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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의 과시
크롬웰은 1643년에 군사조직가·전사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처음부터 그는 의회군은 신중히 선발되어야 하며 적절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충성심과 훌륭한 몸가짐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해 2월 대령에 임명되어 일류급 기병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군대에 좋은 대우와 함께 정기급료 지급을 요구하는 한편 훈련을 엄격하게 실시하고 군기를 바로잡아나갔다. 기병연대를 성공적으로 훈련시킨 결과 크롬웰은 전투를 치르고 나서도 이들을 통제해 재조직해낼 수 있었다.
이같은 점이 바로 전투지휘관으로서의 그의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43년 줄곧 자신이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동부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이 지역은 자타가 공인하는 의회파의 아성이 되었다. 7월 28일 링컨셔의 게인즈버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같은 날 엘리 섬의 지사로 임명되었는데 이곳은 왕당파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요새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의회군의 토머스 페어팩스 장군과 함께 전투를 수행했던 크롬웰은 링컨셔 윈스비에서 왕당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으며 이후 노팅엄셔의 뉴어크를 포위했다. 이에 따라 크롬웰은 이같은 승리에 흡족해하는 하원을 설득해 새로운 군대를 창설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동부지역을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진으로 공격을 펴기 위한 군대였다.
이러한 성격의 군대는 1644년초 맨체스터 백작 2세인 에드워드 몬터규의 지휘하에 편성되었다.
하원에 모습을 나타낸 크롬웰은 맨체스터 백작을 칭찬하는 한편으로 해이해져 있다고 비난했다. 크롬웰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다른 장교들을 비난하는 데 대해 하원의원 모두가 찬동한 것은 아니지만 크롬웰의 동료의원들은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1644년 크롬웰은 중장계급으로 맨체스터 백작 다음 서열의 지휘관에 임명되었으며 하루 5파운드의 급료를 지급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이 체결된 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양왕국 위원에 임명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내란기간중 총괄적인 전략을 관장하는 역할을 했다.
1644년 5월 맨체스터 백작의 군대가 링컨으로 진격한 데 이어 북쪽으로 나아가 스코틀랜드 군 및 요크셔 의회파 세력과 합류해 요크를 포위공격했다. 왕당파 군대의 총사령관 루퍼트 공은 포위망을 뚫었으나 7월 2일 마스턴 무어 전투에 패배했다. 이로써 잉글랜드 북부는 사실상 의회파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크롬웰은 또다시 이 전투를 통해 성가를 드높였다.
그런데 크롬웰 자신은 맨체스터 백작의 꾸물거림과 무기력함을 비판하고 그가 진정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다고는 믿지 않았으며 9월 중순경 두 왕국 위원회에 출석해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 크롬웰과 맨체스터 백작 사이의 불화는 잠시 가라앉았으나 뉴베리 전투에서 주로 맨체스터 백작이 크롬웰의 기병대에 대한 보병지원을 거부함으로써 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재연되었다.
크롬웰이 하원에 나가 맨체스터 백작의 행위에 대한 불만감을 자세히 털어놓자 맨체스터 백작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상원에서 크롬웰을 비난했으며 그를 '선동꾼'이라고 탄핵하려는 계획을 꾸미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언쟁은 다시 진정되었고 12월 크롬웰은 상·하원의 의원은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하거나 장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며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또한 새로운 군대가 토머스 페어팩스 경의 휘하에 편성되도록 한다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페어팩스 경을 추앙했던 크롬웰은 그를 거명하고 나서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는 데 전념했으나 스스로가 하원의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부대원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제2사령관직이 공석으로 남았으며 1645년 여름 내란이 절정에 달하자 페어팩스 경은 크롬웰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크롬웰은 찰스 1세의 마지막 남은 2개 야전부대가 섬멸당하게 되는 네이즈비 전투와 랭포트 전투에 참가했다. 1646년 1월 하원은 크롬웰에게 연간 2,500파운드에 해당하는 급료를 지급했고 직책임기를 6개월간 연장해주었으며 따라서 옥스퍼드 포위공격에 참전할 수 있었다.
페어팩스 경이 새로운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하고 무기력한 맨체스터 백작의 지휘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크롬웰은 전쟁의 진행과정에 대해 만족해했다. 전쟁의 승리를 신의 자비로 돌렸으며 충성스럽게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내전이 끝나자 하원은 군대를 가능한 한 빨리 해산시키고자 했으며 이에 실망한 크롬웰은 1647년 3월 페어팩스 경에게 "병사들의 사기가 이같이 떨어진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의회 내 민간인 출신 지도자들이 스코틀랜드인들을 고용해 자신들을 보호하도록 하면서 군대해산을 명령하자 평소 스코틀랜드인들을 싫어하던 크롬웰은 잉글랜드 병사들이 치욕스런 대우를 받아왔다고 생각하고 런던을 떠났으며 6월 4일 동료병사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다.
중재와 제2차 내란
1647년의 나머지 기간에 그는 잉글랜드 내의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했으나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으며 곧 돈독하던 신앙심이 회의에 빠져들었다.
