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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지
배하는가

D. 록펠러

다른 표기 언어 John Davison Rockefeller 동의어 20세기 석유 문명을 만든 탐욕과 자선의 야누스
요약 테이블
출생 1839년
사망 1937년
국적 미국

요약 미국 정유소의 95퍼센트를 지배한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를 만든 석유왕 존 D. 록펠러. 스탠더드오일의 석유는 근대 초기 전 세계적으로 유통된 최초의 상품이자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동력이었다. 석유산업을 독점하기 위해 리베이트와 협박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 록펠러 일가가 오명을 씻기 위해 벌인 자선사업은 오늘날까지도 자선의 대명사로 록펠러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하지만 록펠러 재단은 냉전기에는 미국 정책의 문화적 대리자로서 녹색혁명을 주도했고, 이후에는 애그리비즈니스를 이끌 과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2007년작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가 2008년 국내에서 개봉했다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아카데미와 베를린 영화제 등에서 많은 상을 받은 이 영화는 1898년 미국의 석유 개발 시대를 배경으로 대니얼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라는 한 사내의 야망과 탐욕, 광기와 몰락을 생생하게 풀어내고 있다. 부인도 없이 홀로 아들을 키우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사막 한가운데서 금을 캐는 가난뱅이 뜨내기 광부 대니얼은 우연히 유전을 발견하게 된다. 일확천금의 행운을 거머쥐면서 그는 뜨내기 광부에서 철두철미한 사업가로 변모한다. 유전 개발에 대한 열정과 야심은 점점 더 그를 탐욕과 광기에 휩싸이게 만들고, 석유라는 악마에 영혼을 팔아넘긴 사람으로 변해가게 한다.

대니얼은 스탠더드오일과 담합한 철도를 피해 직접 송유관을 건설하기 위해 어린 자식을 이용하고, 땅 주인이 요구하는 대로 교회에 나가 자신과 대립하던 목사 엘리 선데이(폴 다노) 앞에서 신앙고백까지 한다. 대니얼이 물질적 광기에 몸을 내맡긴 주동자(protagonist, 연극이나 소설 등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행동을 주로하는 인물로, 주인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라면 사사건건 그와 대립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목사 선데이는 그의 물질적 광기를 올바르게 이끌 의무를 지닌 도덕과 종교를 상징하는 반동자(antagonist, 주동자와 대립적인 입장에서 투쟁하는 인물로, 상대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는 혹은 대립해야 할 두 인물이 석유와 교세 확장이라는 목적을 위해 야합하고 타락함으로써 결국 몰락해가는 과정이 담담하게 묘사된 이 영화는 물질적 탐욕을 제어하고 바로잡아야 할 정신마저 타락해버린 오늘날의 미국, 결국 석유가 원인이 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은유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비록 영화 자체는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석유(Oil!)』(1927)에서 영감을 얻은 픽션이었지만, 이런 사건은 단순히 픽션이 아니라 석유 개발 시대의 미국에서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사실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영혼을 서서히 파괴시킨 것은 석유에 대한 탐욕이었지만, 유전과 송유관을 놓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구조적 원인의 배후에는 거대 트러스트(독점기업의 일종) 스탠더드오일과 존 D. 록펠러가 있었다. 석유의 채취부터 운송, 정제, 판매에 이르기까지 수직적 통합을 이루어내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 존 D. 록펠러와 스탠더드오일에 대항할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처럼 하다가 완전하게 파멸하거나 아니면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결국 실패하고 몰락하는 두 주인공 대니얼 플레인뷰와 엘리 선데이의 모습은 실제 역사에서는 석유사업가로 최고의 악명을 떨치다가 세계 최고의 자선사업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존 D. 록펠러와 그의 자선사업 담당자 프레더릭 T. 게이츠(Frederic Taylor Gates) 목사의 어두운 얼굴이기도 하다.각주1)

석유왕 존 D. 록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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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보스턴에서 광고판을 직접 들고 소설 『석유』의 삭제판을 파는 업튼 싱클레어

겨우 삭제판 150부만 찍은 것이 되려 널리 알려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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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아버지와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어머니

2006년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부자가 누구인가를 놓고 당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을 2006년의 화폐가치로 환산해 순위를 매겼다. 1위는 530억 달러를 소유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Bill Gates)도, 460억 달러를 소유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Warren Buffett)도 아니었다. 1위는 현 시가로 환산한다면 빌 게이츠의 몇 배에 이르는 3,053억 달러의 재산을 가졌다고 평가된 존 D. 록펠러였다. 존 D. 록펠러와 그의 일가는 세계 역사상 최대의 부호이자 가장 악명 높은 기업가로 기억되는 동시에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기부해 사회의 공공 이익을 위한 연구에 쏟아부은 자선사업가이자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사치를 멀리하고 근면 성실한 태도로 기독교적 실천을 몸소 행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성공한 노인들의 특권인 양 어린 시절을 회고하기를 즐겼는데 언제나 "나처럼 전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라며 자신이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던 것처럼 묘사하곤 했다.

록펠러는 1839년 7월 8일 뉴욕 주 북부의 제법 풍요로운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William Avery Rockefeller)는 160에이커의 농장을 소유했으므로 적당한 수입을 저축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윌리엄은 빅 빌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키도 크고 잘생긴 외모에 말주변이 좋아서 이야기를 과장하고 꾸며 말하는 것을 즐겼다. 농장 경영보다는 오히려 장사에 수완이 있는 편이었는데, 엄밀히 말해서 사기꾼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며 유명한 전문의인 윌리엄 A. 록펠러라고 적힌 전단을 돌리고 가짜 만병통치약을 만들어 팔았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장남인 존 D. 록펠러가 열 살 무렵이던 1849년 자신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앤 밴더빅을 강간한 혐의로 쫓겨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이 보안관의 추격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기 때문에 록펠러 일가도 여기저기 떠돌다가 1853년 무렵 클리블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에도 록펠러의 형제자매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 일라이자(Eliza)의 보살핌 속에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부재하는 동안 자식들이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각별하게 신경 썼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특히 자식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애썼다.

