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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남부 명례방(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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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종로구 세종대로 125, 135 서울시의회, 코리아나호텔 |
요약 덕안궁(德安宮)은 한성부 남부 명례방에 있던 궁으로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의 사당이다. 본래 이 근처는 경운궁의 일부로 명례궁이 있던 자리에 황자를 출생한 귀비 엄씨를 위해 명례궁터에 궁을 건립하고 '경선궁(慶善宮)'이라 불렀다. 엄황귀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 경선궁 자리에 사당을 짓고 '덕안궁'이라고 했다. 1929년에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명례방의 명례궁
세조의 잠저는 한성부 남부 훈도방에 있던 영희전이다. 1454년(단종 2년)에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에 적몰(籍沒)한 가사 한 채를 받는다. 계유정난의 정난공신으로서 하사받은 것이다. 대역 죄인의 재산은 관청에서 몰수하였고, 이것을 공신들에게 하사했는데 이때 세조가 받은 집이 한성부 남부 명례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훈도방 궁과 명례방 궁은 명동성당 뒤의 진고개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훈도방 잠저는 의숙공주와 부마 정현조에게 주어 의숙공주가(家)가 되었고, 명례방에 있던 집은 잠저로 '명례궁'이 되었다. 이후 명례궁은 실록에 기록된 것을 미루어보면 광해군 때에는 이미 한성부 서부 황화방 정릉동으로 옮겨져 있었다.
현종 때 영안위 홍주원의 아들 홍만회가 명례궁 구기(舊基)에 집을 짓고 살게 된다. 《사의당지(四宜堂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명례궁의 옛터로 인조 때 이책의 집을 정명공주에게 내린 것인데 정명공주가 아들 홍만회에게 주어 살게 했다고 한다.
인조반정 이후 선조의 딸 정명공주는 홍주원과 혼인하여 안국동별궁에서 살았고, 막내아들을 분가시키면서 인조로부터 받았던 명례궁에 집을 지어 살게 한 것이다. 이 집에 관하여는 후손 홍경모가 지은 《사의당지》가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현재에도 그 위치와 규모에 대해 알 수 있는데 1671년부터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명례궁은 정릉동으로 이전한 뒤, 이책의 소유가 되었다가 정명공주에게 넘어와 홍만회의 집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나 1895년(고종 32년) 일본인 세와키 도시오 의학사가 한성병원을 창설했는데, 그 자리가 명례궁터로 위치는 명치정 2가 25번지였다. 이후 1904년 공립으로 변경되어 공립 한성병원이 되었고, 1906년에 개축 · 확장했으며, 1907년에 대한의원으로 합쳐졌다. 이후 이곳은 일본인 거류민단(타국에서 같은 민족끼리 만든 단체)의 소유가 되었으며, 1914년에는 경성부가 사들여 공공사업장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조선일보사 주체로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이곳을 수리하여 경성부립도서관(현재 남산도서관)으로 사용했다.
한성병원과 경성부립도서관이 있던 명치정 2가 25번지는 현재 명동 10길(구 명동2가 25번지) 일대로, '명례방길'이라는 길 이름으로 남아 있으니 명례궁은 이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례궁 지역은 명례방이나 명례동으로 불리며 오늘날 명동이 되었다.
정릉동의 명례궁
정릉동은 태조 이성계 때 신덕왕후가 죽자 취현방 북녘 언덕에(현재 중구 정동 일대) 신덕왕후의 묘를 쓰고 정릉(貞陵)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했다. 도성 내에 능을 쓸 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태조는 왕후를 지극히 사랑하여 이곳에 능을 쓰고 화려한 석물로 단장했다. 태조가 죽자, 의정부에서 정릉의 영역을 정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정릉이 경중(京中)에 있는데도 그 조역(兆域)이 너무 넓으니, 청하건대 능에서 백 보 밖에는 사람들에게 집을 짓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이를 허락했다. 이에 세력 있는 집에서 분연하게 다투어 좋은 땅을 차지했는데, 좌정승 하윤이 여러 사위를 거느리고 이를 선점하였다."고 하니 정종 때 정사공신, 태종 때 좌명공신이 된 하윤이 사위들과 함께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1409년에는 정릉을 사을한(沙乙閑, 현재 성북구 정릉)의 산기슭으로 옮겼고, 석물은 땅에 묻었다. 그런데 1410년 여름 홍수로 청계천의 다리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었다. 이에 8월에 돌다리를 만들기로 하고, 정릉을 옮길 때 묻었던 석물들을 사용하여 돌다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광통교다.(이 다리는 청계천을 복원할 때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현재에도 600여 년 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정릉을 옮긴 후 이곳에 왕실 가족들이 거처하게 되는데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군과 잘산군이 명례궁 지역(현재 덕수궁)에 살았다. 1457년 9월 2일 의경세자(덕종) 사후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니11세자빈 한씨(인수대비)와 월산군과 잘산군(자을산군)은 궁궐 밖으로 나와 살았을 것이다. 세조는 의경세자의 사당(효정묘, 孝靖廟))을 세우려 했는데 지체되었고, 1469년 새로 세운 효정묘에 신주를 옮기고 월산군으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게 했으니 효정묘는 월산군과 잘산군이 사는 정릉동에 지었을 것이고, 월산군과 후손이 이곳에서 사당을 관리하며 살았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피란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궁궐이 불타버려 월산군가에 머무르기도 했다.
