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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교 미술
사
〈조각〉 로댕의 출현
19세기 후반기도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드러내려는 기념비적 조각상들의 제작이 이어졌으며, 전반기와 마찬가지로 힐데브란트(Adolf von Hildebrand, 1847~1921) 등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고전주의적 조각이 주를 이루는 듯하였다. 그러나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1917)의 활동이 전개되면서 조각사에 거대한 변화가 일게 된다. 그는 낭만적 이상의 표현이나 고전적 완벽성을 거부하고 인간의 내면적 고뇌를 생동감 넘치는 기량으로 표현하려 하였고, 그럼으로써 미켈란젤로 이후 최고의 거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예리한 사실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와 그를 추종하던 새로운 세대-마이욜(Aristides Maillol, 1861~1944), 브루델(Antoine Bourdelle, 1861~1929),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 등-의 조각가들은 인간의 진실된 내면세계의 표출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로댕과 그의 후예들은 근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내면적 고뇌나 생명력의 표출에 있었던 것이지 그리스도교적 주제에 있지는 않았다.
반면에 19세기 후반기의 그리스도교 조각과 관련된 현상으로는 1858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루르드(Lourdes)의 마사비엘(Massabielle) 동굴에 발현한 성모 마리아를 수차례 보았다는 소녀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 1844~1879,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 베르나데타(Sancta Bernadetta)로 시성]의 증언에 따라 아카데미즘적 조각가 파비쉬(Joseph-Hugues Fabisch, 1812~1886)가 1864년에 제작한 성모 마리아상의 확산을 들 수 있다.
파비쉬는 프랑스의 교회공간에 많은 마리아상이나 성인상을 제작, 설치하였던 당대의 중견 조각가였다. 그의 이 루르드 성모상은 수없이 복제되어 전 세계에 확산되었으며, 이에 따라 가톨릭 성상(聖像)의 전형으로 각인되었다. 한국의 가톨릭교회에서도 그의 루르드 성모상은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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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독일 뮌헨대학교 박사학위 취득(서양미술사학). 이화여자대학교 박사연구원, 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역임. 서양미술사학회 등 다수의 미술사학회 임원, 현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교 교수.
출처
그리스도교를 뿌리로 삼은 유럽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미술사적 변화를 알아본다. 그리스도교의 탄생 이후 전개된 그리스도교 미술의 세계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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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각〉 로댕의 출현 –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 김재원,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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