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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
배하는가

월트 디즈니

다른 표기 언어 Walt Disney 동의어 작은 생쥐 하나로 시작한 글로벌 미디어 제국
요약 테이블
출생 1901년
사망 1966년
국적 미국

요약 자신의 출생에 의문을 품었던 월트 디즈니는 그림에 취미를 붙이며 힘든 유년기를 극복했다. 그러나 만화가로 성공하고자 했던 그의 꿈은 소질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자 스스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한 그는 미키 마우스의 성공을 발판으로 애니메이션 산업, 캐릭터 산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후 디즈니랜드라는 테마파크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케이블, 위성, 음악, 레저 스포츠 등 미디어 콘텐츠 분야를 망라한 글로벌 미디어 그룹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자한 미소 뒤에서 이루어진 어두운 흔적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풀 메탈 재킷(Full Metal Jacket)〉(1987)은 베트남 파병을 앞둔 미 해병대 훈련 캠프를 배경으로 평범하고 온순하던 청년들이 어떻게 전쟁 기계로 거듭나는지 보여주며 이를 통해 베트남전의 본질을 묻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와 냉소가 담긴 영화다. 영화는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문관' 로렌스(빈센트 도노프리오)가 자신을 모욕하던 교관 하트먼 상사(R. 리 이메이)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전반부와, 온갖 모욕과 육체적 시련을 견뎌내고 군인으로 재탄생한 청년들이 베트남에서 실전을 겪는 후반부로 나뉜다.

이처럼 힘든 훈련을 통과한 미국 청년들이 베트남의 고도(古都)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한 명의 저격수에게 목숨을 위협받는데, 저격수는 뜻밖에도 어린 소녀다. 소녀를 사살한 병사들은 불타오르는 시가지를 행진하며 소풍이라도 나온 듯 신 나게 노래 부른다.

"Who's the leader of the club that's made for you and me?
M-I-C-K-E-Y-M-O-U-S-E!"

이 노래는 1955년 10월부터 1959년까지 디즈니가 제작해 미국의 ABC 방송에서 방영한 〈미키 마우스 클럽(Mickey Mouse Club)〉의 오프닝 테마곡인데, 베트남에 미국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196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에 참전한 병사 대부분은 어린 시절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성장한 청년 세대다.

Who's the leader of the club that's made for you and me?
(너와 나를 위해 만들어진 이 클럽의 리더는 누구지?)
M-I-C-K-E-Y-M-O-U-S-E!
Hey, there! Hi, there! (안녕, 안녕, 모두들 안녕!)
You're as welcome as can be! (너희들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해!)
M-I-C-K-E-Y-M-O-U-S-E!
Mickey Mouse! (Donal Duck) Mickey Mouse! (Donal Duck)
Forever let us hold our banner high. high! high! high!
(우리들의 깃발을 영원히 높이 휘날리자. 높이! 높이! 높이!)
Come along and sing the song and join the jamboree!
(어서 와서 함께 야영하고 노래하자!)
M-I-C-K-E-Y-M-O-U-S-E!
Mickey Mouse Club! Mickey Mouse Club!
We'll have fun, we'll go places. (우리는 같이 놀고 함께 여행도 할 거야.)
All around the world we're marching. (우리 모두 다 함께 세계 곳곳을 행진하자.)
Yeah, Mickey! Yeah, Mickey!
Yeah, Mickey Mouse Club! Yeah!

일명 '미키 마우스 송'으로 불리는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Mickey_Mouse_March)를 참조하기 바란다.

큐브릭은 시가전 장면을 통해 베트남전의 본질을 날카롭게 묘파하는데, 그것은 바로 세계 초강대국 미국(해병대)과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해 통일 베트남을 건설하려는 약소국(소녀) 사이의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큐브릭은 엔딩 장면에 의도적으로 이 노래를 넣어 베트남전의 여러 단면을 복합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미국이 정말 베트남전에서 승리하고 싶었다면 전략기동군인 해병대보다 미국식 자본주의 문화의 첨병인 월트 디즈니와 미키 마우스를 먼저 보냈어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각주1)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도박꾼인 아버지

월트 디즈니는 1901년 12월 5일 시카고에서 일라이어스 디즈니(Elias Disney)와 플로라 콜 디즈니(Flora Call Disney)의 4남 1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디즈니 가문은 17세기 미국으로 건너와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초기 이민 세대로, 일라이어스는 시카고에 정착할 때까지 캔자스와 플로리다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주로 농업에 종사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자 시카고에서는 주로 목수와 잡역부 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기독교 정통파에 속한 세인트 폴 교회의 전도사 월터 파(Walter Parr)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두 사람은 서로 아들을 낳거든 상대방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기로 했다. 1901년 허버트와 레이먼드, 로이에 이어 넷째 아들이 태어나자 일라이어스는 월터 일라이어스 디즈니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라이어스는 겉으론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한편으론 현세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포커 게임이 벌어지는 술집을 자주 찾았고 독한 위스키에 취한 채 도박에 끼어들었다가 돈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가 도박이나 음주 습관, 전문적인 교육이나 훈련 부족 탓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미국 사회당 당수 유진 뎁스의 열렬한 지지자를 자처하며 세계 금융계를 지배하는 유대계 자본가들의 국제적인 음모를 비난하곤 했다. 1903년 막내딸 루스 플로라가 태어날 무렵에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 인근의 마셀린으로 이주했는데, 일설에는 도박 빚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미국 중서부 지방의 평범한 농촌 마셀린에 정착한 디즈니 일가는 사과 농사에 매달렸다. 농사는 작황이나 시장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잦았는데 온 가족이 농사일에 매달린 첫해에는 작황이 제법 좋아 땅을 더 샀지만 이듬해에는 농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일라이어스는 경비를 아끼기 위해 자식들을 농장에서 무임금으로 일하게 했는데, 기분에 따라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견디다 못한 장남 허버트와 차남 레이먼드는 1909년 추수가 끝나자 가출해버리고 말았다. 남겨진 두 아들 로이(Roy Oliver Disney)와 월트는 형들 몫의 일과 더불어 떠난 자식들을 배신자라고 여긴 탓에 더욱 거칠어진 아버지의 폭력까지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일라이어스는 두 아들에게 농장에서 일해 생계비를 벌라고 명령했고 가벼운 실수만 저질러도 잘못을 바로잡는 매라며 혁대나 회초리를 휘둘렀다.