군대의 동요도 갈수록 심해졌으며 크롬웰이 런던을 떠나던 바로 그날 일단의 병사들이 찰스 1세를 체포했다. 크롬웰과 그의 사위 헨리 아이어턴은 2차례 찰스 1세와 면담하고 자신들이 의회에 제출하고자 하는 헌법안에 대해 찰스 1세가 동의하도록 설득을 시도했다. 그당시 크롬웰은 왕의 적이 아니었으며 찰스 1세가 자녀들에 대해 무척 애정이 깊은 데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왕과 의회 모두를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 군대 내부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이었다.
일반 병사들의 압력에 못이겨 페어팩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런던의 의사당으로 향했을 때 크롬웰은 그래도 의회의 권위는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9월에는 하원에서 앞으로 더이상 국왕에게 청원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크롬웰은 이에 반대했으며 1월 사병대표들도 참석한 군대총회에서 자신은 어떤 특별한 형태의 정부를 구성할 생각이 없으며 또한 왕과 어떠한 밀약을 맺지도 않았다는 점을 납득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정부 상태가 초래될 것을 우려하면서 왕정과 상원의 폐지, 그리고 보다 민주적인 헌법의 도입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러나 군대와 의회, 그리고 국왕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려던 그의 모든 노력은 찰스 1세가 햄프턴 궁에서 탈출하여 스코틀랜드측과 협상을 하기 위해 아일오브와이어트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1648년 1월 3일 크롬웰은 전에 보유한 모든 지위를 포기했으며 하원에 나아가 "왕은 완고한 사람이며 신이 그의 마음을 강팍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왕에 대해 청원을 내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지지했다.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측과 협정을 맺고 크롬웰이 의회와 군대 사이를 중재하는 데 실패한 것에 고무된 왕당파들은 재차 무장했으며 2차 내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페어팩스 장군은 우선 크롬웰을 웨일스로 파견해 그곳의 봉기를 진압하도록 했으며 이후 북부지역으로 보내 6월에 잉글랜드로 침입한 스코틀랜드 군대와 싸우도록 했다. 스코틀랜군과 북부지역의 왕당파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랭커셔 전투에서 이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스코틀랜드로 진주해 질서를 회복시켰다.
최종단계에서 요크셔로 돌아와 폰티프랙트 포위공격의 책임을 맡았다. 노선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머뭇거리면서 북부지역을 맴돌고 있는 동안 그의 사위 아이어턴과 남부지역 주둔군 소속 장교들이 결정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들은 찰스 1세와의 협상을 비난하는 내용의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고 찰스 1세를 살인자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여전히 입장이 불투명하던 크롬웰은 자신의 군대가 남부지역 주둔군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페어팩스 장군의 명령으로 런던 귀환길에 올랐으나 그가 런던에 도착한 것은 이미 아이어턴과 그의 동료들이 하원에서 국왕과의 협상을 주장하던 인사들을 모두 축출하고 난 다음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던 크롬웰은 아이어턴에게 떠밀려 마침내 크리스마스 무렵 찰스 1세를 살인자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고등법원의 135명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크롬웰은 찰스 1세의 사형집행영장에 서명했다.
국무회의의 제1의장
영국이 공화정을 선포한 후 크롬웰은 단원제 의회의 집행기구인 국무회의의 제1 의장이 되었다.
찰스 1세의 처형 후 3년 동안 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왕당파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수평파(Levllers)와 같은 극단주의적인 청교도 집단의 반란행위를 진압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크롬웰 자신은 1641년 잉글랜드 정착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아일랜드인들이 자행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총사령관 겸 총독으로 나서 아일랜드에 대한 무자비한 원정을 벌였다. 1650년 5월 런던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향하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인정된 상태였다.
페어팩스 장군이 취임을 거부했으므로 6월 25일 크롬웰이 페어팩스를 대신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크롬웰은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이었던 아일랜드인에 비해 청교도가 다수인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보다 호감을 갖고 있었다. 전쟁은 어렵게 진행되었으며 1650년 여름 크롬웰은 병에 걸렸으나 9월 3일 던바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1년 후 찰스 2세가 잉글랜드로 진격했을 때도 우스터에서 이를 격퇴했다(→ 색인:우스터 전쟁).
이로써 내란은 종식되었으며 크롬웰은 평화와 함께 정치적 안정과 사회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사면법을 통과시켰으나 여전히 의회에 대한 군대의 불만은 더욱 심해졌다. 군대 내에는 의회의원들이 부패했으며 의회가 새로 소집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크롬웰은 양측을 중재하려고 다시 시도했으나 스스로는 군대편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마침내 의회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고 1653년 4월 20일 자기 휘하의 총기병을 소집해 하원에서 의원들을 강제로 축출했으며 2개월 후 자신이 지명한 인사들로 의회를 구성했다. 이전의 의회가 굼뜨고 이기적인 성격이 강했던 데 반해 새로 구성된 의회는 지나치게 조급하고 과격한 편이었다.
또한 크롬웰은 의회가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존 램버트 소장과 일단의 장교들이 계획한 쿠데타 이후 1653년 12월 의회의 대다수 인사들이 크롬웰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색인:통치헌장). 크롬웰은 3년마다 소집되는 의회와 국무회의의 자문을 받으며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Protectorate)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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