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화학사

다른 표기 언어 history of Chemisty

요약 화학에 관한 체계적인 역사.

화학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성질 및 그 반응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원시시대부터 물질의 변화는 인간의 관심 대상이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치며 야금기술이 발전하였고 고대문명에는 실용화학이 존재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자연현상을 단순화하여 순수한 물질의 현상으로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으며 막을 내린 그리스 고전시대 이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최초의 연금술이 탄생하였다. 이때부터 아리비아의 황금시대는 시작되었고 발전된 연금술은 서유럽으로 건너갔다. 서유럽으로 도입된 연금술은 르네상스 초기에 과학이 부흥하면서 한층 더 발전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화학은 과학으로 점차 인정받게 되었고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18세기에는 기체에 대한 연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근대화학의 아버지인 라부아지에는 화학 명명법의 근대적 체계를 확립했다. 19세기 중반까지 유기, 무기 화학 분야에서 발전해 오던 화학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물리학의 발달과 함께 물리화학이 확립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생화학이 화학의 한 분야로 인정받았다.

과학 이전의 실용화학

화학이 과학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은 16세기였지만, 화학의 주요문제는 이미 원시시대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초기의 인간들은 물질의 변화에 주목하여 물질의 자연적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바가 있음을 알았다. 불의 발견에 이어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도구를 연구했다. 또한 원시시대에도 금속의 이용은 매우 중요해 구리·청동·철기의 각 시대에 야금기술이 발전했으며,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고대문명에서는 이미 고도의 실용화학이 존재했었다. 물론 그들의 기술은 화학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은 금속·염료·향료·약품을 다루는 노동자에 불과했으며, 사원에서 일하기도 했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값싼 모조품이나 숙녀나 귀족을 위해 사치스런 물건을 만들었다. 제조방법은 대부분 상업상의 비밀로 다루어져 대대로 전수되었으며 향료의 제조기술과 금·은 등 여러 금속의 분석기술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고고학상의 발굴물 가운데 발견되는 장치의 일부분이나 유적에서 발굴된 화학물질의 분석결과를 종합해보면, 고대인이 이용한 많은 기술이 밝혀진다. 그들이 사용한 증류·온침(溫浸)·추출법 중에는 나중에 연금술사나 화학자들이 자신들의 방법이나 착상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된 것이 많다.

이들 고대문명에서 화학은 본래 실용적인 것이었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은 대부분 신화적·마술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념 중 어떤 것은 후세의 보다 합리적인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세계는 남과 여, 온(溫)과 냉(冷), 습(濕)과 건(乾) 등의 많은 대립물로 성립된다는 메소포타미아인의 사상을 계승했다. 즉 태양·달·별 등 커다란 세계의 사상(事象)인 대우주는 소우주, 즉 작은 인간세계의 사상과 유사하다는 생각도 중요한 것이었다. 이 생각은 원래 점성술에서 나온 것인데, 많은 그리스 사상가들의 생물학적 편향과 잘 맞아 여러 화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스의 고전학자

개요

그리스인은 고대문명의 사상과 기술을 이오니아의 밀레토스를 통해서 습득했으며, BC 6세기 이오니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이를 계통화했다.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우주론자로서, 모든 자연작용을 극히 단순화하여 논리적, 즉 순수한 물질의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하나의 기본물질을 찾아내면 그 변화에 의해 모든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장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은 상태의 변화였다. 물질은 고체·액체·기체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들 상태는 흙·물·공기에 해당하며 각 상태간의 변화는 열(불)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기본물질을 이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이 물질을 물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일정하지 않은 덩어리로부터 물질이 만들어진다고 상상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기본물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이 가운데 어떤 물질이라도 적당한 조건에서 다른 물질로 변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만물은 유전(流傳)한다는 사상을 제창했으며, 대립물의 결합이 실제 물질을 만든다는 고전적인 개념으로 이 사상을 확대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이들 사상을 이론적으로 크게 발전시켜 모든 물질은 종(種)이라고 하는 불멸불생의 무한하고 작은 입자로 이루어지며, 이들의 혼합과 분리에 의해 운동과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정했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사상을 일반화하여 무한한 종을 흙·공기·물·불의 4원자로 줄였다. 이 사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여 2,000년 동안 과학사상의 주류가 된 4원소설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설은 레우키포스와 그의 제자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처음으로 설명되었다. 특히 데모크리토스는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의 속도에 대해 고찰했는데, 4종류 원자의 여러 형태로 원소의 다양한 성질을 해석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설은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의 기초가 되어 후세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짙었던 피타고라스 학파는 소크라테스와 특히 플라톤의 지도하에 있던 그리스 철학사상 속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 철학자들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플라톤

