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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몽골족이 금과 남송을 멸망시키고 세웠던 나라이다. 13세기경 몽골제국을 일으켜 중국 전토는 물론 동아시아 전역을 정복했던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시조이다. 쿠빌라이는 원의 세조가 된 후 대도(베이징)에 수도를 정하고 중국식 연호를 만들어 중통 1년(1260)이라 했다. 1271년 다시 국호를 대원으로 하고 중국식 천자가 되었다. 원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사회였다. 민족별 신분은 몽골족·색목인·한인·남인의 4계층으로 분류되었다. 원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교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그러나 사인층의 정치적 불만에다 무거운 세금과 끊임없는 부역 징발 등으로 민중의 고통이 커지자 백련교·백운종 등의 비밀결사가 출현해 민족 봉기가 일어났으며, 결국 이것이 원이 붕괴되는 주요원인이 되었다.

개요

몽골족이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키고 현재의 중국 땅에 세웠던 나라이다.

13세기경 몽골 제국을 일으켜 중국 전토는 물론 동아시아 전역을 정복했던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를 시조로 하며, '원'이라는 국호는 〈주역 周易〉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원의 건국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수립하면서 몽골 제국은 유목민과 농경도시민이 공존할 수 있는 거대한 건조농업지대를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복왕조로 변모했다.

처음에 쿠빌라이는 몽골 제국 제4대 칸인 몽케로부터 중국 방면의 국정을 담당하는 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평소에 중국통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것을 기회로 몽골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유자(儒者)나 봉건제후들을 자기 진영에 영입함으로써 그 세력을 다져나갔다. 그리하여 원의 세조가 된 후에는 대도(大都:베이징)에 수도를 정하고 중국식 연호를 만들어 중통(中統) 1년(1260)이라 했다.

쿠빌라이 칸(Kublai Khan)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칭기즈 칸의 손자, 원나라 초대 황제

ⓒ Shizhao/wikipedia | Public Domain

그리고 1271년에 다시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하고 중국식 천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몽골의 왕족들은 쿠빌라이를 승인하지 않고 그의 동생인 아리크 부가를 칸으로 추대했으며, 이로 인해 두 세력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으나 경제력이 월등한 쿠빌라이가 승리했다.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과제는 남송을 굴복시키는 일이었는데, 치밀한 준비 끝에 1268년 남송정벌을 재개한 쿠빌라이는 1279년 긴 전쟁 끝에 넓고 비옥한 남송의 토지를 복속시켰다(원의 영역에 대해서는 '중국사' 항목 참조).

사회·경제

다민족 복합사회

원나라의 사회는 정복왕조가 흔히 그렇듯이 다민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사회였으며, 그 실태는 귀족제적인 신분사회였다.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고 지배한 몽골 제국의 종주국인 원나라의 지배에 놓인 민족의 수는 대단히 많았다. 이들 피지배민족은 숫자도 많으려니와 몽골족에 비해 지식수준도 월등히 높았다. 따라서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몽골족은 지배민족으로서 특별한 배려를 받았으며, 의식적인 민족차별정책과 함께 신분제도가 실시되었다. 민족별 신분은 4계층으로 분류되었는데, 몽골족·색목인(色目人:위구르인·이란인 등)·한인(漢人:옛 금나라 지배 아래 있었던 한족·거란족 등)·남인(南人:옛 남송의 유민)이 그것이었다.

몽골족에게는 지배자의 지위를 보장하는 사회적 특권이 부여되어 원나라 정권의 최상위는 몽골족 황제 일가 및 왕족이나 그 혼족(婚族) 집단이 차지했다. 그들은 국왕 또는 부마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몽골 본토 또는 중국 내부에 봉토로 받은 넓은 유목지나 식읍(食邑)을 가지고 최고의 세습적 특권을 누렸다.

다음으로는 몽골족 공신의 자손들이 주축을 이루는 특권귀족영주층이 있었다. 이중에는 서아시아 제국의 왕손들도 섞여 있었으며, 이러한 귀족층 아래에 일반 한인의 지식층 또는 무인층이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지방관청의 하급관리나 하급군인에 불과했으나, 원나라가 강남의 땅을 합병한 후 그 땅의 통치를 위해 각지에 파견되면서 중급관료나 무장으로 입신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계층은 원의 강남 통치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비해 가장 늦게 정복된 남송의 유민들은 원나라 정권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이러한 차별은 원나라 중기에 과거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세제와 재정

원나라는 국가재정이나 민간경제활동의 변화에 있어 몽골의 다른 여러 한국에 비할 수 없이 거대한 규모였다.