체벌과 노동에서의 유일한 탈출구

가혹한 체벌과 노동에 시달리며 상처받은 월트는 매정한 아버지와 말리지 않는 어머니가 어쩌면 친부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훗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는 정상적인 부모로 구성된 가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직 어리고 몸도 약한 월트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로이는 동생 대신 더 많이 일했고 밤이면 동생을 위로하고 챙겨주었다. 어린 월트에게 각박하고 고단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는 그림 그리기였다. 그는 형이 일하러 나가면 숲에 들어가근처의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고 석탄이나 목탄 조각으로 널빤지나 맨 땅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의 감시와 농장 일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홀로 보낸 시간은 평생 동안 그리운 고향의 향수로 남았다. 두 자식이 떠난 이듬해 일라이어스가 폐렴과 장티푸스를 앓게 되자, 디즈니 일가는 4년 만에 대도시 캔자스시티로 나가게 되었다.

일라이어스는 농장을 처분하고 캔자스시티에 신문 배급소를 차렸다. 플로라는 두 아들을 인근에 있는 벤턴 그래머 학교에 입학시켰지만 남편은 두 아들이 신문 배달로 자기 생계비를 충당해야 한다고 우겼다. 이 무렵 미국 신문들은 대중 지향의 본격적인 상업 매체로 성장해가고 있었는데,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만화를 삽입했다. 월트는 학교에 다니며 아버지일을 계속 도와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시간조차 없었지만 신문에 게재된 만화를 보면서 꿈을 키워나갔다. 그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형 로이마저 아버지와의 갈등을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위기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로이가 떠난 뒤 월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폭력에 직접 맞섰고, 어느덧 나이 들어 쇠약해진 일라이어스는 막내아들이 더는 어린애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폭력에서 해방된 월트는 신문을 돌리는 대신 이웃 약국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그림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했고, 밤에는 인근의 미술 학원에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특유의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되찾은 월트는 학업 성적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미술에서만큼은 탁월해서 누구나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1917년 일라이어스는 신문 배급소를 정리하고 시카고의 젤리 공장을 인수하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월트는 부모를 따라가는 대신 학교를 마칠 때까지 캔자스시티에 홀로 남았다. 열여섯 살에 처음 찾아온 자유였지만 로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뒤 시카고로 가서 합류했다. 매킨리고교 3학년이 되자 학교 신문에 삽화를 그려주는 미술기자가 되었는데,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시카고 예술아카데미 야간반에서 펜화와 풍자화 수업을 받았다. 낮에는 아버지의 젤리 공장과 우체국에서 일하며 수강료를 벌고, 밤에는 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때때로 아버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익살스러운 그림들을 보여주었지만 일라이어스는 아들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1918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자 스물다섯 살이 된 로이는 자원입대했다. 형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따라하던 월트는 이번에도 그 뒤를 따르고자 했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징병관은 월트의 출생증명서를 요구했다.

월트는 출생지인 시카고 쿡카운티의 기록보관소에 출생증명서를 요청했지만 출생 기록 자체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친부모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어왔던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결국 부모의 사인을 위조해 국제적십자사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구급차 운전사로 일하며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를 배웠다. 이때 익힌 흡연 습관은 결국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의 전리품에 격전의 흔적을 만들어주거나 그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주며 돈을 모았고 자신의 작품을 여러 신문사에 투고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그의 작품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1919년 시카고로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는 젤리 공장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월트는 단호히 거절하고 집을 떠났다.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접하다

만화가로서의 꿈을 접을 수 없었던 월트는 예전에 직접 배달하기도 한 『캔자스시티 스타(The Kansas City Star)』지에 취직하기 위해 작품들을 보여줬지만 단번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장차 애니메이션의 선각자가 될 월트 디즈니였지만 이 무렵엔 풋내기 아마추어 만화가에 불과했다. 실의에 빠진 동생을 안쓰럽게 생각한 로이는 프레스먼-루빈 스튜디오의 광고 애니메이터 자리를 추천했고, 월트는 이곳에서 똑같은 꿈을 지닌 청년 어브 아이웍스(Ub Iwerks)를 만나게 된다.

열아홉 살 동갑내기 친구가 된 두 사람은 한 달 만에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만다. 두 사람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자칭 아티스트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월트가 밝고 사교성이 뛰어난 성격인 반면에 어브는 그림 실력은 월트보다 뛰어났지만 지나치게 내성적이었다. 둘은 어차피 남들이 고용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고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 둘이 함께 아이웍스-디즈니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 무렵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은 예술적으로는 물론 산업적으로도 거의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였다.