윌리엄이 언제나 멀리 떠돌아다니면서 가정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일라이자는 18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과부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먼 훗날 윌리엄은 석유 부호로 유명해진 장남 록펠러의 클리블랜드 저택을 찾곤 했지만, 록펠러 일가는 그의 삶에 대해서는 평생 함구했다. 윌리엄의 삶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00년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가 윌리엄 록펠러의 숨겨진 생애에 대해 현상금 8,000달러라는 거금을 내걸고 기사를 모았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가족을 버리고 떠난 윌리엄 록펠러는 사우스다코타에서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와 다시 결혼했고, 그곳에서 40년 동안 윌리엄 리빙스턴 박사라는 의사 행세를 하며 살다가 이름도 적히지 않은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어머니는 장남인 존 D. 록펠러에게 아버지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사랑과 기대할 수 없었던 가르침을 쏟아부었다. 그녀는 자식들에게 친아버지보다 중요한 존재가 하느님이라 가르쳤고 교회의 목회자를 하느님 다음으로 섬기라고 말했다. 또한 근검절약과 성실을 강조했지만 어떻게 돈을 벌든 반드시 교회에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린 시절 록펠러는 야생 칠면조 둥지에서 알을 가져와 부화시키고 길러서 비싼 값에 팔았다. 이렇게 번 돈을 어느 날 급전이 필요한 이웃집 농부에게 7퍼센트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는데, 1년 뒤 원금과 함께 이자를 받은 어린 록펠러는 돈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돈을 위해 일할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받지 못해 창업한 록펠러

록펠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클리블랜드는 이리호(湖)에 인접한 상공업 도시로, 부둣가 인근은 언제나 각종 화물과 승객, 일꾼과 상인 들로 북적였다. 학교에서 그는 언제나 말없이 우울한 표정을 지어 급우들에게 '집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일찌감치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록펠러는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엔 근방을 돌아다니며 교역의 현장을 구경하곤 했다. 1855년 센트럴고교를 졸업하고서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사업을 배울 생각으로 규모가 큰 업체에 취직하려고 했는데, 마침 곡물과 여러 상품을 위탁 판매하던 휴잇앤드터틀에서 주급 4달러를 받고 회계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적은 보수를 받는 동안에도 교회에 꼬박꼬박 헌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불과 열아홉의 나이로 교회 집사가 된 데에는 그의 믿음이 남달랐던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록펠러가 교회의 충실한 재원 구실을 한 공로를 교회가 높이 산 덕분이었다.

출근 첫날부터 마치 자기 가게인 양 근면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고용주는 록펠러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 했다. 15개월 후 그는 난생 처음으로 승진했고 임금도 두 배 이상 받게 되었다. 그러나 첫 승진이 마지막 승진이 되었다. 어느 날 회계장부를 정리하다 자신이 전임자가 받던 월급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임자와 똑같은 임금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제부터 남을 위해 일하는 대신 자신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 그는 최대한 빨리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휴잇앤드터틀에서 일하는 3년 동안 800달러를 저축했지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면 최소한 1,000달러가 더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를 찾아갔다. 윌리엄은 자식에게 10퍼센트의 이자를 받기로 하고 돈을 빌려줬다. 때마침 전부터 알고 지낸 영국 출신 모리스 B. 클라크(Maurice B. Clark)가 막 열아홉 살이 된 록펠러의 동업자가 되어주었다. 당시 30세였던 클라크는 2,000달러를 투자했고 두 사람은 돈만 벌 수 있다면 건초, 양곡, 정육 등 가리지 않고 사고팔았다. 두 사람이 창업한 클라크앤드록펠러는 창립 첫해에 총매출액 45만 달러에 순이익 4,000달러를 벌어들였다. 1861년 4월 시작된 남북전쟁으로 군수물자 주문이 쇄도하면서 사업은 더욱 성장 가도를 달렸다. 동생 프랭크는 북군에 자원입대했지만 록펠러는 북군에 지원금을 보내는 것으로 병역을 대신했다. 3년이 지나자 매출액은 100만 달러에 달했고 수익은 휴잇앤드터틀이 회계보조원에게 지불한 임금의 수십 배가 되었다.

남북전쟁보다 훗날 인류 문명에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사건이 이 무렵 펜실베이니아의 타이터스빌(Titusville)에서 일어났다. 타이터스빌 근처 하천은 언제나 검은 기름띠가 떠다녔기 때문에 기름 냇물이라는 뜻의 '오일크리크(oil creek)'라고 불렸다.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는 땅을 파헤치는 기존 방식 대신에 작은 증기기관으로 추진되는 드릴로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1859년 8월 29일, 그는 21미터 깊이에서 솟구쳐 오르는 검은 유정(油井)을 발견했다. 그의 발견은 미국, 아니 전 세계적으로 시작되는 오일 러시에 시동을 건 사건이었다. 유정의 발견은 마치 10년 전에 시작된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와 비슷한 흥분과 열광을 가져왔다. 1879년 붐이 끝날 때까지 오일크리크에서는 5,600만 갤런의 석유가 생산되었고 미국 전역에 등유 램프가 보급되었으며, 그동안 기름 수요를 대던 포경업은 소규모 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록펠러에게 석유란 아버지가 돌팔이 의사 행세를 하며 작은 병에 담아 팔던 만병통치약의 재료에 불과했다.

드릴로 구멍을 뚫어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석유를 파내 오일 러시에 시동을 건 에드윈 드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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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붐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석유 붐 초기 펜실베이니아에 사는 인디언은 석유를 병에 담아 리터당 1달러를 받고 약으로 팔았다. 당시에는 힘들게 땅속 깊이 파고들어가거나 거친 바다와 싸우며 대륙붕 이곳저곳을 힘들게 시추하지 않아도 지표면까지 석유가 흘러넘쳤기 때문에 대규모 시추 기술이나 탐사 기술 따위가 없어도 대량 채굴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1854년 월스트리트의 주식 전문 변호사 조지 비셀(George Bissell)이 땅을 파서 석유를 시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투자자를 모집할 무렵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미쳤다며 손가락질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처음으로 등유 샘플을 본 비셀은 석유가 지닌 가능성을 직감하고 예일 대학의 벤저민 실리먼(Benjamin Silliman, Jr)에게 원유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투자자들에게 석유 사업의 가능성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성분 분석 보고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실리먼의 보고서는 조명용 연료의 대명사였던 고래기름을 대체할 수 있는 연료로 석유가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인류는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석유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 쓸모에 대해서는 거의 깨우치지 못했다.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 석유는 이따금 무기 재료, 방수제, 윤활유, 고약 같은 용도로만 등장할 뿐 연료로 이용된 적이 없었다. 그런 탓에 여기저기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오는 끈적끈적하고 냄새 고약한 물질에 대한 수요는 거의 없었다. 농부들에게 석유는 농사를 망치는 골칫덩이에 불과했다. 이처럼 쓸모없던 석유가 160년 전 갑자기 검은 황금으로 돌변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직까지 석유에서 플라스틱을 뽑아내는 석유화학산업이 등장한 것도 아니고 내연기관의 발명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석유가 각광 받게 된 까닭은 조명용 연료를 제공하던 고래의 개체 수가 무분별한 남획으로 줄어들면서 고래기름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고래가 줄어들면서 포경선이 더 멀리 더 오래 원양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물로 식물성 유지와 송진 추출유가 있었지만 이것들은 고래기름보다 그을음이 많고 폭발의 위험성도 있었다.

