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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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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예술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주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작품이란 그것이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무언가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예술작품 자체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예술작품이 수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 입장에 서는 사람들에 의하면, 예술은 교훈을 주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묘사하거나 표현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의 수용자를 즐겁게 하는 일이다. 이들에겐 즐거움을 많이 주면 줄수록 성공적인 예술작품이 된다(쾌락주의). 이와 같은 입장을 수용하는 경우, 겉보기에만 그럴 듯하고 내용이 없는 작품이 최고의 예술작품이라는 식의 잘못된 논리를 유도할 수 있다. 비록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결국 보다 큰 즐거움을 주기는 하겠지만, 가치 없는 작품들이 보다 훌륭한 작품으로 오인될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서 즐거움이라는 개념을 단순한 의미에서의 '즐거움'이 아닌 '미학적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자는 제안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미학적'이라는 개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이것 또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예술작품을 단지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입장은 쉽게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비록 예술이란 수용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즐거움만이 예술작품의 목적이라는 식의 지나친 단순화는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진리 또는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어떤 이론가들은 예술작품의 '인지 기능'(cognitive function)에 초점을 맞추어, 예술은 진리나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은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상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제공한다는 식의 주장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주장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예술을 통해 얻는 지식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의미에서의 지식과 동일한 종류의 것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과연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적어도 문학의 경우, 시나 소설 등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이로 인해 진위 개념에 따라 판단이 가능한 진술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주장이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문학적 진술이 역사적 진술이나 과학적 진술과 같이 반드시 진위 개념에 따라 판단할 성질의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문학적 진술의 옳고 그름을 '사실'(事實)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는 없다. 사실과 틀림없이 맞아떨어지는 진술이 반드시 예술적으로 훌륭한 문학 작품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개연성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역사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전자는 후자와 달리 보편적 진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 바로 개연성 또는 보편성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조차 애매모호한 것이며, 개연성을 지닌 문학 작품이 과연 미학적으로 탁월한 작품인가라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작품의 탁월성을 판가름하는 유일한 준거는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며 음악과 같이 장르에 속하는 작품 모두가 진리·지식·개연성 등의 개념과는 전혀 관계없는 경우도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예술작품을 지식이나 진리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도덕적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하나의 예술작품이 미학적으로 탁월하다고 말하는 것과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비록 판단 기준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양자가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도덕을 문제삼을 때 다음과 같은 3가지 견해가 제시될 수 있다. 첫째, 도덕주의적 입장에 따르면, 예술의 1차적인 기능은 어떤 체계의 도덕이든 그 도덕에 봉사하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떤 종류든지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작품이 있다면, 이를 도덕론자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존재 가치를 좀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주의적 예술론은 주로 어떤 특정 종류의 종교적·정치적 입장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소 소박한 논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주의가 예술을 지배할 때 잃은 것은 바로 예술 자체인 경우가 흔하고, 위대한 예술은 이념과 신조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도덕주의자로는 시가 젊은이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시인 추방론을 주장했던 플라톤과 그리스도교적 박애주의에 심취했던 톨스토이가 있다. 둘째, 미학주의적 입장은 도덕주의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는 입장으로, 예술이 도덕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도덕이 예술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적 체험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체험 중 가장 강렬하고 위대한 것이며, 따라서 예술적 체험에 방해가 되는 것은 도덕 또는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예술에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술 체험의 강렬성과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이는 결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미학주의적 입장에 서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극단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아무리 예술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도 예술의 가치가 모든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비록 예술적 체험이 가장 위대한 인간적 체험이라는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체험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미학주의적 입장의 편협성이 지적될 수 있다. 셋째, 도덕주의적 입장과 미학주의적 입장은 모두 일종의 극단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극단론 사이에 서서 양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이 절충주의적 입장인데, 이들은 예술과 도덕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으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양자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으나, 최소한 문학의 경우 다음과 같이 단순화시켜 설명할 수 있다. 문학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소중한 도덕적 교훈을 깨우쳐줄 수 있으며, 문학이 그러한 도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예술적 감화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예술 전반에 걸쳐 비슷한 논리를 전개할 수도 있거니와, 날카로우며 섬세하고 유연성이 있는 도덕론은 예술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예술과 단절될 때 도덕론은 자체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 절충론자들의 주장으로 예술적 체험이 갖는 강렬성 때문에 인간의 삶에 무한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이로 인해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의 도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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