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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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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9년 |
피아노 앞에 두 소녀가 앉아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왼손으로 악보를 편 채 오른손이 열심히 건반을 두드리고 있다. 그 옆에는 하얀 레이스로 목둘레를 장식한 연분홍 드레스의 소녀가 한 손을 피아노에 얹고 지그시 악보를 보고 있다.
반쯤 입을 벌리고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하얀 드레스의 소녀가 동생이고 여유 있는 표정의 연분홍 드레스 소녀가 언니다. 그 둘의 표정에서 평온함과 온화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림 속에선 피아노의 선율이 울려 퍼질 것 같다.
그림은 그 두 사람의 평온함을 강조하기 위해 머리에 맨 리본, 피아노 위의 상감 꽃병, 녹색커튼의 색조와 곡선을 그려 넣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 소녀에게 집중하려는 작가의 의도다.
소녀들의 해맑은 표정과 양쪽 볼의 건강한 홍조, 화려한 옷차림, 잘 세팅된 집안 구조 등을 보면 파리의 부유한 중산층 집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는 〈피아노 치는 소녀들〉에서 보듯 어떤 알레고리도, 고집스러운 주제도 없이 보는 사람이 곧장 평화롭고 따스한 정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만든다. 그의 그림은 밝은 색채를 머금고 화사하다. 비록 가난했지만 소박한 삶에 만족했던 그는 낙천적인 삶을 살았다. 화가 중 유일하게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그가 남긴 5,0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꽃과 과일 등 정물을 가장 많이 그렸다.
타고난 손재주
르누아르의 초기 그림들은 반짝이는 빛의 색채가 가득했다. 인상파 화가로 시작한 탓에 그의 그림들 역시 그 전형을 밟은 것이다. 하지만 마흔 중반에 들어서면서 인상파와 결별하고 인물화에 집중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탄력 있는 피부와 발그레한 빛깔의 여성들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그러한 여성이 장미와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수많은 여성이 모델이 되었고, 그중에는 화가와 모델의 관계를 넘어서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와도 깊이 사귀지 않았고, 결혼도 마다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을 즐겼고, 여러 여자와 교제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았다.
장미를 닮은 여인을 그리듯 장미 그리기도 좋아했던 그는 후기로 갈수록 장미를 더욱 탐스럽게 그렸다. 장미를 닮았기에 여인을 그렸듯, 장미에서 농염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린 장미는 탐스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농염했지만 색정적(色情的)이기보다 청량(淸涼)했다.
한 화폭에 담기 어려운 ‘탐스러움’과 ‘청량함’을 르누아르가 완성해 냈던 것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두 가지를 모두 담아내는 화풍은 누드화로도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다른 화가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 르누아르는 오만했다. 그는 “내 예술의 특징은 ‘설명 불가능’과 ‘모방 불가능’, 이 두 가지이다. 이로써 사람들이 내 열정 속으로 휩쓸린다”며 자신의 그림에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의 오만은 정확한 자기진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정교한 윤곽선으로 농염함과 청량함, 화려함과 여유로움, 형식과 자유를 한 화폭에 담을 수 있는 화가가 르누아르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세밀한 손기술을 따를 화가가 없었다.
그의 손재주는 재봉사였던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모든 의복을 손바느질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재봉사는 누구보다 손놀림이 빨랐다. 그런 부모님의 손놀림은 르누아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게다가 유명한 도자기 산지였던 고향 땅에서 예술적인 재능까지 습득하게 된다. 그의 고향은 도자기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많은 사람이 도자기 만드는 일을 주업으로 삼고 있었다. 르누아르도 열세 살부터 도자기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정밀한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의 도자기는 주목받았다. 뛰어난 손기술에 예술적 재능까지 더하면서 찾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기계가 발명되면서 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다. 르누아르가 다니던 공장 역시 기계의 위력에 밀려 문을 닫으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다.
결국 르누아르는 부채에 그림 그리기, 창문 블라인드에 페인트 칠하기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러다가 내면 깊숙한 곳에 화가의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862년 그는 드디어 화가가 되기 위해 제대로 공부를 할 결심으로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고 교육을 받았지만, 미술학교가 그에게 안겨준 소득은 훗날 함께 인상파 화가가 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 등을 알게 해 준 것이었다. 더 이상 정규교육이 도움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2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르누아르는 독학을 시작한다.
