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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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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세기를 넘어 장수한 기업을 연구한 윌리엄 오하라 교수는 미국에서 1890년에 상장한 회사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업은 GE밖에 없다며 한 기업이 수백 년을 버티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했다. 하지만 1802년 창립된 듀폰은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이 1955년부터 해마다 발표해온 세계 500대 기업 명단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듀폰이 이처럼 오랫동안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존재할 수 있던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며 변신을 거듭한 결과다. 그러나 듀폰이 화약, 화학섬유, 생명공학 등 주력 업종을 바꿔나가는 동안 지구 생태계와 환경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듀폰의 제품은 우리가 숨 쉬는 대기, 마시는 물, 성층권의 오존, 곡물 종자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영화 〈플러버(Flubber)〉(1997)는 1961년 디즈니의 가족 영화 〈건망증 교수(The Absent-Minded Professor)〉를 화려한 컴퓨터그래픽과 같은 특수효과를 동원해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은 1988년 TV 시리즈로도 제작될 만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였는데,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기본 줄거리는 흡사하다. 화학 교수 네드 브레이너드(로빈 윌리암스)는 결혼식까지 잊을 정도로 연구에 몰두하다가 우연한 폭발 사고로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튀어 오르는 고무 같은 물질을 발견한다. 그는 탄성이 엄청난 이 물질을 '하늘을 나는(Flying)'과 '고무(Rubber)'란 뜻의 합성어 플러버(Flubber)라 이름 짓는다. 플러버는 키 작은 농구선수가 슬램덩크를 할 수 있게, 또 낡아빠진 자동차가 하늘을 날 수 있게 만드는 신비한 물질이다. 이처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초월하는 물질은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플러버〉는 연금술사들이 꿈꾼 것처럼 화학이 지닌 놀라운 힘을 어린이들이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 속 플러버와 달리 오늘날 세계를 뒤덮은 화학물질 대부분은 우연한 폭발이나 사고가 아니라 무수한 실험과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결과로 발명되었지만, 인류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의 발명에는 약간의 우연이 필요했다. 1930년, 최초의 합성고무인 네오프렌(폴리클로로프렌)을 발명한 월리스 흄 커러더스(Wallace Hume Carothers)는 1935년에 세계적인 화학 기업 http://www2.dupont.com/Heritage/en_US/index.html)를 참조했다.">듀폰(Dupont)각주1) 의 기초과학 연구부장으로 근무하며 새로운 합성물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물질이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용도가 무엇인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가 잠시 실험실을 비운 사이 연구 조수 줄리언 힐(Julian Hill)이 실패한 실험에 쓰인 기구들을 치우느라 시험관 바닥에 붙은 이 물질의 찌꺼기를 유리막대로 긁어내려 했다. 그러자 유리막대 끝에 붙은 이상한 물질에서 마치 실크처럼 아름답고 가는 실이 끝없이 뽑혀져 나왔다. 이 발견이 없었더라면 나일론은 실험실 선반 위에서 영원히 잠들 뻔했다.
현대 석유화학의 역사를 써내려간 기업
아침이 되면 뉴크렐(Nucrel) 수지로 코팅된 튜브에서 치약을 짜고, 타이넥스(Tynex) 칫솔모로 만든 칫솔로 이를 닦고, 코리안(Corian) 인조대리석으로 만든 싱크대에서 테플론(Teflon)으로 코팅된 프라이팬에 듀폰의 대두 단백질이 포함된 소시지를 요리하고, 마일라(Mylar) 필름으로 포장된 슬라이스 치즈로 아침식사를 하고, 애필(Appeel) 재질로 만들어진 요거트 뚜껑을 열어 건강 디저트를 즐긴다. 식사 후에는 쿨맥스(Coolmax)와 탁텔(Tactel) 소재로 만든 속옷을 입고, 라이크라(Lycra)와 코듀라(Cordura)로 만든 셔츠와 바지를 걸친다. 밤이 되면 듀폰의 폴리에스터(Quallofil) 솜으로 충전된 베개와 이불에서 잠든다.
여기서 언급한 것은 듀폰이 생산한 제품의 극히 일부다. 듀폰의 제품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숨 쉬는 대기, 마시는 물, 저 멀리 성층권의 오존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듀폰은 전 세계에 1만 4,000개 이상의 특허를 출원했고 2만 개 이상의 특허를 소유한 기업으로 2001년에만 1,800개 이상의 국제 특허를 획득했다. 듀폰이 생산한 제품 및 서비스와 관련한 고유 상표만 2,100여 개에 이르며 세계적으로 2만 3,000개 이상의 제품이 듀폰의 등록 상표를 사용해야만 생산 가능하다. 이 가운데 특히 잘 알려진 브랜드를 꼽자면 프라이팬 코팅제로 널리 쓰이는 테플론, 스판덱스라 통칭하는 라이크라, 방탄복 소재로 잘 알려진 케블라(Kevlar), 방염 소재인 노멕스(Nomex), 싱크대와 샤워 부스 등에 많이 쓰이는 인조대리석, 카펫을 만드는 스테인마스터(Stainmaster) 등 수없이 많은 제품이 우리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상품의 기초 소재가 되고 있다.http://www2.dupont.com/Korea_Country_Site/ko_KR/consumer/index.html)">각주2)
듀폰은 유전자 조작 종자 기업의 하나인 파이어니어하이브레드(Pioneer Hi-Bred International)를 인수하고 몬산토, 신젠타, 다우케미컬 등과 함께 세계 4대 종자기업 가운데 하나로 변모하여 사업 영역을 화학공업에서 생명과학 분야로까지 넓혀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곡물 메이저 번지(Bunge)와 합작으로 설립한 쏠레(Solae)를 통해 각종 식품 생산의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인 대두 단백질http://www.solae.com)">각주3) 을 생산하고 있다.
