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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5. 10. 7, 덴마크 코펜하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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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2. 11. 18, 덴마크 코펜하겐 |
국적 | 덴마크 |
요약 덴마크의 물리학자.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한 계의 에너지는 일정한 불연속적인 값들로 제한되어 있다는 양자론을 원자구조와 분자구조에 최초로 적용했다.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에 대해 논쟁했으며 원자 무기의 평화적 사용을 강대국에 주장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양자물리학을 이끌어온 인물로서 주요한 공헌을 했으며,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개요
19~20세기 덴마크의 현대 물리학자. 원자 구조와 핵분열 이론을 규명하고 양자역학 성립에 기여했다.
초기생애
닐스 보어의 아버지 크레스드얀 보어는 코펜하겐대학교 생리학교수로, 호흡의 물리적 측면과 화학적 측면에 대한 업적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어머니 엘런 아들러 보어는 덴마크 정계와 재계에서 유명했던 부유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다. 보어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능력은 어릴 때부터 명백했는데, 온화하고 지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더욱 촉진되었다. 젊었을 때 축구 선수로 유명했던 보어의 남동생 하랄은 훌륭한 수학자가 되었는데 평생 보어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코펜하겐대학교에서 수행한 표면장력을 결정하는 방법인 물 분사(water jets)의 진동에 대한 이론적 분석과 정확한 실험에 대하여 덴마크 왕립 과학·문학 아카데미의 금메달을 받으면서 유명해졌다. 1911년 원자 수준의 물질의 작용을 취급하는 데 나타나는 고전물리학의 부적절성을 강조한 금속의 전자이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케임브리지에 있는 조지프 존 톰슨과 이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 그러나 톰슨은 과거에 이러한 주제에 관해 연구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속의 전자들에 대한 닐스 보어의 착상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케임브리지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나, 보어는 1912년 3월 맨체스터로 옮겨가 원자구조를 연구하는 어니스트 러더퍼드 그룹에 합류하고 연구기간의 하반기 동안 그곳에서 연구했다. 맨체스터에서 닐스 보어는 러더퍼드가 새로이 제안한 원자핵 모형의 이론적 의미에 대해 연구했다.
원자 연구
닐스 보어는 원자번호의 중요성을 이해한 선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원자번호는 주기율표에서 어떤 원소의 위치를 정해주는 것으로 그 원소의 원자핵의 전하수와 같다. 원소들의 다양한 물리적·화학적 성질은 그 원소의 원자핵 주위를 움직이는 전자들에 의존하고 작지만 무거운 핵에 의해서는 오직 원자량과 가능한 방사성 작용만이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러더퍼드의 핵원자는 역학적·전자기적으로 불안정했지만, 보어는 막스 플랑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몇몇 다른 이론물리학자들이 발전시키고 있던 새로운 양자론의 착상들을 도입함으로써 러더퍼드의 핵원자에 안정성을 부과했다. 이는 고전물리학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것으로, 닐스 보어는 모든 원자는 몇 가지 불연속적인 안정상태 또는 정상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이 정상상태는 각각 일정한 에너지값을 가진다고 가정했다.
원자의 양자론에 관해 닐스 보어가 쓴 논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수소원자가 방출하는 빛의 스펙트럼에서 관찰되는 일련의 선들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양자). 보어는 자신의 이론으로부터 상당히 정확하게 이 스펙트럼선들의 진동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진동수는 전자의 전하, 질량, 플랑크 상수(기호 h로 표시하는 작용양자)로 표시되었다. 또한 닐스 보어는 원자가 안정상태에 있을 때는 복사를 하지 않고 두 안정상태 사이에서 전이할 때에만 복사한다고 가정했다. 그렇게 방출된 복사가 가지는 진동수는 그 상태 사이의 에너지 차이를 플랑크 상수로 나눈 값과 같다.
이는 원자가 연속적으로 복사를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는 없고 오직 일정한 단계들이나 양자도약에서만 복사의 흡수·방출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한 원자가 내는 복사의 다양한 진동수들은 그 원자 안에서 움직이는 전자들이 가지는 진동수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그당시에는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대담한 착상이었다. 그러나 닐스 보어의 이론이 새로운 분광학 실험과 다른 실험들에 의해 확증되었을 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것이 '엄청난 업적'임을 인식했다.
1912년 여름 맨체스터에서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약혼녀 마그레더 뇌르룬트와 결혼하고, 원자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계속 발전시켰다. 이 연구는 1913년 코펜하겐에서 완료되었지만 영국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코펜하겐과 맨체스터에서 강사로 재직한 후, 1916년 코펜하겐에서 교수가 되었다. 코펜하겐대학교는 닐스 보어를 위해 이론물리연구소를 새로 만들어주었고, 이 연구소는 1921년 문을 열었다. 보어는 죽을 때까지 이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았다.
