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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의 숨겨
진 왕가 이
야기

도정궁

다른 표기 언어 都正宮 동의어 덕흥대원군의 궁이자 선조의 잠저
요약 테이블
위치 서부 인달방(조선시대)
소재지 종로구 사직로 7길 등 운경기념관, 주택가 등

요약 도정궁(都正宮)은 한성부 서부 인달방에 있던 궁으로 덕흥대원군이 살았다. 선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이곳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에 의해 사당을 모신 궁으로 47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왔다. 도정궁 내 덕흥대원군의 사당인 덕흥궁(德興宮)은 장자 하원군의 후손으로 계승되면서 도정(都正)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에서 ‘도정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손은 4대까지는 종실의 녹을 받았으며, 이후부터는 대대로 도정 벼슬을 세습했다.

중종의 막내아들 덕흥군

덕흥군 이초(李岹)는 창빈 안씨의 소생으로 1530년 중종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538년 덕흥군에 봉해졌고, 1542년 정세호의 딸과 혼인했다. 중종은 막내아들이 덕흥군으로 봉해진 해부터 거처할 저택을 마련하기 시작했는데, 한성부 서부 인달방에 집을 사주었다. 43세에 낳은 막내아들에 대한 중종의 사랑이 담긴 이 저택은 건축 초기에는 그 크기가 50칸으로 제도에는 어긋나지 않았으나, 매우 큰 아름드리 재목의 길이를 기준에서 벗어나 사용하는 바람에 신하들이 이를 사치스럽다며 문제 삼기도 했다. 또한 사직단(社稷壇)과 담장을 사이에 둔 곳에 자리를 잡아 1544년에는 바깥 난간과 담장을 쌓는 일이 논의되기도 했다.

덕흥군은 슬하에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선조) 세 아들을 두었고, 30세에 세상을 떠났다. 덕흥군의 부인 정씨는 영의정 정인지의 증손녀이고 하남군 정숭조의 손녀이며, 하성위 정현조의 조카 손녀이고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이었다. 이렇게 하동 정씨 가문의 막강한 영향력이 훗날 하성군이 왕으로 추대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들의 군호가 하동(河東) 정씨의 하(河) 자를 따서 하원군(河原君), 하릉군(河陵君), 하성군(河城君)이 되었겠는가.

중종 사후에 장자 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후사 없이 죽었고, 문정왕후에게서 태어난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명종은 왕비 1명과 후궁 7명을 두었으나 자식은 순회세자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순회세자마저도 1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을 자주 궁궐로 불렀는데 특히 하성군을 총애했다. 명종 사후 명종비 인순왕후가 하성군을 선조로 등극시키니 선조는 조선의 왕 중 서자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선조대왕 묘지문〉에는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52년 11월 11일에 대왕은 한성부 서부 인달방에서 탄생했다. 대왕은 탄생하면서부터 자질이 아름답고 놀이할 때에도 범상치 않았다. 어렸을 적에 명종이 두 형과 함께 불러 어관(御冠)을 벗어주며 차례로 써보라고 했는데, 대왕이 꿇어앉아 사양하기를 ‘왕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가 어찌 쓰겠습니까.’ 했다. 그리고 명종이 묻기를 ‘왕과 아버지 중 누가 중한가?’ 하니, ‘왕과 어버이는 비록 같지 않으나 충효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고 답하니, 명종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선조는 즉위 다음 해에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정씨를 하동부부인으로 삼고, 잠저 후원에 가묘(家廟)를 지었다. 그리고 조모 창빈 안씨와 부모, 큰형 하원군과 남양군부인, 신안군부인 이렇게 6명의 신위를 모시게 하여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리고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모시며 신위를 옮겨 모시지 않고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불천지위로 정했다. 그 제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대원군
조선 왕조의 대원군 제도는 방계의 시작인 선조 때부터 실시되었다. 선조는 아버지를 덕흥대원군으로, 인조는 아버지를 정원대원군, 철종은 아버지를 전계대원군, 고종은 아버지를 흥선대원군으로 추존했다. 이렇게 조선 왕조에는 대원군이 4명이었으나, 인조의 생부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3명이 되었다.

