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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1, 잉글랜드 노팅엄셔 애튼버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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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51. 11. 28, 아일랜드 리머릭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군인·정치가.
영국 내란(청교도혁명) 때 의회파의 지도자였다.
내란이 일어나자 의회파군에 들어가 1642년 11월 뚜렷한 승패 없이 접전을 기록한 우스터셔의 에지힐 전투에서 기병대를 지휘했다. 이듬해 올리버 크롬웰과 친분을 맺었으며 그후 잉글랜드 동부군의 대령이 되었다. 1644년 크롬웰에 의해 아일오브일리의 부총독에 임명되었으며 요크셔의 마스턴무어 전투(1644. 7)와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 전투(1645. 6)에서 의회파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1646년 여름 그는 크롬웰의 맏딸 브리짓과 결혼했다.
그는 군사적 업적도 뛰어났지만 정치 분야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1645년 의원에 선출되어 군대 내의 독립파와 하원을 지배하고 있는 장로파 간의 대립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1647년 그는 군대와 의회 및 국왕 등의 정치권력 분립과 영국국교도와 청교도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옹호하는 헌법 초안(Heads of the Proposals)을 제출했다.
입헌군주국을 표방하는 이 제안은 국왕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동시에 성년 남자의 참정권과 투표권의 재산 자격 조항 폐지를 주장하는 수평파의 공격을 받았다. 그후 그는 왕에게 등을 돌렸다. 군대의 독립파가 내란의 2번째 국면에 이르러 의회파에 승리했을 때, 그의 '군대의 진정서'는 군주정 공격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찰스 왕을 재판에 회부하도록 추진했으며 왕을 처단하는 데 서명했다. 1649~51년 그는 아일랜드에서 로마 가톨릭 반군에 맞서 정부 주장을 관철해나갔으며, 1650년에는 아일랜드 총독 겸 최고사령관 직무대리가 되었다. 그는 리머릭 포위 공격 이후에 죽었다. 그에 관한 전기로 로버트 램지의 〈헨리 아이어턴 Henry Ireton〉(194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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