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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의 숨겨
진 왕가 이
야기

계동궁

다른 표기 언어 桂洞宮 동의어 남연군의 종가
요약 테이블
위치 북부 광화방(조선시대)
소재지 종로구 율곡로 75 현대빌딩 서측 일부

요약 계동궁(桂洞宮)은 한성부 북부 광화방에 있던 남연군의 종가(宗家)로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이자 고종의 종형인 완림군 이재원이 살았다. 조선 초기 이곳에 서민 의료기관인 제생원과 외교 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이 있었다. 계동이라는 지명은 제생원에서 유래하는데, 제생동이 계생동으로 다시 계동으로 바뀌었다. 고종이 갑신정변 때 잠시 피신한 적이 있어 ‘계동궁’이 되었다.

계동궁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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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중의 명당

계동궁이 있던 한성부 북부에는 광화방(廣化坊), 양덕방(陽德坊) 등이 있었는데 경우궁은 양덕방, 계동궁은 광화방에 위치해 있었다. 양덕방(陽德坊)에는 승문원(承文院)과 제생원(濟生院)이 있었다.

승문원은 조선 시대에 외교 문서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처음에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로 설치되었다가 1411년(태종 11년)에 승문원으로 개편되었다. 초기 승문원은 한성부 북부 양덕방(계동, 桂洞)에 있었으나, 세종 때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 관한 문서를 처리하는 중요한 관청이므로 궁궐 내로 이전했다. 그리고 을미개혁(1895년) 이후 폐지되었다.

제생원은 1397년(태조 6년) 지방의 약재를 수납하여 혜민국과 동서활인서와 같이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리고 1460년(세조 6년)에 의약 개발과 일반 사람의 치료를 맡아 보던 혜민국과 합해졌고 관사를 폐지했다. 이 터는 세종 때의 서운관(書雲觀) 관리 최양선이 창덕궁 서쪽에 천하의 명당이 있다면서 창덕궁을 이곳으로 옮겨야 나라가 만대(萬代)로 이어진다고 주장한 곳이다. 풍수지리에 밝은 그는 이곳이 명당이라고 자신했다. 이에 이진(李鏇)은 이렇게 설명했다.

“최양선이 살펴본 제생원 자리의 판국은 주맥(主脈)이 씩씩하고 벌의 허리와 학의 무릎으로 그 기운이 잡됨이 없이 의젓하게 들어오다가 우뚝하게 둥근 언덕으로 솟아 여러 가닥을 뻗쳐 사방을 둘러 모아놓고 중앙에 높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이것은 지리학에서 산이 크면 터가 작은 곳이 좋은 곳이고 산이 작으면 터가 큰 곳이 좋은 곳이라고 한 말이 증거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악(華嶽, 삼각산)의 형세가 하늘을 치받아 우람하게 뭉치고, 그 기운이 맹렬하게 남쪽으로 달려 자리를 잡았으니, 이러한 자리의 중앙에서는 특히 작은 산이 아니고서는 주맥이 될 수가 없는 것이며, 주작(朱雀)으로 말하면 목멱산이 바로 비치고 왼편과 오른편을 돌아보면 여러 겹으로 둘러 에웠사오니, 그 국세의 중심을 말씀하면 중정(中正)하여 치우치지 않고, 3면의 양기가 고루 갖추어졌으니, 이것은 그 기운 모인 중에도 또 취할 것이 있는 땅입니다.”

즉, 창덕궁의 주맥인 응봉(鷹峯)의 지기(地氣)가 창덕궁을 비껴나 승문원과 제생원에 모였다는 주장이다. 세종은 최양선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곳에 별궁을 지으려 했지만, 반대 여론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랬던 이 터에 경우궁과 계동궁이 들어선 것이다. 또한 현재 제생원터 표지석 옆에는 커다란 보건복지부 표지석이 있어 터의 대물림을 알리는 듯하다.

남연군의 종가를 이어가다

정조는 은신군(사도세자의 서자)을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양자로 삼도록 했다. 따라서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간 남연군은 연령군의 궁인 안국동별궁에 살았다. 남연군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 이하응(흥선군)은 남연군으로 봉작된 후에 안국동별궁에서 태어났다. 장자 이창응(흥녕군)에게 후사가 없어 이정응(흥완군)의 큰아들 이재원을 양자로 삼았다.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묘를 이장하기 위해 재산을 정리했다고 하는데 이때 안국동별궁을 정리했던 듯싶다. 이하응은 일가를 이끌고 계동으로 이사하여 운현(雲峴)의 위쪽에는 장손인 이재원이, 아래쪽에는 이하응이 살았다. 종가인 이재원의 집에는 은신군과 남연군의 사당을 모셨다.

이재원은 1853년(철종 4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1863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고종이 등극한 후 중용되어 1868년 경복궁 중건 때에는 영건도감 제조를 겸임했다. 이후 이조판서,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평안도관찰사, 경기도관찰사, 광주부유수, 강화부유수 등을 지냈다. 갑신정변(1884년) 때에는 개화파가 좌의정에 추대했고, 정변이 실패한 후에는 수구파 정부가 이조판서에 임용했다. 1887년(고종 24년)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아 한때 평택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판돈녕부사에 제수(除授)되었다.

