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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사실 공표죄와 손해배상 관련 판례

누가 그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었나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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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선 "아버지 살해" 보도… 결국엔 "무혐의" 처분

정치인 한 명이 비리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올랐다 치자. 언론은 어떻게 하나. 검찰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받아쓰기'를 한다. 헌법과 법률에서 "피고인(피의자)은 무죄로 추정된다"지만 적어도 언론 보도에서는 유죄로 추정된다. 어디 정치인뿐이겠는가. 살인 사건 용의자나 대형 사건에서도 일단 터뜨리기식 보도가 적지 않다. 실제로 무죄판결을 받아도 명예회복이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우지만, 검찰의 발표와 비공식 정보를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보도하는 언론도 반성할 점이 분명히 있다. 피의사실 공표와 그에 따른 명예훼손의 심각성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사례 1〉
"치료비 부담 투병 중 아버지 살해."

2004년 3월 1일, 방송과 일간신문은 약속이나 한 듯 이런 제목을 단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는 A씨가 투병 중인 아버지를 간호하던 중 인공혈액투석기 연결호스를 절단해 과다 출혈로 숨지게 한 혐의로 긴급체포됐다고 밝혔다. 기사는 A씨가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도 평소 아버지 치료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 A씨 윗옷에서 혈흔 반응이 나온 점 등을 강조했다. 심지어는 "A씨의 범행이 확실하다"는 경찰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기사 제목처럼 '아버지 살해' 사건임을 암시했다. 그는 정말로 돈 때문에 아버지의 목숨을 끊게 한 패륜아였을까.

이 기사를 본 독자라면 누구나 A씨가 살인범이거나 최소한 살인과 관련된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체포 직후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곧바로 기각되어 A씨는 풀려났다. 불구속 수사를 받던 그는 2006년 의정부지방검찰청에서 최종적으로 '혐의 없음' 처분을 받게 된다. 당연히 이 사건으로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A씨는 그동안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인자로 몰려 2년 동안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A씨는 국가와 담당 경찰 등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고, 법원은 국가의 잘못을 일부 인정했다. 경찰의 행위가 피의사실 공표행위에 해당한다는 판단이었다.

법원은 경찰이 실명을 공개하지는 않았으나 A씨와 아버지의 나이, 주소지, 직업 등을 밝힘으로써 이 내용만으로도 피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 사건은 흥미로운 기사 소재는 될 수 있으나 공공의 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없고, 공표 내용의 객관성, 정확성, 표현의 적절성 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선 전 터진 간첩 사건, 진실은?

다음 사례는 '공안사건'이다. 특히 간첩 사건은 피의사실 공표의 단골 사례이다. 과거 독재정부 시절 한 번씩 터졌던 간첩단 사건은 사실 여부를 떠나 수세에 몰린 정권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 사건이 터진 때도 대선을 2달여 남겨둔 시점이었다.

〈사례 2〉
경찰과 안기부는 1996년부터 약 1년 이상 B씨를 내사(수사의 전 단계)했다. B씨는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한 적이 있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학교 후배들을 자주 만났는데 수사기관은 이를 주목했다. 당시 일본어 학원에서 일하던 그는 그곳에서 일본으로 팩스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수신자가 총련 관련 인물이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를 놓칠 리 없는 수사기관은 B씨가 총련의 지시를 받아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몰아갔다. 경찰은 주변인물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고 B씨와 후배 등 5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구속 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이 간첩 행위를 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강압 수사를 선택했고 결국 B씨 등으로부터 자백을 얻어냈다. 1997년 9월 이들이 검찰로 보내질 즈음 경찰은 아래와 같은 간첩 수사 발표문을 〈연합뉴스〉에 넘겼고, 다음날 대부분 언론은 이를 토대로 기사를 내보냈다.

"간첩인 B씨 등 2명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에 포섭되어 노동당에 가입했다. 그들은 조총련으로부터 경남지역 학생운동권을 포섭하고, 정치·노동운동 자료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고 국내에 잠입한 후 후배들을 포섭해 노동당에 가입하게 하고 학생운동 동향 등의 정보를 수집해 조총련에 보고했으며, 운동권을 배후 조종했다."

이것이 이른바 '부산 동아대 자주대오 사건'이다.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B씨 등은 간첩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면서 항소했다. 항소심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간첩죄 부분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이 사건은 과잉 수사의 결과물이었음이 드러났다.

