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개요
19세기초 유럽이나 미국의 교육받은 시민계층은 비록 비밀신문의 형태이지만, 객관적인 뉴스 보도와 정치논평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새로운 전문직업인이 된 뛰어난 작가나 편집인에 의해 정론지의 기본형태가 갖추어졌고, 선정적이기는 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중지가 탄생했다. 19세기 내내 신문의 형식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며, 19세기말 미국과 영국에서는 근대적 형태의 신문사와 제작양식이 확립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신문은 문학의 영역에서 '사업'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
기술적 진보
인쇄술의 혁명과 교통·통신의 발달로 신문은 주당 수천 부에서 수만 부로 크게 성장했다.
신문에 대한 수요가 늘자 필요는 곧 신문인쇄술의 발명을 낳게 되었다. 1814년 런던의 〈타임스〉는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이중인쇄'(double-press) 방식을 도입하여, 시간당 5,000부를 인쇄하게 되었다. 발매능력이 증대되면서 〈타임스〉의 발행부수는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5,000부에서 5만 부로 급증했다. 자동 인테르 활자, 저가(低價)의 얇은 두루마리 신문용지를 생산하는 장망초지기(長網抄紙機), 곡면인쇄판, 자동잉크 주입기, 원통형 윤전인쇄기(1865)가 잇달아 발명되면서 손으로 하던 목판인쇄방식은 구식이 되었다.
그러나 보다 본격적인 인쇄기술의 혁명은 오트마 메르겐탈러가 라이노타이프(자동식자주조기)를 발명하여 자동으로 식자를 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는 각 행과 열을 일일이 손으로 짜맞추어 정렬한 후 인쇄를 하고, 다음에 사용하기 위해 활자를 알파벳 순서대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했다. 라이노타이프는 이 작업을 자동으로 전환시켜, 수동작업의 긴 과정에 드는 노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했다. 〈뉴욕 트리뷴 New York Tribune〉은 1886년에 최초로 이 기계를 도입했고, 영국에서는 1889년 〈뉴캐슬 크로니클 Newcastle Chronicle〉이 최초로 사용했다.
1895년에는 당시 런던 언론계의 중심지였던 플리트가(街)의 모든 출판업체에서 이 새로운 기계를 사용했다. 라이노타이프의 오퍼레이터는 손으로 작업을 하는 활자공보다 6배나 빨리 판을 짤 수 있었다. 1884년에는 인쇄에 전력을 사용하게 되고, 인쇄뿐 아니라 모든 크기의 신문을 절단하고 접고 묶을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되어 인쇄산업은 크게 발전했다.
통신의 발달로 전화나 해저 케이블을 사용하여 도시나 국가간의 뉴스를 신속하게 취합할 수 있게 된 것도 신문산업을 크게 발전시킨 요인이었다(통신 시스템). 특파원을 파견시켜 주요 뉴스원으로 삼던 1815년에는 브뤼셀 부근에서 일어난 사건을 런던에 전달하는 데 보통 4일이 걸렸다. 철도와 전보 같은 다른 통신수단의 개선은 취재기자의 시간·공간 개념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철도망의 발달로 기자들이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신문의 배달도 원활하게 되자 신문은 대중적인 일상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곳에서는 수도에 본부를 둔 거대 신문들이 교통의 발달에 힘입어 광범위한 지역에 신속한 배포·배달이 가능해지면서 전국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근대적 저널리즘의 성립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문기자라는 직업이 훨씬 더 전문적인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초창기의 언론인은 혼자서 기사를 작성·편집·인쇄했으나 신문이 성장함에 따라, 기사 취재를 주업무로 하는 전업기자가 대거 채용되었다. 최초의 종군기자 가운데 1명이었던 〈런던 타임스〉의 윌리엄 러셀은 크림 전쟁(1853~56)에 파견되었는데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크림 반도에서 간호를 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바로 그의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65)에는 150명이 넘는 종군기자가 파견되었다. 종군기자들은 전쟁터에서 열띤 취재경쟁을 벌여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했으며, 평화시에는 현장기자들이 과감한 특종기사로 영웅이나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때에 따라 여러 달 동안 기자들을 파견시키는 데 드는 비용은 작은 신문사로서는 감당하기에 벅찼다.
