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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 9. 26, 이탈리아 콘체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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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8. 8. 6, 카스텔 간돌포 |
국적 | 바티칸시티 |
요약 이탈리아 출신의 교회 교황(1963~78 재위). 본명은 Giovanni Battista Montini.
개요
재위기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대부분이 열렸고, 공의회가 끝난 직후에는 변화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교령과 지침을 내렸다.
재위 기간 동안 그는 현대 세계에서 교회가 새로운 역할을 맡으면서 생긴 문제와 불확실한 상황에 직면했다.
초기생애와 경력
아버지는 중산층 법률가로서 저널리스트 겸 지역 정치가였고, 어머니도 비슷한 사회 계층에 속했다.
어린시절 몸이 약해 주로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라면서는 브레스키아에서 공부했다. 1920년 5월 29일 사제 임명을 받은 뒤 주교의 주선으로 로마에 유학했고, 결국 바티칸 외교관에 선출되었다. 1923년 5월에 맡은 첫 임무는 바르샤바 교황대사의 보좌관이었지만, 건강이 나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로마로 돌아왔다. 그뒤 바티칸 외교관 후보들을 훈련하는 학교인 교회 아카데미에서 특별 수업을 받았고, 동시에 바티칸 국무성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30년간 재직하면서 여러 요직을 거쳤다.
일을 마치고 남는 시간에는 로마대학교의 젊은 학생들의 신앙지도에 전념했다. 이로써 장래가 촉망되는 많은 청년들을 가까이 대하고 사귀었으며, 훗날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이탈리아 정치무대에 두드러진 지도자들로 떠올랐다. 이 가운데는 훗날 이탈리아의 대통령이 된 조반니 그론치, 이탈리아의 국무총리를 지낸 마리오 스셸바와 알도 모로, 장관이 된 인물들이 있었다. 이 대학교 학생집단은 젊은 지도신부의 인도하에 빈민들을 돌아보고 이들을 돕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39년 교황청 국무차관, 1944년 일반(또는 비외교적인) 업무를 맡는 장관서리에 임명되었으며, 1953년 추기경 임명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1954년 11월초 교황 비오 12세에게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받았고, 1958년 교황 요한 23세에게 추기경 임명을 받았으며, 1963년 6월 21일 교황에 선출되어 바오로 6세라는 이름을 취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재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까다로운 첫 회기가 끝난 다음에 교황직을 맡기 시작하여 비록 겉으로는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 초기의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대학생들과 오랫동안 교제를 가진데다가 폭 넓고 깊은 독서 습관으로 발전된 철학적인 성향과 여러 해 동안 외교관으로 쌓은 실무경험에서 얻은 지식에 힘입어 바오로 6세는 당대의 난처한 문제를 학문적으로 풀어나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남은 3차례의 회기를 이끌면서 과거에 밀라노 대주교 추기경으로 있을 때 지지한 논제들을 자주 전개했다.
그의 주요관심은 20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가 명백히 시대에 맞지 않는 전승을 제외한 과거의 전승을 충실히 증거하는 데 있었다. 1965년 12월 8일 공의회가 끝나자 바오로 6세는 교회생활의 모든 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결정 사항들을 실천해야 하는 엄청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수백 년에 걸쳐 굳어진 체제와 의식에 변화(20세기 사회·심리·정치 환경에서 일어난 급속한 변화 때문에 필요하게 됨)를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이 임무에 접근했다.
그는 구체적인 상황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평가하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여러 복잡한 상태를 예리하게 인식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비판자들은 그의 이러한 철학적인 태도를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불명확한 것으로 자주 해석했다. 그렇지만 바오로 6세가 이 중대한 시기에 내린 많은 결정은 용기가 필요한 것들이었다.
1968년 7월 〈인간 생명〉이라는 회칙을 발행했는데, 이 회칙에서 인위적인 출산 방지 방법들을 반대함으로써 이 문제를 놓고 오랜 세월을 끌어온 논쟁에 대해 전임 교황들이 취해온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 회칙은 여러 분야에서 오늘날 교황의 가르침이 지니는 권위에 대한 가장 격렬한 공격으로 묘사될 만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비슷하게 1967년 6월 〈사제의 독신생활 Sacerdotalis Caelibatus〉이라는 회칙을 발행하여 사제는 독신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발표함으로써 심한 비판을 받았다.
훗날 그는 성직을 버린 많은 사제들을 '가시면류관들'로 비유했다. 서약의무를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거나 서약을 감당할 수 없어서 포기하는 수사들과 수녀들의 수가 늘어나는 문제로 고통받았다(산아제한).
교황으로 재직하는 처음 순간부터 사회문제를 연구·해결하는 것과 이것이 세계 평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했다.
