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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플랑크

다른 표기 언어 Max (Karl Ernst Ludwig) Plan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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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8. 4. 23, 독일 킬
사망 1947. 10. 4, 독일 괴팅겐
국적 독일

요약 19~20세기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양자론을 창시했다. 뮌헨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한 뒤, 1892년 베를린대학교 정교수가 되었고 1899년 새로운 기본 상수인 플랑크 상수, 1900년 열 복사 법칙을 발견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발굴하여 그의 상대성이론을 최초로 옹호했다. 1930~37년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권위 있는 카이저 빌헬름 학회 회장을 맡았다. 이후에도 광학·열역학·통계역학·물리화학 등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양자론을 창시한 19~20세기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플랑크 상수와 열복사 법칙을 발견하는 등 양자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플랑크의 초기생애

플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

양자역학의 성립에 핵심적 기여를 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 Lzur/wikipedia | Public Domain

막스 플랑크는 법학자이며 킬 대학교 법학교수의 여섯째 아이로 태어났다. 교회와 국가에의 헌신, 우수한 학문적 분위기, 청렴결백, 보수주의, 이상주의, 신용 및 관용이라는 가문의 오랜 전통은 그의 삶과 업적에 깊이 스며들었다. 9세 때 그의 아버지는 뮌헨대학교에 부임했고, 그는 뮌헨 시의 유명한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했는데, 그곳의 교사 H. 뮐러는 그가 물리학과 수학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학과목에서 뛰어났고 17세에 졸업한 후 진로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맞았다. 그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독창성이 물리학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해 물리학을 택했다.

1874년 가을 그는 뮌헨대학교에 들어갔지만 물리학교수 P. 폰 졸리로부터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했다. 베를린대학교에서의 편력기간(1877~78) 동안 그는 탁월한 연구과학자였던 H. 폰 헬름홀츠와 G.R. 키르히호프에게서도 감명을 받지 못했다. 그의 지적 능력은 독자적인 연구결과로 초점을 찾게 되는데, 특히 루돌프 클라우지우스의 열역학에 대해 연구했다. 뮌헨으로 돌아온 후 1879년(아인슈타인이 태어남) 7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대학교수 자격취득 논문을 완성하고 사강사(私講師)가 되었다.

1885년 킬대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89년 키르히호프가 죽은 후 베를린대학교에 자리를 얻었는데, 그곳에서 선생이자 동료로서 헬름홀츠를 존경하게 되었다. 1892년 정교수로 승진했다. 그는 모두 9명의 박사과정 학생만을 지도하고 있었지만 이론물리학의 모든 분야를 다루었던 베를린대학교에서의 강의들은 여러 번에 걸쳐 수정되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그가 활동하며 살던 시기의 나머지를 베를린에서 보냈다.

그는 "과학에 헌신하겠다는 최초의 결정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받는 연속적인 인상들을 지배하는 법칙과 인간의 이성법칙이 일치한다는…… 발견의 직접적 결과였으며, 따라서 순수이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의 메커니즘에 대한 통찰력을 얻도록 해준다"라고 회상했다.

즉 그는 이론물리학이 아직 독립적인 학문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의도적으로 이론물리학자가 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물리법칙들의 존재는 "외부 세계는 인간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 절대적인 어떤 것이고, 이런 절대적인 것에 작용하는 법칙들에 대한 탐구이며, ……삶에서 가장 숭고한 과학적 추구로 나타난다"라는 것을 예상한다고 결론지었다. 아직 김나지움 학생이던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자연 속의 절대성에 대한 최초의 사례는 에너지 보존법칙인 열역학 제1법칙이었다.

플랑크 상수 발견

대학시절 동안, 그는 엔트로피 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 역시 자연의 절대법칙이라고 확신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그가 뮌헨대학교에서 썼던 박사학위논문의 주제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1900년 지금은 플랑크 상수(h)로 알려진 작용양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1859~60년 키르히호프는 흑체(黑體)를 그것에 입사된 모든 복사 에너지를 재방출하는 물체로 정의했다. 즉 흑체는 복사에 대한 완전한 방출체이며 흡수체이다. 따라서 흑체복사에 대한 절대적인 어떤 것이 존재했고, 1890년대까지 흑체의 특수한 에너지 분포(주어진 온도에서의 흑체에서 서로 다른 진동수를 갖는 복사 에너지가 얼마나 많이 방출되는가를 보여주는 곡선)를 결정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적이고 이론적인 시도들이 있었다.