플라톤은 본래 물리학설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철학자로서 세계의 본질을 밝혀내고자 했으며 〈대화편 Timaeos〉에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플라톤이 생각한 우주 체계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개연적'인 것이었다.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의 4원소를 받아들였는데 그가 말한 원자는 기하학적 추상 개념이었다. 즉 불은 그 날카로운 끝부분이 관통력을 갖는 4면체, 흙은 입방체, 물은 24면체, 공기는 8면체라고 했다. 이 형태들의 경계면을 다시 배열하면 원자는 서로 변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의 상호 변환성이라는 개념은 후세의 연금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추상적인 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더욱 현실에 가까워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분야의 철학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원래 과학자로서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물질의 조성과 변화에 대한 그의 설명은 17세기까지의 과학사상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오니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본물질을 가정했는데, 물질의 여러 가지 상태를 상정하고, 실재하는 물질들간의 차이를 기본물질에 상정된 여러 가지 형태로부터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든 실재하는 물질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선대의 과학자들보다도 훨씬 구체적인 구상을 펼쳤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제시한 대립사상에 주목하여 온·냉·습·건의 4가지 속성을 상정했으며, 그것들이 결합해 물리 세계의 원자를 만든다고 가정했다. 온과 냉, 습과 건은 서로 상쇄하므로 결합하지 않지만 온과 건은 결합해 불의 원자를, 온과 습은 공기의 원자를, 냉과 습은 물의 원자를, 냉과 건은 흙의 원자를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즉 기본물질에 여러 가지 속성의 변화를 상정하면 물질은 변화를 낳고, 속성의 변화가 형태의 변화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4원자를 조합시키면 제2의 변화가 일어나 돌[石]·피[血]·살[肉]과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을 만들며, 나아가 이들을 조합시키면 얼굴·손 등을 만드는 제3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현상과 생물현상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해석했다.

연금술의 출현

알렉산드리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으로 그리스 철학의 고전시대는 끝나고, 과학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당시 사원은 위대한 연구소였는데, 이곳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과학이 개화하고, 그밖의 여러 요인과 결합해 화학은 급속히 진보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많은 문화가 교류한 장소였다. 그무렵까지 그리스 철학은 대단히 추상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몇 백 년에 걸쳐 고도로 발전해온 실제적인 오리엔트의 기술과 만나 오리엔트적 신비종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성행했다. 그결과 그리스 철학, 오리엔트의 기술, 오리엔트의 종교적 신비주의로부터 최초의 연금술이 탄생했다.

초기의 연금술사는 장인에 불과했으나 철학적 이론을 기초로 기술과정의 성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철학자들에게 자극을 받았다. 그들은 철학자의 물질 상호 변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가난한 고객을 위해 만들었던 금 모조품이 진짜 금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들은 금속을 변화시켜 겉보기에 금과 비슷한 것을 만드는 동안 조작과 시약의 조제를 통해 참된 화학을 익혔다. 알렉산드리아의 연금술사들은 화학장치를 대폭 개량하고 무기물질에 관한 많은 새로운 반응을 익혔다. 그러나 오리엔트의 종교로부터 연금술사상에 흘러 들어와 있던 신비사상이 알렉산드리아의 연금술에서 지배적 사상이 되고, 금의 완성은 인간 정신의 완성을 상징하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실험실에서의 실제적인 작업의 흥미는 쇠퇴해 화학상의 발견은 4~5세기에 비잔틴 제국에서 거의 종식되었다.