사회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미 밀라노에서 폭넓은 사목활동을 벌이는 동안(1954~63) 뚜렷이 파악했다. 이 기간 동안 주로 노동자와 빈민에게 관심을 기울여 남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두루 여행했다. 1960년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당시 밀라노의 대주교 추기경의 신분으로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포로의 사슬을 끊는 천사의 상을 줌으로써 어떤 형태의 억압이라도 풀어주려는 데 항상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64년 8월 6일 최초의 회칙 〈주님의 교회〉의 주된 내용이었고, 훗날 1967년 3월 26일에 발행한 유명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일관된 주제였다. 이 회칙이 사회정의를 매우 예리하게 주장한 까닭에 교황은 일부 보수파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목방문
추기경이었을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회기가 끝날 무렵에 공의회 교부들에게 한 연설에서 훗날 교황이 되어 펼친 사목활동의 주제라고 할 만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그리스도의 교회여, 너는 너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바오로 6세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사목방문을 시작했는데, 그결과 역대 교황들 가운데 처음으로 모든 대륙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첫번째 여행은 성지순례(1964. 1)로서, 이때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와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다.
그해말에 인도를 방문하여 아시아를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다음해(1965. 10. 4) 뉴욕 시에 있는 국제연합(UN) 본부를 방문하여 특별 회기 중의 총회에서 평화를 호소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1967년 파티마(포르투갈)·이스탄불·에페소스(터키)를 각각 잠시 들렀는데, 이 여행에서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를 그의 관할 도시(콘스탄티노플)에서 2번째로 만난 일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968년 8월 보고타를 방문했고, 비행기 편으로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버뮤다를 잠시 들렀다. 1969년 6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와 세계교회협의회에 참석했고, 다음달에는 아프리카 동부의 우간다를 방문했다. 1970년 가을에는 현대의 교황으로서는 가장 긴 여행을 했는데, 10일 동안 테헤란·동파키스탄·필리핀·서사모아·오스트레일리아·인도네시아·홍콩·스리랑카 등지를 방문하면서 세계의 다른 민족들을 직접 만났다. 마닐라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 암살 기도가 있었지만, 큰 해를 입지는 않았다. 바오로 6세가 이 여행에서 다룬 주제는 세계평화, 사회정의, 세계 기아문제, 문맹, 하느님 아래서 인류의 형제됨, 국제협력 등 본질적인 것이었다.
이 주제에는 평화와 형제애를 하나로 본 교황 바오로 6세, 종종 '순례 교황'이라고 불린 그의 성격과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사회문제와 에큐메니컬 운동에 쏟은 관심
1971년 1월 6일 바티칸 클레멘틴 홀에서 알바니아 태생의 수녀 마리아 테레사 보약시우에게 '요한네스 23세 평화상'을 주었다.
테레사는 생애 거의 전부를 인도에서 보내면서 그 나라 빈민 계층의 질병을 치유하는 데 헌신하는 특별수녀회를 설립하고,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으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여 그들을 지원했다. 바오로 6세는 시상식에서 이 상은 가진 것이 없고 비천한 한 개인이 선전 없이도 '모든 사람이 내 형제다'(바오로는 세계 평화를 위한 1971년의 실천 사항으로 이 주제를 정했음)라는 것을 매일의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제정되었다고 선언했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바오로의 목적은 전세계에 대한 정의와 평화라는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하는 동시에, 이렇게 분명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현실적인 용기와 개인의 인내로써 해결할 수 있고, 또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단적으로 입증하려는 데 있었다.
그는 인류의 보편 양심을 일깨워 자선과 정의의 이상을 이루는 것을 포함한 구체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게 하기 위해 고심했다. 밀라노 대주교로 있을 때는 매주 금요일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고 직접 가난한 병자들이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곤 했다.
바오로 6세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다른 교회들, 심지어 무종교자들 사이에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교회를 분열하는 면보다는 연합하는 면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교도이든지 비그리스도교도이든지 간에 전세계의 종교지도자들을 더욱 친밀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서로 친근함을 보이는 것이 모든 연합 계획이나 희망의 토대라고 생각하여 영국·미국·소련, 그외 여러 나라의 주요 종교지도자들을 만났다. 또한 무종교자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무종교자들을 위한 특별 사무국을 세웠다(무신론). 그의 지도하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교도들과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의 결혼을 금지해오던 법률을 완전히 개정함으로써 개인 양심들의 충돌에 따른 인간 비극의 위협을 줄이려는 확고한 바람을 표시했다.
이런 이유에서 바오로 6세의 자의교서는 인간문제들을 이해한 점과,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그 어느 편에도 양심의 기본 원칙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잡혼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 때문에 환영과 찬사를 받았다.
바오로 6세는 당시에 일어나던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을 세계의 형제애를 장려할 좋은 기회로 보았으며, 이 운동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에 대한 통일된 신앙 안에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인간의 복지를 위해 계속 노력하기를 원했다.
1971년 5월 15일 사회체제 개혁에 관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의 제80회 기념식에서 바오로 6세는 강력한 회칙 〈80주년 Octogesima Adveniens〉을 발행하여 모든 사람이 정의와 평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다같이 참여해야 함을 특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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