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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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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1,000,000명 (2023년 추계) |
면적 | 49.36㎢ |
언어 | 프랑스어 |
대륙 | 유럽 |
국가 | 프랑스 |
요약 프라스의 행정구역. 가론 강어귀에서 96㎞ 떨어져 있다. 보르도의 대가문들은 해운업과 보르도산 포도주 무역으로 부를 이룩했다. 이들 가문은 잉글랜드 지배 당시 큰 부를 쌓을 수 있었고, 18세기에 다시 번영을 맞았다. 오늘날에 포도원이 차지하는 지역의 면적은 예전 절정기에 차지했던 최고면적의 반 정도이다. 프랑스 정부와 지역 포도재배업자들은 포도주의 생산량과 질을 철저히 관리하여 주요수출시장을 지켜내려 애쓰고 있다. 17세기는 혼란의 시기로, 종교전쟁에서 대학살이 있었고 무역은 위축되었으나 18세기에 '삼각무역'을 통해 다시금 번영을 누렸다.
가론 강이 도르도뉴 강과 만나는 곳에서 위쪽으로 24㎞ 지점에 가론 강을 끼고 있으며 강어귀에서 96㎞ 떨어져 있다. 이곳은 부르디갈라라는 이름으로, 켈트계 부족인 비투리게스 비비스키족의 주요도시였다.
로마 시대에는 피레네 산맥으로부터 루아르 강에까지 이르던 아키타니아 속주(屬州)의 수도였으며, 스페인 및 브리타니아와의 교역이 번성했다. 4세기에 아키타니아세쿤다(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 지역으로 나누었던 아키타니아의 한 지역)의 수도였던 부르디갈라를 두고, 이곳 태생의 작가 아우소니우스는 방벽으로 둘러싸인 4각형 도시이며 갈리아의 최대 교육 중심지 가운데 하나라고 기술했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보르도 주변지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맞이했으나 10세기초에 아키텐 공작령이 수립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로마사).
보르도는 아키텐의 엘리너가 상속받은 재산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이 1154년 헨리 2세로 즉위하면서 아키텐 공국의 나머지와 함께 잉글랜드령이 되었다.
보르도에서 20년간이나 머물렀던 에드워드 황태자와 이곳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리처드(후에 리처드 2세)는 지금도 이 도시에서 존경받고 있다. 잉글랜드의 지배하에서 보르도는 1235년부터 시장이 선출되는 등 예외적인 자유를 누렸으며 잉글랜드 항구들과의 활발한 교역이 발달했다. 생테미용과 리부른 같은 이웃도시들이 보르도가 주도하는 연방에 합류했다.
1453년 카스티용에서 잉글랜드를 누른 프랑스는 이 도시를 자국에 합병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자치시의 특권이 제한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저항했고, 1548년 소금과세 반란 후 120명의 주민이 처형당했다.
17세기는 혼란의 시기로, 종교전쟁에서 대학살이 있었고 무역은 위축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들여 서인도 제도에 팔면서 그곳에서 설탕과 커피를 사들이고 무기와 포도주를 아프리카에 파는 '삼각무역'을 통해 다시금 번영을 누렸다.
기옌의 지사인 마르키 드 투르니에 의해 이 도시는 광장과 훌륭한 건물들이 있는 쾌적한 곳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보르도에서 지롱드당(黨)이 결성되었고 '공포시대' 동안 보르도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의 봉쇄 때문에 고통을 받은 뒤, 1814년에 이 도시는 루이 18세가 그의 조카 아들에게 보르도 공(公)의 칭호를 주도록 촉구하면서 부르봉 왕조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1870, 1914, 1940년에 파리에서 망명한 프랑스 정부가 보르도에 피신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 8월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수복되었다.
시의 본지역과 교외지역인 라바스티드 사이를 흐르는 가론 강(폭 500~690m)은 8㎞ 길이의 초승달 모양인 넓은 부두를 둘러싸고 있다. 이 부두 뒤에는 높은 창고, 공장,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으며 큰 광장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흰색의 독특한 주택들이 있다.
시를 둘러싸고 있는 대로(大路) 너머에 보르도의 교외지역인 르부스카·코데랑·메리냐크·탈랑스·베글이 있다. 강 오른편에 있는 라바스티드와는 19세기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옛 도시 방벽의 성문이 여러 개 남아 있고,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유적이 있다. 꼭대기가 조상으로 장식된 주랑(柱廊)이 달린 대극장(1775~80)은 프랑스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 중 하나로서, 후일 가르니에가 파리 오페라 극장을 설계할 때 이 극장의 장중한 이중계단과 반구(半球) 천장을 모방했다.
부두에서 훨씬 아래쪽에 있는 에스플라나드 데캥콩스는 유럽의 최대 광장 중 하나이며 지롱드 당원 기념비와 몽테스키외 및 몽테뉴의 거대한 동상들이 있다. 몽테뉴의 무덤은 1441년에 창립된 대학교에 있다. 교회와 관련된 옛 유적으로는 생탕드레 대성당 옆의 클로셰 페베를랑과 109m의 뾰족탑이 있는 생미셸 탑이 있는데, 둘 다 15세기의 종탑이다.
새로운 도시개발계획에는 도심부를 혁신하는 것과 커다란 호수 주위 및 지롱드 강 어귀의 서쪽 기슭을 따라 북쪽으로 새로운 지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포함되었다. 또한 도보와 자동차로 가론 강을 건널 수 있던 유일한 옛 다리 대신 현대식의 큰 다리가 세워져 근처를 지나는 국립고속도로를 도시와 연결하게 되었으며 전시관도 건설되었다.
보르도의 대가문들은 해운업과 유명한 보르도산(産) 포도주 무역으로 부를 이룩했다(보르도 포도주). 이들 포도재배와 포도주무역업에 종사하는 가문은 잉글랜드가 지배할 당시에 큰 부를 쌓을 수 있었고, 15~17세기의 위태로운 기간이 지난 후 18세기에 다시 번영을 맞았다. 그후로는 1869년 포도나무 뿌리진디의 만연 같은 가장 심각했던 피해를 포함하여 기생충이나 날씨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에 포도원이 차지하는 지역의 면적은 예전 절정기에 차지했던 최고면적의 반 정도이다. 프랑스 정부와 지역 포도재배업자들은 포도주의 생산량과 질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을 주요수출시장을 지켜내는 필수적인 전략으로 여긴다. 1974년 포도주에 불순물을 섞은 사건이 있었지만 보르도의 포도주 시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이곳의 항구지역은 18세기부터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나, 지금은 5개의 외항(홀수가 깊은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바다를 향한 항구)으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이전되고 있으며, 특히 안틸레스 제도, 아프리카, 프랑스 서해안과의 무역이 이전되고 있다. 최근 수년 동안 가장 많은 물량을 차지했던 수입품은 석유이다.
무역은 자본축적에 유리했으나, 여러모로 노력이 기울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업발달을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전통적인 식품가공업과 가구산업 외에 최근 정유업·석유화학산업·제약업이 추가되었고 포드자동차 공장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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