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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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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프랑스의 파리 동편에 있는 중세시대 요새.

바스티유(Bastille)

ⓒ Anonymous/wikipedia | Public Domain

17, 18세기에 국사범 감옥으로 쓰였고 갖가지 범죄로 기소된 주요인물들을 감금해두는 장소였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던 날, 무장한 파리 시민에게 습격을 받았던 바스티유 감옥은 부르봉 왕조가 행한 전제정치의 상징이었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파리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던 바스티유는 30m 높이의 탑 8개가 같은 높이의 벽으로 연결되어 있고 너비가 24m 이상 되는 호(壕)로 둘러싸여 있었다.

공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370년 4월 22일로, 프랑스 왕인 샤를 5세가 잉글랜드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둘러싼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짓도록 했다. 실제로 바스티유라는 이름은 작은 요새를 의미하는 보통명사 바스티드(bastide)가 전와(轉訛)된 것이다. 원래 형태는 요새화된 문이었지만 샤를 6세가 그 문에 벽을 쌓아 하나의 독립된 요새로 바꾸어놓았다. 1557년 동쪽 측면에 능보(稜堡)를 세워 방어체계를 완성시켰고, 17세기에는 가로 구획을 만들어 내부를 각각 다른 여러 부분으로 나누었다. 17세기에 바스티유를 국사범 감옥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리슐리외 추기경이었다. 매년 40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왕의 직접 명령인 '구속영장'으로 억류되었는데, 한번 억류되면 달리 호소할 길이 없었다. 죄수들 가운데는 정치범과 가문의 요청으로 잡혀오는 사람도 포함되었는데, 젊은 사람을 억지로 복종시키거나 평판이 나쁜 가족 일원이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루이 14세 치하에서 바스티유는 사법부의 구금장소가 되어 검찰총장 권한으로 죄수를 억류할 수 있었다. 오를레앙 공(公) 필리프 2세의 섭정기간 동안에 의회가 재판한 사람들 역시 이곳에 갇혔다. 하지만 구속영장에 의한 투옥이 계속 집행되고 있었으며, 금서들도 여기에 보관했다. 건물을 유지하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1784년에는 폐쇄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1789년 7월 14일 아침, 7명의 죄수만이 투옥되어 있던 바스티유 감옥에 군중들이 몰려와서 감옥 소장이었던 로네 후작 베르나르 조르당에게 보관되어 있는 무기와 탄약을 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네가 피신한 것을 알자 군중들은 분노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는데, 이 극적인 행위는 앙시앵 레짐(舊體制)의 종말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뒤 감옥은 혁명정부의 명령으로 철거되었다. 1880년에 매년 7월 14일을 국경일인 '바스티유 기념일'로 지정하여 "7월 14일이여, 영원히!"와 "바스티유 감옥을 철거하라!" 같은 구호와 함께 행진·연설·불꽃놀이 등의 축하행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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