본격적인 석유 시대가 개막되긴 했지만 이후 내연기관이 발명되기까지 40년간 원유에서 필요한 것은 조명용 연료로 이용 가능한 등유였을 뿐, 경유나 휘발유는 필요 없는 폐기물로 취급되어 버려졌다. 당시 석유 생산량의 약 70퍼센트가 조명용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엔 조명용 연료로만 사용되었지만 점차 석탄보다 부피가 작고 가벼우면서도 더 많은 열을 내는 에너지원으로 석유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산업혁명을 이끈 석탄은 고체 덩어리였기 때문에 덩어리 사이의 공간이 많아 보관할 때 부피를 많이 차지했고 먼지처럼 고운 가루로 만들더라도 액체인 석유보다 밀도가 높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다루기 번거롭고 운반도 불편했다.

석유의 에너지 밀도는 석탄보다 약 50퍼센트 높고 액체라는 장점도 있어서 철도나 선박, 송유관 등을 통한 저장과 수송이 좀 더 간편했다. 1900년 무렵이 되자 기관차의 증기 엔진은 1830년에 처음 선보인 초기 증기기관차 로켓호의 엔진과 비교할 때 압력과 효율이 다섯 배나 늘었고, 이후 효율이 더욱 높아진 증기터빈 엔진은 점점 더 크고 빠른 기선들을 등장시켰다. 인류는 더 많이, 더 멀리, 더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석유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석유에서 현대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온갖 합성물질을 뽑아낼 수 있게 되자 현대 문명은 곧 석유 문명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석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철강 산업을 거치며 산업화를 이룩한 미국 경제의 다음 시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주역은 석유였다. 1859년 최초의 유전 개발 이후 불과 40년이 흐른 1900년이 되자 미국에만 3만 7,000개의 유전이 개발되어 하루에 13만 7,000배럴의 석유가 생산되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불과하던 타이터스빌은 석유채굴꾼, 기업인 그리고 석유로 인해 넘쳐나는 돈을 노리고 찾아든 온갖 패거리로 북적이면서 순식간에 '질척이는 고모라'라는 악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골드러시가 그랬던 것처럼 유정이 마르면 붐비던 도시는 순식간에 유령의 도시가 될 판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석유의 발견이 금광의 발견 못지않은 일확천금의 기회였지만 한편으론 10년 전의 골드러시가 허망하게 끝난 것처럼 오일러시 역시 갑자기 멈출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석유의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였음에도 석유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널뛰듯 했다. 어제 배럴당 13달러 하던 것이 내일이면 10센트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런 가격 변동의 주요 원인은 석유산업의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업자가 참여한 데다 이들 모두 너무 영세했기 때문이었다.

동업자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다

타이터스빌 유정 발견 이후 클리블랜드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애틀랜틱앤드그레이트웨스턴 철도가 뉴욕에서 클리블랜드를 경유해 펜실베이니아 유전지대에 이르는 철도를 건설한 것이다. 1863년 이 철도회사는 15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운송하면서 미국의 주요 석유수송 업체로 발돋움했다. 이와 함께 클리블랜드도 석유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 무렵 클라크앤드록펠러 사무실로 클라크와 알고 지내던 석유정제기술자 새뮤얼 앤드루스(Samuel Andrews)가 찾아왔다. 독학으로 화학을 공부한 화학자인 그는 정유소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직접 정유소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클라크와 록펠러는 온갖 상품을 취급하면서 석유의 상품성도 알았기 때문에 선뜻 4,000달러를 투자했다. 록펠러와 클라크는 똑같은 액수를 투자했지만 새로 설립된 정유소에는 여전히 앤드루스클라크사라는 상호가 붙었다. 비록 엑셀시어 정유소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긴 했지만. 이는 동업자 클라크가 이제 스물두 살이 된 록펠러를 여전히 경리나 담당하는 후배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초기에 록펠러는 석유 사업을 곡물업의 보조적인 분야로 생각했으나 엑셀시어의 운영을 떠맡게 되면서 석유가 지닌 사업성과 고수익을 올릴 가능성에 눈뜨게 된다. 안정적인 수익을 중시한 그는 석유를 탐사하고 유정을 굴착하는 모험성 짙은 사업에 투자하느니 이들이 개발한 유전에서 나오는 원유를 정유하는 사업이 훨씬 큰 돈벌이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철도와 호수의 수운을 이용하기에 최대한 용이한 곳에 정유소를 자리 잡도록 했다. 2년이 채 안 되어 엑셀시어 정유소는 하루 500배럴의 등유를 생산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보잘것없는 생산량이지만, 1865년 당시에는 미국 최대의 정유소에 속했고 클리블랜드의 다른 정유소들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였다. 그러나 석유산업 초기에 정유업은 현대의 IT 벤처기업보다 더 많은 불확실성에 노출된 사업이었다.

잠깐 석유에 대해 알아보면, 휘발유 1리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23톤의 유기물이 아주 독특한 환경(고압·밀폐)에서 100만 년 동안의 변형을 거쳐야만 한다. 원유는 탄화수소와 100만여 다른 분자의 혼합물이지만 이 분자들은 주로 황, 질소,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혼합물이 유전에서 최종 혹은 중간 단계의 생산물이 될 때까지 원유는 시추, 생산, 운송, 저장, 정제의 과정을 거친다. 일반 소비자가 이용할 수 있는 석유 제품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변형(정유·정제)을 거쳐야만 한다. 첫 번째 변형은 증류탑(distillation column)에서 이루어지는데 증류탑을 거치면서 가벼운 생산물(가스, 나프타, 휘발유)과 중간 무게의 생산물(등유, 디젤, 가정용 연료), 무거운 생산물(중유) 등이 분리된다.

오늘날엔 이보다 훨씬 복잡한 공정과 절차를 거쳐 생산되지만 원유 정제의 기본 구조는 전통적인 위스키 증류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더구나 석유산업 초기에 필요한 것은 조명용 연료로 쓰이는 등유뿐이었기 때문에 화학에 대한 약간의 이해와 기술, 그리고 정유소를 세울 땅과 초기 시설비만 갖춘다면 누구나 이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 결과 철도를 따라 클리블랜드에만 30여 곳이 넘는 정유소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석유산업에 뛰어들었지만 한편으론 석유가 갑작스레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과감한 시설투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1870년대 러시아 남부(현 아제르바이젠)의 바쿠(Baku) 유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드레이크가 발견한 북서 펜실베이니아의 유전은 전 세계에서 산업적 가치가 있는 거의 유일한 유전이었다. 1901년 텍사스 스핀들톱 유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미국에서는 새로운 유전이 발견되지 않았다.