아라비아의 황금시대

이 시기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종교논쟁으로 정교회에서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분리되었는데, 네스토리우스교도는 소아시아로 쫓겨나 그곳에서 많은 중요한 학파를 확립하고 그리스 철학자들의 논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대부분의 그리스어 서적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여 서유럽이 암흑기에 있었을 때도 많은 귀중한 그리스 문헌을 보존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또 신흥 아라비아 제국과 접촉해 바그다드의 지식인인 칼리프(마호메트의 후계자)의 장려로 그리스 저서들을 다시 아라비아어로 번역했다.

8~11세기에 많은 의사와 연금술사는 실제적인 실험실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자연법칙을 계승해 화학 변화와 아리스토텔레스의 4가지 속성을 조합시켜 원소들을 설명했으며, 이를 약간 수정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가 제2의 대립물인 황과 수은을 형성한다고 가정했다. 당시에 황과 수은은 금속을 구성하는 물질이라고 생각했는데, 황과 수은은 물리적 물질이 아니라 토성(土性)과 연소성(황), 광택과 유동성(수은)의 속성을 의미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계통의 사상은 존재의 개념으로 바뀌고, 실체가 없는 '요소'는 유형물질에 존재하는 물리적 성질을 부여하게 되었다.

아비체나, 라지 등 아라비아의 의사와 화학자들은 가성 알칼리, 염화암모늄을 비롯해 많은 중요한 물질을 도입했다.

서유럽으로의 도입

11세기 이후 아라비아의 연금술은 이전의 그리스인의 연금술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서유럽 사람들은 일찍이 로마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오랜 동안의 과학적 암흑기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아라비아 과학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있었다. 스페인과 시칠리아 섬에도 학교가 설립되어 고대 아라비아의 사본이 번역되었다. 그 대부분은 그리스어로부터 고대 시리아어를 거쳐온 것이었다. 그당시에 많은 연금술 사본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과학 저작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작들은 서유럽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어 연금술의 실용화가 성행했다.

연금술은 중세를 통해 실용기술로 자리잡은 금속 공작기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장인들은 실제적인 관찰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밝혀냈지만 그당시에도 금속의 조성으로 황-수은설을 취하고 있었다. 게베르가 쓴 책에는 연금술에 대한 새로운 지침이 요약되어 있는데, 1310년경의 저작은 당시 실험실 작업이 기술적으로 상당히 진보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금속 분석실험 방법과 시약 조제, 정제 방법 등의 내용이 아주 정확히 기술되어 있다. 당시에는 또한 알코올의 증류 등 증류기술이 상당히 진보해 있었다.

실용적 연금술의 지배

르네상스 초기에 과학이 부흥함으로써 연금술도 한층 발전했다.

16세기에는 H. 브런츠윅의 증류에 관한 저서와 V. 비링구초, G. 아그리콜라, L. 에커의 채광 연금술에 관한 명저들이 나왔다. 이 출판물에는 새로운 금속과 그 화합물들이 기재되어 있다. 의학에 있어서는 P. A. 파라켈수스가 화학요법을 이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의학에 화학요법을 도입하는 시도로 의약화학 학교를 설립해 약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미 방대해진 새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틀 속에서는 적합하지 않게 되어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되었다.

당시 파라켈수스는 금속 조성에 관한 황-수은설을 수정하고 금속의 제3성분으로서 소금을 덧붙였다. 그는 이것을 금속의 안정성[土性]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은 단순히 연소성의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고, 수은은 여전히 금속성 광택과 유동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파라켈수스의 이 주장은 '3원소설'로 알려지게 되었다.

