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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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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1년 |
국적 | 미국 |
요약 쿠데타와 독재의 악순환을 거듭하며 바나나 같은 플랜테이션 농산물 수출에 생존을 내맡긴 중남미의 바나나 공화국을 다스리는 ‘국가 안의 국가’ 유나이티드프루트컴퍼니. 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며 기나긴 악명의 역사를 쌓은 이가 새뮤얼 제머리다.
미국의 진보적인 예술가로 손꼽히는 우디 앨런(Woody Allen) 감독의 초기 코미디 작품 〈바나나(Bananas)〉(1971)는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에 대한 정치적 풍자를 담고자 했지만 그보다는 슬랩스틱 코미디 연기가 더욱 돋보인 영화였다. 영화에서 우디 앨런은 신경질적이고 섬약한 뉴욕 시민 필딩 맬리쉬로 분해 등장한다. 필딩은 반정부운동가 낸시(루이즈 라세)에게 홀딱 반했지만 그녀는 산 마르코스(쿠바를 염두에 두고 설정한 가상의 남미 공화국)에서 일어난 혁명에 빠져 정작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필딩은 애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산 마르코스 공화국을 찾아갔다가 한바탕 소동에 휘말린 끝에 혁명을 성공시키고 미국으로 돌아오지만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된다.
비록 진보적 예술가가 만든 정치 풍자 코미디로 분류되지만 〈바나나〉가 보여주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인식은 아널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의 출세작 〈코만도(Commando)〉(1985) 같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필딩이 우여곡절 끝에 혁명을 성공시키는 설정이나 은퇴한 전직 용병 매트릭스 대령의 딸을 납치해 이를 빌미로 라틴아메리카의 민선 정부를 뒤집는 쿠데타를 시도한다는 설정은 중남미 국가들을 얕잡아 본다는 점에서 좌우의 데칼코마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 바나나가 의미하는 것은 쿠데타와 독재의 악순환을 거듭하며 바나나 같은 플랜테이션 농산물 수출에 생존을 내맡긴 중남미의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들이다. 작가 오 헨리(O. Henry)는 재직하던 은행의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받던 중 장인의 도움을 받아 온두라스로 도피했다. 그가 온두라스에 머물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녹여낸 소설이 1904년에 펴낸 단편 『양배추와 임금님(Cabbages and Kings)』인데, 이 책에서 바나나 공화국이란 표현이 처음 나왔다. 이때부터 바나나 공화국이란 표현은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배 아래 놓인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를 얕잡아 부르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바나나 공화국의 진정한 의미는 '국가 안의 국가'로 군림하며 중남미 국가들을 마음대로 농단해온 유나이티드프루트컴퍼니(United Fruit Company)를 지칭하는 말이어야 한다. 세계 최대 과일 기업 가운데 하나인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주요 사업 품목은 바나나였다. 이들은 바나나 재배와 유통을 통해 중남미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벨리즈, 자메이카, 쿠바, 콜롬비아, 에콰도르에 이르는 유나이티드프루트 제국의 식민지에서 이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전지전능한 '녹색의 교황'이었다.
열대의 달콤한 황금, 바나나의 슬픈 역사
원산지가 열대 아시아인 바나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식용작물 가운데 하나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2005년 발표에 따르면 "바나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출되는 과일인 동시에 쌀과 밀, 옥수수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중요한 식량 상품"이다. 식량자원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곳은 산지인 열대지방이지만 유럽과 미국, 아시아 등 온대 지방에서도 1년 내내 소비되고 있다.
인류가 바나나를 재배한 것은 기원전 5000~1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바나나가 경제성 있는 중요한 식용작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 100년이 조금 넘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원정길에 발견한 바나나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고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는 바나나를 '현자의 식물(Musa sapientum)'이라 불렀다. 일부에서 바나나를 낙원의 나무(Tree of Paradise) 또는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 이후 바나나는 중동, 아프리카의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신대륙까지 건너갔는데, 바나나란 명칭은 손가락을 의미하는 아랍어 바난(banan)에서 나왔다고 한다.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팔로스항을 출발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일행은 그해 10월 12일 현재의 바하마로 알려진 카리브 해의 섬 가운데 하나에 상륙했다. 신대륙에 도착한 근대 유럽인은 이 지역의 토양과 기후가 바나나 생산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의 식량으로 바나나를 심었다. 바나나는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감자와 옥수수, 담배는 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건너갔다. 2005년 현재 바나나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은 인도로, 그해 생산된 7,260만 톤 가운데 20퍼센트가 넘는 1,680만 톤을 생산했다.
