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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맨
아프리카의 부시맨은 우리가 보기에 문명의 혜택을 전혀 입지 않고 있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원시인들입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우리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인류인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뭐,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야만스럽게만 보이는 생활이 볼거리가 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능숙한 사냥꾼들입니다. 동물들의 습성에 밝고, 포획을 위해 전략을 세울 줄 아는 지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 동물이나 사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사냥을 일부러 멈추기도 합니다. 먹을 것을 찾기 힘든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 변변치 않은 장비, 하루 일해 하루 먹는 빈곤함 속에서도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다.
사냥 수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몸집이 작고 동작이 굼뜬 사슴이나 토끼 같은 동물은 절대로 사냥하지 않는다." 힘없는 동료 사냥꾼, 노인들에게도 사냥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랍니다. "열매를 딸 때는 씨앗이 될 만큼은 남겨두고, 벌집이 꿀을 딸 정도로 크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다." 우리 문화의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로 쓸 씨는 먹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또 목을 축이러 "물가로 오는 동물들을 위해 그 근처에는 덫을 놓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원시인의 사냥 수칙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인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포획이라는 사냥의 궁극적 목적보다 더 상위에 있는 '윤리적'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냥 수칙은 윤리하고는 상관이 없고, 단지 사냥감의 개체 수를 늘리는 데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이때에도 그 윤리적인 태도가 결국은 사냥감의 포획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냥을 잘하기 위해 도구를 고안한다든지 사냥터를 발견하는 것과는 같은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윤리가 아닌 것은 아니지요.
다른 곳에 사는 어떤 원시인들은 사냥에 성공한 장소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을 두고 간다고 합니다. 혹 열매를 딴 장소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고요. 이것은 왜일까요? 하나를 얻었으니 그 빈자리에 하나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과 열매는 어디론가 사람의 입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시인이 가지고 있던 것과 자리를 바꾼 것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이 역시도 무언가 윤리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소니 퀸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에스키모인들의 삶을 다룬 명화가 있습니다. 노모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밥값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은 어머니를 썰매에 태워 북극곰이 잘 다니는 곳에 버려두고 저만 돌아옵니다. '어머니를 먹잇감으로 곰에게 던져주다니! 이런 패륜이 어디에 있어! 패륜도 이만저만한 패륜이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그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란 정말 어쩔 수 없군! 정말 지독한 고려장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들은 석별의 시간이 눈물겨울 뿐,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분노가 무색하게도 그것을 당연한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삶의 예식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곰의 자손일지라도 이것은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곰은 에스키모인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곰은 에스키모인들에게 생명의 근원입니다. 노모는 곰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손을 입히고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곰이라는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 역시 그곳으로부터 왔으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공평합니다. 내가 비워놓은 자리에 자손이 자라고, 자손은 내 덕으로 살 수 있습니다. 곰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도 우리는 윤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 더 많은 이야기가 여기저기에 산처럼 쌓여 있지만, 이제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주의 경제학
위의 이야기들을 생각해보지요. 부시맨은 동물을 자신과 같은 이 우주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동물이 먹이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주린 배를 채우려고만 들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지요. 무언가 더 고차적인 어떤 것을 따라야 한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냥을 하고 나서 동물이 사라진 그 자리에 자신의 소유물을 기꺼이 내주어 세상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원시인도 뭔가 이 우주의 공평함이나 균형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네가 내게 주었으니 나도 주어야 한다. 뺏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이 우주의 어떤 것을 뺏는 것은 세상의 균형을 기우뚱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한쪽이 이겨야 끝내는 지금의 스포츠나 게임과는 다른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받으려거든 먼저 내주어라! 