듀폰은 1802년 미국 델라웨어 주 윌밍턴에서 창립된 이래 현재까지 세계적인 기업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 200년에 걸친 듀폰의 역사는 현대 석유화학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환경 파괴의 역사이기도 하다. 21세기 들어 주력 사업이던 섬유 분야를 매각하면서 종합과학회사로의 변신을 추구하는 듀폰의 미래는 단순히 한 기업의 미래가 아니라 인류의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미래이기도 하다.
죽음의 상인으로 시작한 듀폰
듀폰의 창업자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Éleuthère Irénée du Pont, 1771~1834)은 파리의 시계 제조업자이자 중농주의 경제학자였던 피에르 사뮈엘 뒤퐁(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 1739~1817)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피에르는 루이 16세 시절 재정총감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에게 발탁되어 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을 이끌었지만 봉건귀족 세력의 반발로 해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해임된 뒤 장원을 마련해 한가로운 은퇴생활을 하던 그에게 루이 16세는 프랑스가 후원한 미국의 독립을 영국이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파리조약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공로로 귀족 칭호를 받은 피에르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 미국 정치 지도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엘뢰테르는 14세 때 이미 화약 제조에 관한 논문을 쓸 만큼 화학과 식물학에 조예가 깊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시 가장 유명한 화학자인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의 제자 겸 동료로 일하며 폭발물 제조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뒤퐁 부자가 운영하던 인쇄소가 폭도들에게 약탈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 생명의 위협을 받자 뒤퐁 일가는 투자 명목으로 자금을 모아 미국 망명길에 나섰다.
갖은 고생 끝에 신천지에 도착했지만 뒤퐁 일가는 주변의 충고를 무시한 채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손실을 메워야 하는 엘뢰테르는 자신의 화약제조 기술이 돈을 버는 데 쓸모 있단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미국은 기술 수준이 매우 낮아서 품질이 조악한 저급 화약밖에 생산할 수 없었고 영국제 화약은 너무 고가였기 때문에 수요는 충분했다. 그는 1801년 프랑스로 돌아가 새로운 투자자들에게 추가 자금을 끌어들여 최신 화약 제조 장비를 구입했다. 1802년 7월 19일, 그는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브랜디와인 강변에 처음으로 화약 공장을 열었고,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제퍼슨이 듀폰의 흑색화약을 육군과 해군에 납품하도록 힘써준 덕분에 1811년 무렵엔 미국 최대 규모의 화약제조 업체가 될 수 있었다. 화약 산업은 승승장구했지만 잇따르는 폭발 사고 때문에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고, 사업 규모를 수익 규모보다 더 크게 확장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채무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채무에 시달리던 엘뢰테르는 1834년 사업차 필라델피아에 갔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엘뢰테르의 사망 이후 듀폰은 유진 뒤퐁(Eugene du Pont, 1840~1902)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라모 뒤퐁(Lammot du Pont, 1831~1884)과 헨리 뒤퐁(Henry A. du Pont, 1838~1926)으로 이어졌다. 특히 라모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과학자로, 남북전쟁 기간 칠레에서 300만 파운드의 초석을 구입하는 등 정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이 무렵 듀폰은 매우 든든한 동업자를 만나게 되는데 앞으로 미국 금융계의 마왕으로 성장하게 될 J.P.모건이었다. 1861년 남북전쟁 무렵 이미 미국 최대 화약 기업으로 성장한 듀폰은 모건과 손잡고 북군에 화약을 납품하는 '모건 캠프'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비싸게 납품한 군수품은 품질이 매우 조악해서 병사들은 끊임없이 격발 사고에 시달렸고 군화는 지급받은 지 반나절도 안 되어 밑창이 떨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장관이 해임되고 의회의 진상조사가 실시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다. 전쟁으로 큰 이득을 보았지만 J.P.모건과 듀폰은 악덕 상인이자 죽음의 상인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받았음에도 두 회사는 남북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까지도 군수물자를 생산해 미군에 납품했고 제너럴모터스를 공동으로 지배하기도 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군산복합체는 남북전쟁 때 듀폰과 J.P.모건에 의해 시작되었다.
화약 기업에서 화학 기업으로 변신하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장기 불황에 접어들었다. 듀폰은 경쟁 업체들을 공격적으로 합병해 경영권을 장악하고 듀폰을 중심으로 한 기업연합(cartel) 체제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한다. 라모 뒤퐁은 1872년 화약의 가격과 생산을 통제하는 화약거래협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듀폰은 업체 간 경쟁을 배제하고 생산과 판매의 합리화를 이룩하며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을 갖췄고 연방정부 군용 화약의 공급을 독점하게 되었다. 라모는 1870년대 다이너마이트의 주요 생산 업체였던 캘리포니아화약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면서 듀폰의 사업을 화학 분야까지 넓히도록 이끌었지만, 1884년 폭발 사고 때문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얼마 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으로 뛰어난 경영 능력과 폭넓은 인맥을 지녔던 헨리 뒤퐁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듀폰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창립 100년 만에 가족 경영 체제를 지탱하던 인물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뒤퐁 가문은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사회의 결정에 반발한 세 젊은이 앨프리드(Alfred I. du Pont, 1864~1935), 콜먼(T. Coleman du Pont, 1863~1930), 피에르(Pierre S. du Pont, 1870~1954)가 자신들이 듀폰을 매입해서 경영하겠다고 나섰다. 사촌지간인 세 사람은 나이 든 친척들의 동의를 구해 듀폰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투자자들에게 주식으로 대금을 지급했다. 이 가운데 피에르는 라모 뒤퐁의 아들로 1890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화학을 전공한 뒤 듀폰 계열 철강회사에서 경영자로 일했다. 그는 나이 많은 친척들의 보수적인 경영 방침에 실망해 1899년 철강회사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위기에 빠진 듀폰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나섰다.