미국은 단 한 개의 바나나도 생산되지 않는 나라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바나나를 수입하는 나라지만 신기하게도 세계에서 바나나 수출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나라다. 바나나는 녹말성 작물의 하나지만 역사적으로 중남미가 원산지인 감자만큼 중요한 작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남미 일대의 여러 나라에서 바나나는 원산지가 중남미인 감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작물이다. 미국은 바나나 수출 문제를 놓고 얼마 전까지 유럽연합(EU)과 심각한 무역 마찰을 빚었다. 바나나가 그만큼 중요한 수출용 작물이자 신대륙의 역사가 곧 바나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유나이티드프루트컴퍼니의 탄생
1898년 2월 15일, 쿠바 아바나에 정박한 군함 메인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시작된 미국-스페인전쟁(1898. 4~1898. 8)에서 승리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팽창주의를 노골화했다. 파나마 운하를 차지하기 위해 콜롬비아의 영토였던 파나마의 독립을 사주했고 쿠바 관타나모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며 쿠바를 보호령화하는 한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먼로주의를 강조하며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아이티, 니카라과 등을 침공 또는 협박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했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미국의 사업가들에게도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 식용작물로 재배되던 바나나가 중요한 경제 작물이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1870년 http://www.wellfleetma.org/Public_Documents/F0000F7A6/I00AB53E9)">로렌조 다우 베이커(Lorenzo Dow Baker)각주1) 는 화물선 텔레그래프호에 베네수엘라 광산에 필요한 채광 장비들을 실어 운반하고 미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자메이카에 들렀다가 바나나를 처음 맛보았다. 그는 이국적인 맛과 모양의 이 과일이 지닌 상품성에 주목해 잘 익은 바나나를 가득 싣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미국에 도착한 최초의 바나나였다. 그러나 11일의 항해 기간에 바나나가 모두 상해버리는 바람에 전혀 팔 수 없게 되자 베이커는 이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다음 해에는 덜 여문 초록빛 바나나를 실었다. 항해 중에 노랗게 익은 바나나는 뉴욕의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이내 열대의 황금으로 각광받았다. 베이커는 이후 10년간 과일 무역에 종사하면서 매사추세츠 출신 기업가 앤드루 프레스턴(Andrew Woodbury Preston)과 함께 보스턴프루트컴퍼니(Boston Fruit Company)를 설립했다. 이들은 자메이카에 일곱 개의 바나나 플랜테이션 농장을 세웠고, 많은 선박으로 북미 시장에 열대과일을 실어 나르면서 커다란 수익을 거뒀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젊은 사업가 마이너 쿠퍼 키스(Minor Cooper Keith)각주2) 는 코스타리카의 철도 건설을 도와달라는 외삼촌 헨리 메이그스의 초청을 받았다. 1848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목재상 마이너 허블 키스(Minor Hubbell Keith)와 철도건설업자 헨리 메이그스의 누이 에밀리 메이그스(Emily Meiggs)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로 목축업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왜 코스타리카의 철도 건설에 미국의 사업가가 뛰어들게 되었을까?
1808년에 재배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도 코스타리카의 3대 수출 품목에 속하는 커피는 주로 중부 계곡의 고지대에서 재배되어 울창한 밀림지대를 지나 태평양 연안의 항구도시 푼타레나스까지 달구지로 운반되었다. 코스타리카산 커피의 주요 시장은 대서양 너머 유럽에 있었고 당시만 해도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수로가 없었기 때문에, 카리브 해까지 연결되는 운송 철로를 만드는 것은 코스타리카의 독재자 토마스 과르디아 구티에레스(Tomás Guardia Gutiérrez) 장군에게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정글 지역을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하는 일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것 못지않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말라리아, 황열병, 이질 등 열대 질병으로 철도 건설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벌충하기 위해 마이너 키스는 여러 곳에서 인력을 충당해야 했다. 처음엔 뉴올리언스의 감옥에서 데려온 700명의 강도와 도둑이 함께 일했는데 얼마 뒤엔 25명만 살아남았다. 철도공사에 참여한 키스의 형제 가운데서도 세 사람이나 목숨을 잃었다. 형 헨리도 마이너 키스만 남겨둔 채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루이지애나에서 온 2,000명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끔찍한 노동 조건에 질린 나머지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코스타리카 정부는 키스에게 공사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위임해버렸다.
마이너 키스는 철도 건설에 쓸 재정을 확보해야 했다. 그는 그 방편으로 파나마에서 그로스미첼종 바나나를 수입해다가 코스타리카 정부에서 인수한 철도 부설 지역 인근의 미개간지 80만 에이커에 심었다. 애초에 건설 비용을 충당하고 노동자들에게 먹일 식량으로 재배한 것이었지만 바나나 수출 실험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그는 세 개의 바나나 수출 회사를 소유하게 되었다. 1882년 과르디아가 죽자 마이너 키스는 코스타리카에서 무관(無冠)의 제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더 많은 토지를 획득해 그 땅에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했다. 1890년 철도가 완공될 무렵, 마이너 키스가 건설한 철도는 오직 그의 바나나 수송에만 사용될 정도였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콜롬비아의 카리브 해 연안 지역에도 광대한 바나나 재배 부지를 매입했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미 바나나 재배지를 개발하고 철도도 부설했지만, 국제 시장을 개척할 연줄이 부족했다.
마이너 키스는 시장을 견고히하고 독점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1899년 경쟁 업체 보스턴프루트컴퍼니의 앤드루 프레스턴과 연합해 유나이티드프루트를 만들었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그때 이미 코스타리카, 파나마, 쿠바, 콜롬비아, 자메이카, 도미니카에 1,000만 제곱킬로미터(약 25억 에이커)에 달하는 거대한 농장을 소유했고, 세계 바나나 시장의 4분의 3을 지배하는 기업이 되었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박회사와 수입 업체들마저 인수하면서 바나나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다.
