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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4. 4. 29, 프랑스 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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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2. 7. 17,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수학자·이론천문학자·과학철학자.
우주진화론, 상대성이론, 그리고 위상수학에 영향을 미쳤고 일반대중에게 과학을 해석해주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푸앵카레는 정치 및 행정에 기여한 집안 출신으로, 맏사촌형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레몽 푸앵카레가 그의 친사촌이다.
푸앵카레는 양손잡이이며 근시였다. 어릴 때 근육운동의 조정이 약했고 디프테리아를 심하게 앓은 적도 있었다. 재주가 많은 어머니로부터 특별한 지도를 받아 초등학교 시절에는 작문에 뛰어났다. 프랑코-독일 전쟁 동안 독일어를 배웠으며 의사였던 아버지에게 맡겨진 군인들과 서민들의 고통을 목격했다. 사춘기 때 수학에 깊이 흥미를 느껴 1872~75년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들어가 수학에서 수석의 영예를 차지했으나 운동과 예술에서는 평범했다.
그는 자신이 읽은 모든 내용을 비상하게 오래 기억했고, 칠판의 수학기호를 똑똑히 볼 수 없었던 그로서는 들은 것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유용한 능력을 가졌다. 일생 동안 복잡한 수학계산을 머리로 할 수 있었고 커다란 수정 없이 논문을 신속히 쓸 수 있었다. 1879년 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으로 국립고등광산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캉대학교에서 잠시 동안 해석학을 가르친 뒤 1881년 파리대학교에 들어가 여생을 강의와 역학, 실험물리, 순수 및 응용수학 분야와 이론천문학에 관한 500여 편의 논문을 쓰면서 지냈다.
해마다 강의내용을 바꾸어 광학, 전기, 유체의 평형, 전기수학, 천문학, 열역학, 빛과 확률을 재정리했다. 그중 많은 것은 대학강단에서 강의된 뒤 곧 인쇄되어 나왔다. 폭넓은 확률론에 관한 논문에서 푸앵카레는 통계역학의 기초가 되는 에르고드 개념을 도입했다. 푸앵카레는 통달한 해석학의 지식을 대수방정식 해의 존재 가능성에 적용해 30세 전에 자기동형(自己同型)함수(대수적으로 1차항들의 비율로 특성화되는 변환군에 대해 불변하는 함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 함수들이 어떻게 유리수로 된 대수계수의 선형미분방정식을 푸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대수곡선 위에 있는 한 점의 좌표를 어떻게 단일대수변수(매개변수)의 일가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가를 보였다. 그는 이 자기동형 함수 중 어떤 것을 독일의 수학자 푸크스의 이름을 따서 푸크시안이라고 명명했다.
푸크는 미분방정식론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다. 푸앵카레는 푸크시안이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발생하는 변환과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수학에의 중요한 기여로 그는 1887년 파리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천체역학에서 푸앵카레는 궤도이론, 특히 삼체(三體)문제(태양·달·지구에 관한 문제 등)에 기여했다. 이것은 스웨덴의 오스카 2세가 상을 건 n체(혹성, 별 등) 문제의 하나로 n체에 현재 질량, 속도, 움직임, 상호거리가 주어질 때 이들은 현재의 공간 관계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또는 궤적이 미래 어느날에 변경될 것인지 등이 있다(n체 문제). 푸앵카레는 그의 해에서 점근전개와 적분불변식 등 강력한 새로운 수학기술을 개발했고 특이점 주변에서 미분방정식 해의 성질에 대해 중요한 발견을 했다.
이 문제에 대한 푸앵카레의 해는 그 일부만 옳았으나 그는 1889년 상을 받았고 같은 해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푸앵카레는 〈천체역학의 새로운 방법들 Les Méthodes nouvelles de la mécanique céleste〉(3권, 1892, 1893, 1899)에서 천문학에 사용된 자신의 새로운 수학방법들을 요약했다. 그의 연구에 있어 또다른 결실은 위상수학의 초기 체계를 다룬 〈위치해석 Analysis situs〉(1895)으로 이는 거리변형에 대해 불변하는 계의 특성을 다루는 것이다.
즉 위상수학은 연속변환에서 변하지 않는 공간 배열의 질적 특성을 다룬다. 그는 정수론에도 기여해 독일의 수학자 C. F. 가우스가 발달시킨 2항 2차 형식 개념이 기하형태로 만들어지는 방법을 설명했으며, 1904년에는 성 루이 전시회에서 강의했다.
푸앵카레는 해석학에서 회전하는 유체질량의 균형론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서양배 모양 도형의 안정성 조건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천체 진화와 관련된 우주진화론 연구에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그는 이 개념을 토성 고리의 안정성과 쌍성의 기원 연구에 적용했다. 1906년 전자동역학에 관한 논문에서 그는 아인슈타인과 별도로 특수상대론에 대한 많은 결과를 얻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신호를 근원적으로 고찰하여 이론을 전개한 반면 푸앵카레는 전자기 이론에 기초해 빛 전달 도구로 작용하던 에테르 개념과 관련한 현상으로 다루었다.
푸앵카레는 수학자로 명성을 얻은 뒤 자신의 훌륭한 문학재능을 과학과 수학의 의미와 중대함을 일반대중에게 설명하는 데로 돌렸다. 항상 과학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과학과 가설 La Science et l'hypothése〉(1903)·〈과학의 가치 La Valeur de la science〉(1905)·〈과학과 방법 Science et méthode〉(1908)을 썼고, 이 책들은 비전문가들에게 폭넓게 읽혔다.
그의 저서는 영어·독일어·헝가리어·일본어·스페인어 및 스웨덴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수학적 발견, 창조의 심리상태를 탐구하는 한편 잠재의식을 중요시했다(푸앵카레의 견해). 그는 어떤 수학적 결론은 선험적이며, 논리학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근대 직관주의학파의 선구자이다. 그에 의하면 오랜 잠재적 연구 뒤에 따르는 갑작스런 설명이 수학창조의 전조이다.
그러나 철학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협정(개념을 임의로 택함)에 의한 과학적 방법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다. 푸앵카레는 프랑스 과학에서 명성과 영향력이 더해져 1906년 과학 아카데미 회장으로 뽑혔고, 1908년 프랑스 작가들의 가장 높은 명예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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