회는 2005년 마침내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 회장을 경질하고, 소니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CEO 하워드 스트링어(Howard Stringer)를 영입했다. 더 이상 CEO 개인의 카리스마와 결정으로 잘못된 투자를 반복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미국식 경영 방식을 받아들여 이사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2009년은 소니가 워크맨을 개발한 지 만 3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이전의 10주년, 20주년과 달리 아무런 기념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거대한 스펙터클과 나르시시즘의 세계를 선사한 워크맨

1450년경 구텐베르크에 의해 상업적 활판인쇄가 발명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소장하게 되었고,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책 읽는 대중의 출현은 독서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근대 이전까지 독서란 교회나 학교 같은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공적인 행위로, 오늘날 우리가 연상하는 묵독(默讀)이 아니라 낭독(朗讀)을 의미했다. 근대 이전까지 눈으로만 글을 읽는 행위는 손으로 직접 책을 베껴야 하는 필경사에게만 허용되었으나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책이 대중화되면서 소리 내어 읽는 낭독보다 눈으로만 읽는 묵독이 일반화되었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이와 같은 '독서의 개인화' 현상이야말로 근대 문화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고 말한다.

묵독의 방식을 완벽하게 익힌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미증유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첫째, 묵독은 지적인 작업을 급격히 변모시켰다. 이제 지적인 작업은 더 많은 텍스트들과의 개인적인 대질 작업, 암기, 책 속에서 눈으로 발견한 내용들의 참조 작업 등과 같이 본질적으로 개인의 내면적인 행위가 되었다. 둘째, 묵독은 개인적인 신앙심과 사적인 경건성을 더욱 진작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중재와 훈육에 의해 규제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개인과 신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탁발 수도회의 영성운동과 근대의 신심운동, 그리고 개신교 그 자체는 모두 묵독이라는 새로운 독서 방식에 크게 의존했다. 묵독은, 적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성경이나 신앙서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믿음을 함양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셋째, 홀로 침묵하는 가운데 비밀스럽게 글을 읽는 것은 이전에 금지되었던 대담함을 허용했다. 그 결과 필사본의 시대였던 중세 말기 이래 이미 이교도적인 텍스트가 유통되었고 비판적인 사상이 표현되었으며 적당히 채색된 외설서들이 유행했다.

묵독으로 변화된 문자 사회는 낭독 그리고 구어 사회와 크게 구별된다. 개인이 겉으로 표현하는 행동이나 언어가 내적인 상태와 다를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구텐베르크 은하계(The Gutenberg Galaxy)』(1962)에서 인쇄 문화가 인간을 귀(耳)라는 마법의 세계에서 시각의 세계로 옮겨 놓았다고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가 개발한 청각적 수단인 워크맨은 개인이 원하는 순간, 어디서나 사회와 차단되는 청각의 장벽을 제공함으로써 스펙터클한 시각의 세계를 더욱 강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워크맨을 통해 인류는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건너 새로운 스펙터클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워크맨은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193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스크린에 비추는 대형 스펙터클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 경제위기의 어려움을 견뎌냈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oh why can′t I?
(저 멀리 무지개 너머 어디엔가 높은 곳에 있는 꿈의 나라, 새도 날아가는데 어찌해서 인간인 나는 날아갈 수 없겠는가?)"

이 노래를 듣는 동안엔 누구나 무지개 저편의 세상을 얻었다. 그러나 워크맨이 탄생한 뒤로는 굳이 어두컴컴한 극장을 찾는 수고조차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워크맨 사용자들은 굳이 배우에게 자신을 투사할 필요가 없어졌고 극중 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졌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워크맨은 노란 구두가 되어 우리를 오즈의 나라로 이끌었다. 워크맨은 이처럼 거대한 나르시시즘의 세계를 모든 개인에게 선사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음악을 플레이하는 순간,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던 출퇴근 시간은 기분 좋은 여행이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본질적으로는 개인이 선택한 음악의 힘이지만, 그 음악을 들려주는 개인 휴대용 미디어는 워크맨이었다. 워크맨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상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 되고 일상의 풍경은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다. 워크맨은 모든 사람들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각주4)

68운동의 핵심 운동가이자 탁월한 문화비평가인 기 드보르(Guy Debord)는 현대 자본주의 물질문명과 미디어 혁명이 가져온 지각 능력의 변화를 『스펙터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1967)라 표현한다. 그가 말하는 '스펙터클'이란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 또는 '대상화된 세계관'을 의미한다.