코스타리카와 마찬가지로 과테말라 역시 커피를 수출한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고 있었지만 돈이 떨어지자 마이너 키스에게 철도 완공을 부탁했다. 그는 코스타리카에서처럼 공사 대금 대신 유나이티드프루트가 바나나를 재배할 토지를 요구했고, 1904년 갱신한 계약에 따라 과테말라 철도에 대한 완전한 경영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과테말라 정부는 세금을 면제해주었고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장부를 열람할 권리마저 포기했다. 이 나라에 닥쳐올 기나긴 시련의 서막이었다. 마이너 키스와 앤드루 프레스턴은 유나이티드프루트 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유나이티드프루트 제국이 떨치게 될 기나긴 악명의 역사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50년간 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끄는 것은 러시아 출신 유대계 이민자로 뉴올리언스에서 바나나 사업에 뛰어든 새뮤얼 제머리의 몫이었다.각주3)
바나나 제국을 지배한 카리브 해의 제왕
새뮤얼 제머리는 제정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전쟁을 선포하던 1877년 러시아 베사라비아(Bessarabia)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쉬무엘 즈머리(Schmuel Zmurri)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892년 그는 일가족이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구입해준 표를 쥐고 뉴욕행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싸구려 선실에 홀로 웅크리고 앉은 소년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앨라배마 주 셀마에 정착한 그는 평생 정규교육이라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그는 돼지를 치는 데 필요한 양철 제품을 판매하는 늙은 떠돌이 상인 밑에서 주급 1달러를 받는 거친 일부터 시작해 힘들게 번 돈으로 1896년 러시아에 있던 가족을 미국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제머리는 1899년 앨라배마 주 모빌로 이주하여 바나나 사업에 뛰어들었다. 자본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간거래상으로 일하거나 선상에서 너무 익어버려 급하게 처분해야 하는 바나나를 구입해 소상인들에게 판매하는 계약을 맺으면서 유나이티드프루트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서 그는 세라 와인버거(Sarah Weinberger)를 만나 한 달 만에 결혼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새뮤얼 주니어와 딸 도리스가 태어났다.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르자 제머리 부부는 1917년 뉴올리언스의 툴레인 대학 인근에 호화로운 저택을 구입했다.
사업은 점차 번성했고, 부정기 화물선 두 대와 온두라스의 독립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사서 모빌과 뉴올리언스 등을 오가며 바나나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1910년 제머리는 동업자와 함께 온두라스에 플랜테이션 부지로 5,000에이커를 매입하고 쿠야멜프루트컴퍼니(Cuyamel Fruit Company)를 창립했다. 당시 중앙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는 독립 이후 잦은 정치적 혼란과 낙후된 경제 때문에 유럽에서 들여온 차관에 대한 지불 보증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미국은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지배력을 과시하고 강화하기 위해 J.P.모건각주4) 의 은행을 통해 채무 지불을 보증하도록 했다. 그 대신에 J.P.모건의 은행 직원들은 세관에 상주하며 수출입 물품의 관세를 거뒀다. 관세를 회피하기 위해 제머리는 정치자금을 대며 후원한 다빌라(Miguel R. Davila) 대통령을 압박했다. 그는 온두라스 정부와 직접 합의하기를 원했지만 미국 정부는 다빌라에게 압력을 넣어 제머리의 뜻에 따르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 정부는 요원을 파견해 제머리의 행보를 감시했지만 그는 정부의 경고나 감시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제머리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다빌라 대통령을 직접 손봐줄 생각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1910년 12월의 어느 날 밤, 제머리는 수하 중에서 '머신 건(Machine Gun)'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몰로니(Molony)와 리 크리스마스(Lee Christmas), 장차 온두라스의 대통령이 될 친구 마누엘 보니야(Manuel Bonilla)각주5) 를 대동하고 뉴올리언스의 사창가로 놀러갈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사창가에서 신나는 파티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요원들의 감시를 피해 몰래 사창가를 빠져나와 요트에 승선한 다음, 외항에서 좀 더 큰 배로 갈아탔다. 제머리는 부들부들 떠는 보니야를 위해 코트를 벗어주며 "이봐, 보니야! 난 자네에게 내 운을 걸었네. 내 코트도 걸었고 말이야"라고 말했다. 대기하던 제머리 소유의 화물선에는 소수의 사병 집단이 각종 소총과 탄약, 최신형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도박은 성공했다. 여섯 주가 지난 뒤 다빌라 정부는 쿠데타로 전복되었고, 보니야가 대통령에 오르자 온두라스 의회는 제머리의 사업권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향후 25년간 납세 의무를 면제해주는 특별 법안을 승인했다. 1824년에서 1876년까지 52년간 온두라스에서는 82명이 집권했고 약 170번의 내란이 일어났으며, 1877년에서 1900년까지 23년간 군사반란이 대략 200회 이상 일어났고 정권 탈취 시도도 100번 넘게 있었으므로 제머리가 부추긴 쿠데타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고래를 삼킨 사나운 메기, 새뮤얼 제머리
유나이티드프루트는 마이너 키스 시절부터 철도를 부설해주고 그 대가로 토지를 획득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해왔지만 온두라스와 니카라과에서는 이런 사업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제머리는 유나이티드프루트의 강력한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온두라스에서 쿠야멜프루트를 통해 유나이티드프루트와 경쟁했다. 그는 바나나의 크기와 품질을 개량하기 위해 값비싼 관개 시스템을 구축했고, 1922년에는 블루필드프루트와 증기선 회사를 인수했다. 1929년경 쿠야멜프루트는 온두라스, 니카라과와 뉴올리언스 사이를 오가는 증기선 열세 척을 보유했고, 별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과 정제소도 가지고 있었다. 쿠야멜프루트가 성장하면서 유나이티드프루트와의 경쟁도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1911년에서 1928년에 이르는 동안 유나이티드프루트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는 격렬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지만 회사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유나이티드프루트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남북전쟁 이전의 노예들과 다를 바 없이 일했지만 회사는 자체 보안대(security force)를 조직해 노동자들을 억압했다. 농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형편없는 합숙 시설에서 먹고 자며 회사가 운영하는 상점을 이용해야만 했다.