스핀들톱 유전

미국 최초의 상업 유전이 발견되고 50년 가까이 흘러서 텍사스 스핀들톱에서 두 번째 상업 유전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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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셀시어 정유소의 사업이 번창하던 1864년, 록펠러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든든한 정치적·종교적 배경을 가진 집안의 로라 스펠먼(Laura Spelman)과 결혼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적은 회계장부에는 그녀와 연애하면서 지출한 비용까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이런 성품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록펠러는 신흥 시장의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서 저돌적인 확장과 과감한 시설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채를 얻어서라도 규모를 키워야만 비용을 줄이고 효율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클라크는 사업 확장에 반대했다. 정유업자로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던 앤드루스는 정유업에 별다른 관심이나 열정을 보이지 않는 클라크보다 록펠러가 정유업에 대한 열정과 안목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앤드루스는 클라크 대신 록펠러와 함께 손을 잡고 동업자였던 클라크를 몰아냈다.

검은 황금에서 피어난 잔인한 풍요, 아메리칸 뷰티

클라크와 결별한 록펠러는 회사 경영권을 차지했고 새로운 파트너로 헨리M. 플래글러(Henry M. Flagler)를 영입했다. 두 사람은 함께 침례교회를 다녔고 평생 친분을 유지했지만 성향이 매우 달랐다. 플래글러는 대담하고 때로는 무모할 만큼 저돌적이었다. 록펠러는 플래글러의 이런 성향을 높이 평가해 이런 말을 하기까지 했다.

스탠더드오일의 공동 설립자인 헨리 플래글러의 1882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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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다루는 능력이란 설탕이나 커피와 같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런 상품을 나만큼 비싼 값으로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록펠러는 플래글러의 대담하고 저돌적인 성품만 구입한 것이 아니라 그가 철도회사와 맺고 있던 친분 관계와, 자신이 직접 드러내놓고 처리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을 이용해 철도 운송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까지 함께 사들였다. 정유업자로서 이들은 원유 가격을 직접 조절할 수는 없었지만 석유 제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다른 요소, 즉 운송비를 통제해서 전체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67년 플래글러는 레이크쇼어 철도회사에 리베이트와 하루 60대 분량의 운송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다른 기업보다 적은 운임을 보장받기로 비밀 약정을 맺었다. 오늘날 불법적이고 어두운 거래 관행의 대명사가 된 리베이트란 말은 값을 후려치다 또는 압도하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라바트르(rabattre)'에서 온 것으로, 사전적인 의미는 지불 대금이나 이자의 일부 상당액을 지불인에게 되돌려주는 일 또는 그 돈을 지칭한다. 처음부터 대금이나 요금을 감액해주는 '할인(discount)'과 달리 리베이트는 대금의 지급 수령 후 감액된 금액만큼 별도로 지불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말이 애초의 뜻과 달리 불법적인 뇌물과 어두운 거래의 뉘앙스를 갖게 된 것은 록펠러와 플래글러에 의해서였다.

록펠러는 레이크쇼어 철도회사를 시작으로 윌리엄 밴더빌트(William K. Vanderbilt), 제이 굴드(Jay Gould) 등 '강도 귀족(robber baron)각주2) '이 이끄는 여러 철도회사들과 리베이트를 조건으로 담합을 이끌어냈다. 록펠러의 회사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높은 수익을 유지하면서도 확고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담합 덕분이었다. 리베이트를 금지하는 법률 조항이 제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불법은 아니었다. 록펠러는 이후에도 법망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했고,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면 정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는 불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기 위해 그것만으론 부족했다고 여긴 그는 무엇보다 시장에서의 무분별한 경쟁을 줄일 필요를 느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경쟁자를 줄이는 것이었다. 록펠러는 '록펠러, 앤드루스 앤드 플래글러'라는 사명을 '스탠더드오일 주식회사'로 바꿨다. 석유산업 분야에 탄생한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미국 기업사에서 철도 분야 이후 처음 등장한 주식회사였다. 주식을 발행해서 경쟁사를 매입할 자금을 확보하고 기존 정유 업체들을 하나둘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리블랜드와 피츠버그의 130개 정유업체가 스탠더드오일 밑으로 들어왔다. 스탠더드오일의 경쟁사엔 단 두 가지 선택권만 있었는데, 경영권을 상납하고 주식을 분배받든지 아니면 스탠더드오일이 구축한 리베이트 담합 시스템에 의해 경쟁에서 밀려나 파산하는 것이었다. 록펠러는 매수하려는 기업에 접근해 매우 온순한 태도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지만 그 제안을 거절할 때는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다. 심지어 경쟁사에서 동업자로 일하던 친동생 프랭크가 제안을 거절하자 록펠러는 이런 협박을 퍼부었다.

"우리는 철도회사들과 동맹했다. 이젠 클리블랜드의 모든 정유사를 사버릴 거야. 우린 누구에게나 동참할 기회를 준다. …… 하지만 거절하는 놈은 용서 없단다. 네 주식을 우리에게 넘기지 않으면, 우리가 그걸 휴지로 만들어버릴 거야."

이런 협박은 실제가 되었고 결국 프랭크는 스스로 록펠러 일가를 떠났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클리블랜드의 대학살'이라 불렀지만 이것은 장차 석유산업이 직면하게 될 대규모 합리화 사업의 시초이자 록펠러가 얻게 될 악명의 시작에 불과했다.

자유경쟁 자체에서 트러스트가 형성됐다. 싸움은 가끔 공정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부정했다(벨트 아래를 가격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사업 세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러나 공정하든 부정하든, 싸움은 격렬했다. 사업하다 실패로 끝난 사람들은 흔히 파산했다. 그들은 다시 싸울 수 없었다. 때때로 그들은 미쳤고 가끔은 자살했다. 그러나 가장 큰 트러스트를 창설한 사람의 아들로서 그 문제에 대한 권위자인 존 D. 록펠러 2세는 그것이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브라운 대학 학생들과 트러스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칸 뷰티 장미는 그 주위에서 자라는 어린 싹들을 희생시켜야만 그 화려하고 향기로운 자태를 뽐낼 수 있다."

