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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스

다른 표기 언어 Ephesos 동의어 Ephesus

요약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 있던 그리스 도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곳.
(영). Ephesus.

에페소스(Ephesos)

ⓒ Benh/wikipedia | CC BY-SA 3.0

시 유적지는 튀르키예 이즈미르 주의 셀주크 마을 부근에 있다(→ 그리스 고대사). 로마 시대에 코레수스 구릉과 피온 구릉의 북쪽 능선, 카이스테르(퀴취크멘데레스) 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카이스테르 강이 운반해온 실트가 쌓여 비옥한 평야를 이루었으나, 이때문에 하안이 서쪽으로 많이 밀려났다. 에페소스를 유명한 곳이 되게 했으며 고전적인 그리스 도시로 부상하게 한 아르테미스(디아나) 신전은 세워진 당시(BC 600경)에 피온(지금의 파나이르다)에서 북동쪽으로 1.6km 떨어진 해안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시대에 피온 서쪽에 있는 항구 쪽으로 난 수로를 힘들여 유지했지만 비잔틴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 이 바다 운하는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2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해안선이 서쪽으로 4.8km 밀렸다.

에페소스는 카이스테르 하곡을 따라 나 있던 아시아로 통하는 넓은 교역로의 서쪽 끝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었으며, 헤르무스(게디스) 강과 마인안데르(뷔위크멘데레스) 강을 따라 나 있는 다른 두 교역로로도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역사

에페소스의 역사는 킴메리족의 공격을 받았던 BC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다.

부근의 마그네시아와는 달리 이곳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BC 6세기초 잠시 동안 참주들의 지배를 받았다. 결혼을 통해 리디아 왕실과 동맹관계를 맺었으나 에페소스 전체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던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에게 정복당했다. 그러나 크로이소스는 아르테미세움(아르테미스 신전)을 새롭고 화려하게 재건하는 데 원주기둥들과 금 몇 개를 하사하기도 했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이당시부터 에페소스인들이 평야에서 살기 시작했으며, 아테네인 아리스타르코스가 만들었던 법률을 고쳐 썼다고 한다. 그후 얼마 안 있어 페르시아의 키루스에게 정복당했다. 이오니아인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BC 499~493) 초기에 이곳은 이오니아인들의 사르디스 공격기지로 사용되었다.

이 도시가 다시 역사에 언급된 것은 에페소스인들이 라데 전투에서 살아남은 키오스인들을 대량학살했던 BC 494년이다.

이 학살 사건은 에페소스가 반란의 중심지였던 키오스 및 밀레토스와 무역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약 50년 동안 페르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러한 친밀성은 BC 478년 그리스에서 패배하고 돌아오던 크세르크세스가 이오니아의 여러 성지들을 약탈한 반면, 이 도시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예를 올리고 안전을 위해 자기 아이들을 이곳에 맡겼던 일과 BC 460년대에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로 망명하던 길에 이곳을 통해 갔던 일 등을 통해 알 수 있다(페르시아 전쟁). 그러나 BC 454년 이후 에페소스는 아테네에 종속되었으며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까지의 유명한 에페소스인으로는 그리스 최초의 비가(悲歌) 시인이었던(BC 7세기 중엽) 칼리노스, 풍자가 히포낙스, 바실리드파의 한 사람이자 유명한 철학자였던 헤라클레이토스 등을 꼽을 수 있다.

BC 412년에 아테네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에 참여했으며,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는 스파르타 편에 들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파르타의 든든한 동맹세력으로 활동했다.

BC 403년 후 페르시아에게 위협당하자 BC 396년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왕의 본부로 이용되었다. BC 394년 에페소스는 코논이 이끄는 반(反)스파르타 해상동맹에 가입했으나, BC 387년에 이르러 다시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안탈키다스에 의해 페르시아에 넘겨졌으며, 그후에는 친(親)페르시아 참주였던 시르팍스와 그의 일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왕 알렉산드로스가 이곳을 점령하자 BC 333년에 돌팔매질을 당해 죽었다. 50년간 혼란을 거듭한 후 마케도니아의 리시마코스 장군에게 정복되고 나서 코레수스와 피온 근처에 새로이 터전을 잡게 되었다(BC 286~281). 리시마코스는 레베도스와 콜로폰의 주민들을 이주시켰으며 자기의 아내 아르시노오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고쳤으나 이 이름은 얼마가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 도시는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으며 주조화폐가 많은 곳으로 유명해졌다.

BC 189년 로마인들이 시리아의 대왕 안티오쿠스를 패배시킨 후 이 도시를 페르가몬 왕에게 넘겼다. 페르가몬아탈로스 3세는 다른 재산과 함께 이 도시를 로마인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BC 133)(로마 제국). 그때부터 이 도시는 계속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기간중 폰투스의 대왕 미트라다테스의 선동으로 소아시아 여러 도시가 반란을 일으켜 로마인들을 살해했던 BC 88년초부터 로마의 지배권에서 잠시 벗어나기도 했다.

에페소스인들은 아르테미세움으로 피신한 로마인들까지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BC 86년 다시 로마의 통치권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반란자들의 주장은 비문으로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그들이 우세한 세력에 너무 쉽게 굴복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술라는 이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물리쳤으며 무거운 벌금을 매겼다. 로마의 내란중 2번이나 패자의 편에 섰으며 페르가몬과 스미르나가 완강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 통치하에서 에페소스는 로마령 아시아 속주의 제1의 도시가 되었다.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이 시가 BC 1세기에 중요한 상업중심지였다고 기록했다. BC 3세기의 개선문과 4~14년의 송수로를 시작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인 공공건물들이 세워졌는데, 이 건물들로 인해 에페소스는 그리스 영토에서 가장 대표적인 제국시대의 도시로 꼽힌다.