바지유와의 우정
그 후 2년간 홀로 그림을 그리며 살롱전에 작품을 보냈다. 하지만 르누아르의 그림은 기존 화풍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외면받는다. 나중에 유명해진 화가 폴 세잔, 마네 등도 비슷한 이유로 살롱전에 탈락한다.
오직 그림에만 몰두한 덕에 궁핍했던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인상파 화가로 촉망받던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였다. 부자였던 아버지의 후원 덕에 큰 화실을 가질 수 있었던 바지유는 르누아르는 물론 마네, 모네 등 여러 화가에게 작업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림 재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낭만주의 화가의 거장으로 불리는 들라크루아(Delacroix, 1798~1863)의 작품 등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사 들고 와서 다른 화가들이 참고하게 했다.
특히 르누아르에 대한 바지유의 배려는 남달랐다. 자신의 집에 함께 살면서 먹고 사는 모든 문제를 꼼꼼히 챙겼다. 덕분에 생활은 언제나 빠듯했다. 의대를 다니는 조건으로 매달 아버지가 보낸 생활비로 살았던 터라, 두 사람은 식비를 아끼기 위해 콩을 삶아 먹었다. 그래도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줄 만큼 사이가 좋았다.
바지유가 그린 초상화 속에서 르누아르는 양손으로 무릎을 당긴 채 의자 위에 앉아 있다. 오랜 시간 앉아 있기엔 힘들어 보이는 자세지만, 자신 때문에 희생하는 친구를 위해 르누아르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르누아르 역시 바지유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고급양복을 입은 부잣집 아들 바지유가 〈날개를 펼친 왜가리를 그리는 프레데릭 바지유〉였다.
바지유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르누아르를 언급하기도 했다.
한 곤궁한 친구와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르누아르인데 아직껏 화실도 없지만, 무척 열심히 작업합니다. 저와 같이 숙박하고 제 모델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화실 운영비에 보태라며 뭘 내놓으려 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배려하는 바지유를 위해 어느 날 르누아르는 쪽지 한 통을 남겼다.
나 때문에 자네까지 풍족하게 살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이. 내가 자네 식량은 물론 물건까지 빼앗아 쓰다니.
바지유 역시 그 쪽지에 답장을 잊지 않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좋은 친구와 함께 작업할 수 있어 늘 행복하다네.
모델 리즈 트레오와 마르고
바지유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그림을 그리던 르누아르는 1867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를 그려 다시 한 번 살롱전에 도전한다. 함께 그림을 그리던 모네 역시 자신의 그림을 살롱전에 내보낸다. 세계박람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해였기에 화가들이 작품이 유난히 많이 출품되었던 해였다. 오랜 시간 그림에 공을 들였던 르누아르의 기대가 남달랐던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또 한 번 탈락했다.
그날의 일로 실의에 빠진 르누아르를 위로한 것 역시 바지유였다. 그는 르누아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동반 탈락한 마네와 함께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세계박람회장 한 켠을 임대해 주었다.
바지유의 배려는 다시 붓을 잡을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모델 리즈 트레오(Lise Trehot)가 있었다. 1년간 트레오를 그리며 그림 실력을 다져온 르누아르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모델 트레오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은 〈리즈 트레오〉를 통해 1868년의 살롱전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때부터 그의 그림 속엔 언제나 트레오가 있었다. 아래의 그림 〈오달리스크〉 모델도 트레오이다. “내가 볼 때 르누아르에게 트레오는 모네의 카미유와 같다”는 에밀 졸라(Émile Zola)의 말처럼 둘은 화가와 모델 이상이었다. 그림만으로도 둘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불같이 사랑했고, 행복해했으며, 언제나 함께했다. 그리고 에밀 졸라, 마네, 세잔, 모네와 카미유, 조각가 마르셀 뒤샹, 에드가르 드가 등과도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 앞에 불행이 찾아왔다.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수많은 젊은이가 참전하게 된 것이다. 이 전쟁으로 바지유는 목숨을 잃었고, 모네는 영국으로 몸을 숨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트레오마저 건축가 조르주 브리에르 드 릴(Georges Briere de I’lsle)과 결혼하면서 르누아르 곁을 떠나버렸다.
친구와 연인, 모두를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르누아르가 마음 둘 곳은 오직 그림뿐이었다. 하지만 그해 살롱전에 출품한 그림이 낙선하면서 공식화단과는 연을 끊고 낙향한다.
