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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의 숨겨
진 왕가 이
야기

수진궁

다른 표기 언어 壽進宮 동의어 왕자와 공주를 모신 사당
요약 테이블
위치 중부 수진방(조선시대)
소재지 종로구 율곡로 4길 63 종로구 삼봉로 81 G타워, 두산위브파빌리온

요약 수진궁(壽進宮)은 한성부 중부 수진방에 있던 궁이다.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이 살던 곳이자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평원대군의 제사를 봉향하던 곳이다. 그 후 인성대군, 용성대군, 영창대군, 숙신공주, 명혜공주 등 어린 나이에 죽은 대군이나 공주, 자식 없는 후궁 등의 제사를 봉향하는 사당이 되었다. 그래서 한양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은 바로 ‘수진궁 귀신’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수진궁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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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대군, 제안대군, 영창대군으로 이어지다

평원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소생으로 8세에 평원대군에 봉해졌고, 1438년(세종 20년) 12세에 홍이용의 딸, 남양 홍씨와 혼인했다. 이때 한성부를 치워버리고 의금부 부근에 평원대군의 집을 건축하는데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수진궁은 처음에는 한성부 건물이었다가 평원대군가가된 것으로 보인다.

평원대군은 1445년 홍역을 앓다가 19세에 죽었다. 20세 이전에 죽는 것을 ‘상사(殤死)’라 하는데, 세종과 소헌왕후는 몹시 슬퍼하여 밥을 굶고, 3일 동안 조회(朝)와 저자(市)를 정지했다. 소헌왕후는 평원대군이 죽은 다음 해에 죽게 된다. 평원대군은 경기도 성남시 영장산(靈長山) 남쪽에 묻혔고, 그 아래에 묘를 관리하는 재실을 두었다.

이후 수진궁을 혼궁(魂宮, 왕과 왕비, 후궁,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 후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의금부가 너무 가까워 죄수들을 심문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창덕궁 보평청을 휘덕전이라 새로 이름 짓고 사용했다.

성종 때에는 《대전(大典)》의 입후(立後) 조항에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로서 후사를 삼는다.”라고 전해진다고 하여 성종이 왕위에 올라 제안대군은 지자가 되었으니 법도에 해로울 것이 없다 하며 제안대군을 평원대군의 후사(後嗣)로 삼았다. 《대전》은 1485년(성종 16년)에 《경국대전》으로 완성된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 인성대군이 요절했기 때문에 왕권 계승 1순위였다. 1469년 예종이 20세에 갑작스럽게 죽었다. 즉위 1년 2개월 만이었다. 당시 계비 안순왕후 한씨 소생인 원자(元子) 제안대군은 겨우 4세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세조비인 대비 정희왕후에게 후계 왕을 정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제안대군(4세),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군(16세), 잘산군(13세)이 있었다. 정희왕후는 잘산군을 후계 왕으로 지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은 본래 질병이 있다. 잘산군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세조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太祖)에게 견주기까지 했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당시 한명회가 잘산군의 장인이었던 까닭에 정희왕후는 잘산군을 선택하였던 듯하다. 원자는 1470년(성종 1년) 5세에 제안대군에 봉해지고,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의 봉사손이 되어 후사를 잇게 된다. 그리고 12세에 김수말의 딸 상주 김씨와 혼인했으나 자식이 없고, 풍병이 있다 하여 어머니 안순왕후가 김씨를 내쫓아 14세에 다시 박중선의 딸 순천 박씨와 혼인했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내쫓긴 김씨를 끝내 잊지 못해 1485년에 성종에게 복혼할 것을 청해 다시 김씨를 맞아들였다.