에스키모인들도 이런 교환의 우주에 순응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윤리적'이라는 말이 인간을 빼고도 말할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윤리라는 말에서 인간이 빠진다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윤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해야 한다' 이와 같은 규정들을 모아놓은 것이 윤리가 아니며, 우리의 삶 속에서 유용하기 때문에 고안해낸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곧 윤리는 인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처럼 이 우주와 세상에는 공평함이나 균형을 추구하는 어떤 '힘'이나 '원리'가 이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힘의 단순한 표현은 '받으려거든 내주어라, 내주면 받는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공짜가 없는 이 우주의 경제적 교환은 어떤 의미에서 '우주의 경제학'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이 경제학에서 우주의 일원들은 그것이 인간, 동물, 식물, 더 나아가 어떤 것일지라도 서로서로 주고받는 그 과정이 끊임없이 연결되어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받으려고만 하고 주지 않거나 한다면 경제의 법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부시맨식으로 말한다면, 윤리적이지 않은 겁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기로 하지요. 윤리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질서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이 있고 발이 있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속합니다. 윤리가 자연의 질서에 속한다면, 윤리는 손발처럼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손과 발은 눈에 보이는 것이며, 윤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과학적 합리성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그거야 원시인들의 사고방식이지,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문명인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화된 사회란 거의 서구화된 사회를 의미합니다. 서구화란 다른 말로 하자면 근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원시인들의 저러한 사고방식과 태도는 미개한 지역, 그러니까 문명화되지 않고, 서구화되지 않고, 근대화되지 않은 곳에서나 통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은 오랜 옛날, 말 그대로 원시시대에나 했을 법한 것입니다. 또 덧붙일 수 있습니다. 근대적 사고방식은 과거의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유치하고 어리석은 사고방식 속에 들어 있는 비합리적 요소들을 폭로하고 그것을 벗어나면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합리적 이성이고, 그것을 토대로 이 우주를 새롭게 해석한 체계가 바로 인류의 자랑인 근대과학입니다.
우리말로는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합리주의와 이성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성을 뜻하는 래셔널리즘(rationalism)과 이성을 뜻하는 리즌(reason)은 영어의 할아버지 말인 라틴어의 라치오(ratio)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래셔널리즘을 어떤 사람들은 이성주의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우리말의 형상은 전혀 다르지만 그 속뜻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치오는 본래 '계산하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수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앞선 말들을 곰곰이 살펴보니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서구적 사고방식이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 그것도 수학적 이성을 토대로 이 우주를 해석한 과학적 합리주의였구나! 이 합리주의는 과거의 사고방식 속에 담긴 미신적인 생각들을 단번에 사라지게 만들었구나, 마치 마법사처럼!
근대 세계에 등장한 이 사고방식은 한마디로 말해 과학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고방식에 따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동양, 서양 할 것 없이 과학이 선사한 새로운 문명은 지금도 거침없이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볼 수도 없는 너무도 작은 세계와 볼 수도 없는 너무도 큰 세계를 하나로 꿰어서 설명하는 과학적 체계가 우리가 사는 문명을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방식은 우리가 앞서 예를 든 원시인과 에스키모인들의 행위를 우리처럼 윤리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윤리적인 행위와 지식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며, 과학의 탐구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윤리적인 행위로 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합리성에 토대를 둔 행위가 아니며, 과학적 사고방식이 혐오하는 미신적 사고방식입니다. 가혹하게 말해서 사고도 아닙니다. 우리가 말한 우주의 경제학은 과학의 눈으로 본다면 증명할 수도 없는 믿음의 체계에 불과합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과학의 금과옥조인 인과율의 체계와 맞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우주의 일원이며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면, 어떤 것의 결과에 대한 원인은 아무것이나 될 수 있습니다. 토끼를 잡은 원시인이 그 자리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옥수수수염 한 다발을 놓는다고 해서 토끼가 사라져 우주가 순간 기우뚱할 리도 없고, 또 옥수수수염이 우주의 균형을 잡는 엄청난 임무에 성공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도무지 터무니없는 생각,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믿음의 체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원시인으로 사는 것이 낫습니다. 과학 문명엘랑 얼씬대지 마시길!
한 우주 속의 두 가지 사고방식
우리는 과학의 준엄한 비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시맨의 사냥 수칙은 감동을 줍니다. 옥수수수염을 남기고 총총히 길을 가는 이에게서도 그렇고, 패륜적인 에스키모인들의 삶에서도 존재의 무거움을 느낍니다. 산다는 것은 이리도 가볍지 않구나! 이런 감동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원시인의 마음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나요? 미신을 폭로한 과학의 시대가 한참이나 진행되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고 유치한 상태로 살고 있나요?
