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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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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sailors boarding an Algerine pirate ship

영국 선원과 해적들의 싸움

ⓒ John Fairburn/wikipedia | Public Domain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 등에 이미 해적이 등장한다.

BC 600년경 그리스 사모스 섬의 왕 포루크라테스는 수십 척의 갤리선을 거느리고 해적질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이집트 왕 아푸메네스 2세의 대함대를 습격하던 중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BC 81년 카이사르가 로도스 섬 유학 도중 에게 해에서 해적에게 잡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즉시 토벌군을 이끌고 역습하여 이들을 일망타진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지중해에는 로마의 망명자들이 가담한 대규모의 해적이 로마와 속주와의 곡물수송을 위협하고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BC 67년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제안에 따라 로마는 폼페이우스에게 대군을 맡겨 지중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의 해적을 소탕했다. 그후 로마의 몰락에 따른 해상무역의 쇠퇴로 해적도 일시적으로 소멸했다. 8~10세기의 바이킹('후미에 출몰하는 해적'이라는 뜻)의 원정은 노르만족의 민족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들은 보통 50개의 노를 갖춘 길이 약 20m, 너비 약 5m의 롱십(longship)이라는 배를 타고 스칸디나비아에서 영국 해협과 유럽 각지, 아메리카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바이킹의 위협은 11세기에 이르러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12세기에는 슬라브족의 해적이 발트 해를 석권했다. 13세기에 와서 슬라브 해적은 한자 동맹에 의해 섬멸되었다. 한자 동맹은 14, 15세기에 전성기에 이르렀고 가맹도시도 발트 해에서 북해 연안까지 확대되었으나, 당초 해적 소탕에서 활약하던 한자 동맹 소속 선박의 일부 선원들이 해적행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6세기말에 영국과 스페인의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교전상대국의 배를 약탈해도 좋다는 국왕의 사략(私掠) 특허장을 무기로 사선(私船)에 의한 해적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해적은 양국의 제해권 쟁탈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그 가운데 J. 호킨스, F. 드레이크, R. 그랜빌, 컴벌런드 백작 등 사략선의 선장들이 특히 유명했다. 1588년에 영국 함대의 일원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것도 사략선 출신의 지휘관들이었다. 이무렵 지중해에서는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권의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투르크 해군에서는 아프리카 북서 바르바리 해안의 해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잔인한 수법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16세기초에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19세기에 유럽 제국의 강대한 해군력에 제압될 때까지 해적행위를 했다.

17세기초 유럽 국가간에 평화가 찾아오자, 사략선의 선원들은 합법적인 해적행위를 계속하기 위해 유럽의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 아메리카 수역으로 이동했다.

카리브 해 일대에는 스페인의 영토가 많았으므로 스페인 선박들이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의 사략선의 약탈대상이 되었다. 카리브 해에서도 사략선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자, 직업을 잃은 선원과 군인들은 서인도제도에 정착하여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훈제하여 생계를 꾸리는 '버커니어'(buccaneer)가 되었다. 버커니어는 원래 인디오의 직업이었으나, 스페인에게 박해를 받던 인디오들이 할 수 없이 해적이 되자 해적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프랑스계의 버커니어는 '플리뷔스티에'(flibustier)라고 불렸다. 돛대를 눕혀 난파선으로 가장하거나 초라한 어선으로 꾸며 스페인 상선에 접근한 다음 상대의 허를 찔러 습격하는 것이 버커니어의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버커니어 출신이면서도 후에 자메이카 부총독이 되어 해적 진압에 힘썼던 H. 모건, 검은 수염과 기행으로 유명한 전형적인 해적 E. 티치, 색다른 여자 해적 보니와 리드 등 수많은 버커니어가 카리브 해에 출현했다.

17, 18세기에 인도양·대서양에 출몰했던 해적인 J. 에바리, 캡틴 키드, B. 로버트 등은 원래 스페인 경비선이나 영국의 사략선·상선 출신이었다. 16~19세기에 동서 인도 항로의 선박을 노리는 해적들의 약탈이 심각했으나 해적선의 기치가 된 해골기는 18세기초 이후에야 사용되었다. 그후 각국 해군이 정비됨에 따라 해적은 점점 소멸되기 시작했고, 제2차 미·영전쟁(1812~15)에서 미국군에 협력한 장 라피트가 마지막으로 이름을 남긴 해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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