성종, 연산군, 중종은 왕위 계승권자였던 제안대군에게 많은 재물을 내리고 종종 그의 집을 찾기도 했다. 제안대군은 1525년(중종 20년)에 세상을 떠났고 부인이 둘이었으나 자식은 없었다. 제안대군 이현의 졸기에 사신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현은 예종의 아들로 성격이 어리석어서 남녀 관계의 일을 몰랐고, 날마다 풍류를 잡히며 음식 대접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나 더러는 행사가 예에 맞는 것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짓 어리석은 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제안대군가는 함춘원과 가깝고 주변 낙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었다. 연산군 때 이곳에 자수궁을 옮기려 하다가 가흥청(假興淸, 임시 흥청)을 두고 뇌영원(蕾英院)이라 하여 기생들의 거처로 사용했다. 중종 때는 어머니 정현왕후와 세자(인종)가 피우하기도 했다. 성종 때 종조부(작은 할아버지) 평원대군의 후사가 되었으므로 평원대군의 신주가 있는 수진궁에 함께 모셨다.

영창대군은 선조가 1602년 계비 인목왕후를 맞이하여 1606년에 태어난 적자다. 이때는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이후이므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로 나누어졌다.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1613년 영창대군은 종고조부 제안대군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

1613년 박응서가 행상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의 우두머리로 체포되었는데, 옥중에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반역을 꾀했노라고 말한다. 영창대군은 이 사건으로 강화도로 위리안치되었다가 다음 해에 죽임을 당하고, 인조반정 이후 관작을 회복했다. 영창대군묘는 광주 남한산성 아래에 있다가 성남시 개발계획에 의해 1971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로 이장했다.

이렇게 평원대군, 제안대군, 영창대군으로 후사가 이어졌으며, 세 대군의 묘는 광주에 있었다.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망경암에는 평원, 제안 두 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칠성단을 만들어 칠성제를 지냈다는 기록의 망경암 대비(大碑)와 소비(小碑)가 전해온다. 이 지역은 평원대군묘를 관리하는 수진궁이 있었으므로 ‘궁말, 궁촌, 수진궁, 수진동, 수진리’ 등으로 불렀다. 그 위치는 수진초등학교 서편으로 평원대군과 제안대군 묘는 묘소공원지로 책정하려 했으나 주택지 중심에 있어서 1976년에 천묘했다고 한다. 1983년 이 부근에 태평초등학교가 들어섰다. 묘는 포천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찾을 수 없었으며 평원대군가(수진궁)에서 세 대군의 제사를 모셨다.

망경암 칠성대 중수비(대비)와 소비

평안대군과 제안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비이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 아래에 세워져 있다. 위쪽이 대비이고 아래쪽이 소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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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에 죽은 원손 인성대군

예종의 장남 이분(李糞)은 1461년(세조 7년)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해양대군 시절에 태어났다. 해양대군의 부인 장순빈(한명회의 딸)은 다음 해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이분도 1463년 풍질(風疾)로 3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세조는 이분을 인성군으로 추봉하여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묘(경릉(敬陵),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동쪽에 묻었다. 이후 잊혀 지내다가 숙종이 의경세자묘를 참배할 때 언덕에 있는 인성대군의 황폐한 묘를 보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하고 사초(莎草)를 고치라고 했다.

또한 1798년 정조는 지방관이 아뢰어 인성대군묘가 순회묘 구역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식 때에 지내는 제사는 수진궁에서 관장하는 다른 묘의 예에 의거하여 내시를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묘로 가는 길은 지방관이 매년 한 번씩 소제토록 하라고 하여 또다시 황폐해져서 찾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의 왕자 · 공주 묘역으로 옮겼다.

한편 1465년 인성군의 사당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신하들이 “《예기(禮記)》의 〈증자문(曾子問)〉편을 들어 ‘모든 상(殤)과 무후자(無後者)는 종자(宗子)의 집에서 제사지낸다.’고 하며, 주(註)에 말하기를, ‘무복(無服)의 상(殤)은 제사지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인성군은 본시 복(服)이 없는 상(殤)이니, 청컨대 고제(古制)를 따라 입묘(立廟) · 입후(立後)하지 말게 하소서.”라고 했다. 즉, 인성군은 8세 이전에 죽어 복(服)이 없는 상(殤)이니, 옛 제도를 따라 사당을 세우거나 후사를 세우지 말자고 했으나 세조는 인성군의 제사를 평원대군의 사당에서 지내게 했다.

