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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동부 숭교방(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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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종로구 대학로 95, 103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관 뒤 |
요약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 창경궁의 정원이었던 함춘원(含春苑)이 있었다. 영조 때 사도세자가 죽은 후 이곳에 사당을 짓고 ‘수은묘(垂恩墓)’라 했으며, 정조는 즉위하자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으로 높여 불렀다. 정조는 아버지를 한 달에 한 번 참배하기 위해 창경궁에서 경모궁으로 가는 길목에 월근문과 일첨문을 내기도 했다. 고종 때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신주를 종묘로 옮기고 나서, 영희전에 있던 신주를 이곳으로 옮겼다.
창경궁의 정원, 함춘원
함춘원은 조선 시대 때 창경궁 동쪽에 딸린 정원이었다. 성종은 1484년에 태종이 상왕이 되어 머물렀던 수강궁터에 창경궁을 짓고, 창경궁의 안산인 마두봉(馬頭峰)을 보호하라는 풍수지리에 따라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밖에 별정군을 배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금했고, 담을 구축했으며 대문을 만들고, 함춘원 동편인 낙산까지 전 지역에 있던 민가를 철거했다. 그러나 중종은 백성을 다시 돌아와 살게 했다.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사복시(司僕寺)에 나눠주어 이후 140여 년간 말을 기르는 방마장(放馬場)으로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순회세자의 부인인 공회빈 윤씨 시신을 임시로 묻는 일도 있었다. 공회빈 윤씨는 1592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상중이던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황급히 궁궐을 떠난다. 공회빈 윤씨의 관은 그대로 둔 채였다. 다음 해에 돌아와 시신을 창경궁 후원에 가매장했다고 하여 함춘원 곳곳을 파헤쳤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죽은 사도세자
영조 때 이곳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가 들어섰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죽은 뒤 7년 후,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태어났다. 2세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0세에 혼인했으며, 15세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13년 동안 대리청정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762년 2월에는 왕세손(정조)의 가례가 있었고, 5월에는 액정 별감 나상언의 형 나경언이 동궁의 허물 10여 조를 적어 올렸다. 나경언의 상소는 영조와 홍봉한, 윤동도가 보았고, 홍봉한이 불태우기를 청한다. 따라서 지금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조실록》과 《한중록》의 기록뿐이다. 다음은 《영조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크게 노한 영조가 세자를 창덕궁 뜰에 꿇어앉히고 책망했다.
“네(사도세자)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질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했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말하려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은 왕손의 어미는 은전군의 생모인 귀인(경빈, 景嬪)) 박씨이며, 여승은 양제 가선을 말한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으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을 비교적 자세히 적었다.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세자에게 왕비 정성왕후의 위패를 모셔놓은 혼전인 휘령전(문정전)에 예를 행하도록 했으나 세자가 병을 일컬으면서 오지 않았다. 영조가 다시 행례하기를 재촉하여,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하며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자결하려 했으나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이어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윤 5월 21일 뙤약볕 아래에 갇혀 있던 세자는 8일 만에 세상을 등지니, 나이 28세다. 이 해가 임오년이라 이 일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한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세자의 호를 회복하고 시호를 ‘사도세자’라 했으며, 장례일에 휘경동 배봉산 아래 사도세자묘를 찾았다. 삼년상을 치른 후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세심대 아래)에 사당을 세웠다가 창경궁 홍화문 동쪽으로 옮겨 묘호를 ‘수은(垂恩)’이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14년을 더 살았고, 아비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11세의 아들은 25세의 청년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 하고 부르짖는다. 할아버지 영조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아 왕세손에 올렸지만,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조는 즉위 후 10일 만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 묘를 ‘영우원’, 사당을 ‘경모궁’으로 올렸다. 이후 도감을 설치하여 경모궁을 고쳐지었으며, 경모궁 현판에 직접 어필을 내렸다. 그러고는 자주 경모궁에 들러 참배했다. 창경궁에서 경모궁으로 나가는 곳에 한 달에 한 번 뵈러 가는 ‘월근문(月覲門)’을 내고, 경모궁에서는 매일 바라본다는 ‘일첨문(日瞻門)’을 내어 서로 통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창경궁에는 생부의 사당을 바라볼 수 있는 통명전 뒤 언덕에 자경전을 지어 생모 혜경궁 홍씨를 모셨다. 1791년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를 항상 받들기 위한 마음으로 자신의 어진을 현륭원과 경모궁 망묘루에 걸어두었다. 이후 이곳에 순조, 익종, 헌종, 철종의 어진이 봉안된다.
