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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작에게 사
랑을 묻다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어둠 속에 내민 손

요약 테이블
출생 1813년
사망 1901년
주세페 베르디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클래식을 대표한다면 주세페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와 푸치니는 오페라를 대표한다. 그중에서도 베르디는 수많은 오페라 작곡가 중 가장 위대한 전설이며 지금도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오페라극장에서 제일 많이 공연되고 있다. 오페라극장들이 그 덕에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오페라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그가 국민 영웅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인들도 푸치니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베르디를 지목한다. 시공간을 넘어 사랑받는 그의 많은 오페라 가운데 3대 작품 〈리골레토(Rigoletto)〉,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가 특히 인기다.

명작을 기본으로 독창적 오페라를 만든 베르디는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묵직한 저음과 바리톤을 충분히 활용한다.

베르디의 첫사랑, 마르게리타 바레치

베르디의 첫사랑은 그가 음악가로 대성하도록 후원해준 안토니오 바레치(Antonio Barezzi)의 첫째 딸 마르게리타 바레치(Margherita Barezzi)다. 둘은 고향과 나이가 똑같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레 론콜레(Le Roncole)에서 베르디의 아버지는 주점과 여관을 운영했고, 마르게리타의 아버지는 론콜레 근처 부세토(Busetto)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다.

베르디가 태어난 다음 해 오스트리아의 영웅 ‘라데츠키’ 장군의 군대가 론콜레까지 쳐들어왔다. 이 장군은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유명한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 March)’을 만들었다.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마을이 유린당하고 있을 때, 갓난아이였던 베르디는 마을교회 종탑에 몸을 숨긴 어머니 덕에 목숨을 건진다. 이후 여관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삶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베르디는 여관에 머물다가는 집시와 음유시인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몸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재능을 발전시켜줄 만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베르디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이가 그나마 여유가 있었던 아버지의 친구 안토니오 바레치였다. 그는 베르디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음악을 배울 수 있게 했다. 바레치는 오르간을 직접 연주하고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직접 단장을 맡을 만큼 음악을 사랑했다.

베르디는 바레치의 호의에 감사하는 의미로 그의 네 명의 딸에게 성악을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미모가 남달랐던 마르게리타와 사랑이 싹튼다.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을 아낀 바레치는 둘의 관계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바레치의 아내는 가난한 베르디가 탐탁지 않았다.

바레치는 아내와 베르디의 불화가 계속되자, 베르디를 밀라노로 유학을 보낸다. 하지만 기초교육이 부족했던 베르디의 밀라노 국립음악원 입학은 좌절된다. 피아노 연주 실력은 물론 작곡능력도 미흡하다고 생각한 베르디는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빈첸초 라비냐(Vincenzo Lavigna)의 문하생이 되어 체계적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재능에 노력을 더하자 실력은 일취월장한다.

1836년 공부를 마치고 귀향하여 부세토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마르게리타와 결혼에 성공했다. 그때 두 사람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비극적 가족사로 탄생한 위대한 작품

결혼한 다음 해 3월 딸을 낳는다. 그리고 그다음 해 7월 아들을 낳았다. 신혼생활의 안락함에 젖어 있었지만,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고 싶은 꿈은 베르디를 괴롭힌다. 또한 베르디를 사위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장모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밀라노에 가서 당당히 성공해 금의환향(錦衣還鄕)하고 싶은 꿈을 꾼다.

그러던 중 부세토 음악감독 계약이 끝난다. 베르디는 기다렸다는 듯 가족을 이끌고 밀라노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것이 서운한 처갓집으로부터 지원이 끊어지면서 삶은 궁핍해진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태어난 지 한 달 된 어린 딸이 폐렴으로 죽어버린다. 그 뒤를 이어 아들마저 죽고 만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진 베르디를 다독인 것은 그의 아내였다. 똑같은 아픔을 겪었으면서도 그녀는 늘 담대했다.

“아이들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마세요. 우리 부모님께도 당신의 꿈을 이루어 보여 주세요.”

마르게리타의 위로는 베르디에게 힘을 주었다. 그는 혼신을 쏟아 부으며 〈산 보니파초의 백작(伯爵)〉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839년 11월 17일 산 보니파초의 백작은 라 스칼라(La Scala)에서 초연되며 대성공을 거둔다. 이후 14회 연속 상연되면서 베르디를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가족들, 목숨을 잃어간 아이들을 위로하며 틈틈이 써내려간 위대한 명작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베르디의 성공은 불행이 함께했다. 이듬해 5월 말 겨우 27세였던 아내가 수막염으로 쓰러진 것이다. 자식을 잃은 데다가 실의에 빠진 남편을 다독이는 일에 정신을 쏟느라 정작 자신을 돌볼 틈이 없었다. 딸과 아들에 아내까지 잃자, 베르디는 모든 기력을 상실하고 다시 부세토에 돌아가 칩거해 버린다. 하지만 이미 명성을 날리던 베르디를 가만둘 세상이 아니었다.