1929년이 되자 파업의 후유증으로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주가는 떨어진 반면 쿠야멜프루트의 주가는 올랐다. 그해 6월 14일, 최고경영자 마이너 쿠퍼 키스가 사망하자 경영권 승계 문제까지 불거져 나오면서 유나이티드프루트는 큰 혼란에 빠졌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쿠야멜프루트와 경쟁하는 대신 이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30년 제머리는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주식 30만 주를 받는 조건으로 쿠야멜프루트를 매각했다. 그 덕분에 제머리는 3,000만 달러의 수익과 함께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최대 주주이자 이사직을 얻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경영에서 손을 뗀 그는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의 가족 곁에서 한가로운 은퇴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주가는 계속 떨어져서 1929년 무렵 주당 158달러였던 주가가 1932년이 되자 주당 10달러로 급락하고 말았다. 가만히 앉아서 재산이 줄어드는 것을 방관할 제머리가 아니었다. 그는 당장 이사회가 열리는 보스턴 페더럴 스트리트 1번지로 달려갔다.
유나이티드프루트 이사회는 오랫동안 보스턴 금융계의 보수적인 엘리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보스턴 퍼스트내셔널뱅크의 회장 대니얼 윙(Daniel G. Wing)은 거칠게 항의하는 제머리에게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미안하지만, 제머리 씨! 나는 당신이 뭐라고 말하는지 한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구려."
윙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 여전히 러시아 억양의 영어로 말하는 제머리를 보며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제머리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 곧바로 자신을 지지해줄 주주와 대리인을 소집했다. 회사 경영에 불만을 품은 주주들은 많았다. 이사회로 다시 쳐들어온 제머리는 오랫동안 경쟁 관계였던 유나이티드프루트의 회장 빅터 매컴버 커터(Victor Macomber Cutter)의 자리에 한 움큼의 위임장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자네들 신사 양반들은 그동안 충분히 오랫동안 사업을 말아먹었어.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로잡을 때야."
제머리는 이사회에서 경영을 책임지는 이사로 선출되어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1938년 회장직이 신설되자 그 자리에 올랐다. 사나운 메기가 고래를 집어삼킨 것이다.
단종 재배와 생물다양성의 파괴
유나이티드프루트를 장악한 새뮤얼 제머리는 단호하고 거친 사람이었다. 그는 주가를 끌어올리는 일부터 손댔다. 자신의 봉급을 자진 삭감하는 일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 대신에 직영 농장 인력의 25퍼센트를 감축하고 유나이티드프루트가 바나나를 사들이던 농장에 대한 융자를 대폭 축소했다. 쿠바산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이익은 관세 때문에 대폭 줄어들었고, 98척에 이르는 상선 함대(Great White Fleet)각주6) 가 올리던 수익은 대공황의 여파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회사의 수익은 거의 온두라스,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파나마, 자메이카, 콜롬비아 등지에서 재배하는 바나나에서 나왔다. 그러나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의 단종 재배 방식은 토양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고, 전염병이 발생해 바나나의 생산성이 떨어졌다. 제머리는 더 좋은 토질을 찾아 경작지를 옮겨버렸다.
유나이티드프루트가 경작지를 옮기는 것은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대재앙이었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철로부터 교량에 이르기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가지고 떠났다. 남은 것은 강한 독성을 지닌 농약에 찌든 채 벌건 속살을 드러낸 대지와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장 노동자들뿐이었다.