1874년 파리로 돌아온 모네가 예술가협동조합을 만들면서 르누아르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술가협동조합이 주최한 제1회 인상파 전에 모네,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시슬레 등이 그림을 출품하면서 인상파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인상파 전은 평단의 혹평을 받는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원하던 중개상들에겐 오히려 그들의 그림이 호감이 대상이었다. 이후 열린 인상파 전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르누아르의 형편도 좋아진다.
1975년 르누아르는 일본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부채를 든 소녀〉를 그린다. 생기발랄한 소녀와 화려한 꽃을 그린 그림인데, 둘을 이어주는 것은 일본풍의 부채였다.
당시 화가들에겐 여자가 많았다. 모델은 물론 수많은 여성이 화가의 곁에 머물렀고, 그들 사이엔 사랑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것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거나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치정사건으로 비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르누아르 역시 수많은 여인과 만나고 헤어졌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미련이 적었던 그였기에 스캔들에 휘말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를 사로잡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짙은 청색 옷에 하얀 스카프를 즐겨 매고 핑크빛 볼과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지닌 몽마르트르 출신의 여인 마르고(Margot)였다.
대다수의 화가가 햇빛 속의 대자연을 즐겨 그렸던 것과는 달리 빛의 효과를 강조한 인물화를 주로 그렸던 르누아르에겐 모델이 필요했다. 마르고는 그에 걸맞은 여인이었다. 부드러운 역광(逆光) 속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마르고를 그리면서 르누아르는 그녀를 마음에 담게 된다.
하지만 마르고도 그의 곁을 떠난다. 1879년 2월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이다. 르누아르는 마르고를 살리기 위해 예술가들의 주치의 폴 페르디낭 가셰(Paul-Ferdinand Gachet)에게 매달렸지만, 마르고를 살릴 수 없었다.
마르고 마저 세상을 떠나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르누아르가 찾은 곳은 센 강 변이었다.
르누아르의 눈부신 여름, 정착과 바그너
정을 나누던 연인과 친구를 떠나보낸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젠 결혼을 해서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그때 르누아르의 눈에 들어온 여인이 센 강 변의 식당에서 일하던 종업원이었다.
센 강 변을 산책할 때마다 자주 인근 식당에 들르곤 했는데, 그때 어린 소녀 알린 샤리고(Aline Victorine Charigot)가 눈에 띈 것이다. 하지만 샤리고는 열세 살의 어린 소녀였다. 당시 마흔한 살이었던 르누아르에겐 가당치 않았지만, 자주 뱃놀이에 초대하며 환심을 샀다. 몇 번의 뱃놀이를 즐기는 사이 둘은 연인이 되었고, 샤리고는 그의 모델이 되었다.
1880년 여름, 센 강 변에 정박한 프루네즈(Fournaise) 선의 발코니에 르누아르의 친구들이 모여 점심을 먹으며 왁자지껄 떠드는 장면을 그린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 속에 샤리고가 그려진다. 그녀는 꽃을 꽂은 모자를 쓰고 그림의 왼쪽 가장자리에서 강아지를 어르고 있다.
뱃놀이가 끝나고 샤리고와 강둑에 나란히 앉은 어느 저녁, 청혼하려던 르누아르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게 된다.
“나는 늙고 가난하니 돈 많은 청년을 만나 결혼하거라.”
샤리고는 그 말을 듣자, 집으로 가 버린다. 다음 날 그렇게 떠난 샤리고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르누아르는 화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젤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던 르누아르 앞에 샤리고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옷을 벗었다.
“오늘부터 내가 당신의 모델이 되겠어요.”
샤리고의 당찬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르누아르는 그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림을 끝마치려는 듯 분주했다. 데생이 끝나고 한숨을 내쉴 즈음, 샤리고는 “당신과 결혼하겠다”며 르누아르에게 청혼을 해왔다. 하지만 샤리고 어머니의 마음은 달랐다.
이를 알게 된 샤리고의 어머니가 샤리고를 불러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며 세 가지 이유를 댔다. “르누아르가 유명한 화가이기는 하지만 가난하다. 게다가 나이도 많고 주변에 여자들도 많다.”
그래도 샤리고가 르누아르를 계속 만나자 식당 종업원을 그만 두게 하고 재봉사 일을 배우게 한다.