교전국들이 덴마크의 중립성을 존중해주었던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1920년대 초반을 통해 닐스 보어는 2가지의 서로 연관된 문제들에 그의 노력을 집중시켰다. 원자 준위에서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대체하고 원자 세계의 모든 측면들을 다루기에 적절하고 일관성있는 양자론을 발전시키려 했다.
또한 닐스 보어는 모든 화학원소들의 원자가 가지는 구조와 성질을 설명하려 했는데, 특히 주기율표에 나타난 규칙성과 원자에서 방출된 스펙트럼에서 관찰되는 복잡한 양상에 관심을 두었다. 불확실한 기초 위에 시험적인 이론들로서 불확실한 모형을 가지고 연구하던 이 기간 동안, 보어의 연구는 종종 그의 대응원리(對應原理)의 인도를 받았다. 이 대응원리에 따르면 양자 가설에 의해 주어진 정상상태들 사이의 모든 전이과정은 고전역학에서 기술되는 전자들의 운동에 해당되는 단일 진동수의 조화 성분과 '대등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닐스 보어가 1923년 "이 가설들이 여기에 포함된 고전역학 및 고전전자기학의 이론들의 관념들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원자가 내는 복사와 복사의 근원에 대한 고전적 관념들에 의해 주장되는 입자의 운동간의 연관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지적한 것과 같다. 실제로 2가지의 아주 다른 방법들로 계산한 복사의 진동수들은 적당한 한계 안에서 정확히 일치했다.
이론물리연구소
코펜하겐에 있는 닐스 보어의 연구소는 곧 원자물리학과 양자이론 연구의 국제적인 중심이 되었다. 연구소 초창기에도 여러 나라에서 온 공동연구자들이 많았다. 네덜란드에서 온 헨드리크 안톤 크라머스, 헝가리의 조르주 드 에베시, 스웨덴의 오스카 클라인, 독일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볼프강 파울리, 미국의 존 슬레이터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물리학을 연구하는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닐스 보어 자신은 더욱 광범위하게 여행을 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와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강의했다.
원자론에 대한 닐스 보어의 업적은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음으로써 인정되었다. 보어는 당시 쓰이고 있던 원자모형들이 가진 잠정적·상징적인 본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앞으로 물리학에서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1924년 닐스 보어는 에너지 및 운동량 보존법칙이 원자 준위에서 정확히 유지되지는 않으며 단지 통계적 평균으로서만 타당하다는 가능성을 고려했다.
명백하게 역설적인 빛의 입자성을 피하려는 이러한 극단적 처방은 지지받지 못하고 곧 불필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다음 몇 년 동안 진정한 양자역학이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새로운 종합은 닐스 보어가 기대해오던 것이었다.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오펜하이머).
"그것은 영웅적 시대였다.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많은 나라에서 온 다수의 과학자들의 협동연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닐스 보어의 매우 창조적이고 섬세하고 비판적인 정신이 그 사업을 안내하고, 제한하고, 심화하고, 마침내 변화시켰다."
양자역학 업적
새로운 양자역학은 수학적 계산구조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물리적 해석을 필요로 했다. 그 물리적 해석은 닐스 보어와 그를 방문했던 사람들 사이의 집중적 토론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이 토론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수학적 기술이 실험물리학의 절차 및 결과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닐스 보어는 양자물리학의 특징적 면모를 그의 상보성원리에서 표현했는데, 상보성원리는 "원자적 물체의 행동과 그 현상이 나타나는 조건들을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는 측정 도구와의 상호작용에서 어떠한 날카로운 구분도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실험 조건 아래서 얻어진 증거들은 단일한 구도 안에서 이해될 수 없고 오직 그 현상의 총체성만이 그 대상들에 대한 가능한 정보를 규명해준다는 의미에서 상보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양자물리학의 의미에 대한 물리적 설명의 변화된 견해를 함축하는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수용되었다.
아인슈타인과의 양자역학 논쟁
그러나 가장 유명하고 기탄 없는 반대자는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닐스 보어의 초기업적을 '사고 영역에서 최고 형태의 음악성'이라고 크게 칭찬했지만, 양자역학은 원자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고전물리학의 합리적 일반화'라는 보어의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여러 해 동안 물리학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 여러 번 토론했고, 때로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레이덴대학교 이론물리학교수 파울 에런페스트와도 함께 토론했으나, 그들은 결코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닐스 보어는 이 토론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도전적 반대가 보어 자신의 관념을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했으며 그의 반대가 그에게 얼마나 깊고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던가를 강조했다. 물리학자 아브라함 파이스가 말했듯이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영원한 정신적인 논쟁상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이 죽은 후에도 보어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그와 논쟁하곤 했다." 1930년대 닐스 보어는 양자론에 의해 제기된 인식론적 문제들을 계속 연구했고 새로운 핵물리학 분야에도 기여했다.