그가 듀폰을 중흥의 길로 이끈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우선 재정 부문 담당자로서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을 현대적인 경영 시스템에 맞도록 탈바꿈시켰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조직화된 직급 운용 체계를 도입하고 정교한 회계 시스템과 시장 예측 기법을 개발했다. 특히 폭발물 분야에 치중된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 연구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듀폰이 20세기 세계 최대의 화학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1902년 주식회사로 전환할 무렵 듀폰은 미국 화약 시장의 36퍼센트, 미국 폭발물 생산량의 56퍼센트를 차지했고, 뒤퐁 일가는 듀폰 지분의 75퍼센트를 소유했다.
여러 군소 업체를 합병하면서 독점기업으로 성장한 듀폰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반독점 정책에 따라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고소당하면서 군납 계약이 취소되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또 대부분의 군수업체가 그러하듯 전시에는 특수를 누렸지만 전쟁이 끝나면 위기를 맞는 패턴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피에르는 사업 분야를 다각화하지 않고서는 같은 위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약 생산 시설을 축소하고 그 시설을 다른 용도로 전환할 방법을 궁리했다. 전시에는 전쟁 물자를 생산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일상용품을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기만 한다면 듀폰은 계속해서 이익을 낼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화약 제조 기술을 응용하거나 그 생산 설비를 이용한 제품이어야만 했다.
당시 화약 원료인 니트로셀룰로스를 기초로 응용할 수 있는 제품은 인조피혁, 인조견사, 피록실린(셀룰로이드) 같은 것이었는데, 인조견사 분야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특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듀폰은 우선 인조피혁과 피록실린 분야에 진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잠시 미뤄지게 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1914년에 840만 파운드의 화약을 생산해낸 듀폰은 이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17년에는 4억 5,500파운드를 생산했고 5,300명이던 종업원 수도 8만 5,000명으로 급팽창했다. 전쟁은 위기에 빠진 듀폰에 기회를, 그것도 아주 큰 기회를 안겨주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춧돌이 된 듀폰
엘뢰테르부터 라모, 피에르에 이르기까지 듀폰을 이끈 경영진들은 모두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화학을 연구한 사람들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의 화학공업을 실질적으로 이끈 나라는 독일이었다. 산업혁명을 뒤늦게 겪은 독일은 19세기 중반부터 화학이 지닌 산업적 가치를 인식하고 대학을 중심으로 화학 연구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890년경엔 바이엘(Bayer), 훼히스트(Hoechst), 바스프(BASF), 아그파(Agfa) 등이 화학공업을 선도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경쟁적으로 대학의 연구기관과 관계를 맺거나 기업 내부에 별도의 연구기관(산업체 연구소)을 설치하면서 산업발전에 과학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려고 했다. 이들은 1925년 화학공업 카르텔인 이게파르벤(IG Farben)으로 성장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 측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화학 기업이었다. 염료, 비료, 의약품(아스피린 등), 필름, 합성고무, 인조석유 등의 제품을 생산하며 세계 화학공업을 선도했으나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는 이유로 죽음의 상인이라는 비난도 함께 받았다.
이 무렵 정부나 기업이 과학자들의 연구에 기대한 것은 곧바로 생산에 응용할 실용적인 기술이었지만, 산업체 연구소에 종사한 과학자의 연구가 실용적인 분야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처음엔 산업 분야에 적용하기 어렵던 기술도 시간이 흘러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면서 국가권력과 자본은 과학이 지닌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가 축적되지 않고서는 응용과학이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기초과학 연구에 매진하던 과학자들은 많은 자금이 투자된 자신들의 연구가 실제 산업 분야에서 응용 가능하단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이때부터 과학기술은 자본과 국가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중소기업에 불과하던 듀폰은 전쟁 기간 연합군이 사용한 탄약의 40퍼센트를 공급하면서 4년이 흘러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화학 기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 화학산업을 지배하던 독일이 영국 해군의 대륙 봉쇄에 막혀 수출 시장을 상실하자, 듀폰을 비롯한 미국의 화학 회사들이 해외 시장을 차지했고, 전쟁배상금을 대신해 독일의 특허와 기술도 확보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듀폰의 연간 수입은 1913년보다 스물여섯 배나 증가해 있었다.
종전 후 듀폰은 과거 경험에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다. 여전히 화약을 생산했지만 군수산업의 규모를 원래 수준으로 되돌리는 대신 염료를 비롯한 다양한 화학 제품을 생산했다. 1902년부터 1914년까지 듀폰을 이끈 피에르 S. 뒤퐁은 연합국에 군수물자를 판매하는 대신 대금을 선지급받았는데, 이 때문에 부당한 이득을 거둔다고 또다시 비판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축적한 막대한 자본 덕분에 듀폰은 전후 여러 분야의 화학 회사를 인수해 자회사로 만들어 셀룰로이드 플라스틱, 페인트 화학, 레이온 섬유, 셀로판 필름, 합성 암모니아 등을 생산하는 종합화학 기업이 되었다.
