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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2. 1. 17, 잉글랜드 요크셔 덴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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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71. 11. 12, 요크셔 넌애플턴 |
국적 | 영국 |
요약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벌어진 영국내란(청교도 혁명) 때의 의회군 총사령관.
그의 뛰어난 전술과 용맹에 힘입어 의회군은 영국 북부와 남서부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캐머런의 페어팩스 남작 2세 퍼디낸도의 아들로,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다녔고, 1629~31년 네덜란드-스페인 전쟁에 참전했다. 스코틀랜드와의 주교 전쟁(1639, 1640)에도 참전했고, 1640년 1월 기사작위를 받았다(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한 것은 1648년이었음). 내란이 발발하자 그와 그의 아버지는 의회파를 지지했고, 그는 고향 요크셔의 기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643년 1월 리즈를 점령하고 5월에는 웨이크필드를 장악했으나, 6월 30일 애드월턴무어에서 패한 뒤 요크셔의 거의 전역이 왕당파에게 넘어갔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도움을 받아 반격을 가했고, 윈스비·링컨셔(1643. 10)·마스턴무어·요크셔(1644. 7)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어 북부를 되찾았다. 그는 요크셔에 있는 헬름슬리 성 포위(1644. 9)에서 중상을 입었다.
1645년 2월 페어팩스는 신형군(新型軍)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효율적인 전투병력을 조직하고 훈련시킨 데는 그의 공이 컸다.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둘 때도(1645. 6. 14) 그는 용기와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남서부로 진격하여 서머싯의 랭포트에서 유일한 왕당파 잔류 부대를 무찔렀다. 그는 제한군주제가 수립될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1647년 왕당파가 다시 무기를 들자 켄트주의 메이드스톤에서 그들의 병력을 분쇄했고, 에식스의 콜체스터에서는 적군을 기아로 몰고가 굴복시켰다. 1648년 12월 군사들을 동원한 의회해산에는 찬동하지 않았고, 찰스 1세의 처형을 결정한 위원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런 사태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신생 공화국 국무회의의 일원이 되는 것은 수락했다. 1650년 페어팩스는 총사령관으로서 스코틀랜드 침공계획에 항의하여 사임했다. 그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1657년에는 당시 호국경이자 옛 친구였던 올리버 크롬웰과 신랄한 논전을 벌였다. 1658년 9월 크롬웰이 죽은 뒤에는 조지 멍크 장군을 도와 군부에 맞서 의회의 통치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1660년에는 찰스 1세의 아들을 영국으로 돌아오게 해 찰스 2세로 왕위에 추대한 의회의 일원이었으나, 찰스 2세가 크롬웰의 유해를 모독하자 격분했고, 이후 어떤 공적인 일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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