여기서 잠깐 애니메이션에 대해 알아보자. 애니메이션의 기초를 이루는 잔상 효과는 기원전에 이집트인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고, 13세기 영국의 수도사이자 과학자인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그림자의 광학적 효과를 인식해 현대 광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프레임별로 촬영된 애니메이션은 19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시도된 것이며, 최초의 애니메이션 도구는 지금도 유원지나 어린이를 위한 과학관에 가면 볼 수 있는 회전 원판을 이용한 초보적인 광학 장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20년 동안 애니메이션은 마법에 가까운 과학적 실험의 영역에서 관객들이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오락의 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 기초를 닦은 사람이 바로 월트 디즈니였다.

두 사람이 회사를 설립하고 얼마 뒤 운 좋게 첫 일거리가 들어왔다. 어릴 적 이웃에 살았던 친구의 아버지가 관여하는 피혁공 조합의 창간호 디자인을 의뢰받은 것이었는데 첫 번째 일감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긴 했지만 문제는 그 뒤로 더 이상의 일감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중에 돈이 모두 떨어지자 두 사람은 주당 35달러를 받기로 하고 캔자스시티 영화광고회사에 취직하면서 처음으로 광고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캔자스시티 영화광고회사는 동영상 사업의 선구적인 기업 가운데 하나로 당시 사장이던 아서 빈 코거는 막 '마술'의 영역에서 '산업'의 영역으로 넘어오던 과도기 애니메이션 산업의 기술적인 기초를 닦고 있었다. 이곳에서 애니메이션의 기초를 체험하며 배울 수 있었던 월트는 곧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고, 자신의 집 차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낮에는 회사 일을 하고 밤에는 애니메이션의 기본기를 익혔다.

어느 정도 자신이 붙고 나서 〈래프-오-그램(Laugh-O-Gram)〉이란 제목의 1분짜리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캔자스시티 영화광고회사의 고객 가운데 하나였던 뉴먼 극장에서 상영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수익은 땡전 한 푼 없었지만 자신의 인생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데 성공한 월트는 1922년 5월 래프-오-그램 필름이란 회사를 차렸다. 그는 뛰어난 사교술과 언변을 동원해 여러 사람에게서 투자금을 모았다. 훗날 자신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도 입증되었지만 그의 타고난 입담과 재치는 듣는 이들을 열성적인 지지자로 끌어들이는 비결이었다. 다만, 자금을 모으기는 쉬워도 자금을 사용해 돈을 벌 일거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복원한 래프-오-그램 필름 스튜디오(2010년)

이 스튜디오에는 애니메이션 역사 초기의 개척자들이 모여서 즐겁게 작업했고, 이런 경험은 훗날 미키 마우스 창작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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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스튜디오의 탄생

애니메이션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920년대 월트 디즈니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마치 1980년대 미국의 IT 업계 창립자들처럼 너무나 젊고 발랄했기 때문에 회사 분위기는 캠핑 온 젊은이들이 모인 것처럼 떠들썩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웃고 떠들며 자기들끼리 영화를 찍고 재미난 소재나 코미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결국 얼마 안 되어 당시로서는 거금인 1만 5,000달러나 되는 초기 투자금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다. 최악의 상황을 맞은 월트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성한 작품을 제작한다는 조건으로 배급사의 지원을 받아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Alice's Wonderland)〉를 제작했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이제 막 스물한 살이 된 그에게 세상은 파산 선고를 내렸다. 스튜디오가 사라지자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빚쟁이가 된 그는 영화 카메라를 처분해서 마련한 돈 40달러를 들고 도망치듯 캔자스시티를 떠났다.

애니메이션이란 장르가 상업적으로 태동한 1920년대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싶어 했던 젊은이에겐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당시 애니메이션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뉴욕으로 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 로이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것이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영화를 배급하는 '꿈의 공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1910년경 몇몇 영화사들이 로스앤젤레스 서부의 할리우드라는 작은 교외에서 사업에 뛰어들며 시작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그로부터 10년이 채 못 되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영화들을 지배했다. 거대한 공장 형태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홍보·배급·상영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수직적으로 통합·집중시킨 이 할리우드 시스템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들 역시 이 시스템을 모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 미국에는 5센트짜리 극장(nickelodeon)이 1만 개에 이르러 하루 입장객이 400~500만 명에 이르렀고, 1928년에는 2만 8,000개로 늘어났다. 1920년대에는 평균 관객 수가 일주일에 2,500~3,000만 명이었으며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매주 8,500만에서 1억 1,000만 명의 관객이 돈을 내고 영화를 구경했다. 진작 할리우드에 모여들었던 독립영화사들은 이제 더는 소규모 영화 제작사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들은 점차 자본을 축적하면서 주(州) 단위의 배급망을 전국 단위 배급망으로 확장했고 제작과 배급, 상영을 통제할 수 있는 거대 문화 권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메이저 영화사들은 직접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대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납품 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극장에 배급하는 정도만 관여했을 뿐 애니메이션 제작에는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1910년 1만 개에 이를 정도로 성행한 '5센트짜리 극장'은 1928년에는 2만 8,000개로 늘어났다. 이제 할리우드는 더는 소규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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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할리우드에 도착한 월트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들고 여러 제작사를 돌아다녔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애니메이션보다 실사를 연출하고 싶어 했지만 아무도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애니메이션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할리우드 최초의 여성 배급자이자 애니메이션 최초의 성공적인 캐릭터로 평가받는 〈고양이 펠릭스(Felix)〉 시리즈와 막스 플라이셔(Max Fleischer)의 작품들을 발굴하고 배급하던 마거릿 윈클러(Margaret J. Winkler)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윈클러는 편당 1,500달러의 선급금을 월트에게 지불하며 여섯 편의 시리즈물을 제작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계약엔 성공했지만 자금도 없고 인력도 없어 악전고투하는 동생을 지켜보다 못한 로이는 결핵이 완치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자금을 모으러 다녔고 부족한 인력을 대신해 직접 카메라를 잡았다. 그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제작에 관심이 없었지만 동생을 위해 헌신했다. 두 사람은 갖은 고생 끝에 1923년 10월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혼합된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여러 극장 체인을 통해 개봉되었다. 1925년 7월 25일 월트는 자신의 스튜디오 직원인 릴리언 바운즈(Lillian Bounds)와 결혼한다.