갑신정변의 신정부 요인들은 개화파와 왕실 종친으로 구성되었는데, 개화파들은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해외로 도망했다.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자객에게 암살되었고, 조선으로 옮겨진 시신은 양화진에서 효수될 정도였다. 반면에 왕실 종친들은 고종의 배려로 살아남아 관직을 유지했다. 물론 역모에 가담한 이들은 고종이 내려주는 관직에 나가지 않아 귀향을 가기도 했다. 이재원이 갑신정변 후 7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고종은 친히 제문을 지어주고 ‘효정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황제국이 되고 나서 ‘완림군’에 추증했다.

이재원의 아들 이기용(李埼鎔)은 16세에 이미 9품이 되었고, 22세에 정3품에 오르고 자작이 된다. 8 · 15광복 후에는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후사가 없어 의친왕의 아들 이광(李鑛 ,형길)을 양자로 들여 남연군가를 이어갔다.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서구의 문물을 경험하면서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일으킨 운동이다. 1884년 10월 17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가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시작했다. 안국동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정변을 도모했으나 여의치 않아 별궁 옆 초가에 불을 질렀다. 이때 민영익은 우영사(右營使)로 연회에 참가했다가 칼을 맞고 쓰러졌다. 김옥균 · 홍영식 ·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이 궐내로 들어가 변고를 아뢰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를 경우궁으로 옮겼다. 또한 일본 공사에게 지원을 요구하여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와서 호위했다.

10월 18일에 김옥균 등이 좌영사 이조연, 후영사 윤태준, 전영사 한규직, 좌찬성 민태호, 지중추부사 조영하, 해방 총관 민영목, 내시 유재현을 경우궁 앞 대청에서 죽였다. 군영의 좌 · 전 · 후 영사가 모두 죽었고 우영사 민병익은 묄렌도르프 집에서 치료받고 있었다. 따라서 서광범을 협판교섭사무로 김옥균을 혜상 공국 당상으로, 서재필을 전영 정령관으로, 사관생도 부장 12인을 모두 별군관(別軍官)으로 차하하였으며 홍영식을 좌우영사로, 박영효를 전후영사로 삼고, 김옥균을 호조 참판으로 이재원을 의정부 좌의정으로 홍영식을 우의정으로, 이재완을 병조 판서로, 윤웅렬을 형조 판서로, 김홍집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윤식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그리고 이날 오전, 고종은 이재원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잠시 머문 후에 창덕궁으로 들어가 관물헌에 머물렀다.

10월 19일 이들은 정령을 발표한다. 그중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 중인 1885년경에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쓴 일기라는 《갑신일록(甲申日錄)》에 14개 조항이 남아 있다. 이 일기가 일본인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정변이 목적하는 바를 알아보기 위해 그대로 적어 보았다.

1. 대원군을 불일내(不日內)로 모셔올 것.
1.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人民)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제도를 마련하고, 사람으로서 벼슬을 택하되 벼슬로서 사람을 택하지 말 것.
1. 온 나라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어려움을 펴게 하는 동시에 국용(國用)을 유족하게 할 것.
1. 내시부(內侍府)를 혁파하되, 그 가운데 우수한 인재가 있으면 모두 등용할 것.
1. 전후(前後) 간에 간악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기로 가장 드러난 자는 정죄(定罪)할 것.
1. 각 도의 환상(還上) 제도는 영구히 와환(臥還)할 것.
1. 규장각을 폐지할 것.
1. 급히 순사(巡査)를 두어 절도를 방비할 것.
1.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혁파할 것.
1. 전후(前後) 간에 유배되었거나 금고(禁錮)된 사람을 작량(酌量) 방면(放免)할 것.
1. 4영(四營)을 1영(一營)으로 통합하고, 1영에서 장정을 뽑아 급히 근위대(近衛隊)를 설치할 것.
1. 무릇 국내 재정에 관한 것은 모두 호조(戶曹)가 관리하고, 그 밖의 재무(財務)를 맡은 관서(官署)는 일체 혁파할 것.
1. 대신(大臣)과 참찬(參贊)은 합문(閤門) 안의 의정소(議政所)에서 회의하여 완전히 결정한 다음에 정령(政令)을 반포 시행할 것.
1. 정부육조(政府六朝) 이외의 용관(冗官)은 다 혁파하되, 대신(大臣) 참판(參判)으로 하여금 작량(酌量) 의정(議政)하여 품계(禀啓)하게 할 것.

10월 19일 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병사들이 창덕궁으로 들어오자 고종은 옥류천 뒤쪽 문으로 나가 북묘로 향했다. 놀란 일본 공사도 병사를 거느리고 궁을 떠났는데, 김옥균 ·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은 일본 병사를 따라 나갔고, 홍영식 · 박영교 및 생도 7명 만이 고종을 뒤따라 북묘로 갔다. 청나라 통령 오조유가 고종을 모시고 가려 하자 홍영식 등이 말리다가 모두 죽었다. 자시에 선인문 밖에 이르러 오조유의 영방에서 머물렀다.