듀폰은 J.P.모건과 함께 제너럴모터스에 투자해 GM 주식의 3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1920년 제너럴모터스가 파산 위기에 몰리자 피에르는 GM 경영진에 합류하기 위해 듀폰을 떠나야만 했다. 그는 앨프리드 슬론(Alfred Pritchard Sloan)과 함께 제너럴모터스를 경영하면서 듀폰의 경영 비법을 응용해 시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경영 체계와 다양한 모델의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제공했다. GM은 듀폰이 생산하는 여러 화학제품과 합성소재를 자동차 내외장재에 이용했는데, 특히 포드자동차가 검은색 T형 모델만을 고집하는 동안 듀폰이 개발한 니트로셀룰로스 도료각주4) 를 이용해 다양한 색상의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피에르가 물러나던 1928년, 제너럴모터스는 드디어 포드자동차를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가 되었다. 1962년 반독점법에 따라 미국 정부에 의해 강제로 지배주주에서 물러날 때까지 듀폰은 40여 년 동안 이 자동차 메이커를 실질적으로 경영했다. GM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피에르는 1940년까지 듀폰의 이사회 의장으로 재직했다.
전쟁 때마다 부당한 이득을 거두어들였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듀폰은 대외적인 이미지만큼은 전쟁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또다시 45억 파운드의 폭발물을 생산했고, 미국의 전쟁 수행을 위해 화학무기는 물론 플라스틱 형태의 폭발물과 총기, 로켓추진발사화약 등을 개발하는 데 참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듀폰이 참여한 가장 거대한 프로젝트는 인류 최초의 핵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였다.
듀폰은 1942년 가을부터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핵폭탄 개발에 필수적인 플루토늄 생산 기술과 자금을 협조했다. 워싱턴 주 컬럼비아 강변에 있는 핸퍼드에 화학반응로, 분리공장, 원료설비, 가옥, 도로 등을 새로 건설하는 데 2,500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고작 1달러의 대금만 청구했고, 그 과정에서 취득한 모든 기술에 대해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1944년 말, 맨해튼 프로젝트가 끝나 플루토늄의 생산과 재처리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아무 문제 없이 작동하게 되자 미국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전쟁이 끝나자 듀폰은 아무 조건 없이 핸퍼드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애국심을 과시했지만, 전쟁 기간에 미 정부 산하의 공장 스물다섯 개를 관리했고 전쟁을 통해 1억 9,600만 달러가 넘는 이득을 남겼다.
최초의 합성섬유를 발명한 커러더스의 갈등
나일론은 오늘날 나이롱환자같이 무언가 남을 속이거나 싸구려의 좋지 않은 것을 뜻하는 부정적인 느낌의 속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1939년 뉴욕세계박람회는 '놀라운 합성섬유(synthetic wonder fiber)'인 나일론으로 만든 양말을 신은 매혹적인 여러 명의 모델이 있는 듀폰(Dupont) 전시관을 특색으로 삼았다. 여성들은 처음 소개되는 이 나일론 스타킹을 구매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고, 1.15~1.35달러로 판매된 스타킹은 한 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나일론 스타킹의 인기는 감소하지 않았으나 그 공급은 일시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일론 섬유의 수요가 공급을 소진시켜 나일론 스타킹은 값비싼 상품이 되었다. 나일론은 전쟁을 위한 낙하산, 텐트, 타이어, 밧줄 생산에 대부분 사용되었다. 스타킹을 신고 싶어 못 견디는 몇몇 여성들은 다리에 메이크업을 하고 아이라이너 펜슬로 다리 뒤에 세로선을 그렸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전쟁 동안의 한 조사연구는 전시 후에 여성들이 얻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나일론 스타킹이며, 그다음이 남성이라고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일론 스타킹이 일반에 처음 시판되던 1940년 5월, 상점 앞에는 무려 3만 명의 여성이 이 스타킹을 구하려 줄을 섰고 구입하는 데 성공한 여성은 감격스러워하며 길거리에서 스타킹을 신었다. 이처럼 대단한 인기를 누리다 보니 사람들은 나일론이란 명칭에 무언가 숨은 뜻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나일론(Nylon)이 뉴욕과 런던의 앞머리 글자를 딴 거라 추측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일론을 발명한 커러더스의 비극적인 최후를 연상해 허무(Nihil)에서 따온 거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일론이란 명칭은 커러더스가 1937년 4월 29일,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한 뒤에야 정해진 것이고, 그는 생전에 이 물질을 나일론이라 부르지 않았다. 많은 이가 나일론의 의미를 궁금해하자 듀폰은 1940년대에 아무 뜻도 없는 이름이라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것이 커러더스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1927년 듀폰의 중앙연구소 화학부서 책임자이자 화학자였던 찰스 스타인(Charles Stine)은 연구 조직을 쇄신하고 다양한 사업 분야에 확고한 과학적 기초를 세워줄 장기적 차원의 기초연구 조직을 설립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때까지 미국에서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것은 대학의 전유물이었기에 스타인이 순수기초연구를 표방하며 함께 연구할 학자들을 대학에서 찾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음에도 학자들은 기업체 연구소에서 일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자 스타인은 전술을 바꿔 이미 명성을 얻은 연구자 대신 과학적 재능이 있지만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젊은 과학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포착된 사람이 하버드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며 유기화학을 연구하던 월리스 커러더스였다. 당시 커러더스는 불과 31세의 젊은 과학자였지만, 유기화학 분야에서 여덟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과학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여기엔 매우 혁신적인 중합체(polymer)각주5) 에 대한 논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타인의 제안을 받은 커러더스는 듀폰의 실험실을 방문해 정말 기초과학 분야에 투자할 의사가 있는지 자신의 연구에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보장해줄 것인지 탐문했다. 그는 거듭해서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한 연구엔 관심이 없고 과학지식을 증대시키기 위한 순수한 연구에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과학연구의 순수성을 보장받고자 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스타인이 여러 차례 다짐을 거듭했지만, 커러더스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결국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과학자로서 연구하고 자신의 연구결과물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권리가 기업에 의해 침해받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스타인은 그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고 연구소 부책임자에게 승낙을 받기 전까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며 커러더스를 강력히 설득하게 했다. 듀폰이 커러더스에게 그토록 집착한 까닭은 그의 중합체 이론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듀폰이 원하던 주력 상품, 바로 합성섬유였기 때문이다.
