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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작에게 사
랑을 묻다

이사도라 덩컨

Isadora Duncan

맨발의 여사제

요약 테이블
출생 1877년
사망 1927년
이사도라 덩컨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네 아버지는 엄마의 인생을 망친 악마다.”

이모가 어린 시절부터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1877~1927)을 세뇌하듯 한 말이다. 은행가였던 아버지는 덩컨이 갓난아이였을 때,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면서 가족을 버렸다.

덩컨이 일곱 살 때였다. 초인종이 울려 대문을 열고 나가보니 실크 모자를 쓴 멋진 신사분이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서 있었다. 그 신사는 덩컨에게 “내가 네 아빠야”라며 꽃다발을 건넸다. 놀란 덩컨이 집안으로 뛰어들어 외쳤다.

“엄마, 아빠라는 분이 찾아오셨어요.”

덩컨의 말에 뛰어나온 엄마는 딸의 손에서 꽃다발을 빼앗아 신사에게 던져주고는 문을 잠가 버렸다.

그날 맥없이 돌아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평생 덩컨에게 기억되는 이미지로 남는다. 덩컨의 아버지는 시적 감성이 넘치는 사람으로 언제나 여성들을 매료시켰다. 이런 아버지가 덩컨에겐 오히려 자부심이었다.

덩컨은 영원한 맨발이었다. 태어날 때도 맨발이었고, 고전 발레와 싸우며 현대무용을 개척할 때도 맨발이었다. 불멸의 무용가가 된 후에도 맨발로 도로 위를 춤추고 다녔다.

방치되어 좋았던 어린 시절

덩컨은 1878년 샌프란시스코 해변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가출로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로 인해 덩컨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음악 레슨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방치했다. 그 덕에 각자 취미대로 마음껏 놀면서 자랐다. 덩컨은 회고록에서 방치된 채 바닷가에서 가난하게 자란 것을 무척 감사하다고 적고 있다.

그녀의 성장기에 중요한 사건은 모두 바닷가에서 일어났다. 춤 동작도 파도의 리듬에서 나왔다. 달빛만 고요히 비치는 적막한 바닷가 갯벌에 일렁이는 물결이 만들어내는 무늬는 오랫동안 이사도라의 가슴 속에 신신한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또한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자라는 바람에 자발적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인이나 가정교사를 두었다면 자기표현의 기회가 줄어들고 길드는 인생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 발아래 양탄자에 누워 교육받았다. 학교 교육은 내게 쓰레기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쳐주며 음악과 시, 고전을 읽어 주었다. 덩컨의 문학적 소양과 예술 감각은 그렇게 익혀졌다. 그 무렵 덩컨의 삶을 변화시킨 두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집과 로버트 그린 잉거솔(Robert Green Ingersoll)의 책이 그것이다. 이중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를 어머니는 즐겨 읽어 주었다.

월트 휘트먼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였다.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미국 문학에서 ‘자유시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풀잎》(1855)이다. 덩컨이 영향을 받은 《나 자신의 노래》(1855)는 총 52편으로 되어 있는 장시다. 19세기 미국의 급격한 사회 변화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민주주의 정신을 바탕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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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육체를 찬양하고 내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천국의 기쁨, 지옥의 고통 모두 나와 더불어 있다.
천국 기쁨은 차츰 키워 나가고 지옥 고통은 생경한 언어로 번역해 내련다.
우리는 너무 고개 숙이고 애원만 해왔다. 대통령이라고 남보다 뛰어날까.
그 짓 것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나는 그까짓 것보다 더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가벼이 깊어가는 밤과 더불어 걷는 자이다.
대지는 날 위해 한층 찬란한 은빛 구름을 떠 올리고 있다.
대지여, 네가 나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듯 나도 너에게 열렬한 사랑을 주노라.

세상 무엇과도 비교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고 노래한 시다. 잉거솔의 책 중에선 《왜 나는 무신론자인가(why I am Agnostic)》를 즐겨들었다. 책을 읽어주면서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주지시켰다.

“산타는 물론 신도 없다. 오직 너의 의지만이 너를 도와주는 거야.”

