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명작에게 사
랑을 묻다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Sergei Vasil’evich Rakhmaninov

무기력에서 탈출하다

요약 테이블
출생 1873년
사망 1943년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피아노곡은 무엇일까?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evich Rakhmaninov, 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이다. 처음 들을 때는 여러 빛깔의 작은 물고기들이 조용한 연못에 떼지어 다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바다에 고래 떼가 사나운 파도를 가르며 유영하고 있는 착각이 드는 음색으로 바뀐다. 곡을 통해 다양한 느낌을 그려내기에 그를 피아노의 화가라고도 부른다.

삶의 속도가 빠르고 시대가 롤러코스터처럼 변화무상한 요즘 들어도 그의 음악은 후련하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의 연주를 최고로 꼽는다.

구 소련의 오래된 도시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평생 4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곡이라는 3번이 유명하고, 그다음이 20세기 최고의 발라드곡으로 손꼽히는 2번이다.

우울증을 경험한 후에 만들어진 2번 곡은 작가의 마음이 전해진 탓인지 음악을 들은 뒤 정신적인 치유를 경험했다는 사람이 많다. 미국 가수 에릭 칼멘의 〈All by myself〉가 2번 2악장을 모티브삼아 만들어졌다.

190미터의 거구였던 라흐마니노프는 폈을 때 30센티미터가 넘는 손가락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했다. 유난히 길고 유연한 손은 13음정을 가볍게 짚었다.

작곡뿐 아니라 지휘자 겸 전설적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손가락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곡을 만드는 바람에 다른 피아니스트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는 이런 라흐마니노프를 ‘6피트 반의 괴물’이라 불렀다.

큰 손으로 힘과 기교를 겸비한 연주를 할 때면 관중들은 넋을 잃었다. 피아노 연기에 유리한 신체조건을 가졌음에도 그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내 연주가 매번 다양하기를 바란다. 피아니스트라면 적어도 한 곡을 천 번 이상 연주한 경험과 천 번이 넘는 경청을 통해 비교하고 판단해 보아야 한다.

모스크바 음악원과 나탈리아 사티나

러시아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 바실리(Vasily)와 황실 장군의 딸인 어머니 루보프(Lubov) 사이에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귀족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삶은 궁핍했다.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 때문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태어날 무렵 시작된 여자와 도박에 빠진 바실리는 드넓은 영지와 수많은 가산을 모두 탕진한 채 가족을 버리고 야반도주 해 버렸다. 큰 빚만 안겨주고 떠난 아버지로 인해 남겨진 가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살고 있던 노브고로드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곳에서 음악원을 다녔으나 후일 피아노의 화가라 불리던 그의 어린 시절 성적은 좋질 않았다. 급기야 전 과목 낙제점을 받고 음악원에서 퇴학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겨우 열 살이던 그에게 아버지의 부재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는데, 그에게 힘이 되어주던 누나마저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런데도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는 라흐마니노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슬픈 추억이 깃든 고향에서도 멀리 떨어진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유학 보냈다. 그곳엔 아버지의 사촌인 실로티(Siloti)가 있었기에 의지가 되었다. 그 집에 머물면서 음악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때 나중에 아내가 되는 6촌 동생 나탈리아 사티나(Natalia Satina, 1877~1951)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함께 휴가를 보내거나 농사일을 거들면서 친분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 당시에 두 사람은 먼 친척 관계로 지냈다.

나탈리아 사티나(1890)

러시아 이바노프카 지방에서 찍은 사진으로 사촌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라흐마니노프(뒤쪽 좌측에서 두 번째로 서 있는 사람). 나탈리아 사티나는 앞줄 좌측에 앉아 있다.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은 라흐마니노프는 숨겨진 재능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때 그가 작곡해서 육촌 형제들에게 하나씩 헌정한 것이 〈여섯 노래(six songs)〉이다. No. 4 〈내게 노래 부르지 마세요(Sing not, To me Beautiful Maiden)〉는 나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내게 노래 부르지 마세요〉를 통해 라흐마니노프는 떠나 버린 아버지와 죽은 누이를 그리워했다.

또한 이 무렵 음악적 재능을 살려줌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큰 의지가 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였던 니콜라이 즈베레프(Nikolai Zverev)다.