듀폰의 판단은 옳았다. 자동차 산업이 한창 붐을 일으키던 당시 미국은 전 세계 천연고무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소비했는데, 이 수요가 이따금 천연고무의 공급을 초과하면서 천연고무 가격은 점점 상승했다. 듀폰을 비롯한 수많은 화학 기업이 천연고무를 대체할 합성고무를 개발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커러더스 역시 합성고무에 약간 관심이 있었지만 그 관심은 상업적인 게 아니라 과학적인 것이었다. 그는 천연고무를 복잡한 중합체 물질 중에서 비교적 간단한 조직이라 여겼고, 네오프렌을 발명했음에도 그것이 과학적으로 새로운 화학적 원리나 기술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물질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중요한 업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1930년 합성고무인 네오프렌을 발명한 커러더스는 1935년 인류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을 발명했고, 듀폰은 그의 연구가 다져놓은 기초 덕분에 나일론을 비롯해 수많은 합성수지 제품을 계속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커러더스 덕분에 스타인이 승진하고 엘머 K. 볼튼(Elmer K. Bolton)이 후임으로 연구소 책임자가 되었다. 볼튼은 기초연구에 특권을 준 스타인과 정반대 인물로, 처음부터 기초과학 연구에 반대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업의 연구는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일론을 발명한 커러더스는 나일론 연구에 대한 흥미를 잃고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볼튼은 그에게 나일론과 합성섬유에 대해 계속 연구하도록 강요했다. 마지못해 지시를 따른 커러더스는 틈틈이 합성섬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준비했지만, 듀폰은 특허 신청이 완료될 때까지 발표를 가로막았다. 커러더스는 애초 계약과 다르다며 항의하다가 결국 1년 후에 발표하기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본디 고지식하고 섬세한 성격이었던 커러더스는 점점 알코올에 의존하게 되었고 우울증이 심각해졌다. 그러나 그가 연구에 대해 흥미를 잃고 회사 지시에 따라 이런저런 연구 프로젝트를 오가는 동안 듀폰은 그에게 더욱더 상업적인 연구에 매달리도록 강요했다. 나일론의 제품화가 결정되면서 나일론에 대한 연구는 과학적인 부분에서 산업적인 부분으로 완전히 전환되었고, 커러더스의 기초과학 연구 부서는 나일론 개발 부서가 되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커러더스는 결국 1937년 4월 28일,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평소 지니고 다니던 청산가리를 레몬주스에 타서 마시고 다음 날 숨진다.
유력한 노벨상 후보였던 커러더스는 듀폰에서 일하던 9년 동안 60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69건에 이르는 특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순수과학자로 살고 싶었던 그의 의지와 달리 기업은 그에게 상업 제품의 발명을 강요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에 흩어진 산하의 기업과 연구소에 4,000명이 넘는 과학자가 일하고 있으며 수만 건의 특허를 자랑하는 듀폰이지만 정작 듀폰 출신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1987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찰스 피더슨(Charles John Pedersen) 한 명뿐이다.
화학공업의 위기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퐁 가문
제2차 세계대전 때 핵 개발에 참여하면서 듀폰 경영진은 두 가지 의미에서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다. 첫 번째는 그동안 가장 큰 경쟁자였던 독일의 이게파르벤이 패전과 더불어 해체되면서 독일의 첨단 기술과 인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핵 개발에 참여하면서 확보한 기초과학 기술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한다면 계속해서 '새로운 나일론'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듀폰에는 거대 규모의 연구개발을 통해 기업을 성장시킨다는 특유의 모험적인 기업문화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듀폰은 전후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벤처(New Venture)' 정책을 추진하면서 막대한 연구비를 지출했고 설비 시설을 대규모로 확충해 대량생산을 시도했다. 실제로 이 기간에 무려 2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연구개발 비용을 지출하며 다용도 플라스틱 필름인 마일라를 비롯해 40여 종의 새로운 생산품을 개발했지만 1960년대까지 이익을 안겨준 제품들은 1930~1940년대 개발된 것이었다. 새로운 나일론들은 끊임없이 개발되었지만 생산 과정에서 지출된 비용이 너무 과도했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새로운 나일론 제품들이 석유 가격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듀폰은 섬유산업의 과잉생산과 석유파동 등으로 성장이 지체되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매출의 25퍼센트를 합성섬유 분야가 차지하기 때문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170여 년간 가족 중심 경영 체제를 유지해온 뒤퐁 가문은 현재 시스템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해 1971년 라모 뒤퐁 코플랜드(Lammot du Pont Copeland)가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뒤퐁 가문이 물러나고 전문 경영자들이 경영을 책임지면서 듀폰은 가혹한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8개 사업 부문을 6개로 통합하면서 전 세계에서 3만여 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듀폰 그룹을 실질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여전히 뒤퐁 가문이었고, 듀폰의 이사회에는 반드시 한두 명 이상의 뒤퐁 가문 사람이 이사로 선임되었다.