초기에는 작품 완성도가 떨어지는 등 여러 면에서 고생했지만 점차 수준이 향상되면서 윈클러는 더 많은 작품을 디즈니에 의뢰하기 시작했다. 일거리가 늘어나자 월트는 옛 동료 어브 아이웍스를 불러들였다. 아이웍스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지녔고 무엇보다 그림을 빨리 그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가 합류하면서 작품 제작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옛 동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디즈니 스튜디오는 예전의 활력을 되찾아갔다. 아이웍스의 합류로 과도한 작업에서 놓여나게 된 월트는 직접 원화를 그리는 부담에서 벗어나 경영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947년에 나온 〈고양이 펠릭스〉의 종이책 만화

고양이 펠릭스는 애니메이션 최초의 성공적인 캐릭터로,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움직이는 그림이 아님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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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캐릭터에서 탄생한 미키 마우스

뛰어난 배급업자이자 제작자였던 윈클러가 찰스 민츠(Charles Mintz)와 결혼하고 얼마 뒤 임신하면서 남편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자 디즈니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파라마운트의 〈고양이 펠릭스〉였는데, 경쟁사 유니버설은 민츠에게 〈고양이 펠릭스〉를 능가할 만한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달라고 의뢰했다. 디즈니는 민츠의 요청에 따라 〈토끼 오스왈드(Oswald the Lucky Rabbit)〉를 제작했는데, 다행히도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토끼 오스왈드〉의 성공으로 매주 한 편씩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자 월트는 스튜디오를 좀 더 확장했고, 회사 이름도 형의 동의를 얻어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개명했다. 비록 과거의 적자 상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계약금으로 받은 돈을 모조리 제작비로 사용하고 다음 계약을 기다리는 구조적 악순환을 벗어날 순 없었다. 열악한 제작 조건 탓에 선수금을 받기 위해 불리한 계약 조건도 감수해야만 했다.

〈토끼 오스왈드〉 시리즈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월트는 제작비 인상 요구와 함께 유니버설에서 자신이 만든 캐릭터의 상표권을 마음대로 활용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1928년 2월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민츠를 만나러 갔지만 도리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입지가 좀 더 유리해질 거라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민츠는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그를 따돌리고 나머지 애니메이터들과 비밀리에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의 곁엔 형 로이와 오랜 동료이자 친구 아이웍스만 남았고, 그가 만든 〈토끼 오스왈드〉의 캐릭터 판권과 나머지 직원은 모두 민츠의 밑으로 들어가버렸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월트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그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다시는 누구 밑에 들어가서 일하지 않겠어. 나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겠어"라는 말만 끊임없이 되풀이했기 때문에 곁에 있던 아내마저 두려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월트 디즈니를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자로 만든 미키 마우스는 그가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만들어졌다. 미키 마우스의 극적인 탄생과 관련해서는 그가 가난하고 배고픈 화가 시절, 작업장에서 함께 치즈를 나눠 먹던 생쥐를 캐릭터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졌고 여기서 파생된 수많은 전설이 있지만, 대부분은 검증된 이야기가 아니라 위인전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던 작가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생전의 월트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대부분의 미국인이 싫어하는 생쥐를 주인공 캐릭터로 삼게 되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기보다 자신과 생쥐 사이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만들어져 유포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다만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진실 한 가지는 본래 월트는 '모티머(Mortimer)'라 이름 지었는데, 아내 릴리언이 '미키'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고 조언해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키 마우스의 탄생 신화에 씌워진 포장들을 벗겨내고 냉정하게 살펴보면 오스왈드를 대체할 캐릭터가 절실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낼 시간과 여력이 별로 없었던 월트 디즈니가 〈토끼 오스왈드〉를 생쥐 미키로 급조해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차갑게 버림받은 처지였지만 민츠와의 계약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배신한 동료들 틈바구니에서 함께 〈토끼 오스왈드〉의 나머지 시리즈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고, 그 와중에 미키 마우스의 캐릭터 디자인과 시나리오 작업도 병행해야 했다. 그와 함께 미키 마우스 작업을 진행한 사람들이 형 로이와 아이웍스였는데, 특히 어브 아이웍스는 많은 디즈니 연구자들이 미키 마우스를 실제로 창조한 사람은 월트가 아니라 아이웍스라고 주장할 만큼 미키 마우스의 실제 탄생에 깊이 관여했다. 대체로 월트가 대략적인 설정을 했고 아이웍스가 구체적인 모양을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

이처럼 미키 마우스의 창조자에 대해선 여러 이견이 있지만, 이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것은 미키 마우스의 디자인적 원형이 기존의 오스왈드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초기 미키 마우스를 살펴보면 오스왈드의 귀를 줄여 둥그렇게 키우고 눈동자 모양 등에 약간의 손질을 가해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웍스가 작업한 오스왈드 캐릭터 역시 〈고양이 펠릭스〉를 의식한 것이었기 때문에 펠릭스와의 유사성도 찾아볼 수 있다.