1899년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한다. 동시에 경모궁의 의미가 없어지자 경모궁의 망묘루를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 내로 옮겨 짓고 이름을 ‘평락정’이라 했다. 그리고 망묘루에 봉안했던 다섯 분의 어진을 선희궁 평락정으로 이안했다. 이어 경모궁에 있던 장종의 신위를 종묘(영녕전 제15실)에 모셨으며, ‘장조’로 추존했다. 그리고 1900년 이 자리에 영희전을 이건하고, 영희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의 영정을 옮겼다. 이때 만들어진 《영희전영건도감의궤》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정조, 아버지 묘를 천장하다
정조는 등극 후 생부의 묘를 천장하기 위해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경기도 화성시 화산 아래로 정하고, 1789년 배봉산 아래에 있던 영우원을 화산 아래로 천장하고 ‘현륭원(顯隆院)’이라 했다. 이곳은 원래 옛 수원읍이었는데, 광해군 때 수원 객사의 뒷산이 선조의 능으로 추천된 적이 있었으나 동구릉의 목릉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현종 때 효종의 능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당시 가구 수는 500여 채, 전답은 700여 결(結)의 규모인 이 고을을 북쪽 고등마을로 옮기려고 했다. 효종의 능은 두 달이 넘도록 장소를 결정하지 못했다. 현종은 수원의 산을 끝까지 주장하였으나 신하들은 백성의 공역이 커짐을 염려하는 등의 이유로 건원릉 내로 결정하게 되는데 신하들은 “종묘사직과 신민들에 있어서 더없는 다행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효종은 “수원은 지금 비록 쓰지 않더라도 이미 원릉(園陵)의 장부에 편입시켰으니, 혈도(穴道) 근처에 나무를 많이 심고, 또 개간하여 경작하는 것을 금하라. 그리고 관에서 다른 전답을 주어 산맥(山脈)을 해치지 못하게 하라.” 하고 이곳을 보존하도록 했다. 그러나 효종의 영릉(寧陵)은 건원릉 내에서 여주에 있는 세종의 영릉(英陵) 동쪽으로 천장하게 된다.
1789년 7월 11일 금성위 박명원이 영우원을 천장하자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그동안 생각해 두었던 여러 지역을 나열하면서 수원 화산 아래로 천장을 결정한다. 그러고는 수원읍 읍소재지를 팔달산 밑으로 옮기고 10만 냥을 풀어 백성의 거처를 옮기게 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천장을 끝냈다. 광해군이나 현종이 결단하지 못했던 것을 정조는 순식간에 감행한 것이다.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
천장 이후 정조는 해마다 현륭원을 참배하고 화성을 건설했다. 화성은 실학자인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건설 기간을 단축시켰다. 1794년에 화성 주변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약 2년 8개월 뒤인 1796년에 완성했으니, 사적 제3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水原華城)’이다.
1795년 정조는 문무백관과 왕실 가족을 이끌고 화성에 행차했다. 이때가 동갑 부모인 장헌세자의 사갑(死甲)이며 혜경궁 홍씨의 회갑(回甲)인 해였기 때문이다.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의 8일간의 행차를 기록한 〈화성원행반차도〉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반차도는 청계천 장통교와 삼일교 사이에 백자기(白磁器) 벽화로 재현해놓았다. 1,779명의 사람과 779필의 말을 자기에 구워 정조의 화성 행차의 역사적 의미와 그 시대의 의복이나 가마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제목이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로 되어 있어 유감이다. 현륭원은 고종이 황제가 된 후에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비로소 융릉이 되었기 때문에 이 행차는 원(園)일 때 이루어진 것이므로 〈정조대왕 원행반차도〉가 되어야 한다. 즉, 방문객들이 ‘능(陵)’(왕과 왕후의 무덤)과 ‘원(園)’(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구분할 수 있도록 원본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이때 처음으로 남편의 묘를 참배했다. 행차 4일째 상황을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조는 군복을 벗고 참포(磑袍, 연한 검푸른 색의 상복)로 갈아입고, 오서대(烏犀帶, 검은 물소 가죽으로 만든 띠)를 두른 다음, 여를 타고 원상(園上)으로 올라갔고, 두 군주도 뒤를 따랐다. 혜경궁은 특별히 제작한 유옥교(有屋轎)라 불리는 지붕이 있는 여를 타고 올라갔다. 울지 않기로 약속했던 혜경궁이 묘소 곁에 설치한 휘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통함에 겨워 통곡을 했다. 정조 또한 애통함을 금하지 못했다. 정리사들은 혹여라도 혜경궁이 병환이라도 날까 염려하여 행궁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이에 정조는 친히 차(茶)를 어머니께 권해드리고 귀환길에 올랐다. 새벽에 시작한 현륭원 참배는 이렇게 비통한 오열 속에 끝이 났다.”
사도세자는 33년 만에 찾아온, 친정을 두둔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한 부인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또 혜경궁 홍씨의 오열은 어떤 의미였을까?
화성 행차 기록은 후손에게 많은 역사적 자료를 남겼다. 화성 행차가 있은 지 212년 뒤인 2007년 4월 29일, 서울시에서는 하이서울페스티벌 행사 중 하나로 ‘정조반차도 행렬’을 재현했다. 행렬은 창덕궁에서 시작하여 보신각, 남대문, 서울역을 지나 용산으로 향하고, 이촌 지구 한강둔치에서 부교(배를 이어 만든 다리)를 건너 노들섬에 이르는 것으로 마쳤다. 행렬들이 부교를 만들어놓은 한강을 건너는 모습은 과히 장관이었는데, 이는 1795년 38척의 배를 묶어 만든 배다리를 재현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이 행렬을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며 제1한강교 다리 위에서 ‘정조의 원행길’을 안내했다. 그러나 이 행차를 재현할 때 창덕궁에서부터 행렬과 함께하면서 마치 200여 년 전의 정조와 혜경궁 홍씨, 청연 · 청선 군주를 만난 듯 감동을 느끼며 배다리를 건넜다.