라 스칼라에서 세 곡의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코미디를 써 달라는 요구였다. 베르디는 한탄했다.

‘아!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의 장난인가. 불과 2년 사이 모든 것을 잃은 내게 주어진 일이 코미디 오페라라니!’

비탄에 잠겼지만, 창작열은 남아있던 베르디가 내놓은 작품은 〈하루만의 임금님(Un giorno di regno)〉이다. 베르디 작품 사상 두 번째로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하지만 첫날 대실패를 하고 공연은 바로 막을 내렸다. 베르디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매일 매일을 자살 충동을 억누르며 지냈다. 회고록에 당시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 사방이 어둠뿐이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흔히들 그 뼈저린 경험이 내 오페라 속 인물들이 극한 상황을 만날 때 극복하는 데 녹아들어 갔으리라 쉽게 논평한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지만 참으로 비정한 말이다. 지금도 나는 내 가족의 삶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최고의 영광을 안겨준 내 모든 작품을 버리겠다. 그들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비극적 가족사가 위대한 작품 탄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되돌릴 수만 있다면 차라리 가족들과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 갇힌 베르디에게 손 내민 페피나

연이은 불운과 작품의 실패로 베르디의 삶은 피폐해지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을 때, 그의 손을 잡아준 여인이 ‘페피나’였다. 그녀의 본명은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이며 라 스칼라의 프리마 돈나였다. 그녀와 함께 베르디에게 용기를 주며 붙들어 준 다른 한 사람은 라 스칼라의 지배인 도메니코 모렐리(Domenico Morelli)였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베르디는 뜻하지 않게 딸 비르지니아와 아들 이칠리오를 잃었다. 그 후 사랑하는 아내 마르게리타마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일로 낙담과 실의의 빠져 있는 베르디에게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 사람은 바로 라 스칼라의 지배인인 도메니코 모렐리와 라 스칼라의 프리마 돈나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다. 그 후 스트레포니는 베르디가 작곡한 〈나부코〉에서 아비가일 역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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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베르디의 삶은 이미 막을 내렸을 터였다. 〈하루만의 임금님〉이 크게 실패하고, 폐인처럼 지내며 부세토로 돌아갈 생각을 하던 차에 모렐리가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나부코(Nabucco)〉를 내밀며 작곡을 의뢰한 것이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낙담하고 있는 히브리인들과 바빌론 왕 나부코의 폭정을 다루고 있는 나부코 이야기는 베르디의 처지와 많이 닮아 있었다. 대본에서 감동받은 베르디는 작곡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삶에 치유가 시작된다.

1842년 3월, 나부코는 라 스칼라극장의 무대에 오른다. 무대에서 울려 퍼졌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다음날 밀라노 거리의 시민들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릴 만큼 작품은 대성공을 거둔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압제를 받고 있던 당시 이탈리아 상황이 작품과 맞물리면서 입소문을 타고 더 많은 사람이 공연장으로 몰려든 것이다. 나부코의 성공은 베르디의 상처도 회복시켰다. 가족상실의 아픔을 딛고 불멸의 작곡가로 가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 것이다.

페피나는 〈나부코〉의 여주인공 아비가일 역을 맡은 라 스칼라의 프리마 돈나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동거하던 테너 나폴레오네 마리아니(Napoleone Moriani)가 두 아들을 버린 채 떠난 상실감에 빠져있던 페피나는 주연을 맡을 처지가 아니었다. 남겨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무리해서 무대에 서느라 성대는 결절 상태였고, 〈하루만의 임금님〉의 실패로 베르디의 능력마저 의심받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페피나는 주연을 자청했다.

베르디는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 주인공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맞게 작곡해 주는 것으로 자신을 믿어준 것에 보답했다. 결국 두 사람은 시너지효과를 내며 성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작곡가와 프리마 돈나의 관계를 넘어 연인의 감정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갇힌 페피나에게 손 내민 베르디

〈나부코〉에서 모든 힘을 기울여 노래한 덕에 성공은 했지만, 페피나에겐 오히려 은퇴의 무대였다. 워낙 열창한 터라 목소리가 탁해진 것이다. 은퇴하고 밀라노를 떠난 페피나는 파리에 자리를 잡고 성악레슨을 하며 자녀들을 길렀다.