미국 속담에 '3대만 가면 다시 빈손(Shirtsleeves to shirtsleeves in three generation)'이란 말이 있는데 우리 식으로 하면 '부자가 3대를 못 넘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미국 최고의 부자 리스트인 포브스 400(Forbes 400)에 따르면 뒤퐁 가문이 소유한 총재산 규모는 건국 이래 미국을 지배해온 12개 대부호 가문인 뒤퐁, 듀크, 필드, 포드, 프리크, 게티, 해리먼, 허스트, 헌트, 멜런, 록펠러, 휘트니 가운데 150억 달러로 1위를 차지했다. 포브스 400 리스트는 가문이 아니라 개인의 순위를 매기기 때문에 현재는 뒤퐁 가문 사람들의 이름이 빠졌지만 1982년까지만 하더라도 뒤퐁 가문 사람이 2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각주6) 포브스 400에 뒤퐁 일가의 이름이 빠진 것은 듀폰의 사업 실적이 나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뒤퐁 가문 후손들이 늘어나 유산을 분배하다 보니 개인이 소유한 재산 규모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뒤퐁 일가는 듀폰 그룹의 실질적 소유주로 듀폰 지분의 15퍼센트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듀폰이 위기에 빠지고 뒤퐁 가문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합성섬유 산업의 위기에서 비롯된 수익성 악화 때문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오래전부터 듀폰 스스로 뿌려놓은 파괴의 씨앗들이 무섭게 싹을 틔웠기 때문이다.
『침묵의 봄』과 듀폰의 녹색 세탁
1960년대 살충제는 미국을 뒤흔드는 이슈가 되었다. 살충제 때문에 봄이 와도 새를 보지 못하리라는 '침묵의 봄'에 대한 우려는 점차 환경오염과 사회정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어갔고, 그동안 거의 아무런 규제 없이 생산되던 각종 화학 제품과 기업의 각종 화학 폐기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져갔다. 이 시기 듀폰은 한발 물러나 침묵으로 응수했으나, 1974년 6월 MIT와 캘리포니아 대학의 화학자 몰리나(Mario Molina)와 롤런드(F. Sherwood Rowland)각주7) 가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 결과로 더는 침묵하지 못하게 되었다.
두 사람에 따르면 듀폰이 개발해 냉장고나 에어컨의 냉매 또는 스프레이 제품의 충전제로 사용해온 프레온가스, 이른바 염화플루오린화탄소(CFCs)가 지구의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1993년까지 듀폰이 생산한 CFCs는 미국 시장의 50퍼센트, 세계 시장의 25퍼센트에 해당했다. 듀폰은 만약 CFCs가 오존 파괴와 관련이 있다면 해당 제품의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공약했지만, 대외적으로 표방한 것과 달리 이면에선 연구 결과를 축소하고 CFCs 규제 정책 추진을 막기 위한 정치 로비를 했다. 한편으론 대체 물질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도 투자했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CFCs 사용에 대한 국제 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2000년까지 생산을 중단하기로 약속하면서 대체제로 수소염화불화탄소(HCFCs)와 수소불화탄소(HFCs)를 내놓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 물질들은 몬트리올의정서나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규제 물질이 아니었지만, 안전한 대체 물질이라던 HCFCs와 HFCs 역시 CFCs 못지않게 오존을 파괴하는 위험한 온실가스임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듀폰은 2030년까지 계속해서 HCFCs를 생산할 계획이다.
오존층을 파괴하는 주범은 바로 프레온가스. 프레온가스의 염소 원자 하나가 무려 10만 개의 오존 분자를 파괴하며 일단 성층권까지 올라간 프레온가스는 오존층을 파괴하면서 최고 300년까지 머무를 수 있다. 프레온가스는 1929년에 미국의 '듀폰'사가 발견하였고 '제너럴모터스'에서 냉장고를 차갑게 하는 냉매제로 개발되어 엄청난 양이 쓰였다. 프레온가스는 냄새도 독성도 없으며 불에 타지도 않는 물질로 냉장고나 에어컨의 냉매, 스티로폼 발포제, 드라이크리닝 용제, 반도체나 정밀부품의 세척제, 스프레이와 같은 분사제로 다양하게 이용된다. 남극 상공에 생긴 오존층의 구멍을 메우려면 적어도 2000년대까지는 프레온가스 생산을 완전히 중단해야 하는데 그렇더라도 2050년경에야 구멍이 복구될 것이라 한다.
