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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시대에 주자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배척하여 일컫는 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인(西人) 노론 계열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사상계는 주자 성리학 일변도로 굳어졌다. 이에 따라 양명학(陽明學)·서학(西學:천주교) 등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사학(邪學)으로 규정, 그 수용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성리학계 내부에서도 주자와는 다른 경전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의 학문경향도 사학이라 배척받았다. 후에 동학도 사학으로 탄압받았다.
조선 중기에 양명학이 들어오자 이황(李滉)은 〈전습록변 傳習錄辨〉을 지어 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양지설·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등의 학설을 비판하여 성리학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뒤를 이어 그의 제자들이 강력하게 양명학을 비판하자 그것이 당시의 풍조가 되어 양명학은 세력을 얻지 못했고 일부 가문에서 받아들여 미미하게 명맥을 이어나갔다. 또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서양의 학문과 종교가 일부 지식인과 서민들에게 수용되자 주로 종교적 측면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이익(李瀷)의 제자였던 안정복(安鼎福)은 〈천학고 天學考〉·〈천학문답 天學問答〉 등에서, 신후담(愼後聃)은 〈서학변 西學辨〉을 지어 천주교를 비판했다. 이외에도 많은 유학자들이 천주교를 비판했다.
순조 때는 중앙정계 내부의 권력다툼과도 관련,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동학 역시 유학자들에 의해 사교·사학으로 규정되어 탄압받고 교주인 최제우(崔濟愚)도 희생당했다. 이와 같이 주자 성리학의 신봉자들이 다른 학문·사상들을 배척했던 것은 각각의 사상이 서로 다른 정치·사회관을 가지고 다른 세계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사상계는 이처럼 주자 성리학 이외의 학문·사상에 대한 지나친 비판·배척으로 성리학 일변도의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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