“행복만이 유일한 선이다. 행복해질 시간과 장소는 바로 지금 여기이다. 행복해지는 방법이란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로버트 그린 잉거솔

그는 미국에서 변호사, 정치가로 활동했다. 19세기 미국에서 교회를 무시하면서 종교 문제를 합리적으로 고찰할 것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위대한 불가지론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의 저서 《왜 나는 무신론자인가》(1896)는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 자신의 일생의 임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여 저술한 책으로, 《성경》을 맹렬히 비판하고 인본주의 철학과 과학적 합리주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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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컨은 자신의 정신적인 아버지는 휘트먼이며 스승은 잉거솔이라고 즐겨 말했다. 다섯 살에 공립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둔 뒤로 그가 시간 대부분을 보낸 곳이 공립도서관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도 그는 공립도서관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한때 아버지와 정열적인 사랑을 나눴던 눈이 예쁜 도서관 사서는 덩컨을 격려하며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녀 덕에 소설, 시, 좋은 책, 나쁜 책 가리지 않고 수천 권을 읽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숲길에선 맨발로 춤을 추었다.

도서관에 가지 않는 날은 인적이 끊긴 숲 속이나 바닷가를 찾아 나무와 물결과 혼연일체가 되어 나체로 춤을 추기도 했다. 이때부터 ‘바람과 바다, 별 등의 유영(遊泳)’, ‘꽃들의 만개’, ‘어머니가 피아노 치며 들려주었던 노래’ 등을 춤으로 표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칠 결심을 하게 된다. 발레가 인간의 몸을 억지로 뒤튼다며 싫어했던 것도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그녀의 천성에서 나온 발언이다.

바닷가에서 춤추는 이사도라 덩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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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수송선이 낳은 그리스 예술의 르네상스

덩컨은 청소년이 된 후 술집에서 캉캉 춤을 추었다. 하지만 이건 춤이 아니라며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그리곤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연단체를 찾아갔다.

고향을 출발한 기차를 타고 가며 이런 글을 남겼다.

어린 순례자인 나를 태우고 기차는 우람한 로비 산맥과 대평원을 지나 동쪽으로 달린다. 이 긴 여정에 나는 빈손이나 황금 같은 재능을 가졌기에 조금도 두렵지 않다.

매니저 앞에서 멘델스존(Mendelssohn)의 〈말 없는 노래(Songs Without Words)〉에 맞춰 춤을 추었다. 매니저는 극장에 어울리지 않는 춤이라며 거절한다.

실망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시카고로 건너가 ‘오거스틴 데일리’ 극단에 들어간다. 극단 측이 주 무대인 뉴욕으로 덩컨을 보내 2년간 활동한다. 이때 작곡가 에설버트 네빈을 만나 대표곡 〈수선화〉 등에 맞춰 펄럭이는 춤을 춘다.

미국사회에서 처음으로 허벅지가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고 춤을 춰 충격적이라는 언론보도와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윈저 호텔 지하층에 살며 뉴욕 상류 사교계의 연회장마다 초청을 받아 춤추고 다녔다. 꽤 많은 수입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재로 모든 것을 다 잃은 뒤 미국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미국 투어 때의 이사도라 덩컨(1915~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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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가축 수송선을 타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몸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린파크 벤치에서 노숙하며 새로운 일을 찾던 중에 런던에 저택을 마련한 귀부인이 파티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게 된다.

뉴욕에 있을 때 저택에서 춤을 춘 적이 있는 귀부인이었다. 파티장을 찾아온 덩컨을 반갑게 맞은 귀부인은 영국의 황태자, 공주, 백작 등 귀족을 소개해주고 그 자리에서 공연을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녀의 춤은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특히 황태자로부터 ‘그리스 예술의 르네상스’라는 찬사를 듣는다. 그날 이후 유럽 사교계 최고의 댄서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사교계뿐 아니라 일반 공연요청도 밀려들면서 파리, 부다페스트 등 그녀가 가는 곳은 어디든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매진사례가 이어진다.

심지어 독일 베를린에서는 2시간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이 떠나지 않고 앙코르를 연호하는 바람에 2시간 더 춤을 추어야만 했다. 공연이 끝날 때면 덩컨을 태울 마차는 말 대신 베를린 대학의 학생 수백 명이 끌었다. 수백 명이 몰려들어 마차를 밀고 끈 것도 모자라 호텔 앞에 내린 덩컨이 방에 들어가는 동안 학생들은 무등을 태웠다.

여사제로 등극한 덩컨

덩컨은 박물관 애호가로도 유명했다. 런던과 파리에 머물 때는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들르는 게 휴식이었다. 박물관에 오갈 때면 길 위에서 춤을 췄다. 이 장면을 신기해하는 행인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저기 달나라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덩컨은 특히 그리스 도자기에 매료되었다. 그중에서도 춤추는 동작이 그려진 도자기들은 더욱 유심히 살펴보았다. 먼 옛날 그리스의 춤을 살려내고 싶었다. 박물관 유적에 그려진 그림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그리스로 찾아가고자 했다.