르누아르도 늙은 내가 너무 젊은 여인을 욕심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급기야 그녀를 잊기 위해 알제리로 훌쩍 떠났다. 1881년 봄 그렇게 헤어진 두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한 그리움을 달래려 각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르누아르가 겨우 마음을 잡고 귀국해 기차역에 당도했는데 역전에 샤리고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있었다. 그 옆엔 조그만 짐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동거하려고 작정하고 집을 나온 것이다. 그날부터 함께 살았다.
그해 가을 두 사람은 이탈리아로 밀월여행을 떠난다.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로 간 두 사람은 처음 본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에 경탄했다.
“오 지혜와 지식이 충만한 그림이야.”
두 사람이 나폴리로 가서 미술관을 순례하는데 르누아르만큼이나 바그너를 존경하던 파리의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 시칠리아에 있는 바그너를 꼭 만나보라고 요구했다.
르누아르도 바그너를 만나고 싶었던 터였다. 나폴리에서 15시간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갔다. 바그너는 마침 〈파르치팔〉을 작곡 중이었다. 그날 르누아르와 바그너의 역사적 조우가 이루어졌다.
음악과 미술의 거장들답게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 끝에 바그너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35분 정도 바그너를 정면에서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자기 초상화를 본 바그너는 웃으며 대단히 흡족해 했다.
“꼭 내가 엄숙한 청교도 목사 같네.”
차분하게 명상에 잠겨 있으면서도 단호한 바그너의 면모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르누아르는 아내에게 초상화에 대해 언급했다.
“바그너 씨의 걸출한 두상으로 내 작은 추억을 만들었구려. 그분 처음엔 쾌활하게 포즈 잡더니 점차 경직되더라구. 오히려 좀 더 속성으로 그렸더라면 여유로운 그림이 나왔을 거야.”
샤리고가 웃었다.
“그래도 당신 손이 워낙 빨라 35분 만에 스케치할 수 있었으니 대단해요.”
1년 후 1883년 2월 13일 바그너가 심장마비로 영면하면서 이 초상화는 영정으로 사용된다.
모호한 관계, 발라동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르누아르는 세 점의 대형작품을 내놓는다. 모두 무도회와 관련되어 있다. 이중 두 작품을 그릴 때 마리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7~1938)이라는 모델을 기용했다.
발라동은 서커스단 곡예사 출신으로, 공중곡예를 하다가 추락해 허리를 다친 뒤 몽마르트르 화가들의 모델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열다섯 살, 글래머임에도 균형 잡힌 몸매와 긴 목, 뚜렷한 얼굴 윤곽과 콧등에 점하나가 인상적이다.
모델 일을 하며 여러 화가와 교제했는데 이는 당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1883년 12월 26일 아이를 낳았는데 아빠가 누구냐로 의견이 분분했다. 나중에 르누아르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르누아르와 발라동 둘 다 함구했다. 특히 발라동은 다른 화가들의 이름을 대면 분명히 아니라고 말했으나 르누아르냐고 물으면 묵묵부답이었다. 여러 소문이 난무하는 가운데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와 다소 다른 작품 〈우산(Umbrellas)〉을 내놓았다. 프랑스에서 우산이 나온 때는 1640년경, 프랑스인들은 비가 내리면 행복해하며 우산 쓰고 걷기를 좋아했다. 이 그림에도 비가 와 행복한 사람들의 표정이 뚜렷하다. 굴렁쇠를 든 어린아이도 마냥 해맑기만 하다.
한편 아이를 낳은 후 발라동은 모델 일을 줄이고 직접 그림 그리는 데 열중한다. 그리하여 살롱전에 출품하여 당당히 입상했고, 정상급의 화가가 되었다.
가족을 가진 르누아르의 변신
발라동이 누가 아버지인 줄 모르는 아이를 출산한 직후였다. 발라동이 주위에 아이 아버지가 르누아르인 듯한 암시를 주자 르누아르의 아내는 조바심이 났다.
그녀도 서둘러 임신하고자 노력했다. 동거한 지 5년만인 1885년 3월 21일, 드디어 첫아들 피에르(Pierre)가 태어난다. 아이가 생기자 비로소 르누아르도 아내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한적한 시골을 자주 찾더니 아예 시골로 이사했다.
화풍도 인상파에서 라파엘처럼 고전풍으로 더욱 기울었다. 르누아르는 본래 여성미가 넘치는 인물화를 그리기 좋아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인상파와 결별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였다. 인상파는 회화의 대상(object)을 빛의 휘광으로 환원시킴으로 대상의 형태나 무게감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인물 고유의 존재감을 살려야할 인물화가 인상주의 기법과 모순을 빚는다. 그런데도 르누아르는 엄격한 고전주의보다 자연스러움과 욕망이 담긴 건강하고 참신한 풍경을 담았다.