"의사들이 말하길, 집으로 가서 죽음을 기다리라더군요. 나, 아이들, 우리 가족들 모두 다 말이죠." 44세의 이 남자는 골수암에 걸렸다. 그의 10세 된 딸은 키가 너무 작아서 겨우 4세로밖에 안 보인다. 그의 네 살배기 아들도 아직 갓난아기처럼 작다. 아이는 혼자 일어서지도 못한다. 그들은 벌레들의 바나나 습격에 대비해 1970년대 말까지 미국에서 생산된 약품인 네마곤의 니카라과 희생자들 2만 2,000명 중 일부이다. 이 약품은 충분한 예방조치 없이 사용되었고, 심지어 비행기로 대량 살포되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바나나에 대해 알아보자. 바나나는 키가 크기 때문에 간혹 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파초(芭蕉)과에 속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풀이다. 보통 과일에는 씨가 있지만, 우리가 즐겨 먹는 바나나에는 씨가 없거나 흔적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재배하는 종류에 따라 간혹 야생에 가까운 종에는 팥알만 한 큰 씨가 있기도 하다. 우장춘 박사의 '씨 없는 수박각주7) '은 약품 처리를 통해 염색체 돌연변이를 일으켜 염색체가 3배체(triploid)가 되도록 한 것이다. 3배체 생물은 생식세포를 만드는 세포분열을 통해서 염색체가 잘 나뉘지 않기 때문에 화분이나 난세포(卵細胞)가 생기지 않는다. 그 때문에 수정하지 못하든가 아니면 수정해도 씨가 발육하지 못하게 된다. 대부분의 생물은 세포마다 2배체(diploid)의 염색체를 갖는데, 여기에 한 쌍의 염색체가 더해진 3배체가 2배체보다 생산성도 높고 더 잘 자란다. 바나나는 자연적 돌연변이를 통해 3배체 생물이 되었고, 먹기 좋은 과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3배체, 다시 말해 씨 없는 바나나로 대부분 뿌리나 줄기를 나누는 무성생식을 통해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
바나나는 대체로 열대성 작물이지만 일부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아열대 지역에서도 관개시설만 있으면 잘 자란다. 불필요한 가지와 흡지(吸枝, 어린 나무의 줄기에서 자라나는 곁가지)를 잘라주기만 하면 생육에 그다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상당한 정도의 온도와 물이 필요하며, 또 적절한 배수시설도 있어야 하고, 깨끗하게 경작하기 위해 모든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그런 탓에 플랜테이션에 의한 바나나 단종 재배는 토양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토양을 침식하며, 무성생식에 따라 유전적으로 단일한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특정 질병에 매우 취약하다. 바나나에는 약 300여 개의 변종이 있는데, 예전에 가장 흔하던 품종은 그로스미첼이었지만 지금은 질병에 강한 발레리와 캐번디시로 대부분 대체되었다. 바나나는 아직 녹색을 띨 때 수확하고, 현지에서는 집 근처 그늘에서 성숙시킨 다음 필요할 때 먹는다. 수출용 과일은 신중하게 조절되는 조건 아래서 성숙시키는데, 때로 그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에틸렌을 쓰기도 한다.각주8)
바나나는 독성 있는 화학약품에 의해 끊임없이 처리된다. 익지 않은 바나나 열매들은 녹색을 띠고, 손상되기 쉬우며, 꼭지부터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 바나나 다발들은 더 많은 화학약품으로 세척하기 위해 케이블에 도살당한 짐승처럼 매달린다. 등급을 매기고 상자에 포장된 뒤 냉장 시설된 배에 실려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보내는데, 이 불운한 과일은 그 후에 슈퍼마켓에서 익게 되고, 진실에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수십억 달러의 엄청난 돈을 소비하고 싶어 하는 '양질'의 이미지로 둔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선진국에서 먹는 과일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달러' 바나나이고, 이 바나나는 치키타, 돌, 델몬트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슈퍼마켓이나 대형 할인점 과일 앞에서 스스로 '선택의 자유'를 구가하는 자유시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실제로는 유통 자본과 생산 자본이 결정해 공급한 몇 안 되는 소수의 품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수많은 품종이 상품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특별히 가뭄이나 해충에 강하다거나 당도가 높다는 이유 등으로 선택된 품종만이 남는다. 이렇듯 인간에 의해 선택되고 배제된 종자들은 유전적으로 단일해지고, 단일 품종에 의한 대규모 재배 방식은 그 품종에 기생하거나 공생하며 살아가는 하부 생태계를 교란한다. 교란된 생태계는 갑자기 창궐하는 벌레들, 특정 품종에 유독 강한 질병을 퍼뜨리는 병균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요즈음 바나나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0년간 미국에 존재했던 작물 가운데 무려 75퍼센트가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멸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멸종 위기에 처한 종자들을 보존하고 생명다양성(biodiversity)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각국 정부나 국제곡물다양성신탁(GCDT), 식량농업기구, 국제농업연구자문그룹(CGIAR) 등 국제단체의 지원을 받아 추진되고 있다.14 그러나 카길, 몬산토, 듀폰 등 유전적 형질에 대한 특허권을 소유한 다국적 기업들의 이해관계와 이런 노력이 충돌할 때 과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과테말라 내전과 유나이티드프루트컴퍼니
중남미 전역을 문어발처럼 장악했기 때문에 중남미인들에게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엘 뿔뽀(문어)'라 불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남미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1953년 코스타리카에서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Jose Figueres Ferrer) 국민해방당 후보가 65퍼센트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정권들을 비난하면서 반독재의 기치를 높이 들었는데, 그 결과 이웃 국가에서 독재정권과 싸우던 민주 인사들이 코스타리카로 몰려들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유나이티드프루트에서 일한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Anastasio Somoza-Debayle)는 민주화 도미노를 염려해 코스타리카 국경을 침범했지만, 페레르 정부는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의 협력(실제로는 미국의 도움)을 얻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유나이티드프루트 등 바나나 생산을 독점하던 미국 회사들을 추방하지 않으면서도 자국의 이익 배당을 10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인상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시도를 한 코스타리카 정부는 온두라스와 과테말라를 비롯한 여러 바나나 공화국에 희망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중남미에서 민주주의의 우등생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새뮤얼 제머리는 제2의 코스타리카를 용납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희생양으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구스만(Jacobo Árbenz Guzmán) 정권을 겨냥했다. 전임 아레발로(Juan Jose Arevalo Bermejo) 대통령은 진보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해 노조 결성과 파업권, 최저임금제 등 노동자의 기본권을 인정하는 노동법 제정, 토지 개혁 등 다양한 정책을 수립했다. 그러나 아레발로 정부는 집권 기간 무려 스물두 번이나 쿠데타 위협을 받을 정도로 취약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이고 꼭 필요한 개혁들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후계자 아르벤스는 국방장관 출신으로 중도좌파연합을 이끌고 있었다. 1950년의 선거에서 대통령이 된 그는 전임 정권의 개혁 정책을 이어받아 언론·출판 및 결사의 자유를 보장했고 노동조합의 활동도 장려했다. 1952년에는 공산당 활동도 합법화해 공산당은 과테말라노동당이란 이름으로 합법 정당이 되었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전임 정권이 착수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농지개혁법을 1952년 과감히 단행했다.