미키 마우스의 시대를 연 애니메이션 산업의 선각자

디즈니 그룹은 오늘날 전 세계 어린이의 98퍼센트가 미키 마우스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의 개봉일인 1928년 11월 18일을 미키 마우스의 탄생일로 기념하고 있지만, 미키 마우스가 탄생한 순간부터 곧바로 엄청난 대중 파급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증기선 윌리〉의 성공 이전에 월트는 이미 미키 마우스를 이용해서 〈미친 비행기(Plane Crazy)〉와 〈질주하는 카우보이(Gallopin' Gaucho)〉를 잇따라 제작했지만 관객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관객 시사회에서 반응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배급사들은 애니메이션 영화의 본격 상영이라는 모험에 선뜻 나서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째 작품 〈증기선 윌리〉를 제작하는 동안 영화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최초의 발성 영화 〈재즈싱어(The Jazz Singer)〉가 등장했던 것이다.

월트는 〈미친 비행기〉 시사회에서 작품에 맞춰 오르간을 연주하는 배경음악으로 관객의 환호를 얻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성된 〈증기선 윌리〉에 사운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당시 무성영화 최고의 슬랩스틱 코미디 배우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의 〈증기선 빌(Steamboat Bill)〉의 줄거리를 차용한 것이었는데, 월트는 그때까지 진행된 모든 작업을 중지시키고 사운드를 입힌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키 마우스와 보조 캐릭터들이 단순히 소리를 내는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두길 바랐다. 여러 기술적인 난제가 있었지만 동료 직원들의 도움을 얻어 캐릭터들의 움직임에 따라 효과음도 동시에 진행되도록 했다. 그 결과 〈증기선 윌리〉는 조그만 생쥐가 선장으로 등장해 음악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고 움직이며 염소를 손풍금처럼 연주하는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키 마우스의 성공에는 때마침 할리우드에 몰아친 보수주의 바람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던 영화 대부분은 미국 주류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현대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새로운 진보적 가치관 역시 대중의 호응을 받아 영화를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나는 이른바 부도덕성과 파괴성을 자주 공격했다. 낭만극은 문란한 성생활을 퍼뜨린다고 해서 품위위원회(Legion of Decency)에서 공격을 받았고, 범죄극은 청소년 및 성인 범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자주 비판 대상이 되었다. 시민단체들의 압력과 정부의 통제 위협으로 인해 심사 기구가 줄지어 설립되었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영화계에서 제작법(Production Code)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법안은 키스할 수 있는 시간까지 구체적인 제약을 두었는데, 입을 벌리고 하는 키스는 절대 금지, 나체나 성행위 묘사, 매춘, 마약 등은 절대로 다룰 수 없었으며, 범죄자들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했고, 종교와 교회는 비판할 수 없었다. 이 법은 1960년대까지도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엄격한 이념적·사회적 매개변수 역할을 하며 막강한 위력을 휘둘렀다.

1934년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주최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에서 최초의 미키 마우스 캐릭터 풍선이 행진하는 모습

1930년대는 미키 마우스의 시대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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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작품은 할리우드가 자신들에게 씌워진 혐의에서 벗어나 평범하고 모범적인 미국의 가정을 지키고 미국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영상물이었다. 미키 마우스는 탄생부터 월트의 극적인 성공과 더불어 미국의 새로운 신화로 자리매김하는 데 손색이 없는 존재였다. 문화역사학자 워런 서스먼(Warren Susman)은 "정치학자들이 미국의 1930년대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시대'라고 불렀다면 문화학자들은 1930년대를 '미키 마우스의 시대'라고 불렀다"며 미키 마우스가 사회적으로 거둔 엄청난 인기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디즈니가 살던 세상은 전통적인 규범들이 하나같이 먹혀들지 않는 듯이 보이는 혼란스러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연민과 공포로 얼룩진 악몽 같은 세상이 아니라 끝내는 소망이 충족되고, 전통적인 방식과 가치가 더욱 굳건해지는, 환상과 재미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냈다. 세상이 제아무리 혼란스럽게 보인다 할지라도 디즈니와 그의 미키 마우스(그리고 월트가 만든 다른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는 익히 알려진 게임의 규칙을 따름으로써 결국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초기엔 악동 이미지가 강하던 미키 마우스 역시 시대의 변화에 맞춰 순화되었고, 장난꾸러기 악동 이미지는 도널드 덕이 대신 물려받게 되었다. 1929년 10월부터 시작된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할리우드는 물론 미국 경제 전반에 커다란 위기가 닥치면서 전체 노동자의 25퍼센트가 실직하게 되었는데, 이 상황이 월트에겐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미키 마우스의 성공으로 제법 큰 수익을 거두긴 했지만 그는 할리우드의 다른 메이저 스튜디오들과 달리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았고, 경제 위기로 실직자가 된 애니메이터들을 값싸게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어리석은 교향악단(Silly Symphony)〉 시리즈를 제작했고, 그중에서 〈꽃과 나무(Flower and Trees)〉에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테크니컬러(technicolor)를 도입해 세계 최초로 총천연색 애니메이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이은 성공에도 디즈니의 재정 상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제작만으로는 여전히 이전 작품의 수익으로 다음번 작품의 제작비를 충당하는 구조를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30년대 테크니컬러 카메라

월트는 〈꽃과 나무〉에 당시의 첨단 기술인 테크니컬러를 도입해 총천연색 애니메이션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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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원작을 혼합 모방한 디즈니의 세계와 미키 마우스 연장법

월트는 애써 만든 캐릭터의 권리를 빼앗긴 경험 덕에 저작권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우쳤지만 영화 제작 이외의 방식으로 돈을 벌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뉴욕의 거상 조지 보그펠트(George Borgfeldt)는 미키 마우스와 미니 마우스의 열렬한 팬인 두 자녀를 위해 월트에게 미키 마우스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캐릭터 이용료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한다.