그리스로 가는 여행길은 편안한 여객선 대신 고대인들이 타고 다녔던 돛단배를 타고 원시적인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돛단배를 타고 선상에서 바이런의 시를 노래하며 그에 맞춰 춤을 추게 된 것이다.

우리 헤어지기 전에 아테네 아가씨여, 내 마음 돌려주든 내 남은 마음마저 가져가오.
그대 머리칼에 애무하는 에게 해 바람에 맹세합니다.
그대 두 볼의 홍조에, 어린 사슴 같은 그대 눈망울에도 맹세합니다.
아테네 아가씨여, 이 몸이 비록 이스탄불로 떠날지라도
내 마음 전부 아테네에 있소. 당신이 내 생명이기에.
아테네 아가씨여, 헤어지기 전에(Maid of Athens, ere we part)

에게 해의 수많은 섬 사이를 지날 때마다 덩컨은 감격에 겨워 외쳤다.

섬들이여, 그리스 섬들이여.
사포가 불타는 사랑을 하고 노래했던 섬들이여.
델로스가 일어나고 훼브스가 솟아오른 이 바다.
그때 여름은 이 바다에 지금도 여전하건만
섬들을 이제 그들은 황혼 속으로 가라앉고 있구나.

아테네에 당도한 덩컨은 제일 먼저 파르테논 신전을 찾았다. 그곳에서 춤을 추면서 그리스 비극과 고대 코러스를 추억했다. 그동안 박물관에서 사모하며 익혔던 그리스의 모든 정서가 덩컨의 춤사위에 흘러나왔다. 그리스 여행 이후 비엔나로 러시아로 다시 춤 공연을 다녔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저절로 나온 춤을 유럽 각지에서 추었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이사도라 덩컨(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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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춤을 본 관객이 중병에서 치유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유럽에서 ‘베를린의 여신’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춤에 사람들은 종교적 황홀경까지 경험하게 된 것이다.

하얀 튜닉만 입고 맨발에 샌들 차림인 여사제가 탄생했다. 이 여사제의 공연장에 들것에 실린 환자들까지 밀려들었다.

결혼 없는 사랑이라면 좋아요

1905년 어느 밤, 베를린에서 춤을 추는데 앞줄 한 사람의 파란 눈동자가 유별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는 대감독 고든 크레이그(Gordon Craig)였다. 무대에서 내려온 덩컨에게 크레이그가 작업을 걸어왔다.

“오늘 무용 독창적이고 참으로 훌륭해요. 하지만 이 무대 장치는 내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이오.”

“감독님도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이 무대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생각해온 것이랍니다.”

“그래요? 어쩌면 내 아이디어와 이리도 흡사할 수 있을까요? 당신을 늘 내 무대 장치에 세우고 싶어 상상했더니 서로 통했나 봅니다.”

그 자리에서 덩컨은 크레이그의 스튜디오로 따라갔다. 영문을 모르는 덩컨의 어머니는 못된 놈이 딸을 납치해갔다며 대사관과 경찰서에 신고했다. 그날부터 2주일간 덩컨은 자취를 감췄다. 모든 공연은 취소되고, 신문엔 ‘덩컨 양, 편도선염으로 중태’라는 기사가 발표되었다.

세상이 소란스러운 중에도 두 사람의 밀월 행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딸 디어드리(Deirdre)가 태어났다. 그레이크는 이제 아이도 태어났으니 가정을 꾸미고 평범한 주부가 되어 자신을 내조해 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덩컨은 달랐다. 결혼 없는 사랑, 결혼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를 권리를 원했다. 결혼은 노예적 제도이며 자주성이 강한 예술가들에게 이혼 법정에서 서로 싸우는 씁쓸한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덩컨이 결혼에 대한 견해를 자기 무대에서 밝히자 청중의 반은 열광하고 반은 야유를 보냈다.

유럽으로 건너 온 지 8년이 지나 미국에 귀국했을 때, 덩컨에 대한 세상의 시각은 많이 변해 있었다. 떠날 때 무명에 가까웠던 덩컨이었지만 이젠 미국에서도 진가를 인정하고 환영했다. 다시 파리로 왔는데 억만장자 패리스 싱어(Paris Singer)가 구애를 해왔다. 베르사유에 ‘덩컨스쿨’을 열어주며 적극적으로 구애한 덕에 둘의 사랑은 시작되었고, 아들 패트릭(Patrick)이 태어났다. 패리스 싱어도 그레이크처럼 둘의 결혼을 주장했다. 이때에도 덩컨은 같은 주장을 했다.