20일에는 일본 공사가 도성 밖으로 나갔고, 김옥균 ·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은 일본 공사관에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 연구》에 의하면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왕을 위협한 것, 외세에 의존한 것, 인심이 불복한 것, 청군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지 못하고 약소한 일본군을 끌어들여 청군에 대적한 것 등이다. 갑신정변의 결과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졌고, 일본과 ‘한성조약’을 맺었으며 일본과 청나라의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그동안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국민의 개화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되었고, 청나라를 구원의 나라로 일본을 원수의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다.

계동궁 연못, 번댕이

이 시기에 계동궁은 경우궁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요 장소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경우궁’과 ‘이재원의 집’에 있다가 창덕궁 관물헌으로 환궁했다고 하니 이때까지는 이재원의 집이었던 듯싶다. 그러나 고종이 삼군부(三軍俯)로 나가 친국을 행할 때 죄인 신기선이 “무감(武監)이 계동궁에서 나오더니 상께서 들어오라시는 명을 전달했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볼 때 갑신정변 이후 왕이 머물렀던 이재원의 집을 공식적으로 ‘계동궁’이라 불렀던 듯하다.

당시 이재원이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나 ‘군’의 직위도 아니었다. 이재원이 완림군으로 추증된 것은 1899년이고 계동궁이 그 이전부터 실록에 나오는 것을 보면, 단지 왕의 사촌형이 사는 곳으로서 ‘궁’을 붙인 것이 아니라 왕과 왕비가 지냈던 곳이었기에 ‘궁’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는 연령군의 신도비가 있었다. 이곳은 연령군묘와 낙천군묘를 모신 곳으로 당시 금천현 번당리, 지금의 서울시 영등포구 대방초등학교(여의대방로 35길 14, 구 신길7동 1444번지) 교정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큰 연못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계동궁 연못’이라고 불렀다. 이곳을 번댕이(樊塘里 ,번당리의 속칭)라고도 불렀는데, 1936년 4월 1일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이 학교가 있는 언덕에 연령군과 낙천군의 묘가 있었고, 입구에 연령군 신도비가 있었다.

1940년 경성지구 구역 정리로 연령군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있는 생모 명빈 박씨묘 옆으로 옮겨지고, 신도비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1967년 8월 3일 육군사관학교(구 서울시 노원구 공릉2동 230번지 1호) 내로 옮겨지고 이곳에는 왕자의 비(碑)가 있던 길이라 ‘왕자비길’이라는 길 이름이 붙여졌으나, 현재는 ‘가마산로 88길’로 바뀌었다.

그리고 대방초등학교 담장에는 ‘숙종왕자 연령군훤묘비지’라고 적어 놓은 흔적만 남아 있다. 당시 이곳은 경기도 지역으로 한양 밖이어서 묘소로 이용되었던 땅이었는데 세월이 지나 서울의 영역이 되면서 또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서울대방초등학교

연령군과 낙천군의 묘가 있던 언덕에는 현재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담벼락에는 ‘숙종왕자 연령군훤묘비지’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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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군묘는 은신군, 흥친왕 등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흥선대원군묘 근처에 있었는데, 2006년에 화장하여 새로 모셨다.

계동궁 주인들의 신도비

연령군 신도비는 육군사관학교 내에, 은신군의 신도비는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에, 남연군 신도비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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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궁가의 신도비를 보면 연령군 신도비는 육군사관학교 내에 있고, 은신군 신도비는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에 있다. 남연군 신도비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다. 연령군가는 낙천군, 은신군, 남연군, 흥녕군, 완림군, 이기용, 이광으로 내려오다가 이광(형길)이 죽는 바람에 대가 끊겼다. 현재 계동궁에는 현대빌딩과 율곡로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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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국사편찬위원회, 《태종실록》, 태종 11년 1411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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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국사편찬위원회, 《태조실록》, 태조 6년 1397년 8월 23일.
  • ・ 국사편찬위원회, 《세조실록》
  • ・ 황현, 김준 역, 《매천야록》, 교문사, 20쪽.
  • ・ 국사편찬위원회, 《철종실록》
  •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실록》
  • ・ 국사편찬위원회, 《순종실록》
  • ・ 대한제국 의친왕숭모회 http://cafe.daum.net/daehan815
  • ・ 박은숙, 《갑신정변 연구》, 역사비평사, 2005, 138 · 143 · 503 · 504 · 505 · 507 · 508 · 547 · 548 · 554 · 556쪽.
  • ・ 김옥균, 조일문 역, 《갑신일록》, 건국대학교출판부, 1971년, 20 · 98 · 99쪽.
  • ・ 《동작구지》, 서울특별시동작구, 1994, 122 · 700쪽.
  • ・ 동작구 문화관광 http://tour.dongjak.go.kr

이순자 집필자 소개

1953년 출생. 1975년 숙명여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6년간 경일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뒤늦게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현재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로..펼쳐보기

출처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 저자이순자 | cp명평단문화사 도서 소개

조선의 왕족이 일생 동안 살았던 곳, 왕가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왕가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왕가라는 키워드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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