1962년 6월 16일, 『뉴요커(The New Yorker)』지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쓴 『침묵의 봄(Silent Spring)』(1962) 요약판이 게재되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환경문제의 심각성과 무분별한 화학제품 사용이 지닌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해 시민사회와 과학자들의 찬사가 쏟아졌는가 하면, 반대로 미국 농무부 관료들을 비롯해 화학 기업들은 카슨의 주장이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며 과학에 대한 몰이해와 지나치게 낭만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한 여성의 정신 나간 이야기로 몰아붙였다. 어떤 화학 기업은 만약 카슨의 책이 그대로 출판된다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는 편지를 출판사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책은 예정대로 출판되었고 출판되자마자 60만 부가 팔리면서 '이 책이 출간된 날이 바로 현대 환경운동이 시작된 날'이라 평가받을 만큼 이후 펼쳐지게 될 환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듀폰은 창립 초기부터 이어진 '죽음의 상인'이라는 오명을 의식했기 때문에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그만큼 조직화된 언론 홍보 전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른 기업들이 언론 홍보의 중요성을 미처 깨닫기도 전인 1916년 이미 전문적인 광고 부서를 설치하고, 『필라델피아 퍼블릭 레더(Philadelphia Public Ledger)』의 사회부장 찰스 K. 웨스턴(Charles K. Weston)을 언론 홍보 책임자로 고용했다. 그는 언론인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하면서 듀폰 임직원들이 언론과 접촉하는 표준화된 과정을 만들어냈다. 웨스턴의 표준화된 언론 접촉 지침과 필터링 작업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한 듀폰은 광고부를 홍보부로 확대 개편하면서 『포천』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 등에 우호적인 연재 기사들이 실리도록 했다. 언론인 출신 인사를 홍보실에 채용하는 관행을 처음 도입한 기업도 듀폰이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듀폰은 2002년 『포천』이 조사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설문에서 가장 존경받는 화학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듀폰의 회전문은 언론인뿐만 아니라 특히 전직 관료에게도 재취업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는데, 듀폰이 이처럼 전직 관료와 언론인 채용에 적극적으로 나선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1920년대 듀폰은 제너럴모터스와함께 납이 포함된 휘발유를 개발했는데, 이 제품을 광고하면서 '명백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불렀다. 듀폰은 납 대신 '에틸(tetraethyl lead)'이라는 명칭을 썼는데, 이 제품은 자동차 엔진을 좀 더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해주는 제품으로 흔히 '유연휘발유'라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듀폰의 광고와 달리 이 제품은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20세기의 최대 실수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다. 유연휘발유에 포함된 납 성분은 납에서 비롯된 환경오염 가운데 80~90퍼센트를 차지했는데, 휘발유가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납 성분은 어린이의 정신지체, 성인의 고혈압, 심장마비, 뇌졸중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80퍼센트가 심각한 납 중독에 노출되어 치명적인 질병을 앓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듀폰은 1992년까지 멕시코 등지에서 납이 포함된 휘발유를 계속 생산했고, 이 같은 사실을 발표한 과학자를 공산주의자라며 공격했다. 듀폰의 터무니없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과학자는 1948년에서 1964년까지 미국 국립암연구소 환경발암 부서의 수장으로 근무했다.
때때로 듀폰의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했는데, 1987년 뉴저지 대법원은 듀폰이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앓는 석면 관련 질병의 증거를 고의적으로 조작했다고 판결했다. 또한 듀폰은 대외적인 친환경 이미지와 달리 각종 화학 폐기물을 무책임하게 처리한 전력도 있다. 1990년 델라웨어 주 뉴포트에 있던 듀폰의 폐기물 매립지 지하수가 중금속인 카드뮴과 아연, 바륨뿐 아니라 테트라클로로에틸렌(CCl2)과 트리클로로에틸렌(TCE)에 오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오염으로 13만 명의 식수가 위협받았고 1998년 미국 환경보호청은 듀폰에 6,500만 달러를 들여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의 네코파크(Necco Park) 매립지를 원상회복하라고 명령했다. 『침묵의 봄』 이후 점차 강력해지는 환경 관련 법률의 규제를 피해 듀폰은 다른 화학 기업들과 함께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인도, 푸에르토리코, 브라질, 중국, 아르헨티나 같은 개발도상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겨야만 했다.
2001년 4월 19일, 듀폰은 지난 33년간 판매해온 곰팡이 제제인 벤레이트각주8) 의 판매를 앞으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제품으로 인한 민사소송 비용이 지난 10년간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기 때문에 이 제품을 방어하기 위해 드는 법적인 비용이 너무 막대하다는 것이었다. 벤레이트는 가장 잘 팔리는 농약 가운데 하나였으며 영국에서 1997년 사용이 중지되기 전까지 수만 에이커의 농지에서 매년 사용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많은 양을 사용하면 선천성 기형의 비율이 높아지는 점이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은 눈이 형성되는 임신 초기에 불과 며칠이라도 벤레이트 분무제의 주성분인 베노밀에 노출되면 보통 눈보다 작은 소안구증이나 눈이 완전히 없거나 눈꺼풀이 열리지 않는 안구결여증을 유발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미국 환경보호청은 1970년대에 실시한 동물 실험을 근거로 벤레이트 분무제에 '임신 기간에는 접촉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넣도록 했고, 캘리포니아 대학도 1991년 벤레이트의 위험성을 시사하는 연구 결과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연구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듀폰의 반발로 위험을 경고하는 문구는 사라졌다. 한동안 잠잠하던 이 문제는 1990년대 플로리다 주의 재판에서 듀폰이 패소해 400만 달러를 지급하면서 다시 부각되었다. 듀폰은 패소한 적이 있음에도 벤레이트와 선천성 기형의 관계가 아직 과학자들에 의해 확립된 적이 없다고 계속 부인하고 있다. 미국 환경단체인 공익조사그룹(US Public Interest Research Group)은 1999년 듀폰을 미국에서 가장 큰 다섯 개의 환경오염 회사, 이른바 더티 파이브(Dirty Five)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듀폰은 자신들이 화학제품을 제조·판매하는 기업이란 사실을 대중이 망각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더 나은 화합물을'이라고 광고하던 슬로건 역시 이제는 '기적을 만드는 과학'으로 바꾸었다. 듀폰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펼치는데, 실질적인 변화 없이 광고와 홍보 위주로 펼쳐지는 이 같은 정책을 일컬어 환경 전문가들은 '녹색 세탁(Green Wash)'이라 부른다. 