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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599년 4월 25일 잉글랜드 동부 헌팅던에서 로버트 크롬웰과 엘리자베스 스튜어드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의회의원을 지냈으며 지주와 치안판사로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봉사했다. 아버지는 그가 18세 때 죽었으나 어머니는 89세까지 생존했다. 그는 시골에서 그래머 스쿨(초등학교)에 다니다 이후 1년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와 누이들을 돌보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 귀향했으나 한때 런던에 있는 링컨스인 법학원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곳에는 지방 젠트리들이 모여들어 어설프게 법률공부를 하곤 했었다. 1620년 8월 런던 시의 상인 제임스 부처 경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5남 4녀를 두었다.
인격형성의 영향
그의 부모는 모두 헨리 8세 통치기간의 수도원 해체로 꽤 득을 본 프로테스탄트 가문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크롬웰의 성장과정에서 종교적인 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헌팅던에서 다니던 학교의 교장이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의 학장은 모두 열렬한 칼뱅주의자였으며 반(反)가톨릭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젊은시절 크롬웰은 눈에 띄게 공부에 열중하는 편은 아니었으며 사냥과 같은 야외 운동을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성서를 탐독했으며 월터 롤리 경이 쓴 〈세계사 The History of the World〉를 읽고 극찬했다.
그는 스승들로부터, 그리고 도서를 통하여 지상에서 인간의 죄는 징벌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신은 성령을 통해 선택받은 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 나이의 결혼생활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으며 고향의 여러 가지 일들에 관심을 쏟았다.
39세 때 외삼촌으로부터 엘리에 있는 토지를 물려받을 때까지는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다른 하층 젠트리처럼 그역시 흉작에 따른 피해와 종류도 가지각색인 세금 및 부과금과 악전고투해야 했다.
1628년 헌팅던 선거구 출신으로 의회에 진출했으나 이듬해 의회는 찰스 1세에 의해 해산되고 11년간 1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의회가 열리지 않는 동안 크롬웰과 같은 시골 젠트리들에게는 불만이 쌓여갔다. 크롬웰 가문에는 이같이 불만에 찬 젠트리들이 상당수 있었다.
일례로 버킹엄셔 출신으로 부유한 지방지주였던 좀 햄던은 건함세(建艦稅) 부과에 반발해 국왕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바로 크롬웰과 사촌간이었다. 1640년 봄 케임브리지 선거구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서머싯 출신의 노련한 정치가로 군주제에 아주 비판적이었던 좀 핌이 이끄는 많은 친구와 어울리게 되었다.
그런데 구성된 지 3주 만에 해산된 이 단기의회는 거의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크롬웰은 다시 케임브리지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1653년까지 지속되는 이른바 장기의회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공직활동에 들어갔다.
의회활동
1628~29년 의회에서 활동하면서 크롬웰은 이미 열렬하고 다소 투박한 청교도로 알려져 있었으며 찰스 1세의 주교들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도 개인이 기도를 통해 직접 신과 직접적으로 교통할 수 있으며 성직자의 주된 임무는 설교를 통해 속인들을 감화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순회 설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 일부를 내놓았으며 예배의식과 국교회의 권위를 중시하던 고교회파 지도자인 엘리의 지방주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색인:주교제도). 크롬웰은 국교에 대해 결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영국교회의 전체 성직위계조직에 대해서는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성직감독제도의 폐지를 주창했으며 신자들 스스로가 목회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금과 각종 독점제도, 그리고 백성들에게 지워진 과중한 부담에 대해 동료의원들이 품고 있는 반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으나 크롬웰이 왕의 정부에 대해 반대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종교문제 때문이었다. 1641년 11월 존 핌과 그의 동료들이 주교들을 비난하고 성직자의 타락상을 지적하는 내용의 '대간의서'(大諫議書)를 제출하자 크롬웰은 하원이 대간의서를 통과시키지 않을 경우 자신이 가진 전재산을 "다음날 아침까지 모두 처분하고 다시는 잉글랜드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간의서는 찰스 1세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왕과 의회내 비판세력 간의 괴리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1개월 뒤 찰스 1세는 자신의 반대세력 가운데 5명을 반역혐의로 체포하고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는데 당시 크롬웰은 여기에 포함될 만큼 두각을 나타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1642년 찰스 1세가 군사를 일으키고자 런던을 떠나자 상황은 내전으로 치달았으며 크롬웰은 거리낌없이 말하는 청교도로서뿐만 아니라 조직력과 지도력을 갖춘 실제적인 인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해 7월 그는 케임브리지 선거구민들이 방위조직을 구성하고 무장할 수 있도록 하원의 승인을 얻어냈으며 내란이 발발하자 곧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같은 해 10월 23일 에지힐 전투의 마무리 단계에서 크롬웰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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