니콜라이 즈베레프

1880년대 후반 즈베레프와 그의 학생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라흐마니노프이며, 왼쪽에서 두 번째가 독일 후기낭만파와 인상파의 영향을 받고 이후 인습에서 탈피, 신비적 종합 예술의 의상(意想)을 탐득하여 음과 색채의 결합을 시도했던 알렉산더 스크랴빈(Alexander Nikolayevich Skryabin)이다.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라흐마니노프의 처지를 깊게 이해했던 즈베레프는 개인레슨비도 완전히 면제해주면서까지 라흐마니노프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런 스승도 그의 곁에 오래 있지 않았다. 1893년 즈베레프가 죽고, 연이어 가장 존경하던 음악가 차이콥스키(Chaikovskii)까지 사망하자 그에겐 또다시 상실의 고통이 찾아온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스크바 음악원을 후원하는 귀족 미망인 덕분에 상실감은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금단의 열매, 집시 여인

리쉬코바 부인은 1893년 5월 자신이 후원하던 음악원을 방문하던 중에 라흐마니노프를 보게 된다. 훤칠한 키에 음악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던 그에게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리쉬코바 부인은 졸업을 앞둔 그를 자신의 별장에 초대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지에 머물면서 작품을 만들어보라며 별장을 빌려준다.

그해 여름부터 그 집에 머물며 라흐마니노프의 작곡이 시작된다. 화려한 거실에 머물렀으며 항상 새로운 숲과 개울과 들이 보이는 영지를 쏘다녔다. 밤이면 체호프(Chekhov)의 소설 《길을 따라서》를 읽었고, 새벽엔 졸업 작품 〈바위(The Rock op. 7)〉을 작곡했다.

라흐마니노프가 호사를 누리며 작곡으로 한여름을 보내는 동안 리쉬코바 부인도 행복하게 그 곁을 지켰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라흐마니노프를 통해 보상받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아버지처럼 돌보아주던 스승이 사라진 뒤의 허전함을 위로받고 있었다.

그가 별장에 머무는 동안 안나 로디젠스카야(Anna Lodyzhenskaya)를 만나게 된다. 안나는 유럽의 전통과 문화에 박식했다. 여름 들판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친밀해졌다. 동유럽 출신의 집시 여인이었던 안나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안나는 친구 페터 로디젠스키(Peter Lodyzhensky)의 부인이었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었지만, 가까워질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연을 농노로부터 전해 들은 리쉬코바 부인은 저택에 두 사람을 초청해 따로 시간을 갖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둘이 이후 어떤 사이로 발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가까이할 수 없음을 안 라흐마니노프가 〈보헤미안 카프라이즈(Caprice Bohemien op.12)〉를 헌정하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집시 선율이 담긴 이 곡은 고마웠던 마음을 담아 안나에게 보낸 이별 곡이었다. 이후 교향곡 1번도 작곡하게 되는데, 이 역시 안나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이다.

첫 교향곡의 저주와 톨스토이의 냉대

음악원을 졸업하고 3년이 지난 1897년,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오페라단의 지휘자가 된다. 이 무렵 평생 친구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러시아의 전설적 베이스 가수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표도르 샬랴핀(Feodor Chaliapin, 1873~1938)이다.

표도르 샬랴핀과 라흐마니노프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교향곡 1번으로 생애 첫 공연도 열게 된다. 그날의 지휘는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Aleksandr Glazunov, 1865~1936)에게 맡겨진다. 차이콥스키의 후계자란 평을 듣는 지휘자였기에 공연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컸다. 하지만 순조롭게 흘러가던 공연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연주가 불협화음을 내면서 공연 자체가 뒤죽박죽되어버린 것이다.

참아가며 공연을 지켜보던 라흐마니노프는 분노했다. 준비도 소홀했지만 술을 좋아했던 글라주노프가 취한 상태에서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엉망이 된 무대의 책임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몫이었다.

다음 날 공연에 대한 혹평이 쏟아졌다. 비난 일색의 평가에 기름을 부은 것은 러시아 5대 작곡가 중 한사람인 세사르 퀴(César Cui)였다. 그는 “이번 교향곡은 지옥의 음악학교에서나 인정받을 수 있지, 땅 위 인간들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완전히 지옥 사람들이 크게 기뻐할 곡이다”라는 최악의 독설을 퍼부었다. 그의 평가는 주요 신문마다 크게 보도되면서 전도유망한 작곡가의 길을 걷던 스물네 살의 라흐마니노프는 주저앉아 버렸다.

그날 이후 ‘가장 무참한 4년’을 보낸다. 이 무렵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 가장 존경하는 작가였던 톨스토이를 만난 자리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듣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절망하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를 통해 마음의 위로가 되리라 여긴 그날, 자신의 피아노 반주(伴奏)에 맞춰 동행했던 표도르가 베토벤 〈교향곡 5번〉으로 시작하는 〈운명〉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톨스토이가 혹평했던 것이다.