이의 해결방법으로 생긴 것이 바로 통신사였다. 프랑스의 사업가인 샤를 아바스는 1835년 주요 유럽 신문의 기사를 번역하여 프랑스 언론에 공급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후 이 회사는 런던·파리·브뤼셀 등지를 연결하는 전서구(傳書鳩) 업무를 개시하여, 뉴스를 판매하고 광고를 다루는 국제적인 회사로 성장했다. 아바스의 고용인이었던 로이터는 1851년, 해외의 상업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를 런던에 설립했다(로이터). 이 회사는 전신 및 해저 전신망을 이용하여 언론사에 외신을 공급하는 통신사로 급성장했고, 대영제국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 회사의 취재 영역 또한 확대되었다.
한편 미국의 통신사는 유럽과 매우 다른 방법으로 설립되었다. 뉴욕의 6개 신문사가 평소의 경쟁관계를 유보하고, 멕시코 전쟁(1846~48)의 취재경비를 절감할 목적으로 공동취재를 위한 뉴욕연합통신사(New York Associated Press)를 만들었다. 통신사들은 세계 곳곳의 '현장 뉴스'를 있는 그대로 공급하여 객관적 뉴스 보도의 기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미국에는 외신을 주로 취급하는 통신사 이외에도 특집기사를 제공하는 통신사가 있어서 의학 칼럼이나 서평에서부터 별자리점, 낱말풀이 퀴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사를 공급하고 있다.
신문산업의 성장
신문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19세기말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신문을 구독하게 되었다.
철도의 발달로 인해 신문을 신속히 수송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골 오지에도 신문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증기선과 전신을 이용하게 되면서 국가간의 거리도 좁혀졌다. 대중적 내용의 신문이 대량 생산되자 새롭게 부상한 산업노동자도 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엽에는 몇몇 인기있는 신문의 경우, 발행부수가 100만 부에 육박했으며, 신문업과 광고업은 거대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미국의 신문산업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온 이주민이 많았던 미국에는 독립적인 대중 언론을 지향하는 운동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뉴욕 시에 밀집해 있던 집단이민 인구는 근대 언론의 성격을 형성하려던 시기의 신문에게는 좋은 시장이었다. 1835년 완전한 정치적 자주성을 제창한 최초의 미국 신문 〈뉴욕 헤럴드 New York Herald〉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적절하고, 공정하고, 독자적이며, 과감·온건한 논평을 통해 사건을 기록하도록 노력하며 정치적으로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뉴욕 헤럴드〉는 뉴스와 논평을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조화시켜 큰 인기를 얻음으로써 창간한 지 얼마 안 되어 발행부수가 3만 부에 이르게 되었다. 1841년에는 〈뉴욕 트리뷴〉이 창간되었다. 〈뉴욕 헤럴드〉는 오락적 요소가 강했으나, 이 신문은 사회운동적인 성격이 강해서 "젊은이들이여, 서부로 가라!"고 주장했으며, 노예제도에 대한 강한 반대를 표명하여 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남부의 신문은 남북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시민들의 일체감을 다시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의 신문은 사주나 편집자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에, 사주가 바뀌면 신문의 성격도 바뀌었다. 1833년에 창간된 〈뉴욕 선 New York Sun〉은 '페니페이퍼'라는 대중 저가지로 출발했는데, 창립자인 벤저민 데이는 흥미중심의 '휴먼 스토리'라는 영역을 개척하여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1868년에 찰스 다나가 이 신문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기사의 성격이나 문체 등이 탁월하게 개발되어 주가를 높였다. 〈뉴욕 타임스〉는 오랫동안 〈뉴욕 트리뷴〉이나 〈뉴욕 헤럴드〉의 명성에 가려 있었는데, 민주당 계파 보스의 뇌물제공사건을 폭로하여 언론의 독립성 확보에 기여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편집인이 거절한 뇌물의 액수는 500만 달러라고 보도되었는데, 이 액수만 보아도 언론의 힘이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를 알 수 있다.
