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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리즈

다른 표기 언어 Khawarij

요약 이슬람 최초의 분파.
(영). Kharijite.

그 기원은 칼리프위(位)에 관한 종교적·정치적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리아의 총독 무아위야는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이 시핀 전투(657. 7)에서 살해당한 데 대해 복수하기 위해 우스만의 계승자인 알리에 대항해 싸웠다. 알리가 중재를 받아들였을 때, 알리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이것에 항의하며 "판결은 신만이 하신다"(코란 6 : 57)라고 하며 중재는 〈코란〉의 "만약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항해 모반한다면, 모반을 일으킨 집단에 대항해 싸우라"(49 : 9)라고 한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들 가운데 소수가 이븐 와브의 지도 아래 이탈하여 하루라로 갔고, 알리가 중재에 실패했을 때 수천 명이 이탈해 나라완 근처에서 그들과 합류했다.

주로 이라크 출신 유목민들로 구성된 하와리즈파는 알리의 지배도 인정하지 않고 계승자인 무아위야에게도 대항하면서 자신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슬람교도들을 신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라완 전투(658. 7)에서 이븐 와브와 대부분의 그의 추종자들이 알리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하와리즈 운동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며 끈질기게 지속되었고 알리(이들에게 암살당함)와 무아위야 모두를 괴롭혔다.

칼리프 야지드 1세가 죽은(683) 후의 내전기간중에도 우마이야 영토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다.

하와리즈파는 알 하자즈의 집중공격을 받아 진압된 후 우마이야 왕조가 붕괴할 때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라크와 아라비아에서 2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하와리즈파가 여러 이슬람교도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힌 까닭은 개인적인 반감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이 그들 신앙의 실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기본 입장은 실천이 신앙에 필수적으로 보완되어야 하며, 신앙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중죄를 범한 신도는 누구든 배교자이므로 추방시키거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칼리프도 대죄를 범하고 직분에 필수적인 선행요건(주로 종교적 독실성과 도덕적 순결)을 위반한다면 당연히 폐위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같은 이상주의에다 신의 판결은 오로지 전체 이슬람 공동체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민주적 사고가 보완되어, 자격을 갖춘 이슬람교도라면 누구나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쿠라이시 부족(수니파) 또는 알리의 후손들에게만(시아파) 계승권이 있다는 정통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심지어 이슬람교도들을 포함하여 모든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을 비신도들, 즉 불신도들(kafirun)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항하여 지하드(聖戰)를 벌여야 한다고 보았다.

하와리즈파 운동 중에도 바스라의 아자리카파는 이슬람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분리해나온 가장 극단적인 분파로서, 모든 죄인들은 그 가족들까지도 죽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온건한 이바디야파가 20세기까지 이어져 북아프리카·오만·잔지바르에 약 50만 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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