세제에 있어서는 금나라의 옛 땅이었던 화북지구에서는 '세량'(稅糧:현물납에 의한 전토세)과 '과차'(課差:비단실과 은)의 2가지 과세체계를 두었으며, 남송의 옛 땅인 강남에서는 남송 이래로 행해져온 '하세'(夏稅:여름에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납입하는 것)와 '추량'(秋糧:가을에 내는 전토세)이라는 징세체계를 답습했다. 이와 같은 정세(正稅)에 의한 국가재정수입에는 국초부터 정해진 액수가 있었으므로 원나라는 해마다 팽창해가는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소금·차 등을 국가에서 전매하거나 상세(商稅)·교통세 등으로 새로운 재원을 마련해야 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재원의 확보를 위해 중국 전토의 경제계를 정부의 지배 아래 두고자 했다. 쿠빌라이는 건국초부터 몇 종류의 정부 신용통화를 발행하여 이전에 유통되던 은전·동전을 회수했다. 그러나 유목민 지배층의 낭비와 엄청난 액수의 군사비 등의 중압으로 원나라의 재정은 점차 위기를 맞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통화량을 팽창시킴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나 결과는 통화가치의 하락을 초래했다.

위안화

원나라의 통용되던 동전 화폐

ⓒ PHGCOM / wikipedia | CC의 BY-SA 3.0

문화

문화정책

원나라는 복합적인 민족사회를 지배한 유목민 정권으로 지배층은 당시 세계문화의 수준에서 보면 미개한 존재였다.

그들은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의 건설에 성공했으나 처음부터 식민지의 종교나 관습에 대해서는 관대하여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 자신은 샤머니즘의 신봉자였지만 이미 보다 개화된 가까운 유목민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불교·도교 등을 이해했다. 이슬람교에는 얼마간의 반감을 보였으나 이것도 서아시아에 정착한 몽골족에게서는 사라졌으며, 나중에는 그들 자신이 열렬한 이슬람교도가 되기도 했다.

원나라의 경우는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쿠빌라이 이래 역대 황제 및 왕족들은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사원의 건축 또는 대법회에 많은 재물을 기증했다.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의 한 파인 샤카파의 도사인 팍 파를 국사(國師)로 하여 그로 하여금 티베트 문자가 된 파스파 문자를 만들게 하고, 이것을 음사(音寫)가 불완전한 그때까지의 위구르 문자를 대신하여 국자(國字)로 인정했다.

또한 중국의 사대부층이 신봉한 유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여, 한림원겸국사원·집현원 등에 일부 유학자들을 모아 정치의 중추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특권층에 한했으며 일반 유학자들에게는 피지배층을 벗어나는 길이 막혀 있었으므로, 후에 과거제의 실시로 사정이 호전되기 전까지 큰 불만의 요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인층(士人層)의 정치적 불만에다 무거운 세금과 끊임없는 부역 징발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 일반 민중의 고통이 커지자, 백련교(白蓮敎)·백운종(白雲宗) 등의 비밀결사가 출현해 원나라 정권에 대항하는 민족적 봉기를 기도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것이 원나라가 붕괴되는 주요원인이 되었다.

학문과 예술

원나라의 경학(經學)은 쿠빌라이 정권의 수립 이래 조복(趙復)의 계통을 따르는 북방의 주자학자들인 허형(許衡)·유인(劉因), 강남의 주자(朱者), 육구연(陸九淵)의 절충학파인 오징(吳澄) 등 중앙의 한림원겸국사원과 집현원에 초빙된 유학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정통파 문예로서의 산문이나 시는 원나라의 독자적인 것으로 후세에 자랑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중국문학). 이에 반해 금·송으로부터 계승한 민간문예로서의 잡극이나 소설 등은 입신할 수 없었던 당시의 많은 유자들에 의해 한층 발전하여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원초의 잡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한궁추 漢宮秋〉의 작가 관한경(關漢卿)과 〈서상기 西廂記〉의 작가 왕실보(王實甫) 등이 활약했는데, 이는 한인과 남인뿐만 아니라 몽골족 지배자들에게도 애호된 문예의 하나였다. 또 이 희곡·소설과 함께 원나라 문예를 장식했던 것은 문인화로서, 그 지도자는 송나라 왕실 출신인 조맹부(趙孟頫)였다. 그는 원나라에서 회화·서예의 고문이 되어 많은 후진을 육성했다.

원4대가라 불리는 왕몽(王蒙)·오진(吳鎭)·예찬(倪瓚)·황공망(黃公望) 등이 그 계통이며, 시적 환상이 넘치는 자연묘사로 중국회화사상 일대 거보를 기록했다.