듀폰은 비영리단체인 야생동물서식지협회의 회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야생동물의 보호지를 관리하는데, 이 단체의 다른 회원 기업으로는 몬산토, 노바티스와 다우케미컬 등이 있다. 이들 기업은 다양한 홍보 캠페인을 통해 사회적·환경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명성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자본에 의한 과학의 지배다. 198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로알드 호프만(Roald Hoffmann)은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The Same and Not The Same)』(1997)에서 서독에서 무려 1만 명이 넘는 기형아가 태어나게 한 탈리도마이드 약물 사건을 지적하며 과학자들의 책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창조물이 어떻게 이용되고 오용되는가에 대해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새로운 물질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과 오용의 가능성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은 대중의 이해관계보다 기업의 이익에 더욱 충실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후 공공자금의 대학 지원, 공공 영역을 통한 연구비 조달이 줄어드는 가운데 기업에 의한 대학과 연구기관에 대한 지원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듀폰은 포름알데히드연구소를 비롯해 하버드리스크분석센터(HCRA), 세계자원연구소(WRI), 독성화학연구원 등에 연구자금을 제공해왔고, 벤레이트에 대해 연구하던 플로리다 대학에 연구 중단을 요청했다. 대학 당국이 이 요청을 받아들이자 해당 분야를 연구하던 과학자는 이에 항의해 자진해서 대학을 떠났다.http://www.chsc.or.kr/xe/?document_srl=11304)">각주9)
너무 늦기 전에 과거를 잊어버려야 한다
화약 제조를 통해 죽음의 상인으로 출발한 듀폰은 1955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500대 기업 리스트를 발표한 이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기업이다. 나일론 발명 이후 합성섬유 기업의 대명사였던 듀폰은 2004년 주력 사업이던 섬유 부문을 매각하고 파이어니어하이브레드를 인수하는 등 1998년부터 7년간 600억 달러(약 60조 원)에 달하는 인수합병을 단행하면서 사업 분야의 변신을 모색했다. 이 같은 업종 전환을 통해 화학 기업에서 생명공학, 산업 소재, 전자·정보통신 등을 중심으로 한 종합 과학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변신은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데, 2007년 듀폰의 농산·식품 분야 매출은 68억 달러로 기존의 산업 분야를 능가하며 전체 매출의 34퍼센트를 최근 5년 안에 개발한 신제품으로 거두고 있다. 세계 최대의 석유화학 기업에서 세계 4대 GMO 애그리비즈니스기업(몬산토, 신젠타, 듀폰, 다우)으로 변신한 듀폰은 다른 종자 업체들과 경쟁하면서 주로 옥수수와 콩의 교배 종자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인류가 농경에 눈을 뜬 이래 농부들은 1만 2,000년 동안 해마다 성질이 좀 더 뛰어난 씨앗들을 골라내 이듬해에 파종하는 방식으로 종자를 개량해왔다. 전통적으로 농촌 공동체는 종자들을 보존함으로써 농업의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데 기여해왔는데, 그린피스는 듀폰(파이어니어하이브레드)을 "식물유전자원에 대한 세계적인 생물해적질 두목"이라고 비판했다. 생물해적질(Biopiracy)이란 무엇일까. 원주민들이 대대로 아무 문제 없이 이용해오던 전통적인 식물(작물)의 유전자에 대해 다국적 종자 기업들이 특허를 신청하고 독점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린피스는 듀폰의 '식물유전자원에 대한 특허' 대부분이 개발도상국의 식물 유전자를 도둑질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듀폰이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식물 유전자에 눈독을 들이는 까닭은 몇 년 전 인수한 파이어니어하이브레드와 관련이 깊다. 1924년 헨리 월리스(Henry A. Wallace)에 의해 창립된 이 회사는 유전적 조작으로 2세대에 가면 불임이 되는 상업화된 옥수수 교잡 종자를 최초로 상업화해 생산한 기업이다.
2세대에 가서 불임이 되도록 하는 이 기술은 전문용어로 '기술보호 시스템(Technology Protection System, TPS)'이란 점잖은 이름이 있지만 실제로는 '터미네이터 기술(Terminator Technology)'로 더 많이 불린다. 터미네이터 기술이란 종자(씨앗)의 생식 능력을 스스로 제거한 자손(self-terminating offspring), 이른바 자살 씨앗(suicide seed)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파이어니어하이브레드는 이 종자를 대량생산해서 판매하는 기업이다.19 자살 씨앗은 후손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농부들은 해마다 종자 기업에서 종자를 구입해야 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불임의 씨앗이 자연수분을 통해 다른 품종의 작물에 교배될 경우 이 품종 역시 터미네이터 기술에 의해 불임이 유전될 위험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에 직면한 이 기술은 퍼지면 퍼질수록 다국적 종자 기업으로서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지만, 전통적인 종자를 이용해야 하는 14억 인구를 굶주림에 빠뜨릴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이다. 이것이 터미네이터 기술을 농업에 투하되는 '중성자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듀폰은 석유를 대체하기 위해 2010년까지 유전자조작식물을 통해 원재료의 25퍼센트를 원료로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제품이 바이오폴리머인 소로나(Sorona)다. 소로나는 옥수수에서 채취한 Bio-PDO(프로판디올propanediol)가 주원료이며 기존에 사용되던 석유계 원료인 1-POD, 3-POD의 대체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바이오폴리머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은 전 세계에서 80여 개에 불과하며 극소수 기업만이 연간 6,000톤 이상의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 시장을 주도하는 곳이 바로 듀폰과 카길이다. 듀폰처럼 과거에 각종 화학 오염물질의 대명사로 지탄받던 석유화학 기업의 상당수가 오늘날 이 같은 방식으로 친환경 녹색 기업의 대명사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안전하다고 널리 홍보되던 프레온가스 못지않은 거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비록 친자본적인 과학 저널과 친기업적인 연구소들이 이들 기업의 '녹색 세탁'을 거들고 있지만, 이들 기업의 변신을 표현해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의 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석유를 장악하라. 그러면 전 세계 국가들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식량을 장악하라. 그러면 전 세계 인민들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과거를 잊어버려야 한다." - 찰스 홀리데이(듀폰 200년 역사상 가장 큰 도박을 이끄는 듀폰의 최고경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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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여연대 이야기, [14호] 특집·② 터미네이터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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