1597~1700년의 화학 발전

개요

이 시기의 화학은 과학으로서 점차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기 화학의 방식은 최초의 화학교과서로서 자주 언급되는 A. 리바비우스의 〈연금술 Alchymia〉(1597)에 논술되어 있다. 그는 "알케미(화학)는 마지스테리스(시약과 그 사용법)를 만들어 혼합물에서 주요부분을 분리해 순수한 물질을 추출하는 기술이다" 라고 주장했다. 17세기에 화학은 급속히 발전해 산·염기·염 등이 연구되었고, 천칭을 사용함으로써 반응에 대한 정량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의약화학자는 새로운 화학요법을 발전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프랑스에는 약학자가 많이 나왔는데 C. 글라제르와 N. 레메리는 화학 교과서를 쓰기도 했다. 또한 동·식물성 물질을 증류하고 많은 약제를 조제하여 증류에 의해 휘발성 액체, 가연성 기름, 무거운 액체, 수용성 물질 및 고체 잔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증류가 물질을 '기본성분'으로 분해한다는 것을 확신한 그들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5원소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에 활동했던 화학자들은 각각 1~5개의 기본원소가 존재한다고 믿는 학설을 고수했다.

신구사상

이 시기 화학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천문학설과 물리학설의 영향을 받았다.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에피쿠로스파의 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De rerum natura〉 속에 씌어 있는 고대 그리스의 원자설이 여러 형태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부흥하는 데는 피에르 가생디와 데카르트가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보일은 이들 사상을 화학에 적용했는데, 그는 '입자설'에서 화학으로부터 모든 신비적인 영향을 배제하고 오로지 물리학적 방법에 기초해 화학반응의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회의적인 화학자 The Sceptical Chymist〉(1661)에서 4원소설을 제창한 아리스토텔레스 학설과 파라켈수스의 3원소설, 그리고 증류에 의해 물질의 기본원소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비판했다. 그가 내린 원소에 관한 정의는 근대적인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는 연구실에서 화학에 관해 많은 사실과 현상들을 발견했다. 보일은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촉진시켰으며, 후에 그 사상에 의해 화학이 크게 진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일이 활동했던 거의 같은 시기에 3원소설은 새로운 중요한 형태를 취했다.

독일에서는 J. J. 베커가 파라켈수스의 3원소의 이름을 유리 형상의 흙, 유성의 흙, 액체 형상의 흙으로 바꾸어 불렀다.

이들은 물질에 가연성과 금속광택을 갖게 하는 조밀성을 부여한다. 이 시기에 주목할 점은 물질 성분으로서 공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상이 이미 모든 화학자에게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공기를 항상 존재하지만 물리적 작용체로서 움직일 뿐 반응하지 않는 액체라고 생각했다. 벨기에의 물리학자이며 화학자인 J. B. 반 헬몬트는 17세기 중엽 이산화탄소를 발견해 '가스'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마저도 이 기체가 물리적인 성질 외에 다른 어떠한 성질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또한 베허는 물질의 유일한 성분으로서 고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플로지스톤설(연소설)

베허의 제자인 게오르크 에른스트 슈탈은 베허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스승이 말한 유성의 흙을 '플로지스톤'(연소)이라 하고 이에 기초해 처음으로 화학을 총정리했다.

플로지스톤은 연소의 요소이고 물체의 연소는 플로지스톤을 소실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불꽃을 바라보면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해왔다. 이 생각은 연소체가 유기물인 경우에는 미량의 재만 남음으로써 이치에 잘 맞았다. 슈탈은 금속이 녹스는 것도 연소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법칙을 주로 금속에 적용했다.

금속은 금속재(산화물)로 전환되어 플로지스톤을 잃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금속재는 간단한 물체이며 금속은 금속재와 플로지스톤으로 된 화합물이라고 생각했고, 공기는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하기는 하지만 단지 플로지스톤이 떨어질 때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플로지스톤은 현재 인정되고 있는 산화·환원과는 완전히 반대의 것이지만, 당시에는 현재 산화·환원으로 설명하는 대부분의 반응을 이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플로지스톤설에서 큰 장해인 금속재가 원래 금속보다 무겁다는 사실이 슈탈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플로지스톤이 실체가 없는 요소(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학이 발달하고 화학자들이 더욱 빈번하게 정량적인 수단을 적용함에 따라 이같은 견해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중에 플로지스톤 신봉자에게 있어서 플로지스톤은 실험실에서 다루는 다른 물질과 같은 것이 되었고 반응에 관여하는 물질의 질량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헛된 연구가 이루어졌다. 때로는 플로지스톤이 마이너스 질량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 화학자도 있었고, 수소가 발견되었을 때 이것을 플로지스톤이라고 생각한 화학자도 있었다.