위안 그림

송나라 왕실 출신인 조맹부가 그린 그림. 그는 원나라에서 회화·서예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 Louis le Grand / wikipedia | CC의 BY-SA 3.0

몽골 제국

몽골 제국(Mongol dynasty)

몽골 제국이 지배한 땅의 분포

ⓒ Enerelt / wikipedia | Public Domain

1206년 테무진이 몽골 지방의 동부를 흐르는 아무르 강의 지류인 오논 강변에서 부족연합의 군장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면서 통일제국의 성립을 보았다.

그 이전의 칭기즈 칸은 바이칼 호의 남쪽과 동남쪽의 초원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여러 부족장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함께 그의 권위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의 호전적인 성격이 주변 여러 부족들을 향한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공격목표는 중국 서북방의 변경국인 탕구트족의 서하(西夏)왕국이었으며, 이어서 고원 북부의 오이라트나 서북방의 키르기스, 기타 삼림지대의 부족들을 정복해 나갔다.

칭기즈 칸의 초상

원의 태조 칭기즈 칸의 초상. 칭기즈 칸은 유목 민족이었던 몽골을 통일하고 칸에 올라 몽골 영토를 중국 대륙에서부터 아드리아 해까지 확장시켰다.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는 없다. 그의 출생 연도와 생애의 많은 부분이 지금까지도 불확실하며, 무덤의 위치 또한 밝혀지지 않았다.

ⓒ Soerfm/wikipedia | Public Domain

또한 서요(西遼)를 토벌하고 위구르·카를루크 등을 굴복시켰으며, 1211년에는 마침내 숙적인 나라를 침입해 황허 강[黃河] 이북과 만주 땅을 점령하고 금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다. 1219년부터는 서아시아에 원정해 호라즘 왕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한편, 카프카스를 함락해 남러시아의 스텝 지대를 빼앗고 1225년 귀환했다. 아시아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몽골 제국의 판도를 현저히 확대시킨 칭기즈 칸은 다시 서하를 토벌하던 중 1227년 진중에서 병사했다. 당시 몽골 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에서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시베리아의 삼림지대에,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중앙평야에 접해 있었다.

또한 제국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窩闊合] 칸은 금나라의 잔존 세력과 대규모의 전쟁을 재개하여 금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236년에는 서방을 향한 새로운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점령을 위한 시도였는데, 볼가·부르갈인들의 제국은 1~2년만에 멸망했으며, 그 승리는 러시아 본토로 향하는 길을 연 셈이었다.

오고타이(窩闊台)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이다.

ⓒ National Palace Museum in Taipei/wikipedia | Public Domain

그무렵 러시아 중부와 북부는 도시국가와 독립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몽골군에 차례로 함락되어갔다. 발트 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이 겨울 추위로 인해 진격을 멈춤에 따라 러시아의 무역도시인 노브고로트를 비롯한 몇몇 도시가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의 일부를 토벌했으며 전위부대는 슐레지엔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독일과 폴란드의 기사 연합군은 슐레지엔의 헨리크 2세공의 지휘 아래 레그니차의 발슈타트에서 몽골군과 싸워 1242년 4월 9일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몽골군은 독일 중앙부를 침입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작전중인 부대에 합류했고, 1241년 4월 헝가리군을 격파한 몽골군은 헝가리에서의 몽골 통치의 기초를 구축했다. 헝가리 평야는 남러시아의 초원과 마찬가지로 몽골인들에게 좋은 유목지로서 매력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한편 그에 앞서 몽골군은 이란·조지아·아르메니아에서 장기간에 걸친 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찍이 칭기즈 칸의 공격을 피해 도망친 호라즘 왕국의 술탄은 이란 서북부의 한 왕국의 통치자가 되어 몽골군에 저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몽골의 진격은 1241년 12월 오고타이의 죽음으로 중지되었다. 후계자 선출을 위한 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칭기즈 칸의 자손들은 정벌 계획을 뒤로 미루고, 동유럽에서 그들이 점령한 모든 땅을 방기했다. 따라서 1241년은 유럽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만약 오고타이의 돌연한 죽음이 아니었다면 헝가리가 몽골의 영역이 되는 것을 면치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고타이의 사후, 새로운 칸의 선출은 의견일치를 얻기 어려웠다. 당분간 섭정을 하던 오고타이의 부인은 아들 구유크가 칸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나, 칭기즈 칸의 장손으로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바투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1246년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는 칸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3년 만에 죽었고, 다시 그 어머니에 의한 섭정이 계속되었다.