판서 윤국형이 찬한 《갑진만록(甲辰漫錄)》에는 선조가 정릉동 행궁으로 들어가 궁궐을 이루는 과정을 적고 있다.
"세 곳의 대궐이 모두 난리에 불타서 대가가 계사년 환도한 뒤에, 정릉동 양천도정(陽川都正)의 집과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대내(大內)로,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삼았으며, 또 부근의 대소인가는 궐내의 각사(各司)로 썼다. 을미 · 병신년 무렵에 이르러 길 동편에 문을 세우고 서편에도 문을 세웠으니, 동쪽은 정문(正門)이고, 서쪽은 서문(西門)이다. 이전에는 사면에 담장이 없어 나뭇가지로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이름을 시어소(時御所)라고 했다. 계림군의 집 동쪽 담이 한혜(韓蕙)의 집과 나란히 있어 처음에 비변사로 썼는데, 대내가 협소하여 비변사는 궐외(闕外)로 내보내고 한혜의 집까지 통틀어 대내로 썼다. 목책(木柵)이 아주 허술하였는데, 좌상 이항복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비로소 긴 담을 쌓아 대궐의 모양이 되었다."
여기에서 양천도정은 월산군의 증손자 이성(李誠)을 말한다. 계림군은 월산군의 손자로 성종의 둘째 아들 계성군에게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곳에 살고 있었다. 계성군은 서학 부근에 살았고 서학의 공한지(空閒地)를 계성군의 집으로 넣은 일도 있었으며, 유생들이 계성군의 집에 돌을 던진 일도 있었다. 심의겸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동생이었고, 한혜는 성종의 외조부 한확의 후손이며 임영대군의 외증손으로 이곳에 살고 있었다. 이곳을 처음에는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으며 광해군이 즉위한 후인 1611년 '경운궁'으로 고쳐 불렀다.
인조가 등극한 후에는 경운궁(慶運宮)의 석어당과 즉조당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원래의 주인들이 돌아와 살았고, 이때에 이르러 명례궁이 옮겨져 있었으므로 다시 명례궁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종 때에는 인조와 귀인 조씨의 소생 숭선군이 집을 짓는데 국가에서 명례궁터를 떼어주어 동산을 넓히게 했다. 이후 명례궁은 대비전(大妃殿)의 개인 재산으로 이어오다가 영조 때에는 세손(정조)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명례궁을 하사받았고, 정조 때에는 혜경궁 홍씨의 속궁이 되기도 했다.
이후 명례궁과 경운궁이 혼용되어 전해지기도 하는데, 경운궁 권역 안에 명례궁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겼으며, 궁궐을 넓히면서 다시 경운궁으로 불렸다. 순종이 즉위(1907년)하여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경운궁은 선왕이 거처하는 장소로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의미의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명례궁의 유물로는 '명례궁인(印)'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철제로 만든 네모난 도장으로 보주형 끈이 달려 있다. 윗면에는 '명례궁(明禮宮)', '상(上)'이라고 음각되어 있고, 바닥의 도장면에는 '명례궁(明禮宮)'이라고 양각되어 있다.
시위상궁, 황귀비가 되다
엄황귀비는 엄진삼의 딸로 고종 황제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다. 어린 나이에 입궐하여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이 되었다. 고종의 승은을 입은 사실을 명성황후가 알게 되어 궁 밖으로 내쫓겼다고 전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엄상궁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도 함께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명성왕후를 황후로, 왕세자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고종이 황제에 오른 지 8일 만에 궁인 엄씨가 황자를 낳았다. 이날 호산청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설치한 호산청 기록이 《정유년호산청소일기》로 남아 있다. 이 일기에 따르면 호산청에서 산모의 뒤처리를 하고, 태를 창덕궁 능허정 남쪽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자 탄생 이틀 후에 궁인 엄씨는 '귀인'에 봉작되었으며, 1900년 '순빈'으로 승격되고, 1901년 '경선'이라는 궁호를 받고 '순비'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명례궁터에 지은 경선궁(慶善宮)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당시 비어 있던 황후의 자리에 순비 엄씨를 정식 황후로 추천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올라왔으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매천야록》에는 엄비를 황후로 책봉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그중 두 번째 이유는 숙종 때 희빈 장씨 이후 후궁을 정식 왕비로 올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비 엄씨에게 황후가 아닌 황귀비라는 후궁 최고의 직위를 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고종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일본의 야욕을 알아챈 엄황귀비는 동생 엄준원에게 학교 설립에 관한 일을 상의하고 진명여학교 설립을 엄준원에게, 명신여학교(현재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신정왕후의 조카 조영하의 부인 이진숙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진명여학교에 창성궁을, 명신여학교에 용동궁을 학교 부지로 내렸다. 그리하여 1906년 진명 · 명신여학교를 개교했다. 이때는 일제가 황실 소유의 재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하여 궁들을 빼앗기 직전이었다.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영친왕 이은은 1897년에 태어나 1900년 영왕,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엄황귀비는 아들 이은을 황세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이복형 의친왕은 일본 · 미국을 순회하여 서양 문물을 배우고 1905년에 귀국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그리고 순종에게 후사가 없자 이복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장성하고 강골인 의친왕보다는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11세의 영친왕이 그들에게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같은 해 12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어린 영친왕을 유학시킨다는 명목으로 도쿄로 데리고 간다.