연소의 이해

18세기에는 잇달은 화학적 발견으로 연소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연소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의 식물학자 스티븐 헤일스는 대부분의 물질은 가열하면 공기를 방출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공기를 모으기 위한 용기를 고안했다. 네덜란드의 화학교사인 H. 브루하베는 대기가 화학반응에 관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실증한 사람은 J. 블랙으로 1756년 산화칼슘이 이산화탄소를 흡입하면 탄산칼슘을 만들고 탄산칼슘을 가열하면 그 반대과정이 일어남을 증명했다. 고체 중에 기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은 아주 새로운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산화탄소를 '고정공기'라고 불렀다. 많은 화학자들이 열심히 그의 연구를 계승해 많은 새로운 기체를 발견했다. 이같은 연구는 K. W. 셸레(1772)와 J. 프리스틀리(1774)가 거의 동시에 산소를 발견했을 무렵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플로지스톤설을 타도하고 연소의 본질을 확립한 사람은 근대화학의 아버지인 A. L. 라부아지에이다. 라부아지에는 주석·납·인·황이 산화 또는 환원 반응을 일으킬 때의 무게 변화를 정량적으로 연구해 산소가 이 모든 반응에 관여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리하여 그는 반응과정의 실제 조직을 이해하게 되었고, 연소 또는 금속과 그 산화물의 조성에 관해서 명확히 설명했다. 따라서 황-수은설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원소에 관한 정의는 근대적이며 그 정의에 따라 오랜 동안 화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원소의 개수에 관한 생각이 통합되었다.

라부아지에는 또한 몇몇 화학자들과 함께 화학 명명법의 근대적 체계를 확립했으며 동물의 호흡작용이 산화의 특수 형태임을 증명해보였다. 그는 호흡작용의 연구로 진정한 의미의 생화학 실험을 행한 과학자이다. 프리스틀리 등의 여러 고전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설을 완강히 고수하려고 했으나 급속히 그 근거를 잃어 1800년경에는 라부아지에의 산소설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19세기 화학조성 연구

개요

18세기에 정량적인 방법이 보급되어 다수의 광물이 분석되고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었다.

친화력 문제에 특히 주의가 집중되었는데, 친화력이란 화합물을 결합시키는 힘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원소 집단의 친화력은 화합물 속에 있는 어느 원소와 다른 원소의 치환 정도에 따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T. 베르크만은 상대적 친화력표를 작성했는데 그 힘의 본성에 대해 만족할 만큼 설명하지는 못했다. 1808년에는 화합물은 고정된 조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졌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존 돌턴은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화학적인 원자설을 내놓았다.

그는 각 원소는 특유의 크기와 무게를 지닌 고유한 형태의 원자로 성립된다고 가정하고 원자량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돌턴은 진정한 원자량과 화합물의 원자수를 산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화합물의 조성이 일정한 것은 그 속에 일정한 수의 원자가 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여러 엄밀한 가정을 세웠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그의 법칙의 보편성이 큰 제약을 받았다. 이 제약의 대부분은 게이 뤼삭의 기체 결합비에 대한 연구로 제거되었다. 그는 원소가 당량 단위로 서로 결합한다고 증명했지만, 원자와 분자를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자량과 분자량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1811년 아보가드로가 기체의 부피가 일정하다면 그 안에 포함된 분자의 수도 같고 이에 따라 원자와 분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50년 동안이나 무시되었다. 스웨덴의 위대한 화학자 J. J. 베르셀리우스는 많은 광물에 관한 분석연구로 원자량과 비열과의 곱은 일정하다는 뒤롱-프티 법칙에 기초해 거의 정확한 원자량표를 작성했다.