“이봐 젊은이들. 듣기 거북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음악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나? 베토벤이나 레르몬토프나 푸시킨이나 다 엉터리야.”

용기가 되리라 여긴 러시아 최고 노작가와의 만남이 최악이 되는 순간이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표도르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우울증에 헤매는 소심한 친구가 걱정되어 라흐마니노프의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

자신이 편하게 내뱉은 말에 두 젊은이가 당황하자, 톨스토이는 그들을 위로했다.

“젊은 친구들, 노인네의 투정으로 이해하게. 웃자고 한 얘기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게. 자네들을 괴롭게 할 생각은 아니었네.”

한동안 말이 없던 라흐마니노프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우리가 왜 괴로워합니까? 베토벤이나 푸시킨도 아닌데······.”

무기력에서 탈출하다

톨스토이의 집을 나선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칩거에 들어갔다. 예술가의 고독에 묻혀 사람들과의 왕래도 끊었다. 모든 사람을 밀어내던 그가 단 한 사람, 나탈리아 사티나에게만은 마음을 열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한집에 살며 순진하게 어울렸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모든 것을 받아주던 소녀 시절의 감성을 그대로 간직한 나탈리아는 힘들어하는 라흐마니노프 곁을 지키며 그의 예민함을 받아주고 이해해 주었다.

누구보다 먼저 생각해주고, 칭찬해주는 그녀 덕에 자존감을 회복한 라흐마니노프는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육촌 동생이었음에도 청혼을 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는 친척 간에도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국교인 정교회 법으로 친척 이성 중 첫째와는 혼인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결혼은 무산되었다.

다시 라흐마니노프는 절망했다. 공연은 실패했고. 정신적 우상으로부터도 비난도 받았다.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결혼마저도 무산되자 드넓은 러시아에서 홀로 내던져졌다고 생각한 라흐마노프는 깊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그때부터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무속, 종교, 민간처방 등 별의별 수단을 다 써 보았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면 요법 치료사인 니콜라이 달(Nicolai Dahl) 박사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 1901년 1월부터 4월까지 허약해진 자아를 긍정적 최면을 통해 튼튼하게 해주는 ‘자기암시(Self-suggestion)’ 치료를 받았다. 인지교정(認知矯正)이 되자 비로소 무의식 속의 부정적 압력이 해소되고, 온몸을 짓누르던 노이로제에서 해방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때 자신을 짓누르던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준 달 박사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헌정한 곡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마음의 병으로 고생했던 마음이 음악에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치료 음악으로 불리기도 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강렬한 러시아 이미지가 묻어나는 곡으로도 유명하다.

그해 초가을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독주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그 연주회는 그간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하듯 청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는다. 그가 진정한 작곡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나탈리아 사티나와 결혼

라흐마니노프의 성공은 그의 결혼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탈리아가 “남들도 다 친척끼리 결혼을 하는데 왜 나만 못하게 막느냐”며 황제를 설득해 달라고 조른 것이다. 그해 겨울 그녀의 아버지는 짜르 황제에게 딸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한다. 황제는 정교회의 큰 행사인 사순절을 지나면 결혼해도 된다는 허락을 내린다.

결혼을 허락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라흐마니노프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단숨에 〈12개의 로망스(12 Songs Opus)〉를 작곡한다. 그리고 사순절이 끝나고 29일 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주례는 외조부가 장군으로 현역에 있을 때 부대에 근무하던 러시아 정교회 사제가 맡았다. 주례신부는 장군의 후손답게 음악에서 빛나는 별이 되라고 당부했다. 어렵게 성사된 결혼이 끝난 후 나탈리아가 그날의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모스크바 외곽의 한 부대에서 새 출발을 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데 장대비가 쏟아져 웨딩드레스까지 젖었다. 부대로 들어가는 긴 길목에 군인들이 도열해 축하해 주었다.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하고 온 후 10년 동안 라흐마니노프는 가장 활기찬 작곡 활동을 한다. 〈죽음의 섬(The Isle of the Dead Op.29)〉, 〈피아노 협주곡 3번(Piano Concerto No.3)〉 등을 이 시기에 내놓았으며 이들 작품은 모두 초연부터 갈채를 받는다.

1905년, 볼쇼이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클린카 상까지 받으면서 그는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혁명 분위기였던 러시아에서 음악가로서 안정은 어려웠다. 급기야 한 청년 단체에서 근본적 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가져와 서명을 요구하자, 나탈리아의 종용에 사인하면서 정부의 미움을 받은 뒤로 러시아에서의 입지가 흔들린다. 결국 압력에 못 이겨 볼쇼이극장을 사임한 뒤 독일 드레스덴으로 이주한다. 그때부터 오직 작곡과 연주에만 몰두한다.