막스 플랑크는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에서 그의 동료인 W. 이 1896년 발견한 공식에 특히 이끌렸고, 이어 '빈의 법칙'을 열역학 제2법칙에 기초하여 유도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했다.

그러나 1900년 10월경 PTR의 다른 동료 실험가들인 O.R. 루머, E. 프링스하임, H. 루벤스, F. 쿠를바움은 빈의 법칙이 높은 진동수에서는 타당하지만 낮은 진동수에서는 완전히 효력을 잃는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그는 10월 19일에 열렸던 독일 물리학회 회의 직전에 이 결과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높은 진동수에서 만일 빈의 법칙이 맞는다면 복사의 엔트로피가 그 흑체의 에너지에 수학적으로 얼마나 의존해야 하는가를 알았다.

또한 이러한 의존성이 당시의 실험적 결과들을 재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낮은 진동수에서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플랑크는 이들 표현들을 가능한 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결합시켜야 하고 그결과를 복사의 진동수에 해당하는 복사 에너지와 관련시키는 공식으로 변형시켜야 한다고 추측했다.

플랑크의 공식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정확한 것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은 단순한 추측, 즉 '행운의 직관'이었다. 만일 그것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면 그것은 어쨌든 1차 원리들로부터 유도되어야 했다. 이는 플랑크가 즉시 온 힘을 쏟았던 과업이었고 1900년 12월 14일경 성공했지만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플랑크는 자신이 가장 소중히 간직해왔던 믿음들 가운데 하나인, 열역학 제2법칙이 자연의 절대법칙이라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 그는 제2법칙이 통계법칙이라는 L. 볼츠만의 해석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외에 흑체를 구성하고 또 입사된 복사 에너지를 방출하는 진동자들은 그 에너지를 연속적으로 흡수할 수 없고 불연속적인 양인 에너지 양자로 흡수한다고 가정했다. 즉 통계적으로 분포하는 이 양자들에 의해서만 에너지가 흡수된다는 것을 가정했는데, 각 양자는 각각의 진동수에 비례하는 에너지 양(hν)을 포함하게 되고, 플랑크는 흑체 속의 모든 진동자들을 통해 2개월 전에 그의 뇌리를 스쳤던 공식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는 소위 볼츠만 상수(운동학적 이론과 통계역학에서 쓰이는 기초 상수)·아보가드로수·전자의 전하뿐만 아니라 상수(h,6.55×10-27erg·s)를 계산해내는 데 자신의 공식을 이용함으로써 공식의 중요성에 대한 부가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리학자들은 플랑크 상수가 0이 아니라 작지만 유한한 값을 갖기 때문에 미시적 물리적 세계, 즉 원자 차원의 세계는 통상적인 고전역학으로는 원리적으로 기술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물리이론에서 심오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전자전하).

다시 말해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 개념은 모든 과거의 물리이론과 근본적으로 상충되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의 힘으로 그 개념을 엄격하게 도입하게 되는데, 한 역사학자가 그에 대해 말했듯이 플랑크는 마지못해 하면서도 혁명적이었던 인물이었다. 실제로 광범위한 플랑크의 업적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고, 이러한 수용에 아인슈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5년 플랑크의 연구와는 독자적으로 아인슈타인은 일정한 상황에서 복사 에너지 자체가 양자(광양자, 뒤에 광자로 불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논의했고, 1907년 고체 비열의 온도 의존성을 해석하는 데 양자가설을 이용함으로써 이 이론의 일반성을 보여주었다. 1909년 그는 파동입자이중성을 물리학에 도입했다. 그는 1911년 10월 브뤼셀에서 열린 제1차 솔베이 회의에 참석했던 저명한 물리학자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벌어진 토론들은 H. 푸앵카레를 자극해 플랑크의 복사법칙은 필연적으로 양자를 도입하게 된다는 수학적 증명(후에 제임스 경이 된 J. 진스와 다른 사람들을 양자론의 지지자로 바꾼 증명)을 하게 했다. 1913년 N. 보어도 수소 원자에 대한 양자론으로 양자론의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랑크 자신은 고전이론으로 회귀하려고 최후까지 투쟁한 사람 중 하나였으나, 양자론에 대해 후회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양자론의 필연성을 확신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1905년의 급진적인 광양자가설에 대한 반대는 1922년 콤프턴 효과의 발견 이후까지 계속되었다(양자역학).