창빈 안씨의 음덕을 받고 태어난 하성군

풍수가들은 중종의 아들 중에도 막내였던 덕흥군, 또 덕흥군의 아들 중에도 막내인 하성군이 왕위를 계승한 이유를 할머니 창빈 안씨의 음택이 발복한 때문이라 여긴다.

창빈 안씨는 1499년(연산군 5년)에 태어나 9세에 궁녀로 뽑혀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자순대비)를 모셨다. 20세에 중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고, 22세에 정5품인 ‘상궁’이 되었다. 23세에 맏아들 영양군 이거를 낳았고, 28세에 딸 정신옹주를 낳았다. 31세인 1529년(중종 24년)에는 종4품인 ‘숙원’이 되었고, 32세에 덕흥군 이초를 낳았다. 42세에 종3품인 ‘숙용’이 되었다.

창빈 안씨는 문정왕후의 배려를 많이 받았다. 문정왕후는 1517년(중종 12년) 왕비에 책봉되어 딸 3명을 낳고서 아들(명종)을 얻었으며, 다시 딸을 낳았으니 1남 4녀를 두었다. 뒤늦게 아들을 낳았으나 어린 아들이 항상 불안한 상태였다. 문정왕후는 당시 복성군을 낳은 경빈 박씨와 권력 다툼이 있었으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성격도 단정한 창빈 안씨에게는 호의적이었다. 왕위 계승권을 넘볼 수 없는 처지였기에 가능한 처사였을 것이다.

46세에 중종이 죽자, 창빈 안씨는 삼년상을 마치고 인수궁으로 물러나려 하지만, 문정왕후의 만류로 궁궐에 계속 머물렀다. 따라서 명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도 창빈 안씨가 계속 궁궐에서 지냈으므로 창빈 안씨의 손자들은 궁궐에 드나들며 명종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따라서 후사가 없던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1549년(명종 4년) 10월 18일, 창빈 안씨는 우연히 궁 밖에 나갔다가 갑자기 죽었다. 처음에 양주 서쪽 장흥리에 장사를 지냈는데 터가 좋지 않아 관악산 아래 과천 동작동(현재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손자가 선조로 등극한 후 1577년(선조 10년) ‘빈’으로 추봉되어 ‘창빈’이 되었고, 묘는 동재기 나루터가 있는 동작의 지명에 따라 ‘동작묘’라 불렀다. 이 일대에 구릿빛 돌들이 많아 동재기라 했고, 과천과 수원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어 동재기나루터(동작진, 銅雀津)라 불렀는데 지금의 지하철 4호선 동작역 부근이다.

국립서울현충원터는 풍수적으로 관악산 줄기가 한강을 만나 멈추는 용진처(龍盡處, 용이 행룡을 다하고 멈춘 장소)에 해당한다. 주산은 공작봉(孔雀峰, 화장산)이며 지하철 4호선 동작역으로 가는 좌청룡, 현대아파트로 가는 줄기인 우백호가 감싸 안아주며 앞으로 한강이 흐르는 곳으로, 이 터의 중심에 창빈 안씨묘가 있다. 이곳은 보는 이에 따라 공작포란형(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형상), 장군대좌형(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것과 같은 형상) 등으로 부른다. 여러 가지 혈명(穴名)을 가지고 있는 이곳으로 창빈 안씨묘를 옮긴 후인 1552년 덕흥군은 막내아들 하성군을 얻었다. 하성군은 이 묘의 발복을 받고 태어난 것이다.