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들에서, 삶 전체는 스펙터클들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삶에 속했던 모든 것은 표상으로 물러난다.각주5)

기 드보르는 '현실 세계가 단순한 이미지들로 바뀌는 곳에서는 단순한 이미지들이 현실적인 존재가 된다'는 주장을 통해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론을 독창적으로 변주해낸다. 1960년대 청년문화가 청바지와 통기타로 상징되는 공동체 문화, 반전평화운동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를 표출했다면, 1980년대 워크맨은 개인주의와 소비문화에 포섭된 X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이를 기술적으로 완성한 최초의 전자 미디어가 되었다. 아날로그 매체든 디지털 매체든 또는 워크맨이든 아이팟이든 사회공동체적 입장에서 보자면 이와 같은 개인용 미디어 플레이어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파편화하고 개인을 고립시켜 더 이상 사회현상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자아매몰(自我埋沒)을 추동하고 있다. 인간이 이용하는 미디어가 인간을 잠식하는 미디어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D. 퍼트넘(Robert David Putnam)은 『나 홀로 볼링』에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구가한 미국이 경제적 풍요와 질 높은 교육, 사회경제적 지표의 호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더 많은 사람이 삶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 만족도가 하락하고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지는지 그 원인을 찾고자 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나 홀로 볼링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는 전체적으로는 볼링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남에도 다른 이들과 함께 볼링을 즐기는 사람은 줄어드는 나 홀로 볼링 현상이 미국의 사회적 자본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란 "개인들 사이의 연계(connections),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recirocity)과 신뢰의 규범"을 가리키는 말로, 다시 말해서 각각의 개인이 지닌 '시민적 품성(civic virtue)'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서로 고립되어 있다면 이들이 공동체에 미치는 효과는 미미하다는 개념이다.

사실 이 현상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공통으로 앓고 있는 문제다. 공교롭게도 워크맨의 출현과 거의 동시에 미국에서는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워크맨의 전성기는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던 시기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비록 사회적 자본 붕괴의 원인을 모두 워크맨에 돌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출발점이 워크맨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과 마크 주커버그 등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중동 지역 이슬람 국가의 민주화를 보여주는 재스민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SNS는 과연 새로운 혁명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역동적인 소셜 네트워커들의 출현은 대중민주주의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미디어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세대로서는 그 결과를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SNS는 물론 현재까지 진화된 그 어떤 뉴미디어·뉴 커뮤니케이션 기술 장치도 스스로 정치화된 주체들보다 전복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고객들은 무엇이 가능한지 모른다. 헨리 포드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들은 아마 '자동차가 아닌,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대중은 무엇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3만 대 이상 팔리지 않으면 회장을 그만두겠다. - 모리타 아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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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어빙 팽,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역사』, 한울아카데미, 2002, 138쪽
  • ・ 모리타 아키오·에드윈 M. 레인골드·시모무라 미쯔코, 『소니의 기적: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 이야기』, 기린원, 1986, 29쪽.(모리타 아키오의 자서전 『Made in Japan』의 번역서)
  • ・ 스튜어트 크레이너, 『75가지 위대한 결정』, 더난출판사, 2001, 242~247쪽
  • ・ T. J. 펨펠, 『현대 일본의 체제 이행』, 을유문화사, 2001, 45쪽
  • ・ 진희정, 『내 인생을 바꿔준 위대한 명언』, 좋은책만들기, 2006, 140쪽
  • ・ 미야자키 타쿠마, 『소니 침몰: VAIO 개발 현장에서 목격한 소니 몰락의 생생한 현장』, B&S, 2007
  • ・ 필립 아리에스·조르주 뒤비 엮음, 『사생활의 역사 3』, 새물결, 2003, 173~174쪽
  • ・ 로버트 D. 퍼트넘, 『나 홀로 볼링: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 페이퍼로드, 2009, 698쪽

전성원 집필자 소개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새얼문화재단에 입사해 2012년 현재까지 『황해문화』에서 일하며, 평화박물관·space99 운영위원,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펼쳐보기

출처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 저자전성원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 사람의 천재성이나 개성이 인류의 삶을 크게 바꿔놓는다. 헨리 포드에서 마사 스튜어트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근대화와 세계화의 영역에서 우리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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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모리타 아키오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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