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르네상스 미술이 피렌체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것처럼 바로크 미술은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바로크 양식은 1580년 교황 식스투스 5세(재위 1585~1590)하에 로마의 예수 성당을 개축하면서 시작되어 171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서거 및 빈의 카를 성당의 개축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
1527년 로마는 독일과 에스파냐 등의 대규모 용병 군대에 짓밟힘과 동시에 이미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자들로부터 극심한 비난을 받고 있었다. 로마의 대약탈(1527) 직후 몇 년 동안은 황폐해지고 교황의 권위가 타락된 로마가 다시 서구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스스로 낡은 구조를 개혁하기에 이른다.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전체 교회 회의를 소집(트렌토 공의회)하여 가톨릭교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한편 종교개혁에서 제기된 가톨릭의 기본 교리를 재확인하고 명료하게 했다. 사실상 트렌토 공의회의 교의적 결정은 반종교개혁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으며 바로크 시대의 문화와 예술의 원리가 되었다. 또한 교황은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로써 로마는 반종교개혁의 피난처로서 영원한 도시로 유럽 내에 많은 미술가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바로크 양식은 다양한 모습을 띠면서 로마로부터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의 국외 선교활동을 통해 라틴아메리카까지 확대되었다.
17세기의 유럽은 신성로마제국이었던 독일을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종교 전쟁(30년 전쟁, 1618~48)을 시작으로 점차 종교보다는 영토 및 통상 등 각국의 이익을 위해 앞세워 무력 대결로 이어졌다.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독일어 Westfälischer Friede, 영어 Peace of Westphalia)으로 끝났다.
17세기 전반에 유럽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후반에 이르러서는 독일을 제외하고 절대왕정과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가며 균형적인 유럽을 만들어 가는 방향을 모색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에서는 16세기 후반 로마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대립으로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1562~1598)이 발생하였고, 이를 앙리 4세는 낭트 칙령(프랑스어 Édit de Nantes, 영어 Edict of Nantes, 1598년 4월 13일)을 발표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교회 간의 종교 분쟁을 종식시켰다. 봉건제도가 붕괴됨에 따라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왕권이 서서히 자리를 굳히며 근대 국가의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루이 14세(1643~1715)에 이르러 절대왕정 체제를 확립하고, 정치 · 경제 · 문화에 있어서 유럽의 중심지로 황금시대를 맞게 되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독일 뮌헨대학교 박사학위 취득(서양미술사학). 이화여자대학교 박사연구원, 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역임. 서양미술사학회 등 다수의 미술사학회 임원, 현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교 교수.
출처
그리스도교를 뿌리로 삼은 유럽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미술사적 변화를 알아본다. 그리스도교의 탄생 이후 전개된 그리스도교 미술의 세계를 소개한다.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종교전쟁 –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 김재원, 한국학술정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