창빈 안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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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 안씨묘 신도비

국립서울현충원 내에 있으며 1983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서자로 처음 왕이 된 선조의 할머니 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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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명종 20년) 명종이 위독했을 때 봉서(封書, 왕이 종친이나 가까운 신하에게 내린 서신) 하나를 대신에게 내렸는데, 하성군 이균에게 왕위를 잇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2년 후에 명종이 고명(顧命) 없이 운명하자 명종비 인순왕후는 이미 정한 바 있는 하성군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도록 했다. 이때 선조는 생모의 상중이었다. 어머니 하동 정씨는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렇게 조모의 음덕과 외가의 막강한 세력에 힘입은 선조는 1567년 16세에 등극하여 인순왕후의 수렴섭정(垂簾攝政)을 받았으나 다음 해에 수렴섭정을 거두었다.

역모로 죽은 이하전

조선 후기에 덕흥대원군의 후손은 완성군 이희, 완창군 이시인, 경원군 이하전으로 이어졌다. 이하전은 덕흥대원군의 사손(嗣孫, 대를 이을 손자)인데 음관(蔭官, 과거를 치르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오르는 벼슬)으로 돈녕부 참봉이 되었고, 도정을 지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순조비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귀양 간 은언군의 손자 원범을 아들로 삼아 철종으로 등극시켰다. 그리고 1862년(철종 13년) 김순성, 이극선 등이 이하전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 사건으로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사사당했다.

철종 역시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양자로 왕위에 오르니 고종이다. 고종 등극 후 흥선대원군은 이하전의 관작을 복구해주고, 이경용(덕흥대원군의 후손)의 8세 난 아들 이봉길을 양자로 들여 이하전의 후사를 잇게 했다. 이봉길은 이해창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908년 이하전은 경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이해창은 1904년 창산군에 봉해졌으며, 1910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매국 공채를 사들이기도 했다. 슬하에 덕주, 흥주 형제를 두었으며, 덕주는 우갑을, 우갑은 영기를 두어 대를 이었다.

도정궁에는 세 번의 화재가 있었다. 첫 번째는 1588년에 일어나 선공감(鐥工監)에서 5개월 만에 복원했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때 도정궁이 불타버려 덕흥대원군의 유모인 소빈 함양 이씨 댁에 대원군 사당을 봉안했다가 1612년에 복원했다. 세 번째 화재는 1913년 12월 3일 이해창의 부인 민씨의 장례를 준비하던 중에 발생했다. 이때 도정궁이 대부분 불에 탔다. 이에 고종이 300원, 순종이 1,000원을 하사했다. 그러나 화재의 규모가 커서였는지 다음 해에 고종이 2,000원, 순종이 3,000원을 더 내려 집 짓는 데 보조하게 했다.

도정
조선 시대 정3품의 관직으로 종친부, 돈녕부, 훈련원에서 관리를 지냈다. 조선 시대에는 종친을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고 다만 벼슬과 녹을 주었다. 따라서 종친부에 들어갈 수 없는 왕의 친족과 외척에게는 돈녕부의 관직을 주었고, 종실의 군(君)들에게는 종친부의 관직을 주었다.

운경기념관과 경원당

이처럼 많은 일을 겪으며 지켜온 도정궁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필지를 분할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해창 소유의 도정궁은 하나둘씩 나뉘어 팔려나갔다. 1939년에는 덕흥대원군과 창빈 안씨의 위패 도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후 불천지위 6위를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339번지 덕흥대원군의 묘원 내에 있는 재실 덕흥사로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이곳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덕릉재실의 육위 신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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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 부부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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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 탄신 제480주기 추모제(2010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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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궁터는 200여 개의 필지로 나뉘었고 여러 번의 분필과 합필로 인해 지금은 사직동 262번지와 사직동 1번지의 일부분이 포함된 영역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단독주택과 빌라, 사무실, 종교 단체, 주유소 등이 들어서 있다. 그중에 도정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세 곳만을 자세히 알아보자.