1469년 예종이 후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려 했으나, 종실 중에 인성군의 후사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어 인성군의 신주를 장순빈의 혼궁(魂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장순빈이 장순왕후로 추숭되니 왕후와 왕자의 신주를 한곳에 모실 수 없으므로 별실에 옮겨졌다. 1472년 인성군은 인성대군으로 추증되었고, 1473년 신숙주가 이제 인성대군의 신주를 묘소에 묻자고 하자 성종이 그대로 따른다.

이러한 논의는 계속되어 1474년 성종은 후사를 세우지 말고, 신주(神主)를 묘 곁에 사르고 제사는 묘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1488년 또다시 인성대군의 제사가 논의되자 성종은 선왕(세조)이 정하신 바에 의해 평원대군의 가묘(家廟)에 제사하라고 한다. 이렇게 여러 번 인성대군의 제사가 문제 되는 것은 신하들은 너무 어려서 죽은 왕자이므로 신주를 묻자는 것이고,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일찍 죽은 원손의 제사를 모시게 했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 때 수진궁에 인성대군의 사판(신주)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신주를 묻은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나 고종은 1872년 대군과 왕자로서 후손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사손(祀孫)을 세우게 하는데 광평대군의 14대손 이백연(李白淵)을 인성대군의 사손(祀孫)으로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조선 시대 상에는 3가지가 있는데, 이를 삼상(三殤)이라고 한다. 19세 이하 16세까지의 상을 상상(上殤), 15세 이하 12세까지의 상을 중상(中殤), 11세 이하 8세까지의 상을 하상(下殤)이라 한다. 복제(服制)는 각 상마다 복을 입는 기간을 달리하며, 8세가 못 되어 죽은 자의 상에는 복을 입지 않았다. 따라서 인성군은 3세에 죽었으므로 복이 없다고 했다. 8세 미만은 복이 없으나 삼일간은 곡(哭)을 했지만, 3세 미만이면 곡도 하지 않았다.

용성대군, 의창군과 낙선군의 신위를 모시다

용성대군은 인조의 넷째 아들이지만, 태어난 해와 사망한 해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인조의 묘 지문(誌文)에는 왕자가 3명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의 묘 지문에는 인조가 4남 1녀를 두었다고 되어 있다. 첫째 아들은 이왕(소현세자), 둘째 아들은 이호(봉림대군), 셋째 아들은 이요(인평대군), 넷째 아들은 이곤(용성대군)이고, 딸은 맨 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성대군은 4세에서 7세 사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계운궁(인헌왕후)의 묘 지문은 1626년 3월 21일에 기록되었고, 형 인평대군이 1622년에 태어났으니 용성대군은 1623년에서 1626년 사이에 태어났으며 1629년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1692년 숙종이 광릉에 나아갔다가 인빈 김씨와 용성대군의 묘에 치제(致祭, 제사를 지냄)하도록 했는데, 두 묘가 광릉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빈 김씨의 묘인 순강원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150번지, 광릉은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에 있다. 또한 1798년 정조가 대군 · 왕자 · 공주 · 옹주에 대한 시향과 묘향 때의 의절(儀節) 규정을 정할 때 수진궁에 모신 분들의 묘를 설명하던 중 용성대군의 묘는 풍양(豊壤)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용성대군묘는 광릉과 인빈 김씨묘 근처의 풍양(현재 남양주시 진전면 · 진건면 일대)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영조 때인 1745년 이기진이 “신이 기보(畿輔, 경기)에 부임하여 각 릉을 봉심할 때에 보니 익릉과 순회묘 사이에 고총(古塚)의 표석(表石)이 하나 있는데 ‘용성대군지묘’라고 쓰여 있었으니, 이는 곧 예종조의 친왕자로서 조요(早夭)한 분입니다. 묘가 솔숲이 우거진 속에 있는데 사초(沙草)가 모두 벗어지고 총토(塚土)만 남아서 보기에 매우 참연(慘然)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수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영조가 그대로 따랐다.”고 했으니 돌보는 이 없어 무너진 용성대군묘를 이때 새로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달에 영조는 파주의 장릉(長陵), 공릉(恭陵), 순릉(順陵), 소령묘(昭寧墓)를 다녀오고 나서 용성대군묘에 치제하도록 한다. 이 행차 때에 용성대군묘를 보았기 때문에 추모하는 느낌이 일어나서 명을 내린 것이라 했다.