트러스트의 첫 '아메리칸 뷰티'는 석유에서 피어났다. 1904년에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내 정제 등유의 86퍼센트 이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석유 부문에서 일어났던 일은 강철, 설탕, 위스키, 석탄 등의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경쟁의 혼돈을 독점의 질서로 바꾸려 했던 곳 어디에서나 트러스트가 형성됐다.

록펠러가 꽃피운 아름답고 화려한 장미, 아메리칸 뷰티는 수많은 기업을 거침없이 집어삼켰고 삼킬 수 없는 것은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많은 사람이 파산했고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에 대해 록펠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일은 정당했다. 내 양심에 비추어 정당했음을 확신한다.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 그 일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중요한 사명을 띤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에게 사업의 비효율성을 제거하는 것은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신과 국가를 위한 일이었다. 1882년 1월 2일, 마침내 록펠러는 약 50명의 석유 기업인과 경영인을 한데 모아 그들만의 이해 공동체를 결성했다. 트러스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회사 지분을 수탁자에게 맡겨야 했고 수탁자는 수탁자위원회를 통해 참여 기업들의 사업 정책을 조율하고 확정된 분배 기준에 따라 이윤을 배분했다. 트러스트에 참여한 기업들도 형식적으로는 독립 기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탁자위원회가 모든 경영을 맡는 단일 기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물론 위원회의 최고책임자는 바로 존 D. 록펠러였다.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최대 규모의 트러스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정유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했다. 록펠러는 스탠더드오일의 유전에서 채굴되어 스탠더드오일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운송된 원유를 스탠더드오일의 정유소에서 정제하고, 스탠더드오일의 화차로 수송된 석유를 스탠더드오일의 판매상에 의해 소비자의 바로 문 앞까지 배달되도록 했다. 록펠러는 어떤 경쟁자도 방해자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게는 석유통 하나부터 크게는 제품 운송을 위한 선단까지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석유산업의 수직적 통합을 이루어냈고 기업 경제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곧 질서였다.

클리블랜드의 대학살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다 타벨의 복수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의 사업 방식은 언론과 여론의 질타를 받고 정부의 감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록펠러와 동료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스탠더드오일의 장부와 문서는 전문가가 봐도 제대로 알지 못할 만큼 복잡하게 꾸며졌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조사해도 진실을 캐낼 수 없으리라 여겼다. 정부나 법원에서 소환장이 오더라도 록펠러는 최대한 무시했고 어쩔 수 없이 출두해야 할 때는 "잘 모르겠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난 모른다"는 말로 증언을 회피했으며, 그것도 피해갈 수 없을 때는 위증을 했다. 1894년 헨리 로이드(Henry Demarest Lloyd)가 쓴 『공익을 해치는 사익(Wealth Against Commonwealth)』이란 책에서 록펠러는 사회적 공익과 국가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혔다.

만약 우리 문명이 멸망한다면, 그것은 하층의 야만인들이 아니라 상층의 야만인들에 의해서일 것이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한 세대 만에 홀연히 등장하여 권좌를 틀어쥐었다. 이 재력은 새로운 권력이며, 이 새로운 권력층에게 막대한 기회를 주고 있다. 문화, 경륜, 자부심 그리고 심지어 귀족 가문 특유의 자제력 등 어떤 것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이들 신흥 부자들은 …… 무제한의 권력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권력을 익명적이고 영구적인 형태로 소유하려고 한다. …… 사치와 권력에 대한 그들의 끝없는 탐욕, 거칠고 상스러우며 인류를 공포로 다스리고자 하는 태도를 보라. 신성한 것들에 대하여, 학문에 대하여, 그들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문명에 대하여, 그들은 단 한마디를 내뱉는다. "얼마면 돼?"

그런데 1901년 아이다 M. 타벨(Ida Minerva Tarbell)이란 한 여성이 『맥클루어스 매거진』(McClure's Magazine)에 19회에 걸쳐 록펠러와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록펠러의 전기를 쓰기도 한 론 처노(Ron Chernow)는 타벨이 "미국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을 가장 유명하고 혐오스런 인물로 만들었다"고 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약탈을 해온 록펠러가 안전하게 잊혔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이제 그의 앞에 너무나 자세하게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타벨은 록펠러와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가 저질러온 온갖 불법 행위를 낱낱이 파헤쳐 세상에 알렸다. 세계 최초의 탐사 전문 저널리스트였던 타벨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크고 강력한 힘을 가진 기업에 도전했다. 사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싸움을 끈질기게 이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다. 그녀의 아버지 프랭클린 타벨(Franklin Summer Tarbell)은 서부 펜실베이니아의 석유지대에서 작은 유전을 경영하고 있었다. 스탠더드오일과 록펠러는 타벨의 아버지가 유전 사업 인수를 거절하자 그를 파산시켜버렸다. 이른바 클리블랜드의 대학살로 실의에 빠진 프랭클린은 요절했고 그의 원한은 딸에게 이어졌다.

세계 최초의 탐사 전문 저널리스트 아이다 타벨

19차례에 걸쳐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의 온갖 부정 행위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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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록펠러가 강도 귀족 가운데 최악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우수한 인재를 채용해 경영의 책임을 분산하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실천한 최초의 기업인이었고, 트러스트와 리베이트는 여전히 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등유 램프를 사용하는 4,000만 미국 시민의 밤을 지배하는 독점기업의 대명사였고, 보통의 미국인이 하루에 2달러를 벌기도 어렵던 시절에 1초당 2달러를 벌어들이는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록펠러와 스탠더드오일이 정제한 석유는 국경을 넘어 세계 어디에서나 판매되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적인 소비재였다.

스탠더드오일 마크가 새겨진 양철 깡통에 담긴 석유는 태평양을 넘어 중국과 조선에까지 전해졌지만 그의 사생활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사치스러운 파티와 과도한 소비로 한 번씩 추문에 휩싸이던 다른 부자 기업인과 달리 그의 삶은 회사와 교회 그리고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단순하고 소박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더욱 비밀스럽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가십을 좇는 언론이 즐기며 복수할 만한 사생활 문제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는 더욱 비밀스럽고 냉혹한 인물로 비쳤다. 무엇보다 트러스트를 통한 거대 독점기업의 출현이 시민의 정부와 민주주의를 위협할 거란 위기의식이 록펠러를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1901년 9월,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백악관의 주인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보수적인 공화당 출신이었지만 타벨의 기사를 즐겨 읽는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연방정부가 취해온 경제적 자유방임주의를 대신해 정부와 대기업의 결탁, 악덕 기업가들의 횡포, 정부의 무능력 등에서 벗어날 새로운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비록 혁신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만큼 매우 보수적인 정치인이었다. 그의 신념이 관철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의 단합이 필요했고, 단합을 위해서는 국가를 구성하는 각 계층이 고루 만족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우선 대기업의 횡포를 정부가 앞장서서 제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90년에 제정되었으나 사문화되었던 '셔먼 반독점 트러스트법'을 부활시켜 본격적인 '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로 나섰다.

