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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해상에서 배를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는 강도.
국제법상으로는 공해상에서 국가 또는 정치단체의 명령 또는 위임에 의하지 않고, 사적 목적으로 다른 선박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행위를 하는 자를 말한다. 해적은 옛날부터 '인류의 공적'으로 간주되어 어느 나라의 군함도 이를 나포하여 재산을 압수하고 자국의 국내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 처벌이 각국의 손에 맡겨져 있는 점에서 해적행위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국제범죄라고 할 수 없다.
유럽의 해적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 등에 이미 해적이 등장한다.
BC 600년경 그리스 사모스 섬의 왕 포루크라테스는 수십 척의 갤리선을 거느리고 해적질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이집트 왕 아푸메네스 2세의 대함대를 습격하던 중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BC 81년 카이사르가 로도스 섬 유학 도중 에게 해에서 해적에게 잡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즉시 토벌군을 이끌고 역습하여 이들을 일망타진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지중해에는 로마의 망명자들이 가담한 대규모의 해적이 로마와 속주와의 곡물수송을 위협하고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BC 67년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제안에 따라 로마는 폼페이우스에게 대군을 맡겨 지중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의 해적을 소탕했다. 그후 로마의 몰락에 따른 해상무역의 쇠퇴로 해적도 일시적으로 소멸했다. 8~10세기의 바이킹('후미에 출몰하는 해적'이라는 뜻)의 원정은 노르만족의 민족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들은 보통 50개의 노를 갖춘 길이 약 20m, 너비 약 5m의 롱십(longship)이라는 배를 타고 스칸디나비아에서 영국 해협과 유럽 각지, 아메리카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바이킹의 위협은 11세기에 이르러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12세기에는 슬라브족의 해적이 발트 해를 석권했다. 13세기에 와서 슬라브 해적은 한자 동맹에 의해 섬멸되었다. 한자 동맹은 14, 15세기에 전성기에 이르렀고 가맹도시도 발트 해에서 북해 연안까지 확대되었으나, 당초 해적 소탕에서 활약하던 한자 동맹 소속 선박의 일부 선원들이 해적행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6세기말에 영국과 스페인의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교전상대국의 배를 약탈해도 좋다는 국왕의 사략(私掠) 특허장을 무기로 사선(私船)에 의한 해적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해적은 양국의 제해권 쟁탈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그 가운데 J. 호킨스, F. 드레이크, R. 그랜빌, 컴벌런드 백작 등 사략선의 선장들이 특히 유명했다. 1588년에 영국 함대의 일원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것도 사략선 출신의 지휘관들이었다. 이무렵 지중해에서는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권의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투르크 해군에서는 아프리카 북서 바르바리 해안의 해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잔인한 수법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16세기초에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19세기에 유럽 제국의 강대한 해군력에 제압될 때까지 해적행위를 했다.
17세기초 유럽 국가간에 평화가 찾아오자, 사략선의 선원들은 합법적인 해적행위를 계속하기 위해 유럽의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 아메리카 수역으로 이동했다.
카리브 해 일대에는 스페인의 영토가 많았으므로 스페인 선박들이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의 사략선의 약탈대상이 되었다. 카리브 해에서도 사략선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자, 직업을 잃은 선원과 군인들은 서인도제도에 정착하여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훈제하여 생계를 꾸리는 '버커니어'(buccaneer)가 되었다. 버커니어는 원래 인디오의 직업이었으나, 스페인에게 박해를 받던 인디오들이 할 수 없이 해적이 되자 해적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프랑스계의 버커니어는 '플리뷔스티에'(flibustier)라고 불렸다. 돛대를 눕혀 난파선으로 가장하거나 초라한 어선으로 꾸며 스페인 상선에 접근한 다음 상대의 허를 찔러 습격하는 것이 버커니어의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버커니어 출신이면서도 후에 자메이카 부총독이 되어 해적 진압에 힘썼던 H. 모건, 검은 수염과 기행으로 유명한 전형적인 해적 E. 티치, 색다른 여자 해적 보니와 리드 등 수많은 버커니어가 카리브 해에 출현했다.
17, 18세기에 인도양·대서양에 출몰했던 해적인 J. 에바리, 캡틴 키드, B. 로버트 등은 원래 스페인 경비선이나 영국의 사략선·상선 출신이었다. 16~19세기에 동서 인도 항로의 선박을 노리는 해적들의 약탈이 심각했으나 해적선의 기치가 된 해골기는 18세기초 이후에야 사용되었다. 그후 각국 해군이 정비됨에 따라 해적은 점점 소멸되기 시작했고, 제2차 미·영전쟁(1812~15)에서 미국군에 협력한 장 라피트가 마지막으로 이름을 남긴 해적이 되었다.