이기진에 의하면 용성대군묘는 현재 익릉과 순창원(순회묘)이 위치한 고양시 덕양구 현재의 서오릉 내가 된다. 풍양은 고려 시대에 진건, 진접 지역을 말하며 세종 때 풍양현을 포주에서 양주로 이관하였고, 1980년 남양주로 바뀐다. 즉, 고양과 남양주는 위치적으로 완전히 다르므로 두 임금이 말하는 용성대군묘는 각각 다른 곳을 말하는 듯하다. 따라서 어느 시기에 이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용성대군의 신위는 수진궁에 모셔졌고, 고종 때 가서 인평대군의 넷째 아들인 복평군(福平君)을 후사로 삼았다. 복평군은 ‘삼복의 변’(1680년)으로 유배 후 사사되었으나 영조 때 복관되었기에 가능했다.

의창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소생으로 부인은 양천 허씨다. 선조는 의창군의 혼례를 호화롭게 하였으니 중흥동의 소나무를 베어 의창군가를 수리할 정도였다. 광해군 때 허균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 풀려났다. 글씨를 잘 써 어머니 인빈 김씨의 신도비를 썼다. 의창군은 1645년 57세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 풍양리에 장사지냈는데, 바로 순강원 내에 있다. 후사 없이 죽어 낙선군(귀인 조씨의 소생)의 계자 임양군이 봉사(奉祀)했다. 영조 때에는 의창군의 신주를 수진궁에 모시고 모든 전답과 노비는 수진궁으로 보내 제수에 보태게 했다.

낙선군은 인조와 귀인 조씨의 소생으로 형은 숭선군이고 누이동생은 효명옹주다. 효종은 즉위 후 숭선군, 낙선군, 효명옹주의 집에 각각 노비 150명을 내려줄 정도로 이들을 아꼈다. 특히 효명옹주의 시댁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이 된 김자점 집안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송시열이 장릉(長陵)의 지문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청에 누설한 죄로 쫓겨났다. 청은 사신을 보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이유를 물었으나 효종은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무마했다. 이후 김자점은 숭선군을 추대하였다는 역모와 관련되어 사형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연관된 귀인 조씨는 자살하게 하고, 숭선군, 낙선군, 효명옹주는 유배되었다. 낙선군은 1657년(효종 8년)에 석방되었고, 관작이 회복되고 혼인했다. 숙종 때에 후사 없이 죽었으며, 양주(楊州) 청송면(靑松面, 현재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 623번지, 연천군 향토유적 제1호)에 묻혔다.

의창군은 선조의 아들이며 낙선군은 인조의 아들인데, 숙종이 낙선군으로 의창군의 뒤를 잇게 하였고 1755년 이후로 두 왕자의 봉사를 안흥군이 대신 행했다. 안흥군은 인평대군의 봉사손으로 이미 능창, 인평 두 대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 앞으로 그 후손에게도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1772년 영조 때 낙선군 부부의 사당을 수진궁으로 들이게 된다.