사도세자는 반대 세력의 끊임없는 위협을 겪으며 부모와 부인에게조차 버림받고, 마침내 뒤주에 갇혀 한 많은 삶을 끝냈다. 그러나 사후 아들의 지극한 효성을 받았고, 조선 왕실은 그의 서자 은언군과 은신군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사도세자를 주제로 한 많은 책과 영화, 드라마가 전 국민의 각광을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
1795년에 현륭원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한 의궤로 권두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나오는데, 특히 행렬 전체의 모습을 그린 반차도가 있다. 본문에는 행사와 관련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함춘원 마두봉 언덕에 세워진 대한의원
창경궁의 정원이었던 마두봉 언덕에는 ‘대한의원’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의료 시설에는 궁궐 안에는 ‘내의원’이 있었고, 궁궐 밖에는 백성의 질병 치료와 구호 사업을 하는 ‘제생원’,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 백성에게 약을 나누어주는 ‘혜민국’, 가난한 백성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세운 ‘동서활인원’ 등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1885년 갑신정변 때 자객의 칼에 찔려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살려낸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의 건의로 재동에 설립한 ‘광혜원’이었다.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바뀌었고, 1894년에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로 이관했다. 이것이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이다.
1899년에는 ‘의학교’를 세우고 종두법 보급에 공헌한 지석영이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총무, 위생 등을 관할하던 내부(內部)에 속한 ‘내부병원(內部病院)’을 세웠다. 내부병원은 1900년 7월에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칭되었다. 1907년에 의학교와 광제원 등을 합쳐 ‘대한의원’을 신설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다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바뀌었고 8 · 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1907년 창경궁 함춘원 내 마두봉 언덕에 지어진 대한의원 건물은 1976년에 사적 제248호로 지정되었고, 1978년까지 서울대학교병원 본관으로 사용하다가 본관 건물을 신축 · 이전하고 나서 현재 ‘서울대학의학박물관’과 ‘병원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
경모궁터의 변화
사도세자의 사당을 영조 때에는 ‘수은묘’라 했고, 정조 즉위후에는 ‘경모궁’이라 높여 불렀다.
내신문과 삼계만 남은 경모궁터
경모궁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을 시대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영조 때(1764년) 《수은묘영건청의궤》에 수록된 〈수은묘도〉, 정조 때(1785년) 경모궁과 영우원 의절(儀節)을 기록한 《궁원의》에 수록된 〈경모궁도설〉, 고종 때(1901년) 《영희전영건도감의궤》에 수록된 〈영희전도〉가 있다. 이 도면들을 비교해보면 수은묘일 때는 단출한 사당이었다가 경모궁이 되면서 많은 전각이 생겨났고 영희전이 되면서 다시 간략해졌음을 알 수 있다.
구 서울대학교 본관(사적 제278호) 뒤쪽에는 경모궁의 세 번째 문이었던 내신문과 구름무늬의 삼계와 석단만이 남아 있다. 얼마 전까지 ‘함춘원지’라고 알려졌던 이곳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궁원의(宮園儀)》에 기록된 〈경모궁도설〉을 살펴보면 삼계 앞에 있는 내신문이다. 함춘문은 함춘원 영역 전체에 있는 문이므로 그 위치가 이곳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의견들로 문화재청은 2011년 ‘함춘원지’를 ‘서울 경모궁지’로 명칭 변경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관인 ‘함춘회관’이라는 건물만이 이곳에 함춘원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경모궁터를 바라보며 세자로 죽은 지 137년 만에 왕이 된 사도세자와 그 아버지를 사모했던 효성 깊은 아들 정조, 그러한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며 친정의 몰락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혜경궁 홍씨, 아들을 죽인 영조와 또한 아들을 죽이는 데 앞장서야 했던 생모 영빈 이씨를 생각해본다. 애증과 고통이 뒤섞인 권력의 무상을 사무치게 후회하며 지금쯤은 서로 화해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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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국사편찬위원회, 《성종실록》, 성종 15년 1484년 9월 27일.
- ・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 서울특별시, 1995, 297~300쪽.
- ・ 국사편찬위원회, 《선조실록》, 선조 26년 1593년 4월 18일.
- ・ 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 ・ 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실록》
- ・ 국사편찬위원회,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 즉위년 1608년 4월 22일.
- ・ 국사편찬위원회, 《현종실록》
- ・ 국사편찬위원회, 《현종개수실록》, 현종 즉위년 1659년 7월 11일.
- ・ 《수원 화성행궁》, 수원시, 2003, 142쪽.
- ・ 서울대학교의과대학 http://medicine.snu.ac.kr
- ・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동녘, 2010, 495 · 498 · 499쪽.
글
출처
조선의 왕족이 일생 동안 살았던 곳, 왕가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왕가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왕가라는 키워드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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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경모궁 –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이순자,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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