이슬람권의 해적
아라비아 근해는 옛날부터 해적의 출몰로 유명했는데, 〈코란〉에 '모든 배를 강탈하는 왕'의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홍해 입구의 페림 섬, 아덴 만 앞바다의 소코트라 섬 등도 해적의 근거지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페르시아 만 방면의 카타르 반도에서 마산담 곶에 이르는 지방은 해적해안으로 불릴 정도로 아랍계 해적의 주무대였다. 또 그 주변지역의 주민들을 총칭하던 자와스미(Jawasmi)라는 말은 해적의 별명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들의 생업은 해적행위, 그 쾌락은 살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적들은 악명이 높았고, 중세의 아랍·페르시아의 항해자들은 이들에게 큰 고통을 당했다. 인도의 서해안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미 1세기에 플리니우스도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인도로 가는 길에 해적이 많기 때문에 궁수 부대를 배에 승선시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3세기의 마르코 폴로는 인도 구자라트 지방의 해적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4세기에는 이븐 바투타가 인도의 해안에서 해적과 마주쳤던 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에티오피아의 전사가 해적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다.
1798년에 아라비아의 자와스미가 영국의 밧세인호를 약탈한 것을 시작으로 자주 동인도회사의 배를 습격하자, 영국은 조직적으로 해적소탕에 나서 1819년에 본거지인 케슘을 함락하여 해적선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영국이 페르시아 만을 중심으로 중동 일대에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토대로 해서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알제리·튀니지·트리폴리 등이 이슬람계 해적의 본거지로 스페인·영 국의 해상세력과의 충돌이 계속 벌어졌다. 오스만 투르크의 명제독이며 '붉은 수염 바르바로스'라고 불리던 하이렛딘(1546 죽음)도 본래는 형과 함께 지중해를 주름잡던 해적이었으나, 튀니지의 술탄을 섬기게 되면서 후에 알제리를 공략하여 그 지배자가 된 사람이다.
중국의 해적
중국의 해적활동은 처음에는 소규모에 머물렀으나 진(秦)·한(漢) 시대에 산둥[山東]·장쑤[江蘇] 일대를 노략질하고 다니는 해적이 나타났고, 삼국시대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서는 남해 방면이 해적의 소굴이 되었다. 당·송 시대에 아라비아·페르시아로부터의 선박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 이를 습격하는 대해적단이 출현했으며, 푸젠[福建]·광둥[廣東]의 섬들과 하이난 섬[海南島] 등이 그 근거지가 되었다.
원말 명초의 '왜구'의 내습을 계기로 명조 정부는 특히 해방을 엄중히 하고, 적선과 공선을 준별하기 위한 감합제도를 택했으며, 공선 이외의 일체의 해상교통을 엄금하는 '해금'을 시행했다. 그런데 15, 16세기경 내외시장의 성장을 배경으로 해금을 위반하고 밀무역을 일삼던 '가정(嘉靖 : 521~566년의 명나라 연호)의 해구'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발했다.
이것을 '대외구'라고도 하는데 일본 해적의 참가는 일부에 불과했고, 당시 명조의 중세주구를 견디지 못하고 장쑤·저장[浙江]·푸젠 등 연해지 일대에 넘친 중국 빈민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실직관리·낙제서생 등의 불평분자도 섞여 있었다. 이를 이끈 해구 수령은 대체로 사무역 공허를 바라던 신흥상인층으로 후이저우[薇州] 염상 출신의 왕직 등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獐州]의 상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미 남해·일본에 걸치는 밀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본토 연해의 각 도시와 일본의 고토 제도[五島諸島] 등에 거점을 설치하고 수백 척의 배로 저장·푸젠 등의 연해지, 난징[南京]까지 내습을 일삼았다.
명조가 필사적으로 해적의 소탕에 힘써 융경·만력 연간에 해금이 철폐될 즈음 거의 진정되었다. 그후 필리핀 방면을 습격하는 해적이 나타났고, 명·청 교체기에 정씨 일파가 푸젠 성에 근거를 두다가 타이완으로 옮겨가서 반청 투쟁을 계속하며 중국 본토를 습격했다. 건륭연간말부터 가경연간에 걸쳐 '백련교의 난'이 일어났다. 푸젠 사람 채견 등이 이 난을 이끌었는데, '가정의 해구'와 규모·성격이 모두 비슷했다.
청말부터 중화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화남 해상에 자주 해적이 출몰했다. 또 화이허 강[淮河] 하류에는 염효라는 소금을 밀수하는 해적떼가 있었으며 양쯔 강[揚子江]에는 강적이 출몰했다.
일본의 해적
일본에서 해적은 고대부터 근세 초기까지 해상의 여러 권익을 기반으로 하고 해상교통의 발달에 따라 번영하여 항만이나 항로의 해변, 섬 등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면서 그 시대의 지배자와 대립한 바다의 호족을 지칭했다. 고대의 해적으로는 931년 히부리시마에 근거를 둔 후지와라 스미토모가 이름이 높다.
중세 이후에는 미세·시마·히젠 지방의 해적이 유명했는데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 근거지를 둔 노시마 무라카미가 대표적인 해적의 호족이었다. 그러나 노시마는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세토나이카이 진출에 따라 모리 씨 휘하로 들어가 수군으로 편성되면서 해적행위를 그만두었다.
이와 같이 해적들은 처음에는 독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남북조 내란 시기에는 활약이 컸으나, 슈코와 다이묘[大名]의 해안지역 지배가 단계적으로 강화되면서 그 지위를 상실했고 다이묘 휘하의 수군으로 편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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