숙신공주와 명선공주, 명혜공주

봉림대군은 혼인하여 1남 7녀를 두었는데, 숙신공주가 장녀였다. 봉림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잡혀갈 때 세 살짜리 숙신공주도 함께 갔는데 가던 길에 숙신공주가 병을 앓아 죽고 말았다. 《정조실록》에 숙신공주의 묘가 서산(西山)에 있다고 했는데, 이곳이 경기도 고양군 하도면 유현(현재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이다. 당시 중국 심양으로 가려면 고양, 벽제, 신의주를 지나야 했는데, 숙신공주가 고양에서 죽어 이곳에 묻힌 것으로 추측된다. 1675년 숙종은 숙신공주에게 숙신공주의 명자(名字)를 내려주었다. 이 증직교지(贈職敎旨)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남아 있다. 그 후에 신주를 수진궁에 모셨고, 묘는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내 왕자 · 공주 묘역으로 옮겼다.

숙신공주 증직교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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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왕세자일 때 김우명의 딸과 하어의궁에서 혼인했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세자빈은 명성왕후가 되었고, 숙종,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1673년 궁궐에 마마(천연두)가 돌아 명혜공주가 9세에 죽었고, 명선공주가 14세로 연달아 죽었다. 이때 명혜공주는 동안위 신요경, 명선공주는 신안위 맹만택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다. 3개월여 사이에 두 딸을 잃은 현종과 명성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현종은 조정(朝廷)을 폐했다.

1681년 신하들이 두 공주 소유의 논밭을 혁파하라고 건의할 때 숙종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두 공주가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므로, 선왕께서 언제나 가련하게 여겨 슬퍼하시면서 별도로 사우(祠宇)를 지어 전장(田庄)을 그대로 보존하게 한 것은 한때의 제사를 위하려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대체로 뒷날 대군으로 하여금 각각 제사를 받들도록 하여 영구토록 유전(流傳)하게 하려는 뜻이라고 하신 또렷한 옥음(玉音)이 지금까지 귀에 남아 있는데, 어떻게 차마 선왕께서 남기신 뜻을 저버리고 마침내 혁파하라는 영(令)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3년 후에 두 공주의 사당을 세웠고, 1684년 위패를 수진궁에 옮겨 제사를 받들게 했다. 같은 해에 숙종이 헌릉에 제사를 지내고는 친히 제문을 지어 명선, 명혜 공주에게 제사지냈다.

유물로는 《명혜공주신생공주안태등록》이 남아 있었는데, 명혜공주와 이제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신생공주, 즉 명안공주의 태를 보관할 장소를 선정하고 태실을 만들어 안장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없어졌다. 두 공주는 광주 영장산 아래 묻혔으며 명복을 빌기 위해 근처에 있던 사찰을 재건하여 봉국사(성남시 수정구 태평동)라 했다. 그리고 해마다 봄, 가을에 궁인(宮人)이 나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묘는 일제강점기에 서삼릉 내 왕자 · 공주 묘역으로 이장했다.

숙신공주묘

서삼릉 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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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공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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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공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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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궁은 처음에 왕의 아들을 모시는 사당이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일찍 죽은 왕자와 공주, 자식 없는 후궁의 제사를 봉향하는 곳이 되었다. 숙종의 후궁으로 자식 없이 죽은 귀인 김씨와 소의 유씨의 위패도 수진궁에 모셨다. 그리고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 가운데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907년 고종이 궁내부령 제1호에 의해 1사 7궁에 소속된 토지의 도장(導掌, 궁방을 대신해 논밭을 관리하고 소작료를 거두는 일을 맡아보는 관리인)을 폐지하고, 순종 때 제실 재산 정리국에서 재산을 정리하면서 국유화되었다.

서삼릉 내에 있는 소의 유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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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에는 수진궁에 5묘(廟)에서 15위(位)의 신주를 받들었다. 1묘에는 세종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과 강녕부부인(남양 홍씨),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과 상산부부인(상주 김씨), 선조의 적장자 영창대군, 인조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을 모셨다. 2묘에는 선조의 아들 의창군과 양천군부인(양천 허씨), 인조의 아들 낙선군과 동원군부인(강릉 김씨)을 모셨다. 3묘에는 효종의 딸 숙신공주, 4묘에는 현종의 첫째 딸 명선공주와 둘째 딸 명혜공주, 5묘에는 숙종의 후궁 귀인 김씨와 소의 유씨를 모셨다.