우선 유나이티드프루트 등 다국적 대기업이 소유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휴경지를 그들이 신고한 금액대로 보상하여 매입하는 조건으로 몰수했다. 다국적 기업들은 세금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그동안 실제 금액보다 싼 금액으로 토지 가격을 신고해왔기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아르벤스 정권은 18개월 동안 약 150만 에이커의 토지를 몰수하여 10만 가구의 가난한 농민에게 분배했다. 손해를 보게 된 유나이티드프루트 등은 미국 정부에 대한 로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제10회 미주기구 회의에서 미국은 아르벤스 정권을 공산주의 정권으로 규정했다. 당시 아르벤스 정부는 다소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하긴 했지만 소련과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외교 관계도 맺지 않고 있었다.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전복 공작은 1952년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 작전을 승인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듬해 8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작전명을 '피비 석세스(PB Success)'로 변경하고 270만 달러의 특별 예산을 배정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장애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아르벤스 대통령의 측근 70여 명을 살해했다. 위기를 느낀 아르벤스 정권이 1954년 6월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민병대 창설용 무기를 폴란드에서 수입하려고 하자 과테말라 군부가 반발했다. 미국은 온두라스와 니카라과에 망명한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대령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1954년 6월 18일 오전 8시를 기해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480여 명의 쿠데타군이 온두라스 접경 지역을 넘어 과테말라를 침공했다. 당시 과테말라 정부군은 그들보다 열 배 이상 많았지만 미국의 공중지원을 받은 쿠데타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아르벤스는 우루과이, 멕시코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멕시코에서 끝내 사망했고, 아르마스 역시 집권 반년 만에 다른 우익 군부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후 집권한 우익 군부 세력들은 더욱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로 내전이 끝날 때까지 20만 명이 넘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 세계 최장기 내전인 과테말라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1961년에도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피그스 만 침공에 두 척의 배를 제공했지만 실패했다.
스쿨 오브 아메리카와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정보 조작
유나이티드프루트에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었다. 아니, 그들은 유나이티드프루트와 똑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53년에서 1961년까지 CIA 국장을 맡은 앨런 웰시 덜레스(Allen Welsh Dulles), 1953년에서 1959년까지 국무장관을 맡은 그의 형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등을 비롯해 미국의 정치외교 분야를 주무르는 고위급 인사 가운데에는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전 경영진이나 주주들이 많았다. 그렇지 않은 다른 고위 인사들 역시 법률자문회사의 형태로 유나이티드프루트와 모종의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머리는 이들 정치인뿐만 아니라 바나나를 즐겨 찾는 대중의 감정과 심리 또한 교묘히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1940년대부터 에드워드 버네이스와 계약을 맺어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도록 했다. 버네이스는 1920년대 말에 펴낸 책 『프로파간다』의 제1장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이룬다."
1995년, 10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담배 광고에 나선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는데, 그가 정말로 후회할 일은 유나이티드프루트를 위해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공산주의와 연계시킨 일련의 정보공작이어야 했다. 아르벤스 정권을 미국의 안정에 위협이 되는 공산주의 정치 세력으로 몰아가기 위해 그는 먼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 『하퍼스(Harper's)』 같은 유명 잡지에 과테말라의 상황에 대한 기사가 실리도록 유도했다. 또한 대중이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뉴욕타임스』로 하여금 유나이티드프루트에 대해 호의적이고 과테말라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인 기사를 쓰도록 부추겼다.