엄황귀비는 어린 아들을 홀로 타국에 보내고 비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1911년 아들을 보고 싶어하는 엄황귀비에게 영친왕의 모습을 담은 활동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일본 군대교육을 받는 장면 속에서 영친왕이 맨손으로 주먹밥을 먹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덕수궁 즉조당에서 눈을 감았다. 공식적인 사인은 장티푸스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순종이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었으므로 순헌황귀비 엄씨도 순헌귀비로, 영친왕은 황태자에서 왕세자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순헌귀비가 죽자 시호를 '순헌', 궁호를 '덕안', 원호를 '영휘'라 했다. 1912년 8월 1년 상을 치르고 신주를 덕안궁에 모셨다.
1920년 영친왕은 일본의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 이방자)와 결혼하여 이듬해 장남 진(晉)을 얻었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칭했다. 1931년 둘째 아들 구(玖)를 낳았고, 1945년 8 · 15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원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3년 11월 박정희 대통령(당시 박정희 의장)의 도움으로 56년 만에 귀국했으며 귀국 후 7년여 동안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면서 정신박약아를 위한 '자행회', 농아와 소아마비아를 위한 '명휘원'을 세워 소외 계층을 돌보았다. 영친왕 사후에도 이방자 여사는 이 사업을 계속하여 '명휘원', '자혜학교'로 키웠으며 1989년에 운명하여 영친왕이 있는 홍유릉 근처 영원에 함께 묻혔다.
영친왕 사후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시호를 '의민(懿愍)'으로 올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신주는 의민황태자와 황태자비로 종묘 영녕전 16실에 마지막으로 안치되어 조선 왕실의 마지막을 고했다. 첫째 아들 진은 1922년 고국을 방문했다가 갑자기 죽어서 할머니 엄황귀비의 묘인 영휘원 옆 숭인원에 묻혔고, 둘째 아들 구는 2005년 영원 좌측 언덕에 묻혔다.
경성부민관에서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덕안궁은 1929년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왕직은 비어 있는 덕안궁을 팔기 위해 내놓았다. 〈매일신보〉에는 '엄순비 신전(神殿)이던 덕안궁 철회, 희망자가 있으면 불하할 터, 경내 총 천오백 평'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경성부는 1933년 경성전기주식회사가 100만 원을 기부하여, 4,912㎡(1,486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1935년 경성부민관을 완공 했다. 이때 경성부에서 이왕직 소유의 덕안궁터 일부를 매입하여 부민관을 지었다.
경성부민관은 다목적 공연장으로 이용되었으며, 1945년 7월 24일에는 친일파들의 연설 도중 애국 청년들이 연단을 폭파한 사건이 발생했다. 8 · 15광복 이후 '시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다가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2002년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등록문화재 제11호)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일보 사옥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35(구 태평로1가 61번지 1호)에 있다. 조선일보는 처음 중구 관철동에서 시작하여 삼각동, 수표동, 견지동, 연건동을 거쳐 1935년에 태평로 1가 61번지 일대 약 4,628㎡(1,400평)의 대지를 사들이는데 이때 덕안궁 일부가 포함되었다. 이 터 위에 5층 건물을 준공하여 조선일보 사옥으로 사용했다. 신문사의 규모가 커지자 1969년에 구관을 철거하고, 주변의 대지까지 사들여 1972년에 22층 건물의 코리아나호텔을 세워 호텔과 조선일보 본사로 사용하고 있다.
덕안궁 앞은 원래 황토현으로 막혀 있었으나 광화문통과 연결하여 도로를 내기 시작했고, 여러 차례의 도로확장 공사로 경성부민관과 조선일보사는 땅을 내주게 되었다. 따라서 덕안궁의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단지 덕수궁 권역의 덕안궁 모습이 태평로 도로에서부터 서울시의회 건물과 조선일보사 별관에 이르는 언덕에 있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현재 코리아나호텔 주차장 자리쯤에 덕안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성공회성당 앞에 '명례궁터'라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고, 덕안궁은 표시조차 없다. 1912년에 세워져 1929년에 이전한 덕안궁은 가장 최근의 왕실 사당이면서도 그 흔적조차 없어 더욱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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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조선의 왕족이 일생 동안 살았던 곳, 왕가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왕가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왕가라는 키워드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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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덕안궁 –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이순자,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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