1886년 인상파 전에 아예 불참하고 값싼 모델들을 찾기보다 강둑에 앉아 빨래하는 여인 등 평범한 인물들을 그렸다. 1887년 대형작 〈목욕하는 여인들〉에 양식변화가 확연히 일어난다. 고전적 기법에 밝은 광선을 결합해 그렸다. 이런 변혁은 대성공했다. 예술계, 정부는 물론 그림에 문외한인 일반인들까지 박수갈채를 보냈다.
결혼과 점차 너그러워지는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샤리고와 동거한 지 9년 만에 결혼을 결심한다. 1889년 늦겨울 먼저 몽마르트르에 안개의 성이란 이름을 지닌 사방이 정원인 집으로 이사했다. 동거 10년만인 1890년 4월 14일 동료 화가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나이 쉰 살, 샤리고가 서른여섯 살이었다.
아들 피에르도 그제야 호적에 올렸다. 1894년 9월, 후에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는 둘째 아들 장(Jean)이 태어난다. 이때부터 가족이 그림의 포커스가 된다.
아내의 사촌 가브리엘 르나르(Gabrielle Renard)가 함께 살며 1914년 결혼할 때까지 르누아르의 모델 역할을 했다. 1901년 세 번째 아들 클로드(Claude)가 출생한 후부터 르누아르의 그림은 점차 ‘자연에 즐거운 감정을 이입해 꽃과 여인으로 만든 아름다운 부케’라는 평을 듣게 된다.
누드화도 초기보다 살빛을 더 붉은색으로 칠했으며 장미꽃 다발도 화병에 담긴 정물화에서 바람에 자유롭게 날리는 꽃다발의 모습으로 그렸다. 수입도 크게 늘었으나 금욕주의자처럼 소박한 생활을 했다.
늙어가면서 류머티즘이 심해져 손발이 부자유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 무렵 온화한 기후의 니스 근처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겨울이면 그곳에서 지냈다. 일설에 의하면 떨리는 손에 붕대를 감고 장미화만 그렸다고 한다.
슬픔도 찾아왔다. 제1차 세계대전에 장남과 차남이 참전 도중 중상을 입게 된다. 샤리고가 병원과 집을 오가며 간호하다가 1915년 6월 15일 과로로 죽는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가칠한 성격에 독설이 많았던 르누아르는 웃음과 이해심이 많은 노인으로 변해갔다. 1919년 폐병으로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아들 장에게 말했다.
“팔레트와 붓을 가져오너라. 꽃을 그려야겠다.”
꽃을 간신히 그려 간병인에게 주며 “이제야 비로소 그림이 뭔지 이해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성악에서 세레나데는 해거름에 사랑하는 여성이 기대고 있는 창가에서 남성이 부르는 사랑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기악에서도 의미는 비슷하다. 해거름에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되는 곡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하이든이 세레나데를 작곡했을 때 현악 4중주곡 〈세레나데〉를 작곡한 목적은 피곤한 사람과 사무에 분주한 사람들의 위안과 휴식을 위해서였다.
하이든의 초기 작품이기도 해서 멜로디가 쉽고 경쾌해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곡이다. 이제 막 작곡을 시작하고, 좀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 길을 나서던 하이든에겐 아픔이 있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합창 단원이었지만, 변성기가 오면서 노래 부르는 일은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작곡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게 오히려 하이든을 세계적인 음악가로 만든 것이다.
가난했지만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성스러운 음악을 만들어온 하이든은 작곡하는 내내 자기 음악으로 사람들이 평안을 찾길 바랐다.
잘나가는 도예노동자 르누아르 역시 자기 뜻이 아니라 기계에 밀려 다른 길을 택해야 했다. 도자기에 그리던 그림은 하얀 캔버스에 그려졌고 그의 그림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마흔한 살의 르누아르가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딸뻘의 열세 살 어린 소녀 샤리고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제어할 수 없다. 좋아지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어질 뿐이다. 나이도, 신분도, 신앙도, 국경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저 상대를 위한 세레나데만을 부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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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다! 화가, 음악가, 시인 등 예술가의 명작을 이해하려면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편의 명작이 태어나기까지 희로애락이 깃든 작가만의 라이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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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이동연,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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