귀인 김씨묘와 청화백자 묘지

귀인 김씨 묘지문은 백토로 만든 형태 위에 무색 투명의 유약을 입혀 구워낸 자기 묘지(墓地)다. 귀인 김씨묘도 서삼릉 내에 있다.(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소장)

ⓒ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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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혼백의 안식처였던 수진궁

수진궁은 평원대군의 집으로, 처음에 평원대군가의 사당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자식 없이 죽은 왕자들의 사당으로 내려오다가 미혼으로 일찍 죽은 효종 · 현종의 딸들을 모셨고, 숙종 후궁들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1907년 제궁에 속한 토지를 제실재산정리국에서 관리하게 하고, 제사는 장례원(掌禮院)에서 지내게 하면서 수진궁도 폐쇄된다.

1907년 11월 29일 유길준은 흥사단을 세워 국민교육회 건물에서 활동했으나, 고종이 비어 있는 수진궁을 내려주자 이곳으로 이사했다. 1908년에 유길준이 이곳에 측량전문교육기관인 ‘수진측량학교’를 개설했다. 또한 종로교회(현재 중앙교회)에서는 소녀매일학교와 소년매일학교를 세웠는데 두 학교가 합쳐져서 종로소학교가 되었다. 종로소학교는 공립학교가 되면서 비어 있는 수진궁터에 자리하게 된 듯싶다. 이 학교는 일본인 자녀와 사동궁의 황실 자녀들이 주로 다녔고 1941년에 종로국민학교로 바뀌었다.

1972년에 종로국민학교가 폐교되자, 삼양식품공업주식회사에서 인수했다. 이후 이 자리에 거양빌딩과 삼양식품이 들어섰다(거양빌딩은 G타워(율곡로 4길 63)로, 삼양식품은 두산위브파빌리온(상봉로 81)으로 바뀌었다). 현재 하늘을 찌르는 건물의 1층에는 처녀귀신과 총각귀신들이 모여 있던 수진궁의 암울함을 떨쳐버리듯 젊은 남녀들이 드나드는 커피점이 자리하고 있다.

수진궁과 관련된 유물로는 《수진궁도서책(壽進宮圖署冊)》, 《수진궁등록(壽進宮謄錄)》(서울대학교 한국학연구원규장각 소장)이 남아 있다. 《수진궁도서책》은 수진궁이 도장(導掌) · 감관(監官) · 마름(舍音) 등에게나 지방 관청에 대해 발한 명령서(命令書)인 도서(圖署)를 모은 책이다. 《수진궁등록》은 수진궁 내의 제반 행사에 관련된 비용과 궁에의 진상 물품 그리고 궁에 속한 장토의 관리와 관련된 공문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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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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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국사편찬위원회, 《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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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국사편찬위원회, 《인조실록》, 인조 4년 1626년 3월 21일.
  • ・ 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 ・ 남양주시청 http://www.nyj.go.kr
  • ・ 국사편찬위원회, 《효종실록》
  • ・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 ・ 국사편찬위원회, 《효종실록》
  • ・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 ・ 권기흥 외, 〈성남시지〉, 성남시, 1982, 764쪽.
  • ・ 국사편찬위원회, 《순종실록》
  • ・ 이광린, 《유길준》, 동아일보사, 1992, 159 · 164 · 165 · 169쪽.
  • ・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교회 기획위원회, 《중앙교회 107년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교회, 1998, 26 · 28쪽.
  •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e-kyujanggak.snu.ac.kr

이순자 집필자 소개

1953년 출생. 1975년 숙명여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6년간 경일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뒤늦게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현재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로..펼쳐보기

출처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 저자이순자 | cp명평단문화사 도서 소개

조선의 왕족이 일생 동안 살았던 곳, 왕가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왕가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왕가라는 키워드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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