보그펠트가 만든 미키 마우스 캐릭터 상품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자 캐릭터 상품의 잠재력을 깨우친 월트는 그와의 계약이 만료된 1932년 한 해 동안에만 80여 개 회사와 디즈니 캐릭터 사용에 대한 계약을 맺었다. 이제 미키 마우스는 어두운 극장을 뛰쳐나와 세상 어디에서나 피할 수 없는 이미지이자 쉽게 만날 수 있는 상품이 되었고, 1934년 미국에서만 3,5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애니메이션이 산업이 되는 순간이었다.

재정적인 능력을 갖추게 된 디즈니는 40명의 애니메이터와 45명의 어시스턴트, 30명의 트레이서 및 채색 인원 등 총 180여 명의 사원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월트는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을 끊임없이 재교육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 사내 교육기관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훗날 칼아츠(CalArts: California Institute of Arts)라는 4년제 대학으로 확대되었다. 1930년대 디즈니에는 아홉 명의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이른바 http://en.wikipedia.org/wiki/Disney's_Nine_Old_Men)">나인 올드 맨(Nine Old Men)각주2) 이 활동하면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를 일구어냈다. 1937년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뮤지컬 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는 디즈니에 어마어마한 성공을 가져다주었고, 뒤를 이어 〈피노키오(Pinocchio)〉(1940), 〈판타지아(Fantasia)〉(1940), 〈덤보(Dumbo)〉(1941), 〈밤비(Bambi)〉(1942) 등 오늘날까지 디즈니를 대표하는 걸작 애니메이션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1998년은 미키 마우스 탄생 70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기념 행사가 치러진 해이지만, 한편으로 미키 마우스의 상표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제정된 해이기도 하다. 미국 하원의원이자 유명 작사가였던 소니 보노(Sonny Bono)의 이름을 따서 제정된 소니 보노 저작권 기간 연장법(Sonny Bono Copyright Term Extension Act, CTEA)은 '미키 마우스 연장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기존 법안대로라면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되는 미키 마우스의 저작권 시효를 늘려주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비난 때문이었다. 법안은 저작물의 보호 기간을 저작자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하고, 직무상 만들어진 작품에 대한 저작권 보호 기간 역시 최초 출판된 해로부터 95년까지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실제로 디즈니는 이 법안 제정을 위해 강력한 로비를 펼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등 유명 예술가의 초기 작품들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이 법안의 제정을 위해 디즈니는 물론 할리우드와 당시 대통령 조지 W. 부시까지 나서 국제법인 저작권법의 연장을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 저작권법 연장을 보여주는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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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 기한 연장을 비판하는 로고

미키 마우스 탄생 80주년인 1998년에 미키마우스의 상표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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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열린 EBS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에서 브렛 게일러(Brett Gaylor) 감독의 〈찢어라! 리믹스 선언(Rip: A Remix Manifesto)〉이란 작품이 EIDF 페스티벌 초이스에 선정되었는데, 이 작품은 디즈니가 주장하는 저작권 보호의 허구성에 대해 풍자해 큰 호응을 얻었다. 게일러는 '재혼합자의 선언(A remixer's manifesto)'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를 끌어가는데,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문화는 항상 과거를 바탕으로 세워진다.
2. 과거는 항상 미래를 통제하려고 한다.
3. 우리의 미래는 점점 더 자유가 줄어들 것이다.
4.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당신은 과거의 통제를 제한해야 한다.

이 작품에서 예술 창작의 자유와 향유의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일종의 빅브라더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 다름 아닌 디즈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가운데 상당수는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라 과거에 존재한 작품들을 재혼합(remix)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잘 아는 디즈니의 대표작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그림 형제가 원작자인데 이 작품에는 본래 일곱 난쟁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러시아 시인 푸시킨(Aleksandr Pushkin)이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공주(Snow White)』에서 영감을 얻어 「죽은 공주와 일곱 명의 기사(The Tale of the Dead Princess and the Seven Knights)」(1833)란 시를 발표했는데, 디즈니는 일곱 명의 기사를 난쟁이로 탈바꿈시켰다. 〈찢어라, 리믹스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미키가 칠순을 맞은 1998년 저작권법이 개정되고, 디즈니 제국은 미키의 무기한 소유권을 획득한다. 저작권 기한이 원작자 사후 70년까지 연장되고, 회사에는 95년이 주어진다. 저작권법의 원래 기한인 14년을 넘어 100년이 넘게 된 것이다."

월트의 사후에도 디즈니 스튜디오는 캐릭터의 저작권을 강력하게 지켜나갔고, 마침내 〈토끼 오스왈드〉의 판권도 다시 사들였다.