사문화된 셔먼 반독점 트러스트법을 부활시켜 스탠더드오일 해체의 토대를 마련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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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때 시작된 스탠더드오일 재판은 대통령이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로 바뀔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1911년이 되자 미연방대법원은 트러스트의 최고봉인 스탠더드오일이 자유로운 거래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조직이라 결론 내리고 스탠더드오일을 34개의 기업으로 분리하도록 명령한다.각주3) 그러나 이 판결은 존 D. 록펠러와 동료들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을 해체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분리된 기업들의 주가는 2년 뒤 두 배까지 뛰었고, 록펠러 역시 이전보다 두 배 커진 부를 얻었다. 조명용 연료를 넘어 새로운 용도로 쓰이게 된 석유가 그에게 더욱 큰 이득을 가져다준 것이다. 바로 자동차의 등장 때문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혁신 정책과 트러스트 해체 노력은 사실상 대기업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지만, 이제 기업가들은 더 이상 정부와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전횡을 일삼던 과거의 경영 방식을 고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러들로 학살 사건과 록펠러 재단의 출범

트러스트 해체 이후 록펠러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존 D. 록펠러 2세(John Davison Rockefeller, Jr.)가 가업과 재산을 승계했다. 록펠러 일가를 자선과 기부의 대명사로 만든 존 D. 록펠러는 이제 록펠러 1세로 불리게 되었다. 자선과 기부 하면 떠올리는 록펠러 가문의 명성은 아버지 록펠러보다 그의 아들 록펠러 2세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오늘날 재단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재단이 활동하는 미국이지만, 재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00여 년에 불과하다. 그 역사는 산업의 주역이던 1세대 기업인(이른바 강도 귀족)들이 은퇴하던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산업화 과정에 석유, 강철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돈을 모은 기업인이 사회사업을 위한 재단을 창설하면서 재단 창설 붐이 일었던 것이다. 1907년에 창설된 러셀세이지 재단을 시작으로 1911년 카네기 재단이 만들어졌지만, 록펠러 재단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인 1913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설립될 수 있었다.

록펠러 1세와 록펠러 2세

트러스트 해체 이후 존 D. 록펠러는 아들 존 D. 록펠러 2세에게 가업을 물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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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가 사회적 공익을 위해 본격적으로 투자한 것은 1891년 전직 침례교 목사 프레더릭 게이츠를 자선사업 책임자로 발탁하면서부터였다. 게이츠는 자선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원칙을 수립하고 이를 토대로 사업을 실행해나갔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01년 미국 최초의 의학연구소인 록펠러의학연구소를 설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록펠러가 기금을 출연하는 사업과 시점을 의심했다. 기금 출연이 여론의 호도를 목적으로 한 것이든 아니든 그 시점이 록펠러 일가가 사회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시기와 공교롭게도 번번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전직 목사로 록펠러 가문의 자선사업 책임자였던 프레더릭 게이츠

그러나 그 자선사업 시작 시점이 록펠러 가문의 악명이 높아지는 시기와 겹쳐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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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그가 3,200만 달러를 출연하던 때는 대법원 판사가 판결을 내리던 시기였고, 1억 달러짜리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하던 시점은 대법원의 트러스트 해산 판결에 대한 브리핑을 발표하기 닷새 전이었다. 그런 까닭에 여론의 질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전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록펠러의 재단 설립 소식을 듣자 "그 부를 가지고 얼마나 선행을 하든, 그 부를 쌓으려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며 비판했고, 미국노동총연맹(AFL)의 회장 새뮤얼 곰퍼스(Samuel Gompers)는 "록펠러 씨가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면, 대규모의 교육 연구에 투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록펠러처럼 되지 않을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그런 교육 말이다"라고 비아냥거렸다.

록펠러 재단이 출범했던 1913년에는 록펠러 일가가 실질적 소유주였던 콜로라도 남부의 러들로 석탄 광산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의 원인이 된 사건은 한 젊은 노동운동가의 죽음이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토요일 밤, 콜로라도 주 트리니다드의 탄광 지구 중심 거리에서 제리 리피어트(Gerald Lippiati)가 록펠러가 경영하는 콜로라도 연료 및 제철 회사에서 고용한 사설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대부분 이민자였던 광부들은 록펠러가 집세를 받고 제공하는 허름한 오두막에 살았고 회사가 운영하는 잡화점에서 생활필수품을 구입해야 했다. 이들이 받는 월급은 달러가 아니라 회사가 임의로 만든 쿠폰이었고 그나마도 그 금액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회사 경영자들은 사설 경찰을 고용해 노동자들의 조직화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리피어트의 죽음에 분노한 광부들은 노조 결성을 목적으로 파업을 일으켰다. 그러자 록펠러 일가는 이들을 오두막에서 강제로 쫓아냈고 파업 광부들은 광산연맹에서 제공한 천막에서 살았다. 록펠러 일가가 고용한 자경단 용역들은 밤마다 장갑차를 동원해 광부들이 사는 천막촌을 향해 소총과 산탄총,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그럼에도 광부들은 파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1914년 4월 20일엔 주방위군이 출동해 이들의 거주지에 불을 지르고 기관총 사격을 가하며 강제로 진압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와중에 어린이 열한 명과 여성 두 명을 비롯해 최소 24명이 사망했는데, 이 사건이 훗날 '러들로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록펠러 2세는 광부들이 무리하게 노조를 조직하려고 한 것이 원인이라며 모든 책임을 광부들에게 떠넘겼다.

파업을 일으킨 광산 노동자들

가혹한 대우에 노조를 결성하려던 광산 노동자들을 막기 위해 록펠러의 지원을 받는 주방위군이 이들의 임시 처소인 천막촌을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어린이 11명과 여성 2명 등 24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이 이른바 러들로 학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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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2세의 이런 태도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가 존경하는 두 사람, 아버지와 게이츠 목사의 생각과 가르침을 따른 결과였다. 노동조합 문제에 대해서 록펠러 1세의 입장은 언제나 단호했다. 그는 기업이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기업가가 노동자들에게 베푸는 시혜라 생각했고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려는 시도에 단호히 대처하는 것은 기업가의 정당한 의무라고 믿었다. 심지어 철강왕 카네기가 노동자들의 파업에 맞서기 위해 실탄 사격을 가하자 그의 강경 조처를 지지하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최고경영자가 이런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콜로라도 탄광의 운영자들은 록펠러 2세에게 '우리가 지킬 수 있는 탄광은 지키고 그럴 수 없는 것은 폐쇄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록펠러 2세는 이들을 지지했고, 결국 무력을 사용한 강제진압은 학살이 되었다.

