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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
사망 |
1538. 3. 2, |
국적 | 송가이 |
요약
서아프리카의 정치가·군사지도자.
Moḥammed I Askia라고도 함. Askia Muḥammad, Muḥammad Ture라고도 씀. 본명은 Muḥammad ibn Abī Bakr Ture.
목차
접기개요
1493년 송가이 제국의 왕위를 빼앗았으며 여러 차례의 정복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나 1528년 아들 아스키아 무사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권력장악
그의 출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오랫 동안 실라(세네갈의 투쿨로르) 혹은 사나콜레(손닌케)의 투레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팀북투의 연대기작가들에 의해 아랍어로 모하메드 토우리 또는 토로(세네갈의 푸타토로)의 모하메드로 이름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투굴로르 출신으로 가오에 정착한 세네갈인 가문에서 태어난 듯하며, 그가 속한 혈족의 명칭은 칸 또는 디알로라고 여겨진다. 아직도 상당부분이 남아 있는 구전(口傳) 기록은 마마르(무하마드의 속칭)가 신령(jinni)의 힘으로 송가이 제국의 왕인 손니 알리의 조카, 즉 손니 알리의 누이 카세이의 아들이 되었다고 전한다.
1464~92년 송가이 제국을 결속시키며 통치했던 손니 알리 베르가 사망하자 무하마드는 1493년 2월 손니 알리의 아들 손니 바루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 했다. 손니 바루는 그해 1월 21일 환호를 받으며 권좌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1493년 4월 12일 안파오 전투에서 무하마드의 군대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은밀하고 신비스런 이슬람적 요소가 가미된 우상숭배를 하던 손니 왕조의 송가이 제국은 〈코란〉을 법전으로 하고 아랍어를 공식 문자로 사용하는 이슬람 국가에 굴복하고 말았다.
적을 정벌한 뒤 무하마드는 자신을 두고 '아시티아'('그는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라고 말한 손니 왕조의 딸들을 비웃는 뜻에서 아스키아(아스키야) 칭호를 사용했다(아스키아 왕조). 그뒤 아스키아라는 이름은 그가 세운 왕조와 그 지도자들의 명칭이 되었다.
손니 알리가 전사(戰士)였던 반면 무하마드는 특히 정치가로서의 소질이 뛰어났다.
그는 선조들이 정복한 지역에 효율적인 행정제도를 확립해 송가이 제국을 여러 주로 나누고 각각을 자신이 임명한 지방장관이 다스리도록 했으며, 상비군과 카누 함대를 편성, 각기 장군과 제독의 지휘를 받게 했다. 이외에도 재정·사법·내무·의전·농업·산림수산·'백인종족'(무어인과 투아레그인들이 당시 송가이 제국의 봉신으로 있었으며 무하마드는 그들에게 낙타기병부대를 제공하고 있었음) 부문의 담당관리를 임명했다. 관리들은 모두 귀족 가운데서 우선적으로 뽑았으며 이들은 무하마드 자신의 형제와 자녀 및 사촌들이었다.
송가이 제국의 조직
이같은 모범적인 행정기구를 편성하는 작업은 종교기구를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지만 종교의 정통교리 문제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므로 모로코 출신의 개혁가 엘메흐릴리를 고문으로 임명했다. 토우아트의 유대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인 엘메흐릴리의 도움을 받아 무하마드는 제국의 질서를 확립하고, 특히 몰락한 손니 왕조 후손들과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은 '노예 근성이 강한 족속'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데 도움을 구했다. 이슬람교를 귀족들의 공식 종교로 확인한 것은 명백히 무하마드에게 있어서 유일한 실책이었다.
그뒤부터 이슬람교는 대중적인 종교가 아니라 외래종교가 되어버렸으며 나중에는 모로코 이슬람교도의 송가이 정복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또한 그는 권력을 장악하기 2년 전인 1495년 메카로 성지순례를 함으로써 '성전'으로부터 직접 필요한 자문을 받았다. 성지순례는 그것이 불러일으킨 굉장한 이야기거리만큼이나 그 성대함으로 유명했다. 성지순례에서 무하마드를 수행했던 연대기작가 마흐무드 카티는 〈카리크 알파타시 Ta⁾ῑkh al-fattāsh〉에 메카의 신령이 무하마드를 칼리프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손니 왕조의 휘하 족속들에 대한 지배권이 있음을 분명히 말했다고 기록했다.