사직동 인왕산로 7(구 사직동 1번지 57호)은 1945년에 도정궁의 사손 이해창이 사망했기 때문에 호주 상속으로 아들 이덕주의 소유가 되었다. 이때 이덕주의 거주 주소는 사직동 262번지 1호로 분필되기 이전의 주소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보면 이후 두 차례의 매매 과정을 거친 후 선조와 정빈 민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성군의 후손인 운경 이재형이 도정궁의 주인이 되었다. 인성군은 1628년 유효립 모반 사건에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자결하게 된다. 이후 1637년에 복관되었고,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 땅을 하사받아 그 후손이 살았다. 사직동 262번지 77호를 사들인 이재형은 이후 집 주변을 더 사들였다. 이재형 사후에는 1993년에 운경재단을 만들고, 1997년에는 후손이 이곳에 이재형의 호 ‘운경’을 딴 ‘운경기념관’을 짓고 운영하고 있다.

기념관 옆에 있는 고풍스러운 안채와 사랑채 ‘긍구당(肯構堂)’은 2000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했으며, 축대의 기단(基壇)들에서 도정궁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사직동 262번지 77호가 합병 · 분할되면서 사직동 1번지 57호로 변경되었고, 토지대장을 확인해보면 1번지 40호, 262번지 81호, 262번지 6호 등이 합필되어 현재의 운경기념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은 제사 때만 가족들이 모인다고 하지만 어쨌든 덕흥대원군의 후손이 도정궁을 지키고 있다.

선조가 독서하던 긍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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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로 65(구 사직동 262번지 85호), 지금의 주유소 자리 부근에 도정궁의 사랑채 경원당이 있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해영의 아들 정재문이 1973년 대양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77년 3월 17일 사랑채가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면서 당시의 소유주 이름을 붙여서 ‘사직동 정재문가’라고 했다. 정해영은 대동연탄을 세워 석탄왕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후 정계에 진출해 7선 의원을 지내면서 신민당 정책의장, 원내총무,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55년 사재를 털어 동천장학회를 설립했고, 서울 성북동에 기숙사인 동천학사를 세웠는데 이곳에서 500여 명의 인재가 배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1979년 7월 4일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도로가 확장되면서 ‘사직동 정재문가’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건국대학교에서 도정궁 경원당을 인수하여 광진구 모진동(현재 화양동) 건국대학교 연속공정연구센터 옆으로 옮겼다. 이후 덕흥대원군의 후손은 이 건물의 유래와 역사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해 경원군 도정 이하전이 살았던 곳이므로 도정궁 경원당으로 개칭할 것을 추진했으며, 2009년 2월 5일 서울시의 문화재명 정정으로 ‘도정궁 경원당’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정재문의 손자 정연택은 이 자리에서 대양C&C와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다.

도정궁 경원당

도정궁 사랑채인 경원당은 개인 소유가 되어 ‘사직동 정재문가’가 되었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 계획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으나 건국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건국대학교 내로 옮겼다. 현재는 ‘ㄱ’자 형태의 사랑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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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 262번지 83호(사직로 67)에는 임당빌딩이 있고 이 빌딩 뒤에 한옥이 한 채 있다. 이곳은 ‘학교법인 용문학원’, 즉 안암동의 용문고등학교 소유로 이사장은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의 모친인 임당 김문희다. 1965년 김문희가 소유했다가 2005년 재단법인 영문에 출연(出捐)했다. 재단법인 영문은 2012년에 재단법인 임당장학문화재단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은 고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과 김문희 이사장의 네 딸 중 차녀다. 이곳은 재단법인 임당장학문화재단 소유로 되어 있으며 한옥은 도정궁 위치에 남아 있는 옛 흔적으로 보인다. 개인 소유로 들어갈 수는 없으나 운경 저택에서 내려다보면 긍구당으로 올라오는 돌계단이 보인다.

