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15~16세기에 번성한 서아프리카의 무역 제국.
empire Songhay라고도 씀.
지금의 중부 말리를 흐르고 있는 나이저 강의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했으며 뒤에는 서쪽으로 대서양 연안과 동쪽으로 니제르와 나이지리아까지 영토를 넓혔다.
송가이인들은 800년경에 가오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슬람교로 개종한 송가이인 '디아'왕 코소이가 통치한 11세기가 되어서야 이곳을 수도로 여기게 되었다. 가오는 그뒤 300여 년 간 큰 번영을 누리며 계속 팽창했고 1325~75년 사이에는 말리의 지배자들이 세운 제국에 흡수되었다.
1335년 무렵 디아의 왕가는 '순니' 또는 '쉬'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그들 가운데 하나인 술라이만 마르는 가오의 독립을 다시 얻어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약 1세기 동안 가오는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1464년 알리 베르(1492 죽음)로도 알려진 손니 알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안정을 찾았다. 알리는 송가이 제2도시인 팀북투에 대한 모시족의 공격을 물리치고 반디아가라 언덕에서는 도곤족과 풀라니족을 격퇴하여 1468년 무렵에는 제국을 위협할 만한 요인들을 없애버렸다.
또한 그는 1433년부터 팀북투를 차지하고 있던 투아레족을 팀북투에서 몰아내고 1473년에는 7년간의 포위 끝에 젠네를 점령했으며, 1476년 무렵에는 서쪽의 나이저 강 중부 호수 지역을 지배했다. 1480년에는 북서부의 왈라타를 공격한 모시족을 다시 물리쳤으며, 나이저 강 계곡 남부 거주민들의 공격도 막았다. 손니 알리의 대내 정책은 이슬람교도인 도시 거주민들과 목축민인 이교도 백성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서로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송가이 제국은 이슬람 시민들의 부와 학식에 의존해 있었다.
손니 알리의 아들인 손니 바루(1493 즉위)는 전적으로 목축민 백성들의 편을 들었고, 결국 반란을 일으킨 무하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 투레(무하마드 1세 아스키아로도 알려짐, 1493~1528 재위)에게 쫓겨났다. 무하마드는 서부 수단의 중부를 제국에 복속시켰다.
또한 야텐가의 모시족과도 싸웠으며 1505년에는 현재 나이지리아의 북서부를 이루고 있는 보르구에 침입했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1512년 그는 디아라족과 세네갈의 푸타-토로 왕국, 그리고 동쪽으로는 하우사족 국가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북쪽으로는 대상들의 주요시장을 지배할 목적으로 군대를 풀어 아이르의 아가데스와 그 주위에 식민지를 세우게 했다. 그러나 그는 1528년 맏아들인 무사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그뒤 계속해서 왕조 분란이 벌어지는 동안 (아스키아 무사 1528~31, 벵간 코레이 혹은 아스키아 무하마드 2세 1531~37, 아스키아 이스마일 1537~39, 아스키아 이시하크 1세 1539~49 재위) 도시의 이슬람교도들은 중개인으로서 기니 중부에 있는 아칸 국가들과 꾸준히 황금 무역을 벌여 이윤을 많이 남겼다.
아스키아 다우드의 치세(1549~82)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나, 그뒤에는 소금산지 타가자를 노린 모로코의 술탄 아마드 알 만수르의 공격을 받았다. 무하마드 바니(1586~88 재위) 시대에 들어와 상황은 더 나빠졌고, 이시하크 2세(1588~91 재위) 때는 소형 화기로 무장한 모로코군이 송가이 제국으로 침입해 들어와 처음에는 톤디비, 그 다음에는 팀북투와 가오에서 바니의 군대를 패퇴시키면서 송가이 제국의 재난은 절정에 달했다.
송가이 목축민들이 그 보복으로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제국을 구하지는 못했고, 결국 송가이 제국의 경제·행정 중심지들은 모로코의 수중에 그대로 남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