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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2. 11. 11, 오스트리아 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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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5. 8. 25, 독일 메르겐트하임 |
국적 | 오스트리아 |
요약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탁월한 군사전략가.
보수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선전가의 한 사람이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합스부르크 왕국의 군사활동을 계획하는 일을 맡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고속 승진을 하다가 왕위계승권자로서 그와 군사적 견해를 같이한 프란시스 페르디난트 대공의 추천으로 1906년 참모총장이 되었다.
철저한 보수파인 콘라트는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팽창주의적 경향을 불신하고 양국에 대한 예방 전쟁을 일으킬 것을 역설했다. 1911년 이탈리아에 대한 지나치게 공격적인 자세 때문에 일시 파면되었지만, 1912년에 복귀하여 참모총장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동구에서의 궁극적인 전쟁에 대비한 2개의 안을 세웠다. 그것은 러시아가 중립을 지키면 대규모의 병력을 세르비아 공격에 투입하고, 러시아가 참전을 하면 병력을 그쪽 전선에 집중 배치한다는 구상이었다.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오스트리아 군대는 대부분 그쪽의 적과 대치했다. 그 결과 콘라트의 세르비아 침공은 실패했으며, 세르비아는 1915년말에 독일의 지원을 받고 진압되었다. 러시아 전선에 대한 그의 공격도 격퇴되었다. 그의 전략이 견실했으나 그에게는 러시아를 격파할 충분한 군대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군이 개입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재앙을 모면했다.
1915년의 오스트리아-독일군 공세는 콘라트의 작전대로 수행되어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무렵 오스트리아군은 독일의 참모진에 예속되어 독자성을 상실했다. 1916년 콘라트의 이탈리아에 대한 공세 역시 성공 일보직전에 이르렀으나, 러시아 전선이 위기에 처하여 군대를 철수하자 또다시 승리를 놓쳤다. 새로운 황제 카를 1세가 1916년 지휘권을 떠맡았으며, 그는 1918년 여름까지 이탈리아 전선에서 1개 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콘라트를 파면시켰다.
전후에 퇴역한 콘라트는 회고록 〈나의 초년시절 1878~82 Mein Anfang 1878~1882〉(1925)·〈나의 군무 1906~1918 Aus meiner Dienstzeit 1906~1918〉(5권, 1921~25)를 집필했다. 유능하지만 불운한 군인이었던 콘라트가 실패한 주된 원인은 인간적인 요인들과 제1차 세계대전 전의 정치 현실을 모두 무시하고, 무자비한 군사적 해결책만을 주장한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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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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