돌계단과 대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순조가 덕흥대원군의 사우에 작헌례를 하고 이곳의 고적(古蹟)을 물으니 사손 진안군 이언식이 말하기를 “내정(內庭)의 돌기둥은 곧 선조께서 독서하시던 서재(書齋)이고, 앞기둥 뒤의 계단에 있는 회양목(黃楊木)은 대원군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며, 총죽(叢竹)은 선조께서 손수 심으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곳이 이 기록에 나오는 계단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정궁의 계단을 묘사한 것이므로 나름대로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연암집》 〈담연정기〉에는 도정궁의 풍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공(李公)이 살고 있는 집 서쪽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정자 밑에 연못을 파고 담을 뚫고 샘을 끌어들여 물을 댔다. 담의 남쪽에는 석벽이 있는데 길이가 한 길 남짓하고, 벽의 틈에 노송이 박혀 있어 등걸이 구불구불 서리고 그 가지가 한옆으로 쏠려 그늘이 온 뜰에 가득했다. 내가 날마다 빈객들과 정자에서 노닐며 거문고와 바둑으로 유유자적하니, 한가하고 여유롭기가 마치 물아(物我)를 잊어버리고 득실의 차이를 초월한 듯했다. 이에 그 정자를 ‘담연정(澹然亭)’이라 이름하고, 지원(趾源)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짓게 했다.”

운경기념관 옆의 사직동 262번지 84호(사직로 7길 4)는 2010년 종로구청에서 매입하여 현재 ‘사직동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운경기념관의 높은 담장을 바라보면 도정궁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훗날 이곳에 도정궁 역사관이 들어서길 기대해본다.

재단법인 영문

옛 도정궁터에 남아 있는 이곳은 재단법인 영문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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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구당과 담연정을 거닐다

도정궁은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 담연정의 위치는 어디였는지, 사당은 얼마나 위엄을 지키고 있었는지, 그 규모는 얼마나 컸는지 등등 궁금증이 머릿속에 한가득 생겼다.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도정궁 건너편에 새로 생긴 아파트단지 앞에서 《순조실록》의 기록과 박지원의 〈담연정기〉, 그리고 유리건판으로 남아 있는 도정궁의 사진들을 마음으로 새기며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옛 도정궁터

이곳에는 도정궁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 있고 현대식 건물들만 빼곡히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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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의 작은 수로가 있고 그곳을 건너면 솟을대문에 양쪽으로 긴 담장의 줄행랑이 나타난다. 일꾼이 많으니 행랑채도 길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인 경원당이 나타나고 동쪽에 한옥이 한 채 있다. 북쪽을 향해 ‘ㄷ’자 모양을 한 한옥이다. 무슨 용도로 사용한 곳일까? 사랑채의 부속 건물로 주인이나 손님을 위해 음식을 만들거나 시중을 들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이 한옥 뒤로 계단이 나오고 이곳에 덕흥대원군이 심은 회양목과 선조가 심은 총죽도 보인다.

계단을 오르면 선조가 책을 읽던 긍구당과 도정궁의 안방마님들이 거처하던 안채가 나올 것이다. 안채 뒤로는 정갈한 장독대가 보이고 사랑채에서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그 위로 엄숙해 보이는 사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눈을 돌려 도정궁 서쪽 언덕을 바라보면 사계절 꽃이 피고, 아담한 담연정이 작은 연못과 어우러져 평온한 듯 서 있으며, 한 길이 넘는 담장 벽 사이로는 구불거리는 노송이 정취를 돋운다. 상상만 해도 도정궁이 얼마나 위엄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470년을 지켜온 덕흥대원군의 궁이요, 왕의 잠저가 아니던가.

도정궁의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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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지원 저, 신호열 · 김명호 역, 《연암집》 상, 돌베개, 2007, 50쪽.

이순자 집필자 소개

1953년 출생. 1975년 숙명여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6년간 경일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뒤늦게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현재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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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 저자이순자 | cp명평단문화사 도서 소개

조선의 왕족이 일생 동안 살았던 곳, 왕가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왕가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왕가라는 키워드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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