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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66년 라이노타이프 기계가 도입되면서 이전에는 영국과 미국에만 국한되었던 발행부수의 증가가 여타 산업국가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선정주의 신문이 등장하여 판매기록이 잇달아 경신되었으며, 급기야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 탄생했다. 영국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타임스〉나 〈데일리 텔레그래프〉 같은 신문의 발행부수가 10만 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신문은 이전의 문학성을 탈피하고 대중시장산업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90년대 '신문왕'의 등장으로 입증되는데, 신문왕이란 광고수입을 중시하고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독자를 확보하는 여러 개의 신문을 소유한 사업가를 일컫는다.
미국
1880~1900년의 20년 동안 미국의 신문수는 850종에서 2,000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지역사회에서 발간되는 소규모의 주간신문 이외에도 주요도시는 모두 일간신문을 갖게 되었으며, 대도시에서는 여러 신문이 발행부수 경쟁을 벌였다. 뉴욕의 신문업계는 헝가리 이민계인 조지프 퓰리처가 등장하면서부터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미국 언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히는 퓰리처는 적자에 허덕이던 〈뉴욕 월드 New York World〉를 인수하여 3년 안에 1만 5,000부에서 25만 부로 발행부수를 증가시켰다.
이것은 당시 세계 최고의 발행부수였다. 흥미거리와 사회성있는 기사를 연재하면서 퓰리처는 이미 확립된 선정주의와 이상주의 양식을 혼합했으며, 편집권의 독립성을 높여 이전의 〈뉴욕 트리뷴〉이나 〈뉴욕 헤럴드〉가 도입한 '재미있는 신문'으로서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퓰리처가 정치적·사회적 부정을 폭로하여 개혁을 지향했던 것에 비해, 또다른 신문재벌인 윌리엄 허스트는 특종기사를 창조해내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1895년 뉴욕 신문계에 뛰어든 허스트는 사실의 진실성 여부를 무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발행부수를 증가시킬 수 있는 사건을 선호했다(뉴욕저널, 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 허스트가 발행하던 〈모닝 저널 Morning Journal〉이 퓰리처의 〈뉴욕 월드〉와 발행부수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모닝 저널〉은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정치적 긴장을 왜곡 보도하여 국민을 흥분 상태로 몰고갔으며, 결국 쿠바와의 전쟁이 벌어지도록 했다.
허스트는 이목을 끄는 헤드라인과 흥미위주의 기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전술을 도입했다. 특히 옐로 저널에서 중요시하는 시각적 요소, 즉 만화·그래픽·일러스트레이트 등을 도입했으며, 일요 특집판을 새로 창안해 흥미본위의 휴먼 스토리나 만화를 게재했다.
이런 옐로 저널의 공세 속에서 일부 신문, 특히 합리적 태도를 견지하는 정론지들은 발행부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중 하나가 〈뉴욕 타임스〉인데, 이 신문은 1896년 실업계의 거물인 아돌프 옥스가 인수한 이후 유력지로서의 선두적인 위치를 다시 찾았다. "뉴스다운 뉴스로 아침 식탁을 더럽히지 않는 신문"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정론지로서의 보도 의지를 천명했다. 1900년경 미국에는 6명의 유명한 신문재벌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허스트는 한때 42개의 신문사를 거느린 거대한 신문재벌이었다. 에드워드 스크립스는 재정이 부실한 소규모 신문을 구입하여, 발행부수가 증가하는 만큼 이윤을 나눈다는 조건으로 젊고 유능한 편집인을 기용해 신문을 재건해나가는 방식으로 거대한 신문 체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스크립스는 그의 신문이 진정으로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바랐으며, 신문업으로 축재했지만, 이윤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문 체인의 소유가 유리한 조건으로 신문용지를 구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연합 기사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등 많은 상업적 이점을 갖는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면서 경쟁지나 다른 나라의 신문 소유주들도 스크립스의 방식을 채택했다. 