베르셀리우스는 촉매와 화학 이성(異性)현상을 기술, 명명하고 화학기호를 근대적으로 체계화하는 등 화학이론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의 주된 이론적 공헌은 원자결합에 관한 양성설(兩性說), 즉 전기화학이론으로 이 이론에 의하여 친화력의 본질에 관한 종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새로 발견된 전기분해과정과 볼타 전지의 전극에서 기체와 금속이 분리되는 과정에 강한 흥미를 가졌다. 베르셀리우스는 모든 원자는 '+'와 '-'의 2가지 전하를 띠고 있으나 어떤 것은 '+'가, 다른 것은 '-'가 우세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하를 띤 원자는 정전기력에 의해 '+'전하를 띤 원자와 결합한다고 생각했다. 이 화학친화력의 법칙은 무기염류에는 잘 맞았다. 무기염류는 그 시대에 가장 많이 연구된 물질이며, 그의 학설은 화학자들 사이에 널리 인정되었다.

19세기 전반 유기화학을 연구하여 수많은 탄소화합물이 밝혀짐에 따라 양성설의 불충분함이 밝혀졌다.

특히 유기화합물 속의 수소가 염소와 같은 원소로 치환되는 것은 베르셀리우스의 설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염소 원자는 수소와 반대의 전하를 띠고 있기 때문에 정전기력에 의해 결합하는 화합물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기화학자들은 관능기(반응할 때 작용하는 원자집단)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들 기가 간단한 물질이 물과 암모니아 속에서 결합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원소와 결합하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화학식을 쓰는 경우 분자량·원자량·당량을 일치시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어 한때는 아세트산에 대해 여러 개의 다른 화학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기화합물(1858~1900)

1858년 F. 케쿨레와 A. S. 쿠퍼는 탄소 원자는 4가로 다른 탄소 원자와 결합해 긴 사슬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구조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1860년대에 A. M. 부틀레로프가 발전시켰다. 1865년 케쿨레는 방향족 화합물의 성질이 환상 구조에 기인한다고 해명했다. 유기화합물의 구조를 알게 되자 표면적인 화학식을 3차원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논리에 맞게 되었다. 반트 호프와 J. A. 르 벨은 1874년 동시에 4면체 탄소 원자를 가정했으며, 이로써 입체화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사상에 의해 유기화합물의 명확하지 않은 많은 성질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그후 30년에 걸쳐 많은 연구자들이 이 사상을 발전시켰다. 19세기말 A. 베르너는 백금 또는 그와 유사한 금속 무기착화물에 입체화학을 적용해 이전에 잘못 알고 있던 많은 화합물의 성질을 다시 설명했다.

원자량과 주기율

1860년 독일의 카를스루에에서 최초의 국제화학회의가 개최되어 화학법칙, 특히 원자량에 관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회의에서는 이탈리아 화학자 S. 칸니차로가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부활시켜 원자와 분자를 서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즉시 받아들여져 원자량과 분자량이 인식되었다. 이로써 원자량으로 원소의 성질을 분류하려고 했던 초기의 시험적 연구가 완성되었다. 1869~71년에 D. I. 멘델레예프와 L. 마이어가 각각 주기율표에 관해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했다.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작성한 주기율표에 기초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3개의 원소(갈륨·스칸듐·게르마늄)의 존재와 성질을 예상했다. 이들 원소가 발견되고 그 성질이 멘델레예프의 예상과 일치했을 때 주기율이 승인되었다.

물리화학의 확립

1875년까지 화학은 주로 무기·유기 분야에서 발전했다. 물리학은 화학과 함께 급속히 진보했으나 두 분야 사이에 접촉이 적었으며, 물리학자와 화학자 사이에는 간혹 대립의식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관련분야에서는 빠른 발전을 이루어 친화력과 반응속도의 연구를 하던 화학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해 물리화학이 과학으로 확립되었다.