이때 그를 매혹게 하는 그림 한 점을 만나게 된다.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1827~1901)의 연작 〈죽음의 섬〉이었다. 히틀러조차 매혹되어 세 번이나 전시회를 찾았다고 전해지는 그림 속에는 작은 배 한 척이 작은 섬으로 가고 있다. 그 섬엔 죽음을 상징하는 무성한 사이프러스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신비스러움과 깊은 침묵이 묻어났다. 곡은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았다.

죽음의 섬: 세 번째 버전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1883년, 캔버스에 유채, 80×150cm, 베를린 구국립 미술관 소장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탈리아와 함께 보낸 이바노프카 별장에서 전후좌우로 펼쳐진 광대한 호밀밭을 보며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했다.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호밀밭은 흘러다니는 뭉게구름만이 산처럼 솟아있을 뿐 그 끝이 어딘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가장 소련 적이며 시적 통찰력이 가장 풍부한 메머드급 작품이었던 이 곡은 평생 예술동지였던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에게 헌정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칭찬할 만큼 신뢰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호프만은 이 곡을 단 한 번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연주하지 못했다. 곡을 연주할 만큼 큰 손을 가지질 못했다.

미국행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라흐마니노프의 재능을 확실히 보여 주는 곡이다. 그는 이 곡으로 작곡가와 연주가로서 재능을 확실히 각인시켜 미국 무대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의 바람대로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모든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경외로운 곡이 된다.

1909년 11월 28일, 라흐마니노프는 뉴욕에서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가운데 직접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초연한다. 이 공연 이후 연주회 계약요청이 밀려든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짜르 황제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두 사람은 더 이상 러시아와 인연을 맺을 수 없게 된다. 결국 나탈리아와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러시아와 결별한다.

이후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더욱 큰 성공을 거두면서 국제적인 명성과 찬사를 얻게 된다. 무대에만 서면 건반을 완전히 장악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여 관중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이끌어내곤 했다. 하지만 육중한 신체와 달리 청중의 호응에 답례하는 것도 망설일 만큼 소심했다. 연주가 끝나면 나탈리아가 감사하다고 인사하라며 남편을 일으켜 세우는 일도 많았다. 공연을 앞두고 머리가 아프다, 자신이 없다는 투정을 부려 나탈리아를 속태우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이런 남편을 깊이 이해하고 지지해주었다.

내향적이고 사색적인 남편을 다독였고, 그런 남편을 이끌고 연주여행을 다녔다. 유럽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던 중 베이루트에서 니콜라이 달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베이루트로 이주해 온 그가 연주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날 마침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연주가 예정되어 있었다. 연주를 마친 라흐마니노프가 달 박사를 가리키며 “이분이 오늘 연주한 곡을 헌정받은 분입니다. 곡의 탄생도 이분 덕분에 가능했습니다”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청중들은 두 사람을 위해 큰 박수를 보냈다.

그의 음악이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돈과 명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혹독한 연주 스케줄로 인해 만성 요통과 관절염을 앓는다. 몸이 아플수록 고향이 그리워지듯 그는 특히 러시아의 설경을 무척 그리워했다.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1931년 〈뉴욕타임스〉에 러시아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 일로 러시아는 그의 음악 전곡을 금지곡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자 연주 수입금 전액을 구호비로 보낼 만큼 러시아를 사랑한다.

1943년 3월 28일, 20년간 자신을 외면했던 러시아를 그리워하며 라흐마니노프는 생을 마감한다. 남들보다 커다란 손가락으로 박자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연주하는 루바토(rubato) 기법으로 건반을 질주하던 음악가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을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시름에 잠길 때마다 그의 연주를 들었다는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은 “그의 피아노 소리는 묵직한 가슴속에 간직한 황금색 비밀에서 나오는 생명의 소리이다. 그 소리에 내 모든 시름은 사라지고 만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탈리아는 남편의 자료를 정리해 미의회에 기증한다. 이후 그 자료는 라흐마니노프 기록보관소에 영원히 남게 된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동연 집필자 소개

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펼쳐보기

출처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 저자이동연 | cp명평단문화사 도서 소개

명작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다! 화가, 음악가, 시인 등 예술가의 명작을 이해하려면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편의 명작이 태어나기까지 희로애락이 깃든 작가만의 라이프..펼쳐보기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이동연, 평단문화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