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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해적활동은 처음에는 소규모에 머물렀으나 진(秦)·한(漢) 시대에 산둥[山東]·장쑤[江蘇] 일대를 노략질하고 다니는 해적이 나타났고, 삼국시대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서는 남해 방면이 해적의 소굴이 되었다. 당·송 시대에 아라비아·페르시아로부터의 선박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 이를 습격하는 대해적단이 출현했으며, 푸젠[福建]·광둥[廣東]의 섬들과 하이난 섬[海南島] 등이 그 근거지가 되었다.
원말 명초의 '왜구'의 내습을 계기로 명조 정부는 특히 해방을 엄중히 하고, 적선과 공선을 준별하기 위한 감합제도를 택했으며, 공선 이외의 일체의 해상교통을 엄금하는 '해금'을 시행했다. 그런데 15, 16세기경 내외시장의 성장을 배경으로 해금을 위반하고 밀무역을 일삼던 '가정(嘉靖 : 521~566년의 명나라 연호)의 해구'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발했다.
이것을 '대외구'라고도 하는데 일본 해적의 참가는 일부에 불과했고, 당시 명조의 중세주구를 견디지 못하고 장쑤·저장[浙江]·푸젠 등 연해지 일대에 넘친 중국 빈민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실직관리·낙제서생 등의 불평분자도 섞여 있었다. 이를 이끈 해구 수령은 대체로 사무역 공허를 바라던 신흥상인층으로 후이저우[薇州] 염상 출신의 왕직 등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獐州]의 상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미 남해·일본에 걸치는 밀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본토 연해의 각 도시와 일본의 고토 제도[五島諸島] 등에 거점을 설치하고 수백 척의 배로 저장·푸젠 등의 연해지, 난징[南京]까지 내습을 일삼았다.
명조가 필사적으로 해적의 소탕에 힘써 융경·만력 연간에 해금이 철폐될 즈음 거의 진정되었다. 그후 필리핀 방면을 습격하는 해적이 나타났고, 명·청 교체기에 정씨 일파가 푸젠 성에 근거를 두다가 타이완으로 옮겨가서 반청 투쟁을 계속하며 중국 본토를 습격했다. 건륭연간말부터 가경연간에 걸쳐 '백련교의 난'이 일어났다. 푸젠 사람 채견 등이 이 난을 이끌었는데, '가정의 해구'와 규모·성격이 모두 비슷했다.
청말부터 중화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화남 해상에 자주 해적이 출몰했다. 또 화이허 강[淮河] 하류에는 염효라는 소금을 밀수하는 해적떼가 있었으며 양쯔 강[揚子江]에는 강적이 출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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