1952년 1월, 버네이스는 언론인들과 함께 과테말라를 여행했다. 언론인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실제 이들이 발견하고 지켜본 것은 모두 버네이스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통제한 것이었다. 이들은 여행에서 돌아와 과테말라 정부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기사를 썼다. 버네이스와 언론인들의 여행 경비는 모두 유나이티드프루트가 지불했다. 그러나 모든 기자가 그의 의도대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뉴욕타임스』 과테말라 특파원 시드니 그루존(Sydney Gruson)은 현실을 지켜본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현장에서 본 그대로 보도했다. 당시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프린스턴 대학 동창인 『뉴욕타임스』의 국장 줄리어스 오크스 애들러(Julius Ochs Adler)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루존은 멕시코시티로 전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군부독재를 끝내고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성취하려는 민중의 열망이 강해졌고,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실제로 민주화가 추진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 기간 중남미에서 좌파적 색채를 지닌 정권이 등장할까 경계한 미국은 비록 민주적 정당성이 없더라도 친미 반공이란 이유만으로 군부 쿠데타를 적극 지원했다. 그 중요 수단 가운데 하나가 라틴아메리카의 군부 엘리트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독재자 학교 또는 쿠데타 학교란 별명으로 많이 알려진 '스쿨 오브 아메리카'(School of America, SOA)각주9) 는 미국의 중남미 정책을 관철시키는 중요한 외교적·군사적 수단이었다. 미국 조지아 주 포트베닝에 있는 SOA에서 라틴아메리카의 군부 엘리트들은 군사훈련은 물론 정치 교육을 함께 받았고, 혁명에 대한 반혁명으로 시위 진압, 게릴라 전술과 요인 암살 교육 등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나마의 안토니오 노리에가(Manuel Antonio Noriega)와 오마르 토리호스(Omar Herrera Torrijos), 엘살바도르의 카를로스 로메로(Carlos Humberto Romero), 과테말라의 페르난도 루카스(Fernando Romeo Lucas García),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 움베르토 메히아(Óscar Humberto Mejía Víctores), 볼리비아의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Hugo Banzer Suárez), 아르헨티나의 로베르토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 온두라스의 로페스 아레야노(Oswaldo López Arellano), 판 메르가르(Juan Alberto Melgar Castro) 등 라틴아메리카의 악명 높은 군부 독재자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치키타브랜즈인터내셔널
시대가 변하면서 악취 풍기는 오명은 아무리 조작하고 은폐하려 해도 널리 퍼져나갔고, 유나이티드프루트는 기업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기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1950년대부터 유나이티드프루트는 대중에 좀 더 친근한 기업 이미지를 전하기 위해 '미스 치키타(Miss Chiquita)'라는 브랜드 캐릭터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1961년 새뮤얼 제머리가 사망한 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국제 질서가 변화한 까닭도 있지만 단종 재배와 유전적으로 단일 형질에 가까워진 바나나의 치명적인 질병 등 여러 요소가 맞물리면서 제국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었다.
1974년 유나이티드프루트의 텃밭이던 라틴아메리카의 바나나 생산국들이 자체적인 카르텔인 바나나수출국동맹(UPEB)를 출범시켰다. 유나이티드브랜즈는[유나이트드프루트는 1970년 정육회사 AMK코퍼레이션과 합병되어 유나이티드브랜즈가 되었다가 1989년 치키타브랜즈인터내셔널(Chiguita Brands International)로 이름을 바꿨다] 이 카르텔에서 온두라스를 빼내기 위해 125만 달러를 들여 군부를 매수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주가가 곤두박질쳤고 비윤리적 기업으로 지탄받는 등 커다란 곤욕을 치렀다. 활동하기 편했던 냉전 체제가 해체되어가던 1989년, 현재의 기업 이미지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유나이티드브랜즈는 기업명을 친근한 이미지의 '치키타브랜즈인터내셔널'로 변경했다.
오늘날 치키타와 델몬트, 돌은 세계 과일 무역을 좌지우지하는 거대 다국적 기업이지만 바나나, 파인애플, 사탕수수, 커피 등의 단종 재배, 과도한 농약 사용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이 생산자에게 적정한 이윤을 보장해주지 않고, 노조 지도자들에게 린치를 가하거나 암살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억압을 계속해왔다는 사실이다.
불공정한 무역 관행을 타파하고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 친환경 유기농 바나나 공정거래가 대안으로 주목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100억 달러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 유기농 시장에서 바나나는 아직 적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점점 더 많은 곳에서 공정무역에 의한 유기농 바나나가 생산되고 있다. 품질 경쟁에서 브랜드 경쟁으로 넘어가게 되자 단기 이익 극대화보다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기업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사회적 책임 국제연대(Social Accountability International, SAI)'의 새로운 국제적 기준에 부응하는 쪽으로 기업 운영 방식이 변화하고 있는 추세다.
뉴욕에 본부를 둔 SAI에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인터내셔널), 국제노동조합, 케어인터내셔널 등의 대표자들과 치키타, 돌, 아일린피셔, 쿱이탈리아 등의 대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있다. 이들은 '노동의 기본적 원칙과 권리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선언'과 같은 선언들에 제시된 노동자 권리에 중점을 둔 SA8000 인증제도를 도입했다. SA8000 인증을 얻으려면 독립기구의 감사를 통해 아홉 가지 영역에서 그 실태를 검증받아야 한다. SA8000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아동노동·강제노동 금지,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단체결성권과 집단교섭권, 인종·신분·국적·성별 등의 차별 철폐, 육체적 강압이나 언어 폭력 등에 의한 징계 금지, 법정 근로시간 준수, 관련 업계의 기준 및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기본적인 욕구에 충분한 수준의 임금 지급 등 이 인증을 획득 유지하기 위한 관리 체계와 운영 방식"에 대한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2005년 과일 무역 업계 최초로 SA8000 인증을 따낸 기업은 다름 아니라 치키타였다. 치키타는 라틴아메리카에 소유한 모든 농장과 1만 4,000명이 넘는 종업원과 3만 7,000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에 대해 SA8000 인증을 취득했다. 이제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조건을 바꾸기는 매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더군다나 비정규직 노동이 흔해져가는 시대에 정규직 노동자의 집합체인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일정하게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다. 생산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본주의로 전환되어가는 현실은 노동보다 소비가, 노동자보다 소비자가 더욱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치키타의 SA8000 인증 획득은 소비자의 윤리적인 소비가 친환경적인 생산과 좀 더 안정적인 노동 조건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이란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업 권력이 남긴 상흔과 중남미 과거사 청산
"죽은 이들의 부릅뜬 눈들은 정의가 다가온 후에야 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야 그 날이 올 것인가?"
