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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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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681. 1, 니네베(지금의 이라크에 있음) |
국적 | 아시리아 |
요약
센나케리브는 니네베를 제국의 수도로 정했고, 청동 주조술 고안과 기계 개량 등 기술 분야에도 업적을 남겼다. 예루살렘을 공격해 구약 성경에 산헤립이란 이름으로 자주 언급된다.
사르곤 2세의 아들로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뛰어난 군사 통솔력을 가지고 있었고, 바빌로니아 지역의 타 부족과의 계속되는 갈등과 반란 때문에 재위 기간 내내 이를 진압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이집트의 후원을 받은 팔레스타인 속국들의 반란 시도 또한 무력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성경에서는 그가 예루살렘을 정벌하려 했었다고 묘사하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은 포위 공격 끝에 막대한 배상자금을 받고 용서해줬다. 위에 오른 직후 니네베를 도읍으로 삼고 웅장한 새 궁궐을 지었으며, 도시를 확장하고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두개의 성벽을 세웠다.
개요
니네베를 도읍으로 정하고 새 궁궐을 짓는 한편 도시를 확장하고 아름답게 꾸몄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의 외벽과 내벽을 세웠다.
센나케리브는 〈구약성서〉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메소포타미아).
초기활동과 바빌로니아 전쟁
센나케리브는 사르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로서 바빌로니아에서 남부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의 재위 당시에는 바빌로니아가 주요문제였다. 바빌로니아에서 칼데아족과 아람족의 세력이 성장하게 되자 상업 이해관계와 안전한 교역로의 필요성 때문에 보통 친(親)아시리아 입장을 취해왔던 유서 깊은 중심도시들에 심각한 혼란이 발생했다.
게다가 엘람(남서부 이란)의 개입으로 정치적 불안이 더욱 심해지자 센나케리브는 BC 703~689년 이 지역에서 6차례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수도였던 바빌론에 토착부족의 통치를 용인하던 그의 태도는 이후 적대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BC 703년 메로다크 발라단(마르두크 아팔리디나)이 이끄는 칼데아족의 한 부족이 엘람족의 군사적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이 지역의 평화는 깨어졌다.
센나케리브는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해 바빌로니아 북부를 되찾고 토착 바빌로니아인(人)인 벨 이브니를 속왕으로 임명했다. 그의 군대는 바빌로니아 남부의 반란부족에게 넘어간 몇 도시를 제하고는 파괴하지 않았다. BC 702년에는 엘람족의 바빌로니아 개입이 노골화하자 엘람족이 자그로스 산맥을 통해 아시리아 동부로 진출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엘람족의 속국인 자그로스 지방의 소왕국들을 정벌했다.
BC 701년에는 메로다크 발라단의 사주를 받은 듯하지만(Ⅱ 열왕 20 : 12~18, 이사 39 : 1~7) 이집트가 후원하는 반란이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다. 센나케리브는 강경하게 대처해 충성을 서약한 속국들은 지원하고 반란을 일으킨 도시들은 점령했으며 다만 예루살렘은 포위공격 끝에 막대한 배상자금을 받고 용서해주었다(Ⅱ 열왕 18 : 13~19 : 36, 이사 36 : 1~37 : 37).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대해 2차례의 정벌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왔지만 아시리아의 사료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메로다크 발라단이 꾸민 또다른 음모로 인해 센나케리브는 BC 700년 칼데아 지방을 또 1차례 정벌해야 했다.
그러자 메로다크 발라단은 엘람으로 피신했다가 멀지 않아 그곳에서 죽었다. 바빌론에 대한 센나케리브의 강경한 태도는 속왕 자리에 벨 이브니 대신 자신의 아들 아슈르 나딘 슘을 임명해 아시리아의 직접통치를 실시한 데서 잘 나타난다. 이에 따라 바빌로니아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으며 그동안 센나케리브는 킬리키아와 북방에서 원정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불만을 품은 칼데아족은 엘람족에게 지원을 받아 BC 694년 바빌로니아 남부를 다시 침공했으며, 그와 동시에 엘람족은 바다를 통해 페르시아 만을 건너 침입해 들어왔다.
엘람족은 바빌로니아 북부를 공격해 아슈르 나딘 슘을 생포하고 대리인을 임명해 18개월간 통치하다가 아시리아의 새로운 공격을 받고 물러갔다.