플랑크의 후기생애

1900년 42세 되던 해 플랑크는 유명한 발견을 했고, 이로 인해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많은 다른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이와 비교할 만한 중요성을 갖는 아무런 발견도 못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광학·열역학·통계역학·물리화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기여를 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1905)을 옹호한 최초의 저명한 물리학자이기도 했다.

플랑크는 "광속과 상대성이론과의 관계는 기본 작용양자와 양자론에 대한 관계와 같다. 즉 광속은 상대론의 절대적인 핵이다"라고 술회했다. 1914년 플랑크와 물리학자인 W.H. 네른스트는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플랑크가 아끼는 학생이었던 M. 폰 라우에도 데려오게 되었다. 1928년 플랑크가 은퇴했을 때, 파동역학의 창시자인 또다른 저명한 물리학자 E. 슈뢰딩거가 플랑크의 자리를 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은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하여 1933년 1월 권력을 잡을 때까지 한동안 이론물리학의 중심지였다(→ 특수상대성이론).

말년에 그는 철학적·미학적·종교적인 의문들에 대한 저술에 더욱 몰두했다. 1922~26년 양자역학의 출현 이후 보어, M. 보른, W. 하이젠베르크 등이 물리학에 도입한 비결정론적이고 통계적인 세계관에 대해 아인슈타인·슈뢰딩거와 함께 확고하게 계속 반대했다. 그러한 견해는 그의 깊은 직관 및 믿음과 조화될 수 없었다. 플랑크가 논의했던 물리적 우주는 인간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이며 보어와 그의 학파가 보았던 것처럼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긴밀히 결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1912~38년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수학 및 물리학 분과의 영구 간사로 재직했으며 1930~37년 카이저 빌헬름 학회(지금은 막스 플랑크 학회) 회장을 맡았다. 이 공직들과 여타 직책들은 특히 독일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권위를 갖도록 해주었는데, 그의 결정들이나 충고가 의문시된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공식적인 직위가 아니라 개인적인 도덕적 힘에서 나왔다. 그의 공정함·성실·지혜는 더이상 의문시되지 않았다. 이는 플랑크가 히틀러의 파괴적인 인종정책에 반대하여 그를 직접 찾아갔고, 그가 독일 물리학에 대해 할 수 있었던 것을 보존하기 위해 나치 통치기간에도 독일에 남아 있던 데서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막스 플랑크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덜 금욕적이고 철학적·종교적인 확신을 덜 가졌더라면 50세 이후에 그에게 닥쳤던 비극들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뮌헨 은행가의 딸인 그의 첫 아내 M. 메르크는 22년의 행복한 결혼생활 중에 죽었고, 플랑크에게 두 아들과 쌍둥이 딸을 남겼다. 큰 아들 카를은 1916년 전투중 사망했다. 이듬해 두 딸 중 마르가레테는 출산중 죽었고 1919년 똑같은 운명이 플랑크의 남은 딸인 에마에게도 닥쳤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더 큰 비극을 안겨주었다. 베를린에 있던 플랑크의 집은 1944년 폭탄투하로 완전히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둘째 아들 에르빈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의 목숨을 노렸다는 혐의를 받아 1945년초 게슈타포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런 무자비한 행위가 그의 삶의 의지를 파괴해버렸다. 종전이 되자 미군 장교들은 1910년 결혼한 플랑크의 2번째 아내 M. 폰 회슬린과 플랑크를 괴팅겐으로 데려갔다. 그는 1947년 9월 4일 89세로 괴팅겐에서 죽었다. J. 프랭크의 말을 빌리면 죽음은 '구원'으로서 그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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