판결이 확정되자 B씨 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손해배상액은 크지 않았지만 판결(2001다49692)은 피의사실 공표의 기준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법원 "피의자에 치명적 피해 될 수도… 무죄추정 원칙 지켜야"

대법원은 "국민들은 범죄에 관한 알 권리를 가지고 있고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에 관해 발표를 하는 것은 국민들의 이러한 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라며 필요성은 인정했다. 그동안의 법원 판결도 "피의사실 공표가 공익을 위한 목적이고 그 내용이 진실하거나 진실이라고 믿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허용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피의사실 공표행위는 국민들에게 그 내용이 진실이라는 강한 신뢰를 부여함은 물론 그로 인해 피의자 등에 대해 치명적인 피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피의사실 공표는 ▲객관적이고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 발표에 한정되어야 하고 ▲정당한 목적 하에 수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에 의하여 공식 절차에 따라 해야 하며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여 유죄를 속단하게 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나 추측 등을 피해야만 허용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B씨 등의 자백만을 유력 증거로 삼았다가 무죄가 된 점, 당사자의 반박 의견이 없었고 표현이 단정적이었던 점, 당사자들이 간첩이라는 낙인이 찍혀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점을 들어 간첩 사건으로 발표한 수사기관의 행위는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사례 3〉
199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 검찰은 집에서 치과의사와 딸이 함께 숨진 채 발견되자 남편 C씨가 가정불화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숨기기 위해 불을 저지른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언론이 이 사건을 한국판 'OJ 심슨 사건'에 빗대며 흥미 위주의 보도를 하는 사이에, C씨는 피해자들의 사망 시각, 화재 발생 시각 등을 놓고 검찰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이듬해인 1996년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인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난다. 이후 대법원의 유죄취지 파기환송(1998년) → 서울고법 무죄(2001년) → 대법원 무죄(2003년)로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8년이 흘렀다. 결코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여론 속에서 그는 법정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된 건 언론을 통해서다. 언론은 C씨의 신상을 공개했고, 피의사실도 상세히 보도했다.

무죄가 확정된 직후 C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론 보도에 대해 "한마디로 선정적이었다. 사건의 본질을 외면한 채 흥밋거리에만 치중했다. 거의 모든 언론이 다 그렇게 다뤘다. 언론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결국 남은 건 크나큰 실망뿐"이라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흥미 있게 다루던 언론이 8년 동안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의문이다. 아니 그가 무죄가 된 후에라도 언론은 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피의사실 아닌 법원 판결에 보도 초점 맞춰야

범죄에 대한 사법 절차는 통상 이렇게 이루어진다.

고소·고발(또는 수사기관의 인지) → 수사 → 기소 → 재판 → 판결 → 형 집행

한국의 형사사건 보도는 대부분 수사단계 전후에 집중된다.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아무래도 갈수록 관심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건 초기에는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재판이 시작되고 판결이 나올 때쯤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을 꺼 버리는 보도 경향을 보인다. 정작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검찰의 피의사실이 아니라 사법부의 판결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듯하다.

국민의 알 권리는 존중돼야 하고 취재에 성역은 없어야 한다. 문제는 범죄 사건 보도에서 언론이 수사기관에 의존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데 있다. 수사기관은 특정 사건에 대해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하고,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이를 진실인 것처럼(또는 진실이라 생각하고) 보도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굳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피의사실 공표는 검찰과 언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생긴 합작품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명예와 인권을 강조할수록 표현의 자유 영역은 좁아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더라도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흘리고, 언론이 이것을 별 생각 없이 받아쓰는 관행은 바뀌어야 한다. 그 누구도 무고한 시민을 섣불리 살인자나 간첩으로 낙인찍을 자격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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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국 집필자 소개

서울중앙지법, 동부지법, 가정법원, 고양지원 등에서 법원공무원으로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 2009년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는 글을 연재, 20회 만에 조회수 100만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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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법률 해법사전
생활법률 해법사전 | 저자김용국 | cp명위즈덤하우스 도서 소개

법을 바르게 알고 제대로 판단하게 돕는 친절한 법률 안내서. 평소 궁금하지만 어딘가 물어볼 곳이 없어 답답했던 법률 지식부터, 감추기 급급했던 민감한 사안들까지 생생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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