바빌론을 점령한 칼데아족의 새로운 지도자 무셰지브 마르두크는 신전의 재물을 꺼내어 엘람으로부터 막대한 군대를 사들였다. BC 691년 아시리아와 엘람의 군대는 디얄라 강변의 할룰레에서 접전을 벌였다. 센나케리브는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상은 상당한 손실을 입어 한동안 힘을 쓰지 못했다.
BC 689년 그는 다시 바빌론을 포위공격해 9개월 만에 점령했다. 센나케리브는 이 위대한 성도(聖都)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고의적으로 철저한 약탈을 자행했다. 현존하는 한 문헌에는 이같은 불경한 내용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담겨 있다.
건축과 기술적 업적
센나케리브의 불후의 업적은 왕세자 시절의 공식 주거지였던 니네베를 재건한 것이었다(도시계획). 왕위에 오른 직후 그는 니네베를 도읍으로 삼고 샤니나라이슈('비길 데 없이 훌륭한 물건'이라는 뜻)라는 웅장한 새 궁궐을 지었다.
전쟁포로들을 일꾼으로 사용해 거리를 만들고 공공건물을 복원·증축하는 등 도시를 확장하고 미화하는 한편, 도시를 둘러싸는 13km 길이의 내부 성벽을 비롯해 외부 성벽을 세웠는데 이 두 성벽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도읍 주변에는 과수원과 이국적인 나무 및 풀들이 가득한 공원을 꾸몄다. 그가 들여온 외래 식물 가운데는 '양모(羊毛)가 열리는 나무'라고 일컬어진 목화도 있었다. 티그리스 강과 호스르 강은 때로 물이 부족할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농장의 관개를 위해 니네베 북쪽의 산악지대에서 샘물과 개울을 찾아내 그 물을 10km에 달하는 운하와 돌로 만든 대형 수로를 통해 호스르 강으로 끌어왔다.
또한 그는 아슈르를 비롯한 다른 도시에서도 활발한 토목공사를 벌였다. 센나케리브는 자신이 기술 분야에서도 창의력을 발휘했다. 그는 설화석고와 건축용 석재를 새로 발굴해내기 위해 탐사작업을 벌였으며 산악 삼림지대에서 새로이 거대한 건축용 목재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는 새롭고 더 간편한 청동 주조술을 고안해냈으며 우물물을 길어올리는 기구를 더 편리하게 개량했다. 해로(海路)로 엘람을 공격할 때 그는 병참술에도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때 그는 니네베에서 건조한 선박을 페니키아 뱃사람들을 시켜 티그리스 강을 따라 운반한 뒤 육로로 유프라테스 강의 운하로 옮겨 페르시아 만까지 운반했다.
센나케리브는 BC 681년 1월 니네베에서 자식들의 손에 살해당한 것 같다. 그의 후계자 에사르하돈을 낳은 정비(正妃) 나키아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그녀는 아시리아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아람인 출신이었던 것 같다.
예루살렘을 공격한 일 때문에 센나케리브는 성서에 자주 언급된다.
이사야는 센나케리브를 하느님의 도구로 보았으며(Ⅱ 열왕 19 : 23~28, 이사 37 : 24~29) 그의 군사행동 자체는 비난하지 않고 다만 자기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오만한 태도 때문에 그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히카르 이야기 The Story of Ahikar〉에 보면 센나케리브는 현인 아히카르가 섬기는 왕으로 외견상 덕망 있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똑같은 설화가 인용되어 있는 〈토비트 Tobit〉에는 그가 나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유대교의 〈탈무드〉에도 비슷한 양면성이 나타나는데, 〈탈무드〉에서 센나케리브는 악인으로 지칭되면서도 동시에 유명한 랍비 힐렐을 가르친 스승들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전시대의 전승(傳承)에는 센나케리브가 바빌로니아에서 활동한 사실뿐만 아니라 킬리키아에서 활동한 내용도 담겨 있다.
킬리키아 지방 도시 타르수스는 그가 바빌론을 본떠 세운 것이라고 알려졌다. 또한 그는 아테네에도 신전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쥐떼가 활시위와 화살통을 갉아먹는 바람에 이집트를 공격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는 센나케리브의 팔레스타인 원정중에 발생한 전염병 재난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이 재난은 하느님이 보낸 파멸의 천사가 아시리아 군대를 학살하는 이야기(Ⅱ 열왕 19 : 35, 이사 37 : 36)의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바이런 경은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센나케리브의 파멸 The Destruction of Sennacherib〉이란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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