영국의 신문산업
19세기 전반 영국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독립 신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런던의 〈타임스〉는 어렵게 획득한 권리를 유지하려면 객관성을 견지하고 정부를 올바르게 비판해야 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1819년 정부가 맨체스터의 정치적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피터루 대학살을 공정하게 보도했고, 의회개혁을 주장했으며, 크림 전쟁의 참상을 폭로하는 등 정론지로서 영국 언론계의 모범이 되었다. 〈타임스〉는 또한 기술적인 면에서 새로운 인쇄기계를 선구적으로 도입하여 신속하고 신뢰성 있는 뉴스를 제공했다.
1836년 우편세가 1페니로 줄고 1855년 완전히 폐지되어 기존 신문의 발행부수가 증가하는 한편 새로운 신문이 활발하게 창간되었다. 새로 창간된 신문의 대다수는 싸구려 폭로지로서 창간되자마자 곧 폐간되었다. 이들 신간 신문들 가운데 예외적인 것으로 〈뉴스 오브 더 월드 News of the World〉(1843)라는 화제를 일으킨 일요신문이 있는데, 1세기 이상 일요신문계의 선두를 지켰다. 당시에 등장한 특징적인 페니 페이퍼로 〈데일리 텔레그래프〉(1855)가 있다.
이 신문은 진지한 뉴스와 수준높은 논평으로 〈타임스〉와 경쟁했는데, 가격은 〈타임스〉의 1/4에 불과했다.
유럽의 신문산업
19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의 군주들은 대중폭동을 두려워하여 언론을 경계했다.
대중신문의 첫 징조는 에밀 드 지라르댕이 설립한 〈프레스 La Presse〉(1836)였다. 최초의 신문재벌 가운데 한 사람인 지라르댕은 특집기사와 연속기획물을 새로 도입해 발행부수를 2만 부로 증가시켜 신문의 단가를 낮추었다. 비슷한 시기에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1829)와 자유주의 일간지 〈콩스티튀시오넬 Le Constitutionnel〉(1835) 등이 창간되었다.
프랑스의 야심만만한 작가들은 이런 신문에 글을 기고하여 문학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인기를 누리기도 했는데, 특히 1850년 신문의 기사작성자 명기를 의무화한 탕기법(Tanguy Law) 제정에 따라 이런 경향은 더욱더 짙어졌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신문은 이러한 전통이 남아 있어 문학적 성격이 강한 반면 정치·경제 관계 뉴스가 다소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다.
독일은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검열이 존속하여 언론이 탄압을 받고 있었으나, 독립 일간신문인 〈알게마이네 차이퉁 Allgemeine Zeitung〉(1798)이 창간되어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스웨덴에는 1766년부터 언론자유가 확립되었으나, 1830년에야 최초의 정론지 〈아프톤블라테트 Aftonbladet〉가 창간되었다.
19세기 중반 각 나라에서 검열제도가 폐지되면서 유력지들이 창간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지금도 발행되고 있다. 〈피가로 Le Figaro〉(1854, 파리)·〈프랑크푸르터 차이퉁 Frankfurter Zeitung〉(1856)·〈푀플 Le Peuple〉(브뤼셀, 창립연도 미상) 등이 당시에 창간된 신문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는 검열이 존속하여 진정한 언론자유가 주어지지 못했으며, 차르 체제하의 러시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드르 2세가 잠시 검열을 완화하자(1855~65) 많은 신문이 창간되었으나, 언론자유가 급진적 사상을 전파시킨다는 이유로 다시 탄압을 가했다. 이후 러시아의 신문은 언론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보다는 문학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신문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