1850년 L. 빌헬미는 저당의 가수분해 속도를 방정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것은 수식을 사용해 화학과정을 나타낸 최초의 예이다. 빌헬미의 연구에 이어 평형이 따르는 화학반응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1863년에는 C. M. 굴베르그와 P. 보게가 질량작용의 법칙을 정식화했다.

이 법칙에 따라 반응계에 포함되는 반응물의 농도로 가역반응의 진행방향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법칙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 밝혀져 화학자들은 원자를 운동성의 면에서 생각하고 그같은 견지에서 화학반응 기구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와 거의 같은 무렵에는 물리학자들이 S. 카르노 시대로부터 발전시킨 열역학적인 사고가 화학분야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G. H. 헤스, P. E. 베르텔로, J. 톰슨 등의 반응열 연구에 의해 그 길이 열렸다. 1869년 A. F. 호르스트만은 최초로 엔트로피의 원리를 화학에 적용했다. 1876~78년에 J. W. 깁스는 여러 상평형과 상률 취급에 수학적 기초를 도입했다.

1800년 볼트 전지가 발명된 이후 전기분해로 금속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학자들은 용액의 전기전도도를 연구하던 중 염이 용해상태에서는 예상하지 않은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F. 콜라우슈와 J. W. 히토르프의 연구에 의해 전기장 내에서 염은 전하를 가진 이온으로 나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1884년에 S. 아레니우스가 발표한 전리설에서 이온은 전기장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항상 용액 중에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 용액 이론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들 모든 연구는 화합물의 물리적 성질과 작용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W. 오스트발트에 의해 처음으로 조직화되었다. 오스트발트는 물리화학의 총괄적인 교과서를 썼으며(1885~88), 반트호프와 아레니우스의 도움을 받아 1887년에 이 분야의 전문잡지를 만들었다. 이후 물리화학은 화학의 한 전문분야가 되었다.

1895년 이후 화학의 발전

화학의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 19세기말에는 원소와 화합물의 작용을 각 원자의 성질에 따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유기화학자는 원자는 정4면체를 이루며 원자가 결합은 그 구석에 돌출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리화학자는 원자를 모든 방향으로 튀어나온 구이며 때로는 전하를 띠고 그것이 성질과 형태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발트 같은 지도적인 화학자 중에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원자 내 구조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화학자는 없었다. 이당시 물리학자들이 행했던 원자구조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방사능의 발견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분야가 열려 원자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희박 가스 중의 방전에 의해 생기는 방사선 성질을 연구해왔다. 방사선에서 음극선의 경우에는 '-', 양극선의 경우에는 '+'하전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판명한 학자도 있었다.

아레니우스가 이온설을 발표한 후 음극선과 양극선은 당연하게 입자로 구성되고 그 성질은 이온성을 나타낸다고 가정했다. 음극선에 대한 상세한 연구로 1897년 J. J. 톰슨은 전자를 발견했으며, 1911년에 R. A. 밀리컨은 그 전하를 결정했다. 전자는 어느 원소로부터 얻어졌든지 간에 같으며 '-'전기 단위라고 생각했다.

톰슨(Joseph John Thomson)

영국의 물리학자이며, 전자와 동위원소를 발견하였고 질량 분석계를 발명하였다.

ⓒ QWer/wikipedia | Public Domain

양극선은 여러 종류의 원소 이온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원자는 전자와 이온으로 구성되며 베르셀리우스의 양성설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를 가졌다. 또한 1896년 A. H.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한 후 퀴리 부부의 우라늄광의 광범위한 연구에 따라 화학자들은 이들에 대한 연구에도 힘써 19세기말까지 폴로늄과 라듐이 발견되었다.