그러는 동안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57년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이곳 극장에서 일어난 소란이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역 신앙계에 따르면 요한의 권고로 에페소스 부근에서 살다가 죽은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에페소스였다고 한다. 그러나 루가도 이곳에서 죽었다는 전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에페소스는 〈요한의 묵시록〉에 기록된 아시아의 7개 교회 중 하나이다.

262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당한 도시와 신전은 그후 다시는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공중 목욕탕을 하나 건축했으며, 아르카디우스가 극장에서 부두까지 이전보다 좀더 높이 도로를 재건했다. 이 도로는 아르카디우스를 따라 아르카디아네라고 불렸다. 431년 에페소스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열린 교회 공의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유죄를 선포하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공경으로 인정했다.

전설에 의하면 그후 몇 년 뒤 에페소스의 7영웅(3세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기적적으로 부활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도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6세기에 웅장한 성 요한 대성당을 지었다(비잔티움 제국). 중세 초기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항구로 이용가치가 없어지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잔티움 시대 말기에는 소도시로 전락했으며 1090년에 셀주크에 점령당했다.

14세기에 잠시 번영했으나, 다시 쇠퇴했다. 아르테미세움의 유적지는 1869년에 발굴되기 시작했다.

발굴과 유물

1863~74년 영국박물관에서 파견나와 이곳에서 발굴작업을 하던 J. T. 우드가 음악당과 극장을 발굴했다.

1869년 5월에 그는 아르테미세움의 한 모퉁이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가장 낮게 지어진 신전(BC 350년 후에 세워짐)의 유적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서 보다 먼저 세워진 신전의 기단을 발굴해냈다. 후자의 경우 크로이소스가 지어서 기증한 것으로 나중에 규모나 설계가 BC 6세기의 신전과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두 신전에서 부서져 나온 조각들은 영국박물관에 보내졌다.

1904년 영국박물관이 시도한 또다른 발굴사업을 지휘한 D.G. 호가스는 초기 신전의 기단을 조사하다가 중앙부분 아래에서 보다 오래된 세 건축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최초의 확인단계에서 이 신전은 녹색의 편암으로 된 작은 기단으로 밝혀졌는데, 여기에는 갖가지 초기 주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물건들이 봉해져서 보관되어 있었다. 이들은 BC 600년경의 것들로 생각된다.

고대 작가들이 언급했던 많은 건축가들과 이 신전의 단계별 책임자를 연결짓는 일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케르시프론과 메타게네스가 크로이소스 신전을, 그리고 키로크라테스나 디노크라테스가 4세기의 신전을 건축했을 것으로 잠정적으로나마 추측할 수 있다. 파이오니오스·데메트리오스 등의 건축가들과 유명한 음악가 티모데오스가 헌정한 찬미가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BC 400년까지 상당한 개축작업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아르테미세움은 BC 550년경 이전까지 3단계의 건축기간을 거쳤다.

크로이소스 신전(제4단계)의 특징은 큰 규모(길이가 90m, 너비가 45m 이상이었음), 원통형 기둥(콜룸나이카일라타이) 밑둥치에 새겨진 조각, 지붕의 낙수홈(시마) 주위에 있는 작지만 정교한 프리즈 등이다.

크로이소스 신전은 BC 356년에 불에 타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조금 뒤에 지은 새 신전은 옛 신전의 기둥(기둥 중 1개는 스코파스가 만든 것임)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으나, 새로운 지붕 낙수홈에는 작고 복잡한 조각 대신에 보다 전통적이고 활동적인 분위기의 장식을 했다. 켈라에는 폴리클레이토스·페이디아스·크레실라스의 아마존 상을 비롯하여 여러 위대한 작품들이 있었다.

1894년부터는 오스트리아 고고학 연구소가 계속 리시마케아 에페소스에 대해 발굴작업을 해오고 있으나, 로마 시대 시가지의 지질이 견고하고 면적이 넓어서 1960년대초까지만 해도 헬레니즘의 문화를 거의 밝혀내지 못했다.

아야솔루크(하기오스 테올로고스) 산 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재위중에 지어진 성 요한 대성당이 있다.

1922년부터 발굴된 이 교회는 본래 당당한 건물이었으나 복구를 잘못했다. 이 산 위에는 1375년에 봉헌된 아름다운 셀주크 모스크도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장방형 가로에 늘어서 있는 공공건물로는 트라야누스 시대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약 2만 5,000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 세베루스 시대에 지은 것으로 스토아스(지붕을 올린 산책로)로 둘러싸인 아고라(시장), 트라야누스 시대에 세워졌으며 정면으로 유명한 켈수스 도서관, 수많은 목욕탕과 단련장 등이 있다.

이러한 건물들은 모두 피온 서쪽에 있다.

그 북쪽에는 경기장이 있으며 이것의 북쪽에는 비교적 작으면서도 아주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푸블리우스베디우스 안토니우스 단련장이 있다. 이 단련장에는 안토니우스 피우스를 숭배하기 위한 유명한 예배당이 있다. 피온 남쪽에는 베디우스의 또다른 걸작으로서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붕이 있는 반원형의 주악당과 여러 분수와 송수로들이 있었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코레수스에서 시작되어 이 계곡지대를 가로질렀던 가이우스 섹스틸리우스폴리오 송수로였다. 코레수스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한 도시 성벽은 리시마쿠스 시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비잔티움 시대 초기의 건축물로는 파나지르다 위의 성벽을 비롯하여 그 동쪽으로는 7영웅 교회의 유적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공의회가 열렸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있다. 이 대성당은 여러 번 개축되었으며, 비잔티움 시대에 에페소스인들은 대체로 큰 단련장과 경기장 사이에 있는 이 대성당 주변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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