“결혼은 특히 예술가에게 미친 짓입니다. 내가 전 세계 공연을 다닐 때 재벌인 당신이 특별석에 앉아 일생을 나를 찬미하며 소비할 자신이 있나요?”

“나하고 결혼하면 순회공연을 접어야지.”

“그럼 난 뭘 하죠?”

“요트도 타고, 한적한 별장에서 휴식도 취하고, 내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한 세계 정상들과 담소도 나누고······.”

“저한텐 그런 파티가 아무 의미도 없는데요.”

그러자 패리스 싱어가 실험적으로 3개월만 함께 살아보자고 제안했다. 드디어 덩컨은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재벌 집 마님 행세를 시작했다. 계속되는 만찬의 호스트가 되어 유명 인사들과 교제하며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2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덩컨은 지쳐버렸다. 결국 패리스 싱어의 저택을 나와 다시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두 아이의 죽음과 서두른 결혼

비가 부슬거리던 어느 봄날, 덩컨은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 시내에 있는 무용실로 나와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습은 길어지고 아이들이 지루해하는 것이 미안했던 덩컨은 그들을 먼저 귀가시킨다. 오후가 되면서 빗줄기는 굵어지고 있었다. 그날 아이를 태운 승용차가 센 강 변을 지나던 중 시동이 꺼지는 일이 발생한다. 비를 뚫고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보닛을 열고 고장 부위를 확인하던 중 언덕 아래로 굴러간 승용차가 센 강에 침몰하면서 두 아이와 보모가 모두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침몰한 인근을 수색한 지 1시간 30분 만에 두 아이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날부터 센 강 변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덩컨의 모습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사도라의 자녀 디어드리와 패트릭(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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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를 잃은 뒤 상심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것은 러시아 정부였다.

“당신의 모든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픔이 깃든 파리를 떠나 러시아로 오십시오. 무용학교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아이를 잃은 기억이 남아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오라는 러시아 정부의 설득은 주효했다. 1914년 덩컨은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접고 러시아로 가게 된다. 그때 덩컨을 마중 나온 이가 스물다섯 살의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이었다. 가냘픈 몸에 금발을 가진 예세닌은 죽은 아들 패트릭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모성애가 발동한 덩컨은 예세닌을 좋아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15개월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예세닌은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렸다. 심지어 ‘더럽게 늙은 암캐 같으니’라며 폭언을 일삼고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지 사들이는 기벽이 있었다.

덩컨은 그런데도 예세닌 곁을 지켰다. 그런데 미국순회 공연을 함께 다니던 도중 예세닌은 자기 기분을 조절하지 못하고 손목을 면도칼로 그어 자살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결혼무용론자였던 덩컨은 자신의 신념을 꺾고 결혼하는 바람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결국 러시아를 떠나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오십 살이 되던 날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친구와 드라이브를 나선 덩컨은 목을 감고 있던 붉은 스카프 자락이 자동차 바퀴에 휘감기면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다.

〈맨발의 이사도라〉 주제곡

화려한 삶을 살다가 영화 같은 죽음을 맞이한 여인, 이사도라 덩컨은 태어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별이 빛날 때’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경영하던 은행은 파산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는 가족의 붕괴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비극적인 그녀의 삶에 시작이었다. 두 아이의 익사와 모든 것을 잃은 뒤에 만난 예세닌의 폭력과 자살을 감당해야 했으며, 드라이브 도중 스카프가 바퀴에 걸려 질식사하기까지 그녀의 삶은 영화와 같았다.
〈맨발의 이사도라〉는 차분한 선율로 그녀의 아픔을 노래한다. 굴곡 많은 삶이었지만,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진 않고 있다. 그저 빠르고 느린 선율을 통해 그녀의 격정과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춤을 보는 것만으로도 중병이 치유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것처럼, 평생 예술에 대한 열정만으로 살았던 맨발의 여사제가 지금 마음의 병이 깊은 우리에게 다가와 위로와 평안을 선사하듯, 곡은 천천히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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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집필자 소개

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펼쳐보기

출처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 저자이동연 | cp명평단문화사 도서 소개

명작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다! 화가, 음악가, 시인 등 예술가의 명작을 이해하려면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편의 명작이 태어나기까지 희로애락이 깃든 작가만의 라이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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