20세기초 E. 러더퍼드와 그 제자들은 방사성 붕괴 중에 새로운 원소가 생기며 그 과정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에는 헬륨 이온, 전자, X선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 발견을 기초로 F. 소디는 방사성 붕괴구조와 경로를 연구했다. 그는 화학적 성질이 동일하며 질량수가 다른 원소가 존재함을 밝히고 이들을 동위체라고 명명했다. T. W. 리처드와 O. 페니히슈미트는 동위체가 실제로 존재함을 화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들은 다른 방사선원으로부터 얻은 납 시료를 고전적인 정량방법으로 조사해도 다른 원자량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1919년에 F. W. 애스턴이 고안한 질량분석기에 의해 거의 모든 원소에 동위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13년 H. G. J. 모즐리는 X선 분광사진에 기초해 각 원소는 원자핵의 '+'전하를 나타내는 고유의 원자번호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번호는 주기율표의 원소 위치와 일치하며 이론적으로 훨씬 정확한 것이었다. 이들 모든 발견은 20세기초의 15년간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화학자는 그 이론을 기초부터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자 내 구조의 친화력과 원자가의 문제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1916~20년 G. N. 루이스, W. 코셀, I. 랭뮤어 등은 새로운 사고를 화학결합의 본성에 대해 설명하는 데 이용했다.

베르셀리우스의 오래된 양성설이 아레니우스의 전리설에 따라 수정되었듯이 다시 유기화학자의 친화력 단위의 개념과 조화되도록 바뀌었다. 태양계의 형태를 한 원자모형은 1913~14년에 닐스 보어가 제기했다. 원자는 중심의 무거운 핵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로 구성된다는 생각은 원자의 결합력이 가장 바깥쪽 전자수에 의존한다는 것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이 설명과 상당히 일치했다.

C. K. 인골드 등은 복잡한 유기화합물 중의 전자 위치와 그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알아냈다. 이들의 초기 연구는 전자구조론적으로 유기반응 구조를 설명하려 한 많은 화학자들에 의해 보완되었다. 양자론에 따라 원자가 결합은 수학적으로 논의되어 공명 개념이 도출되었다. L. 폴링이 달성한 이 분야 연구는 화학결합력의 성질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리학자는 원자구조 연구에 유효한 사이클로트론 등의 기기를 개발했다. 이들 기기에 의해 화학자들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해 주기율표의 빈 곳을 채웠고, 또한 가장 무거운 원소라고 알려졌던 우라늄보다 더 무거운 원소도 얻었다.

1930년대 후기에 원자핵분열을 통해 새로운 원소수가 늘어나 안정한 방사성 동위원소까지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들 새 물질이 일반에 이용됨에 따라 방사성 동위원소는 화학과 생물 반응경로를 추적하는, 이른바 추적자(tracer)로 응용되는 등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생화학의 발전

생화학은 20세기초에 화학의 한 전문분야로서 인정받았다. 라부아지에 시대부터 생리학자는 생물현상을 해명하는 데 화학적 방법과 사고방식을 이용해왔다. J. 리비히는 1840년경 많은 농업문제를 연구했으며, 19세기 후반 L. 파스퇴르, W. 퀴네 등은 산소의 작용에 대해 연구했다.

1897년에는 E. 부흐너가 산소는 생세포와 관계없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화학물질일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생체조직의 화학에는 그러한 진보가 없었다. 1890~1910년에 비로소 E. 피셔의 지도하에 눈부신 연구가 이루어져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같은 중요한 세포를 구성하는 물질의 기본적인 화학구조가 밝혀졌다.

1910년 이후에는 이같은 연구가 보급되어 생화학의 새로운 전문분야가 화학의 오래 된 분야와 맞서게 되어 그 자리를 넘겨 받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화학의 모든 분야의 방법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생화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결과 1930년대에는 비타민과 호르몬의 화학적 성질에 관한 지식이 급속히 증대했다. 에너지 대사작용 연구에 따라 생세포 가운데 탄수화물 대사작용이 복잡하다는 것과 동식물 체내에서 인산에스테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욱이 이들 지식을 응용해 광합성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개개 단백질의 분리와 연구가 급속히 이루어져 이들 필수불가결한 화합물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이론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되며, 핵단백질 연구는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Daum백과] 화학사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