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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2(숙종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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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1(정조 15)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켜 다루는 것을 반대하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서술했으며, 봉건사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1746년 이웃 고을인 안산에 살던 이익을 만나 경세치용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748년 이익이 동몽교관으로 추천했으며, 이듬해 만녕전참봉으로 첫 벼슬에 올랐다. 1751년 의영고참사, 이어 정릉직장·귀후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45세 되던 해 〈동사강목 〉을 쓰기 시작해 1759년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20여 년 간 이익·윤동규 등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수정·보완 작업을 계속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켜 다루는 것을 반대하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서술했으며, 봉건사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광주.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할아버지는 울산부사 서우(瑞雨)이고, 아버지는 극(極)이며, 어머니는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로 아버지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한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벼슬이 주로 외직이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제천·울산·영광·무주·한양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736년(영조 12)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했다. 그뒤 이곳에 거주하면서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분석하고 〈치통도 治統圖〉·〈도통도 道統圖〉 등을 저술하는 등 주자학 연구에 몰두했다. 1746년 이웃 고을인 안산에 살던 이익(李瀷)을 만나 경세치용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748년 이익이 동몽교관으로 추천했으며, 이듬해 만녕전참봉으로 첫 벼슬에 올랐다. 1751년 의영고참사, 이어 정릉직장·귀후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45세 되던 해 〈동사강목 東史綱目〉을 쓰기 시작해 1759년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20여 년 간 이익·윤동규(尹東奎) 등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수정·보완 작업을 계속했다. 1772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는 익위사익찬이 되었고, 4년 뒤 정조가 즉위하자 목천현감을 지냈다. 그뒤 돈녕부주부·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1790년(정조 14)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으나, 그가 맡은 직위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령에 따른 예우로 받은 산직(散職)이었다.
사상
안정복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사회는 사회경제적으로는 지주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신분제가 변질되는 한편, 주자학적·중화주의적 세계관이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의 학문은 주자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스승인 이익을 비롯하여 그의 문인들과의 교류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황의 주자 해석에 따라 이기이원론의 설을 계승하고, 유형원·이익의 수기치인(修己治人)·경세치용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하학지남 下學指南〉의 편찬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당시 학자들의 '먼 것에 힘쓰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공자가 말한 하학상달(下學上達)의 방법론을 취하여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사물로부터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실학자들이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던 서학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특히 천주교에 대해서는 〈천학고 天學考〉·〈천학문답 天學問答〉을 통해 불교와 비슷한 이단으로서 배척했다. 이는 실학자이면서도 주자의 정통론에 기울어 있던 그의 사상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전(井田)을 연구하면서 민산의 균등화를 추구하는 토지개혁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환곡제도를 없애고 관권이 배제된 가운데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이를 자치적으로 운영하자는 적극적인 사창론(社倉論)을 제기했다. 그가 현실적인 개혁론으로서 제기했던 토지제도 개혁론은 기존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인정한 위에서 토지소유 규모의 상한선을 정하고 부농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농업문제의 해결 방향을 토지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에서보다는 증산(增産)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사창론도 기존의 환곡제도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인 개선을 주장했다. 결국 안정복이 가졌던 현실적인 개혁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부분적인 제도개혁과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역사인식
양란 이후의 조선 봉건사회의 동요는 역사인식의 분야에서도 종래의 전통적인 역사인식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인식경향을 낳았다. 특히 이익은 화이관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자국사를 서술할 것을 주장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동사문답 東史問答〉·〈열조통기 列朝通紀〉 등의 역사서를 통해 이익의 사론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켜 세가로 서술하는 종래의 편찬태도를 비판하고 본기로서 독자적으로 다룰 것을 주장했다. 한편 단군조선을 우리나라 정통왕조의 시작으로 설정하여 국사의 상한을 중국과 대등하게 끌어올렸으며, 종래 역사가들이 중국문헌이라면 별다른 검토 없이 믿어온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한 가능한 모든 사료를 수집하여 이를 철저히 고증하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한편으로는 주자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하여 전통적인 역사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점은 그의 대표적인 역사서 〈동사강목〉이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801년(순조 1) 좌참찬에 추증되고, 1871년(고종 8) 문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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