이처럼 칸위의 공백기가 계속된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툴루이 측의 승리로 돌아갔고,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가 제4대 칸이 되었다. 그후 몽골 제국에서 원조(元祖)에 이르기까지 칸위는 툴루이 자손에 의해 독점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족 내부에서의 대립과 항쟁은 마침내 몽골 제국의 분열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몽케는 이미 서정(西征)에 참여하여 명성을 얻었고 전장에서도 공적을 쌓았다. 그의 치세에 수도 카라코룸은 제국의 광대함을 반영하듯 장엄하고 화려했다.

몽케는 1252년 훌라구로 하여금 아바스 왕조를 멸하게 하고 이라크·이란 방면을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쿠빌라이에게 남송을 정벌하게 했다.

몽골 제국의 이와 같은 대정복이 실현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평소의 목축과 수렵으로 말타기·활쏘기에 단련된 군사들과 대규모 몰이사냥으로 길러진 조직적인 행동력, 그리고 능숙한 작전이 겸비되어 있었으며, 그에 비해 호라즘 왕국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적대국들은 통일성을 갖추지 못한 신흥국이거나 쇠퇴기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몽골군의 살육은 유명한데, 이는 몽골족이 수렵과 전쟁을 동일선상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파악된다. 확대된 제국은 유목민 외에 수렵민·농경민을 포함하여 상당히 복잡했다. 직할령인 남방 농경지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칭기즈 칸과 그의 동생의 자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리하여 일리 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골 서부에서 톈산 산맥에 걸친 몽골 고원 일대에 오고타이 한국(1224)이, 서요의 옛 땅인 중앙 아시아에 차가타이 한국(1227)이, 바이칼 호 서쪽의 삼림지대와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에 킵차크 한국(1243)이 각각 성립되었다.

또한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이란 땅에 일 한국(1258)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왕위계승분쟁과 농경문명지대를 둘러싼 이권획득 문제를 놓고 일으킨 파벌싸움은 이 거대한 제국을 분열로 몰아갔다. 특히 칸의 직할령인 화북(華北)지방의 경제와 문화를 탐내는 쿠빌라이 세력의 대두는 제국분열의 또다른 싹이었다. 제국의 통일을 강화하기 위해 전력했던 몽케 칸이 남송을 정벌하는 도중에 사망하자, 제멋대로 쿠릴타이를 개최하려는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쿠빌라이 세력은 마침내 중국 정복 왕조인 원나라의 건설을 보게 되었다.

원과 고려의 관계

고려는 1219년 몽골의 정복전쟁을 피해 고려 영토인 강동성에 들어온 금나라 유민인 거란족을 몽골군과 협공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몽골은 거란을 토벌한 뒤 고려에 대해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요구했다. 그러던 중 1225년 몽골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몽골은 이것을 트집잡아 본격적인 고려정벌을 시작했다(→ 몽골의 침략).

1231년에 있었던 제1차 침입에 이어 1257년까지 고려는 무려 7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제1차 침입 때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개경 근처까지 침입해오자 고려는 화의를 요청했고, 몽골은 서북면에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몽골이 계속하여 무리한 조공을 요구해옴에 따라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했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강력한 항몽정책의 하나로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 살게 하는 정책을 썼다. 고려의 입조·출륙을 요구하는 몽골과 우선 철수를 요구하며 대립하던 고려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1259년(고종 46) 태자 전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는 한편 강화도의 성을 헐고 굴복했다. 같은 해 6월 고종이 죽자 태자가 귀국하여 원종(元宗)이 되었다. 그는 태자 심(諶:충렬왕)을 몽골에 보냈으나 자신은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았다.

1269년 고려는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위했으나 몽골의 압력으로 복위시켰으며, 원나라의 초청으로 연경에 갔다가 귀국한 원종이 개경에 환도함으로써 고려는 사실상 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강화천도 시절, 몽골군과의 끈질긴 항쟁을 뒷받침했던 것은 고려 백성의 드높은 애국심과 민족의식이었다.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 무사들의 항거정신이 이를 증명하며,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를 수호하고자 15년에 걸쳐 완성한 팔만대장경 또한 이 시대에 이루어낸 큰 업적이다.

그러나 원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고려는 인명·재산은 물론 문화재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정치적인 자주성을 잃어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까지는 원의 부마국이 되는 수모를 겪었다. 모든 정치기구는 원의 뜻대로 개편되었고 쌍성총관부·동녕부 등의 설치로 국토의 변질을 초래했으며, 사람의 빈번한 왕래와 물물교환으로 고려인의 생활 속에 이른바 '몽골풍'의 유행을 가져왔다. 한편 일찍이 동서문화의 교류에 힘쓴 원으로부터 천문·의학·예술·화학·목화 등이 전래되어 고려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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