또한 신문업이 경제적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게 되자 상업적 동기에서 외부 투자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유형의 소유주로는 1916~24년에 많은 신문사를 구입하고 합병한 프랭크 먼시가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편집장인 윌리엄 화이트는 먼시나 그 부류의 사람들을 "정육업자의 재능, 환전상의 도덕관념, 청부업자의 매너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신문사가 거대 출판그룹에 상업적으로 합병되는 현상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도 계속되어 발행부수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1919년 처음 창간된 〈뉴욕 데일리 뉴스 New York Daily News〉는 조지프 패터슨이 소유하게 되면서 섹스나 선정적인 기사를 주로 다루었으며, 1924년에 창간된 허스트의 〈데일리 미러 Daily Mirror〉는 맥파든의 〈데일리 그래픽 Daily Graphic〉과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데일리 그래픽〉은 1932년 폐간되었으며, 〈뉴욕 데일리 뉴스〉는 1963년 〈데일리 미러〉와 합병해, 오스트레일리아의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국제적인 언론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합병과 함께 신문 제호도 합쳐지거나 완전히 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광범위한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들은 거대 광고주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고, 이는 다시 소규모 신문사를 도태시키면서 소수의 거대 신문사를 등장시켰다.
새로운 소유양식으로 생겨난 결과 가운데 하나는 편집자이자 소유주로서 전문적인 편집자의 역할과 경영자의 역할이 통합되었던 옛 신문재벌이 점차 사라진 것이다. 편집자의 개인적 영향력은 약해지고, 칼럼니스트들이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0년대의 영향력있는 정치 칼럼니스트로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뉴스 United States News〉의 데이비스 로렌스, 〈볼티모어 선 Baltimore Sun〉의 프랭크 켄트, 〈뉴욕 월드〉의 월터 리프만 등이 있다. 이들은 주요 신문 체인에 칼럼이나 기사를 기고했으며, 미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국
영국에서는 선정적인 대중지가 비교적 뒤늦게 등장했다.
인지세가 폐지된 1855년부터 신문업계는 새로운 도약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에 앞서 이미 1853년에 광고세가 폐지되어 좀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확산되어감에 따라 모든 종류의 신문에 대한 수요가 전국적으로 증가했다. 세금이 폐지되자 신문가격이 인하되었으며, 그것만으로도 당분간 판매부수가 크게 증가할 수 있었다. 1861년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판매는 하루 평균 13만 부로 〈타임스〉의 2배에 달했다. 신문에 대한 세금의 폐지로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연간 1만 2,000파운드의 추가수입을 얻게 되었다.
1877년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발행부수는 24만 부에 달해 당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이 신문은 지면의 절반 이상을 의회 의사록으로 할당한 정통 일간지로서 〈타임스〉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부상하는 중산계층을 주된 구독자로 하고 있었으며, 당시 최고 작가들의 작품을 실었다. 언론의 독립성은 잘 유지되고 있었으나, 글래드스턴과 디즈데일리 사이에 정당간의 정치적 긴장이 첨예화되면서 각 신문도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고, 아울러 판매부수도 자극을 받아 증가했다.
19세기 후반이 되자 영국의 신문도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게 되었다.
1888년 반 페니짜리 석간신문 〈스타 Star〉가 창간되었다. 이전의 어떤 신문보다도 폭넓은 구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 신문은 흥미거리의 휴먼 스토리를 강조하면서도 간결하고 생동감있는 문체로 주목을 끌었다. 석간신문 〈펠 멜 가제트 Pall Mall Gazette〉 또한 미국식 전술을 사용했는데, 〈현대의 바빌론에 바친 처녀 제물〉이라는 연속기획물에서 기자가 직접 뚜쟁이 노릇을 하며 런던의 미성년 매춘실태를 폭로했다.