1910년의 『백설공주』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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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의 한 장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상당수는 이미 있던 작품들을 리믹스한 것이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원작에는 일곱 난쟁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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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스튜디오의 파업과 빨갱이 광풍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계속해 성공하면서 디즈니 스튜디오는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회사 규모도 점점 커져갔다. 월트는 애니메이션에서 음악을 매우 중시했는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클래식 음악과 접목시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한다는 야심찬 시도로 〈판타지아〉를 제작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대중은 익숙했던 과거 디즈니 작품에 비해 지나치게 고급 취향이 되어버린 〈판타지아〉를 외면했고, 디즈니는 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월트의 가부장적인 경영 방식에 억눌려 지내던 애니메이터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초기 디즈니 스튜디오에서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벤처 산업에 뛰어든 동지애를 바탕으로 경영자인 월트와 애니메이터들 사이에 비교적 친숙하고 사적인 관계가 조성되었지만, 점차 회사 규모가 커지고 사업이 다각화되면서 그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월트는 누구보다 애니메이션에 열정을 쏟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애니메이션만 생각하는 자신보다 이 분야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으며, 사업 초창기에 믿었던 동료와 직원 들에게 배신당한 경험까지 더해져 내심으로는 부하 직원들을 깊이 신뢰하지 않았다.

스튜디오 직원들이 영화만화가조합을 결성하고 협상하고자 했지만 그는 노조 설립을 방해하기 위해 만든 어용조직인 만화가연합을 앞세워 노조를 억누르려 들었고, 마피아와 결탁해 노조 지도자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노사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치열해졌고 '환상과 재미, 게임의 규칙을 따름으로써 결국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만들어낸 디즈니 스튜디오의 파업 소식은 사회 이슈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 노동부 산하 연방조정중재기구와 디즈니 스튜디오의 주거래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까지 압력을 행사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노조와 타협해야만 했다. 월트는 애니메이션 기술 개발 면에선 누구보다 혁신적이고 진보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전형적인 보수 중산층의 가치관에 묶여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군 '또 하나의 가족(?)'인 직장에서 최고의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목표를 배신한 직원들을 용서하지 못했고, 이런 사태가 초래된 것은 모두 외부의 공산주의자들이 순진한 직원들을 부추긴 결과라고 믿었다.

때마침 할리우드를 감시할 끄나풀이 필요하던 FBI의 후버(John Edgar Hoover) 국장은 파업 사태에 개입하면서 국가의 미래를 안정시키는 일에 협조하는 대가로 월트에게 진짜 부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그는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파업의 결과로 월트의 애국심은 한층 강화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경제적 이익과 자신의 애국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관제 홍보 영화 제작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나자 디즈니 스튜디오는 애니메이션의 명가가 아니라 정부 하청을 잘 따내는 관제 스튜디오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전후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빨갱이 광풍'에 휩싸이게 되는데 월트는 자발적으로 이 광풍에 동참했다. 1947년 11월 의회반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HUAC)가 연예 산업에 대한 일련의 재조사에 착수하자 수많은 사람이 위원회에 불려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공산당원인가? 아니면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있는가?"

1947년 11월 24일과 25일에 걸쳐 뉴욕의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영화제작자협회 회의에서는 좌파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되던 영화인 열 명(이른바 할리우드 10)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이들을 영구히 추방한다는 내용의 악명 높은 '월도프 선언(Waldorf Statement)각주3) '이 채택되었다. 미국이 매카시즘 광풍에 휩싸였을 당시 동료 영화인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지닌 미국노동총연맹 영화배우협회 회장 로널드 레이건은 가장 먼저 월도프 선언 지지를 선언했고, 그 뒤를 로버트 테일러, 로버트 몽고메리, 조지 머피, 게리 쿠퍼, 잭 워너, 루이스 마이어 등이 따랐다. 월트 역시 이들과 함께 우익 세력의 선봉에 섰으며, 미키 마우스의 정신적 모델이던 찰리 채플린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인과 눈엣가시 같던 직원들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여 내쫓았다. 심지어 데이비드 힐버먼(David Hilberman) 등은 디즈니에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와 〈밤비〉를 함께 만든 동료였는데도 말이다. 매카시즘의 광기에 휘말린 몇몇 영화인은 결국 자살하거나 심지어 수감되는 등 생계 수단을 잃고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1947년 HUAC의 연예산업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 현장

월트 디즈니는 연예산업에 불어닥친 빨갱이 광풍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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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진출한 디즈니와 테마파크 디즈니랜드

너무나 배가 고파 제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먹은 문어처럼 오랫동안 함께해온 동료들을 배신한 디즈니는 한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단편 애니메이션 하나도 제대로 제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이곳에서 애니메이션을 배우고 수많은 작품을 함께 만든 애니메이터들은 월트의 곁을 떠나 UPA(United Production of America)를 설립하고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미학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형화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구성 방식에서 벗어나 다소 거칠지만 시대적 분위기를 담아내는 캐릭터와 작품들을 만들어냈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해야 했기 때문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대명사인 풀 애니메이션(full animation) 기법 대신 리미티드 애니메이션(limited animation) 기법을 창안해냈고, 이것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 anime)의 중요한 기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시기를 거치며 월트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대신 다른 분야에 열정을 품기 시작했다. 실사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자연 다큐멘터리 분야에도 진출했다. 디즈니가 만든 자연 다큐멘터리는 이전의 자연 다큐멘터리들과 달리 동물들이 하나의 퍼스낼리티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대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 월트는 1953년 실사영화를 만들기 위해 브에나비스타(Buena Vista Pictures) 영화사를 설립했다.