자신을 위로하며 〈나부코〉의 성공을 이끄는 데 한몫한 페피나의 은퇴는 베르디에게 안타까움이었다. 그런데 파리에서 그녀의 삶이 또 다른 연민으로 다가왔다. 페피나의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베르디는 파리로 향했다. 2년 전 상실감에 빠져있던 자신을 위로했던 것처럼, 페피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둘의 만남은 이미 싹터있던 연인의 감정에 동병상린(同病常鱗)의 감정까지 겹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둘은 파리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때 페피나는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소설, 《동백 아가씨》를 읽고 있었다. 청년 알프레도가 파리 사교계의 꽃 비올레타를 흠모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는 페피나의 처지와 닮아 있었다. 페피나는 베르디에게 자신이 읽고 있는 소설을 오페라로 만들어보는 것이 어떠냐며 의중을 물었다.

《동백 아가씨》

1848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1852년에 5막짜리 연극으로 개작해 큰 성공을 거둔다. 1853년에는 베르디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만들었다. 이 소설은 화류계 여성의 자유분방한 환락을 그리면서 에로틱한 상상력과 사회적 질서라는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슬픈 사랑 이야기 이면에는 프랑스 상류층의 물질만능주의 비판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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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춘희(椿姬)]〉다. 라 트라비아타가 세계적 걸작에 오르면서 서른네 살의 베르디와 서른두 살의 페피나는 자식과 가정을 상실한 아픔을 딛고 정상에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경제적인 풍요도 함께 누린다.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처럼 사랑의 잔 앞에 지난날의 아픔을 잠재웠다. 두 사람은 파리를 떠나 고향 부세토로 금의환향했다.

뒤늦은 결혼식과 일시적 위기

고향 사람들은 베르디의 금의환향을 반긴다. 하지만 함께 나타난 페피나에 대한 질시도 많았다. 페피나가 베르디의 돈에 반한 거라며 질타를 쏟아낸다. 마르게리타를 잊지 못해 홀로 사는 베르디가 크게 성공하자 호강하려고 유혹했다는 풍문에 페피나는 좌절한다. 그런 페피나를 위로한 게 베르디였다. 심지어 장인을 찾아가서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오해를 푼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1859년 8월 29일, 베르디는 페피나를 데리고 제네바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 여행 중에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동거한 지 12년 만이었다. 증인으론 마차꾼과 종 치는 소년, 단 두 사람뿐이었지만 이렇게라도 베르디는 페피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자기 마음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던 첫사랑 마르게리타와 두 자녀만큼이나 페피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베르디의 배려였다.

두 사람은 중간에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50년간 해로한다. 베르디가 스무 살 어린 테레사 스톨츠(Teresa Stolz)와 염문을 뿌리는 위기에도 페피나는 그의 곁을 지켰다. 테레사 스톨츠는 〈아이다(Aida, 고대 이집트에 포로로 잡혀간 공주)〉 초연 때 주연을 맡아 이미 인기 높은 소프라노 가수였다. 그녀가 그렇게 된 것도 베르디와 6년간 애인으로 지냈기 때문이다.

테레사 슈톨츠

그녀는 이탈리아 초연에서 아이다 역을 맡아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베르디보다 20세가 어리지만, 그와의 연인관계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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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의 주연이 된 것도, 진혼곡(Messa da Requiem)과 돈 카를로(Don Carlo)의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베르디의 지목 덕분이었다. 하지만 연회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등 페피나의 끊임없는 미움이 스톨츠를 괴롭혔다. 베르디는 아내에게 시달리는 스톨츠를 배려했다. 그 덕에 스톨츠는 견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이 그럴수록 페피나의 마음고생은 심해진다. 그럼에도 페피나는 잘 견뎌내며 생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베르디 곁을 지킨다.

1897년, 페피나는 베르디 곁에서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잘 있어요. 당신 세상에서 나와 인연 맺었던 것처럼 저 세상에서도 다시 만나서 함께 살길 바래요.

그리고 오랫동안 간직해온 편지 한 통이 전해진다. 함께 묻어주길 소원한 그 편지는 51년 전 베르디가 페피나에게 보낸 거였다. 페피나가 떠난 빈자리는 스톨츠가 지킨다.

오페라 작곡으로 벌어들인 돈은 무료 요양원을 짓는 데 쓰인다. ‘음악가 휴식의 집(Casa di Riposo)’이라 이름 지어진 요양원은 가난하고 늙은 음악가들의 안식처였다.

한 기자가 베르디에게 물었다.

“베르디 선생님. 자신의 작품 중 어느 작품이 최고 걸작이라 생각하십니까?”

“음악가 휴식의 집입니다.”

이처럼 넓은 아량의 베르디도 1901년 영원한 휴식을 취한다. 마지막 베르디가 가는 길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연주했다.

그 뒤 1년 후 스톨츠도 아름다운 세상과 작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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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집필자 소개

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펼쳐보기

출처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 저자이동연 | cp명평단문화사 도서 소개

명작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다! 화가, 음악가, 시인 등 예술가의 명작을 이해하려면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편의 명작이 태어나기까지 희로애락이 깃든 작가만의 라이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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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주세페 베르디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이동연,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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