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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화학조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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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세기에 정량적인 방법이 보급되어 다수의 광물이 분석되고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었다.

친화력 문제에 특히 주의가 집중되었는데, 친화력이란 화합물을 결합시키는 힘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원소 집단의 친화력은 화합물 속에 있는 어느 원소와 다른 원소의 치환 정도에 따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T. 베르크만은 상대적 친화력표를 작성했는데 그 힘의 본성에 대해 만족할 만큼 설명하지는 못했다. 1808년에는 화합물은 고정된 조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졌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존 돌턴은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화학적인 원자설을 내놓았다.

그는 각 원소는 특유의 크기와 무게를 지닌 고유한 형태의 원자로 성립된다고 가정하고 원자량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돌턴은 진정한 원자량과 화합물의 원자수를 산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화합물의 조성이 일정한 것은 그 속에 일정한 수의 원자가 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여러 엄밀한 가정을 세웠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그의 법칙의 보편성이 큰 제약을 받았다. 이 제약의 대부분은 게이 뤼삭의 기체 결합비에 대한 연구로 제거되었다. 그는 원소가 당량 단위로 서로 결합한다고 증명했지만, 원자와 분자를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자량과 분자량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1811년 아보가드로가 기체의 부피가 일정하다면 그 안에 포함된 분자의 수도 같고 이에 따라 원자와 분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50년 동안이나 무시되었다. 스웨덴의 위대한 화학자 J. J. 베르셀리우스는 많은 광물에 관한 분석연구로 원자량과 비열과의 곱은 일정하다는 뒤롱-프티 법칙에 기초해 거의 정확한 원자량표를 작성했다.

베르셀리우스는 촉매와 화학 이성(異性)현상을 기술, 명명하고 화학기호를 근대적으로 체계화하는 등 화학이론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의 주된 이론적 공헌은 원자결합에 관한 양성설(兩性說), 즉 전기화학이론으로 이 이론에 의하여 친화력의 본질에 관한 종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새로 발견된 전기분해과정과 볼타 전지의 전극에서 기체와 금속이 분리되는 과정에 강한 흥미를 가졌다. 베르셀리우스는 모든 원자는 '+'와 '-'의 2가지 전하를 띠고 있으나 어떤 것은 '+'가, 다른 것은 '-'가 우세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하를 띤 원자는 정전기력에 의해 '+'전하를 띤 원자와 결합한다고 생각했다. 이 화학친화력의 법칙은 무기염류에는 잘 맞았다. 무기염류는 그 시대에 가장 많이 연구된 물질이며, 그의 학설은 화학자들 사이에 널리 인정되었다.

19세기 전반 유기화학을 연구하여 수많은 탄소화합물이 밝혀짐에 따라 양성설의 불충분함이 밝혀졌다.

특히 유기화합물 속의 수소가 염소와 같은 원소로 치환되는 것은 베르셀리우스의 설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염소 원자는 수소와 반대의 전하를 띠고 있기 때문에 정전기력에 의해 결합하는 화합물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기화학자들은 관능기(반응할 때 작용하는 원자집단)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들 기가 간단한 물질이 물과 암모니아 속에서 결합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원소와 결합하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화학식을 쓰는 경우 분자량·원자량·당량을 일치시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어 한때는 아세트산에 대해 여러 개의 다른 화학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기화합물(1858~1900)

1858년 F. 케쿨레와 A. S. 쿠퍼는 탄소 원자는 4가로 다른 탄소 원자와 결합해 긴 사슬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구조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1860년대에 A. M. 부틀레로프가 발전시켰다. 1865년 케쿨레는 방향족 화합물의 성질이 환상 구조에 기인한다고 해명했다. 유기화합물의 구조를 알게 되자 표면적인 화학식을 3차원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논리에 맞게 되었다. 반트 호프와 J. A. 르 벨은 1874년 동시에 4면체 탄소 원자를 가정했으며, 이로써 입체화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사상에 의해 유기화합물의 명확하지 않은 많은 성질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그후 30년에 걸쳐 많은 연구자들이 이 사상을 발전시켰다. 19세기말 A. 베르너는 백금 또는 그와 유사한 금속 무기착화물에 입체화학을 적용해 이전에 잘못 알고 있던 많은 화합물의 성질을 다시 설명했다.

원자량과 주기율

1860년 독일의 카를스루에에서 최초의 국제화학회의가 개최되어 화학법칙, 특히 원자량에 관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회의에서는 이탈리아 화학자 S. 칸니차로가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부활시켜 원자와 분자를 서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즉시 받아들여져 원자량과 분자량이 인식되었다. 이로써 원자량으로 원소의 성질을 분류하려고 했던 초기의 시험적 연구가 완성되었다. 1869~71년에 D. I. 멘델레예프와 L. 마이어가 각각 주기율표에 관해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했다.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작성한 주기율표에 기초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3개의 원소(갈륨·스칸듐·게르마늄)의 존재와 성질을 예상했다. 이들 원소가 발견되고 그 성질이 멘델레예프의 예상과 일치했을 때 주기율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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