과테말라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Miguel Angel Asturias)가 남긴 말이다. 전쟁의 세기였다는 20세기에 전쟁보다 더 많은 인명피해를 낸 것은 집단학살이었다. 이 때문에 숨진 사람은 1억 7,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30년 넘게 내전을 치러온 과테말라에서는 2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그 가운데 80퍼센트가량은 인디오 원주민이었다. 1985년 과테말라 최초로 문민 대통령 세레소 아레발로(Vinicio Cerezo Arevalo)가 취임했으나 군부가 더욱 강하게 반군 소탕에 나서면서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과의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고 그 결과 전 국토가 내전 현장이 되었다.
1991년 선출된 세라노(Jorge Serrano Elías) 대통령은 과테말라 민족화해위원회(CNR)를 만들어 URNG와 평화협상을 시작하지만 이것마저 군부의 반발로 실패하고 만다. 고통스러운 협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희생자가 계속 늘어났고, 1996년 1월 평화협정을 우선하는 정책을 공약한 아르수(Alvaro Arzu)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그해 12월 29일 마침내 영구 평화 정착에 합의했다. 1997년 5월, UN의 입회 아래 URNG에 대한 무장해제가 완료되었고, 과테말라 정부도 33퍼센트의 병력을 감축했다. 1996년 평화협상 중에 결성된 인권침해조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전체 민간인 학살의 97퍼센트 정도가 정부군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한다. 후안 호세 헤라르디(Juan José Gerardi Conedera) 주교의 주도로 만들어진 과테말라 천주교 대교구 인권위원회(ODHA)는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해 역사적 기억 회복 프로젝트(REMHI)각주10) 를 추진했다. 그러나 1998년, 모두 네 권으로 구성된 『인권침해조사보고서』가 발간된 지 이틀 만에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인 헤라르디 주교가 주교관 앞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1970년대 이래 유럽,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한국을 비롯해 대만, 필리핀, 네팔, 스리랑카 등) 전 세계적으로 50개 이상의 각종 과거사 청산 기구들이 활동해왔다. 이들 나라는 대개 내전이나 인종·민족 분쟁을 경험했거나 군부독재를 겪었다. 과테말라를 비롯한 이들 나라에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등 과거사 문제 청산위원회가 어려움에 처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해자였던 세력은 여전히 그 사회를 지배하는 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사를 규명할 만한 자료가 망실되거나 조직적으로 폐기되어 생존자와 가해자의 증언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테말라 역시 헤라르디 주교의 암살 이후 과거 가해자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증인이 살해되고 판사의 자택에 수류탄이 투척되고 가해자를 기소한 검사가 살해 압력에 시달리다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CIA와 유나이티드프루트가 공모한 과테말라 민주정부 전복 계획 피비 석세스(PB Success)는 말 그대로 대성공이었다. CIA는 쿠데타 성공 이후 아르벤스 정권이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고 조작했던 문건을 모두 없애버리라는 후속 계획 피비 히스토리(PB History)를 추진했고, 이후 그와 관련한 자료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 결과 유나이티드프루트와 미국이 중남미에서 벌인 경제적 수탈과 잔인한 폭력의 역사는 사라지고, 그 대신 〈바나나〉나 〈코만도〉 같은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바나나 공화국의 이미지만 남았다.
21세기 들어 치키타브랜즈인터내셔널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 변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독일 기업들처럼 과거사에 대한 참회나 사과, 적절한 보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최근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치키타브랜즈인터내셔널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미 정부와 함께 콜롬비아 테러조직에 은밀히 자금을 제공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콜롬비아 무장반군 세력 AUC(United Self-Defense Forces of Colombia)는 2001년 10월 미 국무부에서 해외 테러조직으로 지정된 바 있다. 1997년 이후 미국과 유럽에 17톤이 넘는 코카인을 밀수한 혐의와 2001년 적어도 1,015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혐의 등이 있어서다. 치키타브랜즈인터내셔널은 AUC에 170만 달러의 경비를 제공한 혐의로 2007년 3월 14일 유죄판결을 받아 1,500만 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바나나 공화국의 녹색 교황으로 군림해온 치키타브랜즈인터내셔널엔 과연 어떤 면죄부가 필요한 것일까.
자네들 신사 양반들은 그동안 충분히 오랫동안 사업을 말아먹었어.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로잡을 때야. - 새뮤얼 제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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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새뮤얼 제머리 –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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