이후 열린 청문회에서 록펠러 2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날리고 노동자가 모두 죽더라도 노조를 파괴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고, 록펠러 1세는 그런 아들이 자랑스럽다면서 콜로라도 탄광의 주식 1만 주를 추가로 증여했다. 그러나 러들로에서 벌어진 참상을 확인한 대중은 크게 분노했고 록펠러 일가는 다시 궁지에 빠졌다. 이때 록펠러 일가가 여론을 전환시키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에드워드 버네이스와 함께 현대 PR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이비 리였다. 리는 천막촌에서 일어난 화재가 주방위군의 방화와 자경단의 총격 때문이 아니라 광부들이 추위를 쫓으려 피워둔 난로가 쓰러지면서 생긴 거라고 홍보해 비난을 받았는데, 그와 동시에 좀 더 많은 기부를 통해 록펠러 일가의 이미지를 개선하라고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과 제3세계의 녹색혁명

존 D. 록펠러는 99세를 6주 앞둔 1937년 5월 23일,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둔다. 유해는 클리블랜드로 돌아가 어머니와 먼저 떠난 아내 사이에 묻혔다. 이때 그의 손에는 '증권번호 1번'이라고 적힌 스탠더드오일사의 증권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 자선사업을 시작했지만 생전에 쌓은 악명이 너무나 컸기에 사후에도 존 D. 록펠러란 이름은 오랫동안 대중의 뇌리에 더러운 이름으로 기억되었고, 록펠러 일가와 록펠러 재단은 이미지 변신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존 D. 록펠러는 언젠가 록펠러 재단이 록펠러 일가에게 과거의 스탠더드오일보다 더 큰 힘과 영향력을 가져다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악명보다 록펠러 재단의 자선이 좀 더 두드러져 보이게 되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오늘날 왜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 유난히 미국에 재단이 많고 이들이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첫째, 미국의 재단은 주로 기업인이 설립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재단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규모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둘째, 미국은 전통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해왔고 국가와 중앙정부의 권한과 책임이 최소한으로 규정된 탓에 민간 영역에 속한 재단이 실제로는 국가가 담당해야 할 공공 영역의 역할과 기능까지 분담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빈부격차 등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복지,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교육 등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본래 국가가 담당해야 할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그 역할이 미약한 공백을 민간 재단이 메워주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부각되는 것이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의 '자본주의 4.0'이다. 칼레츠키는 1970년대부터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스』 등에서 비즈니스와 금융 문제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전 세계의 금융기관, 기업, 정부기관에 경제와 정치 분석 보고서를 제공하는 유명한 경제 전문 칼럼니스트인데 그가 현장 경험을 녹여 2010년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간행한 책이 바로 『자본주의 4.0』이다. 그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2008년 금융위기를 시장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시장근본주의의 위기'로 보았다.

그는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나타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1.0으로, 러시아혁명과 경제대공황 이후 출현한 케인즈식 수정자본주의를 자본주의 2.0으로 보았고, 1980년대 대처와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정치혁명으로 출현한 프리드먼식 자본주의,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3.0으로 규정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비효율적인 정부를 대신해 시장이 정치를 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내적 논리에 의해 더욱 강화된 결과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지나친 시장만능주의, 시장근본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칼레츠키는 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진화가 필요하다며 이것을 자본주의 4.0이라 불렀다.

자본주의 4.0은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를 대신해 정치와 경제(시장)가 모두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견제하는 관계를 새롭게 구축해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최근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돈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노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보다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은 비정상"이라며 부자 증세를 주장한 데 이어 프랑스 최고의 부호들이 국가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기고문까지 낸 까닭은 그들이 자본주의 4.0을 대안으로 인식했든 아니든 간에 이대로 가다간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공동체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한 국가 공동체가 병들지 않고 온전하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물론 세금이라는 연료와, 기부라는 윤활유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거나 나타나는 자본주의 4.0은 그가 본래 의도한 것과 달리 기부와 자선에 의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빈부 양극화가 심화된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건전한 전통으로 부의 사회적 환원을 손꼽는데, 실제로 미국 부호들이 재단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과정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유럽식 민주주의와 달리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허점을 보완하려다 보니 이런 전통이 생겨났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선진국 대부분이 갖춘 기본적 사회복지제도인 국민의료보험조차 최근에야 도입하려고 시도하는 국가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 대다수가 혜택을 입게 될 의료보험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보수적인 공화당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보험금융자본의 강한 로비에 휘말려 민간의료보험과 신설된 공보험을 경쟁시키는 방식으로 후퇴하는 등 제대로 된 개혁 법안이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대다수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본과 시장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법안의 혜택을 구체적으로 실감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미국은 건국 이래 전통적으로 국가의 기능, 특히 사회복지와 같이 국가가 직접 개입해 빈부격차를 줄이고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완화하는 기능이 약했다.

산업화 이후 미국 사회에서 이 같은 기능을 담당한 것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재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캐나다 정치인 로버트 위브(Robert Wiebe)는 20세기까지 또는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정부가 갖고 있었던 가장 유용한 이미지는 텅 빈 화물선, 즉 권력이 만들어지고 넘치지만 정부 스스로는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는 컨테이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과장된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세계 최고의 권부를 자임하는 미국 행정부지만 꾸준히 작은 정부를 추구해온 결과 스스로는 자국민에게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는 텅 빈 컨테이너와 같아졌기 때문에 이처럼 정부가 수행하지 못하는 빈자리를 자선단체들이 메워왔다는 것이다.

카네기와 록펠러에서 버핏과 빌 게이츠로 이어지는 부의 사회적 환원 전통은 매우 부러운 현상이지만, 국가가 세금을 통해 사회적 인프라와 복지 체계를 구축하는 대신 부자들의 자선과 기부에 의존하는 사회가 과연 우리 국민이 바라는 국가 공동체의 모습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부자들의 자선과 기부로 만들어진 재단은 공공의 영역에서 국가의 빈자리를 채웠고, 냉전 시대엔 미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 없는 냉전의 문화적 대리자로서 제3세계와 비동맹권을 아우르는 전략을 수행하기도 했다. 한동안 TV 드라마로 인기가 높았던 〈맥가이버〉에서 주인공은 동구권을 넘나들며 정부를 대신해 여러 가지 비밀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가 속한 조직이 정부기관이 아니라 피닉스 재단이란 민간기구였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좀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처럼 정부의 공백과 의도를 대신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행한 가장 대표적인 민간 재단이자 NGO가 바로 록펠러 재단이다.