1497년 성지순례에서 돌아올 당시 무하마드는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교화된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그다음 그는 송가이를 굳건히 한 뒤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그는 군사적인 면에서 항상 성공을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1498~1502년 야텐가의 모시족 및 아이르(니제르) 주민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몇 년 뒤 보르구(지금의 니제르와 나이지리아 접경지역) 지역의 원정(1505~06)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507~14년 세네갈의 풀라니 반란세력과 아가데스 근처의 보르누 세력을 굴복시켰지만 부하 지휘관인 카비의 카르타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며, 1516~17년 진압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력은 무하마드의 통제권이 미치지 않는 독립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무하마드는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편성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수도 가오에서 오래 머무는 동안(1502~04, 1506~07) 그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1/10세를 비롯한 징세제도를 확립하고 농업과 어업에 관한 규정, 행정관과 총독의 모집과 훈련제도 등을 마련했다.
이 시기의 송가이 제국 영토에 관해서는 추측에 의존할 따름이다.
팀북투의 연대기작가인 사디는 무하마드가 '불과 검'으로 정복한 영토는 서쪽으로 대서양, 북서쪽으로는 테가자(지금의 말리 북부 국경)의 소금광산, 남서쪽으로는 벤두구(세구), 남동쪽으로 부사, 북동쪽으로는 아가데스까지 이른다고 기술했다. 확실히 무하마드의 통치시기에 송가이의 영향력은 광대했으며 위에서 서술한 영역 너머까지 위세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주변의 국가는 동맹세력이든 적대국이든 간에 송가이 제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이같은 영향력은 깊숙이 파고든 이슬람교 전도사업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보다 강화되었다.
무하마드의 지원이 없이는 침투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지역으로 이슬람 학자들이 들어갔다. 이후 수세기 동안 아프리카의 소규모 국가들과 그 지도자들은 송가이 이슬람 제국과 명망있는 지도자 무하마드를 자신들의 모범으로 삼았다. 지금도 구전에 따르면 무하마드는 초자연적 존재인 신령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존재는 그의 아버지를 닮았거나 메카 성지순례중에 특별한 재능을 통해 그가 자문을 얻을 수 있었던 신령을 닮은 것이었다.
권력상실과 죽음
무하마드의 통치 말기는 비극적이었다.
수단을 이슬람화하려는 그의 꿈은 차츰 사라져갔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자식들은 이권을 놓고 서로 싸움을 벌였다. 무하마드의 형제였던 총사령관 칸파리 오마르가 1519년에 죽은 뒤로 그는 가오에서조차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으며 그에게 있어 송가이의 주민들은 '굽이쳐 흐르는 니제르 강의 만곡만큼이나 마음이 비뚤어져 있는 존재'였다. 치솟는 분노로 반쯤 눈이 먼 이 노인에게는 친구이자 조언자인 신하 알리 폴렌 이외에는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국민들이 그에 대해 가졌던 거의 종교에 가까웠던 경외심은 경멸로 변해갔다.
1528년 큰아들 무사는 음모를 꾸며 무하마드의 또다른 동생이자 측근으로 새 총사령관에 임명된 야야를 죽였다. 무사는 이어 아버지를 축출하고 아스키아 무사라는 칭호로 3년간 권좌에 앉아 있었으나 그 역시 동생의 손에 암살되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무하마드는 '모기떼와 두꺼비가 득실대는' 강 한가운데의 섬에 유배되었다. 1528~37년 그곳에 있으면서 무하마드는 눈이 멀었으며, 송가이의 영토를 놓고 자식들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듣고 낙심했다.
1537년 그의 3번째 계승자인 아들 아스키아 이스마일은 아버지를 가오로 불러들였다.
무하마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녹색 터번과 칼리프의 검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잠시 동안 평온하게 지낸 뒤 1538년 죽었다. 시신은 수도 가오에서 흙으로 되어 있고 꼭대기 부분에 나무 대못이 둘려진 피라미드에 안장되었는데 이 무덤은 아직 보존되어 있으며 서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신성한 사원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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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무하마드 1세 아스키아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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