동서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미국에선 가장 미국적인 이데올로기를 담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고, TV 기술의 혁신이 일어나면서 가정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가족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의 대명사는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 작품인 것처럼 당시 TV 방송국들도 가족 프로그램으로 애니메이션 작품을 방영하려고 했다. 이 기회를 놓칠 월트가 아니었다. 디즈니는 미국의 3대 방송 NBC, CBS, ABC 가운데 가장 늦게 출범한 ABC와 계약을 맺고 1954년 10월부터 〈디즈니랜드〉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명을 이렇게 한 것은 장차 개장할 테마파크의 시너지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빼어난 언변과 대중 친화적인 외모를 앞세워 월트가 직접 해설자로 출연하면서 〈디즈니랜드〉는 높은 시청률을 올렸다. 1950년대 미국은 대공황과 전쟁의 경험에서 해방된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베이비붐 세대를 형성하게 되었고, 전후 최대의 풍요는 어린이들이 무엇이든 맘껏 누릴 수 있는 물질적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에 월트는 미키 마우스 못지않은 대중적인 스타로 떠올라 어린이들의 친근한 이웃 아저씨가 되었다. 1954년 12월 15일에 방송된 〈디즈니랜드〉의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 3부작은 최고의 인기를 얻어 미국 어린이들을 '데이비 크로켓' 열기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수백만에 이르는 어린이들이 데이비 크로켓의 너구리 모자를 쓰고 카우보이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온갖 상품이 쏟아져 나와 5년간 거의 3억 달러에 이르는 상품들이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정도 인기였느냐 하면 대통령 아이젠하워마저 데이비 크로켓 타이를 맬 정도였다.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과 TV 프로그램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제3세계 국가의 어린이들에게 미국식 삶과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디즈니는 1955년 가을부터 어린이를 주요 대상으로 한 〈미키 마우스 클럽〉이란 프로그램을 제작해 연이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훗날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된다.

디즈니 스튜디오의 성공은 콘텐츠 제작업체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지녔는지 보여준 성공적인 사례였고, 이전까지 영화와 경쟁 관계에 있던 방송국들은 영화 프로덕션과 결합할 때 놀라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 결과 ABC는 디즈니 외에도 워너브라더스, MGM과 손을 잡았고 CBS는 20세기폭스를 파트너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오늘날 존재하는 거대 미디어 그룹의 시작이었다. ABC의 프로그램 제작업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던 디즈니는 1996년 190억 달러에 ABC를 인수하면서 콘텐츠 업체에서 거대 미디어 네트워크 그룹으로 성장했다. 물론 이 같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은 월트의 사후, 위기에 처한 디즈니를 살려낸 최고경영자 아이즈너(Michael Eisner)였지만, 그 씨앗은 이미 월트 생전에 뿌려진 셈이었다.

이 같은 엄청난 성공은 무엇보다 다른 업체와 차별화되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낸 디즈니 스튜디오의 저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와 같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월트였다. 2000년도 디즈니의 사업 부문별 기업 이익 규모를 살펴보면 테마파크 디즈니랜드가 거둬들인 수익이 21억 달러로, 케이블 네트워크의 13억 달러, 방송국과 캐릭터 제품이 각각 6억 달러, 모기업에 해당하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1억 달러에 견줄 수 없는 가장 큰 수익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디즈니랜드 테마파크는 월트가 생전에 추진한 마지막 사업이다.

1954년 오렌지카운티에서 디즈니랜드 계획을 짜는 월트 디즈니(중앙)

현재 디즈니사에서 가장 큰 수익을 올리는 디즈니랜드 테마파크는 월트가 생전에 추진한 마지막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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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2월 15일, 폐암으로 사망한 월트는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입에 올리곤 했다.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꿈을 실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작은 생쥐 하나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한 마리 생쥐에서 시작한 월트 디즈니 그룹은 영화·텔레비전/비디오·케이블/위성·음악/라디오·출판·뉴미디어·테마파크·여행/레저·스포츠·소매/개발·텔코 제휴·해외사업 등 미디어, 콘텐츠 분야를 총망라하는 독점적인 글로벌 미디어 그룹이 되었다.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월트 디즈니는 꿈과 희망을 주는 착한 할아버지로 묘사되지만 그가 남긴 흔적들, 이를테면 예술가들에 대한 착취, 노동운동 탄압, 마피아·FBI와의 은밀한 거래·밀고, 테마파크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감정노동 실태 등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어두운 유산으로 남았다.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꿈을 실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작은 생쥐 하나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 월트 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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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존 할라스, 『세계 애니메이션 작가와 작품』, 범우사, 2002, 12~24쪽
  • ・ 제프리 노웰 스미스, 『옥스퍼드 세계영화사』, 열린책들, 2005, 71쪽
  • ・ 존 힐·파멜라 처치 깁슨 엮음, 『세계영화연구』, 현암사, 2004, 407~408쪽
  • ・ 박인하, 『꿈과 환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가 월트 디즈니 vs 인간 가치를 꿈꾸게 하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숨비소리, 2006, 38쪽
  • ・ 닐 개블러, 『월트 디즈니: 미국적 상상력의 승리 (1·2권)』, 여름언덕, 2008, 289쪽
  • ・ 찰스 패너티, 『문화와 유행상품의 역사 2』, 자작나무, 1997, 264~266쪽

전성원 집필자 소개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새얼문화재단에 입사해 2012년 현재까지 『황해문화』에서 일하며, 평화박물관·space99 운영위원,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펼쳐보기

출처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 저자전성원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 사람의 천재성이나 개성이 인류의 삶을 크게 바꿔놓는다. 헨리 포드에서 마사 스튜어트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근대화와 세계화의 영역에서 우리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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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월트 디즈니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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