20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개발 기관은 선구적인 NGO인 록펠러 재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기구도 [세계은행이나 국제개발처(USAID)나 그 밖의 어떤 국제기구도] 재단 발족 이후 75년 동안 록펠러 재단이 수행한 역할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 록펠러도 마찬가지로 도전에 나서면서, 1907년 미국 의회에 질병, 빈곤, 무지를 퇴치하기 위한 연방기관에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성마른 정치가들은 그가 돈으로 명성을 사려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공격했다. 의회가 반대하면서 그의 제안은 기각되었다. 록펠러는 대신에 1913년 뉴욕 주에 사무실을 내고, 두 차례의 초기 출연금 1억 달러로 록펠러 재단을 설립했다. 20세기에 국제적 개발의 대의를 고무하는 일에 이 이상의 역할을 한 기관은 없었다. 록펠러 재단이 처음 60년 동안에 착수한 일은 거의 황금알이 되었다. 재단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 중 약 170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록펠러 재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여러 저개발 국가에서 농업생산력 증대, 이른바 '녹색혁명'을 지원해왔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 달리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독일의 이게파르벤이 붕괴하자 미국의 화학 기업이 세계 최강으로 부상했다. 유수 기업들─듀폰, 다우케미컬, 몬산토, 허큘리스파우더 등─은 전투용 폭탄과 탄환을 만들기 위해 생산한 질소화합물이 넘쳐나는 사태를 맞았다.

질소는 TNT 같은 고성능 폭약의 주성분이며, 질산염 비료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화학업계는 비료·암모니아질산염·무수암모니아 같은 형태로 남은 질소를 팔아먹을 수 있는 시장을 새롭게 창출하기로 했다. 자국 농업시장일 수도 있고 해외 농업시장일 수도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록펠러가의 스탠더드오일 집단에는 무엇보다 듀폰, 다우케미컬, 허큘리스파우더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질소비료산업은 록펠러 스탠더드오일 집단의 주력 업종이었다.

전후 새로운 농화학 제품의 국제 마케팅은 카길·콘티넨털그레인·번지·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의 연합체인 곡물 카르텔뿐 아니라 미국의 석유화학산업에도 중요한 시장을 열어주었다. 거대한 곡물무역회사는 모두 미국 기업들이었고, 그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녹색혁명의 확산을 통해 특수교잡종자를 개발함으로써 성장했다. 농업은 세계화하는 중이었으며, 록펠러 재단이 애그리비즈니스의 세계화 과정을 이끌었다.

록펠러 재단은 설립 초기인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독일의 우생학 연구를 지원하는 등 이른바 생명공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이후 록펠러 재단이 연구비를 투자하고 이끈 녹색혁명은 궁극적으로 인류의 식량자원을 생산하는 농업을 산업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 쌀과 밀, 콩, 옥수수 같은 곡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농약과 비료가 필요하고, 논을 갈고 추수하는 기계의 연료로는 물론이고 운송과 보관 등 모든 과정에 석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녹색혁명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토종 종자 대신 이를 유전적으로 변형시킨 종자를 몬산토 같은 종자회사에서 구입해 농약과 비료와 버무려 함께 뿌려야만 두세 배의 증산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지난 세기 제3세계에서 펼쳐진 녹색혁명의 실체다. 제3세계에서 진행된 농업의 산업화는 그 과정에서 투입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빈농을 도태시켰고 결국 산업화된 농업에 적응할 수 있는 기업화된 농업만이 살아남았다. 농업이 석유와 화학산업에 의존해 산업화된 결과 20세기 초반 15억이던 인류는 70억으로 늘어났고, 현재도 또 앞으로도 농업이 현재와 같은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록펠러 스탠더드오일 집단이 대주주로 있는 유전자 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의 생산물인 이 생산하는 종자와 비료에 의존해야만 한다. 이처럼 록펠러 재단이 펼치는 다양한 사업이 과연 순수한 의도로만 출발한 것일까.

정부가 무능력하고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세상에서는 더 많은 기업 경영자가 세상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게 된다. 강력한 정치 지도력이 사라진 세상에서 경제는 새로운 정치학이 되었고, 선출되지 않은 채 막대한 부를 누리는 기업과 기업의 소유주들은 전통적으로 정치인이 해온 역할을 대체한다. 19세기의 자유방임주의를 연상하게 되는 신자유주의가 극성인 21세기 초엽을 살아가는 우리는 부자들이 스스로 힘들게 벌었다고 주장하는 막대한 부를 단순히 수익의 재창출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마치 로빈 후드처럼 우리 사회의 예술과 교육, 빈곤 퇴치와 일자리 창출 같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의무이자 복지는 고용을 통한 국민 개개인의 소득 증대와 세금을 통한 국가 재정의 건전성에 대한 기여다. 그러나 자기 기업 내부의 비정규직 노동자 1만여 명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 1,000억 원이 아까워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법원 판결조차 어기는 기업이 저소득층 인재를 양성한다며 5,000억 원을 기부하고, 한 여성 노동자가 309일 동안 35미터 고공에 매달려 '해고는 살인'이라 외쳐도 눈도 깜짝 안 하는 사회에서 이름뿐인 자본주의 4.0은 어쩌면 지독한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스템을 통해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교육과 문화에 이바지하는 장학재단과 문화재단을 설립하겠다며 발 벗고 나선다. 과연 이들의 기부와 자선은 우리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인가?

브레히트는 「임시 야간숙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철도회사들과 동맹했다. 이젠 클리블랜드의 모든 정유사를 사버릴 거야. 우린 누구에게나 동참할 기회를 준다. …… 하지만 거절하는 놈은 용서 없단다. 네 주식을 우리에게 넘기지 않으면, 우리가 그걸 휴지로 만들어버릴 거야. - 존 D. 록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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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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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원 집필자 소개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새얼문화재단에 입사해 2012년 현재까지 『황해문화』에서 일하며, 평화박물관·space99 운영위원,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펼쳐보기

출처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 저자전성원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 사람의 천재성이나 개성이 인류의 삶을 크게 바꿔놓는다. 헨리 포드에서 마사 스튜어트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근대화와 세계화의 영역에서 우리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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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존 D. 록펠러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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