20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새로운 생각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원시인의 사고방식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은 하나가 하나를 벗어나거나, 하나가 하나의 우위에 서서 그 하나를 버리거나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하나의 사고방식이며, 둘은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것입니다. 손이 둘이고 눈이 둘이며, 둘은 서로 각각 다르지만 결국 한 인간 속에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원시인의 저러한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사고방식과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한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는 대등한 사고방식입니다.
이로부터 근대과학의 세례를 받기 이전의 모든 문명의 저급한 사고방식을 다시 음미하려는 생각이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속했던 전통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적 합리성에 비추어보아 우리의 전통적 사고방식은 원시인의 사고방식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20세기의 진취적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이 자각을 좀 더 확장시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곧, 이 우주에는 근대과학처럼 원인과 결과를 바탕으로 수학적 이성을 통해서 사물을 파악하는 과학적 방법이 있는가 하면, 원인과 결과가 수학적 이성이라기보다는 직접적인 감각에 따라, 거의 의식이 생기기 이전에 자발적인 방식으로 연결되는 오래된 과학적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동은 과학 이전의 뭉뚱그려진 모호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매우 오래된 과학에 따른 반응이었습니다. 이 과학은 수학적 이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이 우주 안에는 경제적 교환, 곧 '얻으려거든 먼저 주어라'라는 자발적인 반응을 하게끔 몸과 마음속에 새겨진 능력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주와 나는 마치 거울이 사물의 모습에 응답하고 메아리가 종소리에 응답하듯, 그렇게 느껴서 공명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한자말로 감응이나 상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주는 본래 어떤 것을 더 편애하는 법이 없습니다. 빈 것은 채워주고, 채우다 더 채울 것이 없으면 그 다음은 비워집니다.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해가 기울고, 자정이 되면 여명을 준비합니다. 달은 차고 나면 기울고, 꼭 쥔 주먹은 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겨울에는 암만 애를 써도 싹을 틔우기 어렵고 봄이 되어야 싹이 돋아나며, 여름의 장마를 거치고 가을의 따가운 볕을 쬐어야 알곡이 여뭅니다. 원시인들의 자발적인 마음이란 이런 우주의 사실과 공명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원시시대를 한참 벗어난 우리 현대인들도 이런 사실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세계 곳곳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우주의 경제학이 인간과 공명을 일으키는 과정을 지키고 따르며, 그 속에서 어떤 삶의 기술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20세기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이러한 삶의 기술이 가진 설명 논리가 가장 잘 드러난 지역이 바로 한자문화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음양오행 이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이론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론이지만, 이것이 오래된 과학인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그것의 가치를 좁은 한자문화권의 풍토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보편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술은 이 이론을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론이므로 인간의 고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이론은 인간 이전에 있다는 뜻에서 이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절은 이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원형이정
이 우주의 경제학 덕분에 사계절이 제때 제 역할을 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삶이 영위됩니다. 사계절은 예나 지금이나 사실 해와 달이 변화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해가 길어지고 짧아지는 리듬과 주기는 실제로 해를 도는 지구와 달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의 연(年)은 해 년이고, 월(月)은 달 월이라고 합니다.