닐스 보어가 물방울에 비유했던 그의 원자핵 관념은 많은 핵 현상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것이었다. 특히 이 개념은 1939년 핵분열(무거운 핵이 거의 똑같은 질량을 가진 두 조각으로 쪼개지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어의 연구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이론물리학자들의 초점이 되었다. 양자물리학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연례 핵물리학회의와 공식적·비공식적 방문을 통해 코펜하겐에 와서 다양한 기간 동안 머물렀다. 당시의 많은 보어의 공동연구자들을 이 연구소의 특별한 활기에 대해 애정이 넘치는 글을 썼다.
이곳에서는 많은 나라에서 온 젊은 과학자들이 물리학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으로 진지한 관심과 외부의 암울해져가는 세계를 덮어주는 밝은 분위기 속에서 함께 연구했고 함께 즐겼다. 그 집단에서 가장 활기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H. B. G. 카지미우어는 "우리 가운데 누구보다도 더 강력하게 집중했고 더 오래 남아 연구하는 힘을 가졌던 보어조차도 십자낱말풀이, 운동, 익살스런 토론을 하는 가운데 휴식을 취했다"고 썼다.
망명
덴마크가 1940년 독일에 침략당해 점령되었을 때, 닐스 보어는 연구소 일을 유지하고 나치의 영향력으로부터 덴마크 문화의 고결함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나치당).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았고 반나치 견해를 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각적 체포 위협에 놓인 보어는 1943년 아내와 가족, 친지들 몇 명과 함께 덴마크 저항운동세력이 제공한 고깃배로 한밤중에 스웨덴으로 갔다.
며칠 뒤에 영국정부는 비무장 모스키토 폭격기를 스웨덴으로 보냈고, 닐스 보어는 그 비행기를 이용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으로 갔다. 그후 2년 동안 보어와 그의 아들 가운데 하나인 오게 보어(나중에 이론물리학자로서 아버지의 대를 이었고, 보어의 연구소 소장이 되었으며 노벨 물리학상을 받음)는 핵분열 폭탄을 만드는 계획에 참여했다(보어). 그들은 수개월을 영국에서 일한 후, 영국 연구 팀과 함께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로 옮겨갔다.
원자 무기의 위험성
원자 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인류가 처하게 될 무시무시한 미래에 관하여 닐스 보어는 일찍이 1944년부터 염려하고 있었다. 닐스 보어는 국제적으로 협력하여 이 문제들을 다룰 필요가 있음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루스벨트에게 설득하려 했다. 이러한 호소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보어는 1950년 국제연합에 공개편지를 보내어 '열린 세계'를 옹호하는 합리적·평화적인 정책들을 옹호하는 주장을 계속했다.
보어는 인력과 착상을 국가들간에 자유로이 교환하는 것이 핵무기 통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것임을 확신했다(군비제한). 보어는 1955년 제네바에서 열린 제1차 원자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와 같은 국제적 노력을 장려했고,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를 만드는 일을 도왔다.
닐스 보어의 많은 훈장 가운데는 1957년 미국 평화를 위한 원자상을 최초로 받은 것도 포함된다. 보어는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생물학과 인류학으로부터 인간은 행동하며, 그 행동에 대한 관찰자이기도 하다는 오래된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과 사고의 많은 측면에 상보성이론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점들을 지적하려 했다. 보어는 몇 세대에 걸친 물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과학과 삶에 대한 그들의 접근을 깊이있게 했다.
연구 정신
보어는 항상 배우려는, 심지어 그의 가장 젊은 공동연구자들로부터도 배우려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보어는 그의 공동연구자들, 아들들, 아내, 남동생과의 밀접한 유대로부터 힘을 얻었다. 보어의 정신은 상당히 국제적이었지만 그만큼 덴마크적이었고 그의 고유한 문화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보어의 많은 대중적 역할들로 상징되는데 특히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맡았던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 책임자로서의 역할에서 두드러졌다.
사후 영향
1965년 코펜하겐대학교는 이론물리연구소를 '닐스 보어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어 탄생 100년 축하 연회가 1985년 10월 3일 덴마크에서 열렸으며 이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는데 우표에는 보어와 그의 아내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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