그결과 담당기자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초기 언론의 취재조사활동의 실례인 이 사건으로 의회는 1885년 미성년자보호를 명시한 형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사건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언론의 사회 계도적 역할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영국 최초의 신문재벌이라 할 수 있는 앨프레드 함즈워스(나중에 노스클리프 경이 됨)가 등장하면서 영국의 신문도 대중화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데일리 메일〉·〈데일리 미러〉·〈타임스〉·〈옵서버〉 등을 소유했다.
23세에 첫 잡지를 발간한 그는 짧은 문장, 짧은 단락, 짧은 기사라는 새로운 편집기법을 도입하여 1870년 교육법에 따라 의무교육을 받게 된 영국의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1894년 〈이브닝 뉴스 Evening News〉를 구입하여, 독특한 편집양식에 미국의 옐로 저널 기법을 결합하여 1년 만에 발행부수를 4배로 증가시켰다. 1896년에 구입한 〈데일리 메일〉은 3년 만에 하루 발행부수가 50만 부에 이르러 당시 최고기록의 2배를 상회하는 신기록을 수립했으며, 보어 전쟁(1899~1902) 기간에는 100만 부 이상을 팔았다.
'1페니 신문을 반 페니에'라는 구호를 내건 〈데일리 메일〉은 광고에서 소요경비의 대부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독자에게 반 페니에 공급할 수 있었다. 이 신문은 신문 판매대금보다 광고수입을 주요재원으로 삼은 최초의 영국 신문이었으며, 공인회계사에게 독자적으로 발행부수를 공인받아 공표한 최초의 신문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광고주로 하여금 충분한 수의 독자에게 광고가 전달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 광고료가 올라도 많은 광고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데일리 메일〉은 '바쁜 사람들의 일간지'를 표방하여 '쉽고 분명하게 표현한다'는 기사작성원칙을 세웠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편집인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언론인을 두어 사시(社是)에 맞게 기사를 다시 쓰고 표제를 달았으며, 필요하다면 원래의 기사에 약간의 '양념'을 더했다.
함즈워스는 또한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도입하여 20세기 대중지에 혁신을 가져왔다.
타블로이드판이란 기존의 신문크기를 절반으로 줄인 것으로, 독자들이 다루기 편할 뿐 아니라, 새로운 편집에 의한 간략한 기사를 싣기에 알맞는 것이었다. 타블로이드판 신문으로 첫번째 성공을 거둔 것은 함즈워스의 〈데일리 미러〉(1903)였다. 원래 '여성'전용 신문으로 시작한 〈데일리 미러〉는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타블로이드판으로 개정되면서 신문값을 반 페니로 내리고 사진을 많이 게재하여 새로운 형태의 사진신문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1914년 발행부수가 100만 부에 달했다.
미국의 신문재벌들처럼 함즈워스도 자기 신문의 제작에 끊임없이 간여하기를 좋아하여 〈데일리 메일〉이나 〈데일리 미러〉, 〈타임스〉(1908년부터 소유)나 〈옵서버〉(1905년부터 소유)의 편집진에게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언론에 게재할 전쟁정보를 통제하기 위해 정부차원의 언론국이 설치되었고, 군사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검열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는데도 함즈워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 군수품 부족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도전이 정부로부터 언론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었지만, 소유주의 영향력이 언론자유에 중요한 걸림돌이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유무역, 영연방 내의 무역문제, 영국의 유럽 공도체(EC) 가입문제 등이 대두되자 여러 사주들이 자신의 견해를 소유 신문사를 통해 공공연히 주장했다.
미국의 '발행부수 전쟁'이 1930년대에는 영국으로 번져 여러 신문사들은 새로운 독자를 얻기 위해 사은품을 제공하거나 상금을 주기도 했으며 함즈워스 같은 이는 일찍이 1890년대에 그날의 영국 은행 금(金)시세를 맞추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었다. 신문협회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도 각 신문사는 치열한 경쟁을 벌여나가, 1930년대말에는 사회의 전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지체제가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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