위에서 원시인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우리 문화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세계의 석학들이 공감하고 있는, 오래된 과학의 참모습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체계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제인 삶의 기술로서의 예절을 말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만 말하자면, 우주와 인간이 공명하고 있다는 오래된 과학 속에서 우주의 경제학인 '얻으려거든 먼저 주어라'와 같은 원리는 사계절이 자리를 번갈아 내주는 추이와 이행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 원리를 한자로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각각 대표하는 이 우주 속의 힘이자 원리입니다. 우리가 부시맨의 사냥 수칙에서 받은 감동은 이 원리가 우리 마음과 공명하면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직접적인 전통인 조선왕조의 철학은 우주와 내 마음의 공명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주의 원리가 내 마음과 공명하면서 드러나는 것은 거울의 영상과 같은 것입니다. 우주가 하나라면 내 마음도 하나이고, 둘이라면 내 마음도 둘이 됩니다. 원형이정의 넷에 따라 내 마음에도 넷이 있습니다. 우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형이정이 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됩니다. 원형이정이 하늘의 해와 달, 사계절이 그로 말미암아 변할 수 있는 과학적 원리라면, 인의예지는 사람의 세계에서 이로부터 사람의 행위에 기준이 되는 윤리와 도덕의 원리입니다. 과학과 윤리(도덕)는 지금의 합리성에 따르면 서로 다른 세계, 서로 다른 문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보았듯이, 오래된 과학은 이 우주의 질서와 원리가 그 자체로 '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 한자문화권의 전통에서 이 우주는 윤리적 우주이며 가치화된 우주이고, 과학과 윤리가 구분되지 않는 우주입니다. 하나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둘이라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안쪽으로 둘이 통합되어 있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인의예지가 있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저 우주에 원형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형이정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 하나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의예지도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일 앞의 글자인 인이 나머지를 대표합니다. 인은 현대 말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시맨의 사냥 수칙이 우리에게 불러일으켰던 감동은 '받으려거든 주어라'라는 우주의 원리였으며,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감정이면서 우주의 원리가 됩니다. 원형이정이 사계절의 원리라면, 대표가 되는 원은 이 사랑을 잘 보여주는 봄을 뜻합니다. 사랑 때문에 생명이 자라고, 커가고, 결실을 맺고, 사랑 때문에 자리를 내주고 다시 봄을 기다립니다. 인류의 스승들이 이 우주의 원리를 아낌없이 주는 것, 받아들이는 것, 어머니 등으로 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인의예지는 현대 말로 대강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인은 사랑, 의는 정의와 의리, 예는 예절과 예식, 지는 지혜에 해당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의 탐구 대상인 예에 주목하겠습니다. 예라는 한자말로부터 다양한 말들이 현대에 생겨났습니다. 예절, 예의, 예식, 예치 등등.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이해하겠습니다. 집합 A라고 하면, A에 속하는 원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는 예절, 예의, 예식 등을 원소로 가지고 있습니다. 나누어서, 예절은 예의 세세한 항목들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저렇게 하는 것이 맞다' 등과 같은 절차들을 가리킵니다. 그에 비해 예라는 한 글자는 예로부터 비롯된 많은 말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지금 말로 이해하면 어떤 예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의 절차는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손으로 바꾸거나 새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는 그렇지 않습니다. 곧 예의 원리, 혹은 예의 정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주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정신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앞서 말한 사랑입니다. 예도 인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예라고 할 때 이 사랑은 다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의 원리는 적합입니다. 상황에 따른 적합함, 들어맞음, 잘 맞음이 예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참 애매하게 들립니다. 무엇에 적합함인가? 무엇에 들어맞음인가?
적합함은 상황의 적합함입니다. 그런데 상황이란 시간이 변하듯 변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변하는 것에 적합하려면, 지금 적합한 것은 계속 지속되지 않습니다. 지금 적합해도 다음에는 적합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예가 한동안 적합한 삶의 기술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이게 삶의 기술인가 하는 의심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고는 결국 바뀌게 됩니다. 이 상황이라는 것은 삶이 진행되는 시간과 공간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삶의 기술은 삶이 있고 나서 그 삶을 더욱 고양된 것,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지금보다 더 좋고 나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절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의예지라는 우주의 원리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곧 인, 사랑입니다.
우주의 경제학은 얻으려면 먼저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 안의 모든 것을 동료로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에 따라 균형과 공평을 지키려고 합니다. 사랑은 이러한 원리를 쉽게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주 전체의 보편적 원리와 떨어져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고양과 관계가 있습니다. 삶의 기술은 삶을 지금보다 더 나은 단계로 성장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주가 원래 그런 것이고, 내 마음이 그를 따라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적합하다는 의미는 변화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이 고양되고 성장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낙관적인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바로 우주의 원리가 사랑이며, 인간이 그와 공명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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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뜻도 모르고 따라했던 관혼상제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예절의 행위나 절차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전통 예절 중에서 가례에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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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예절의 정신 – 정말 궁금한 우리 예절, 이창일,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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