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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르투

다른 표기 언어 Urartu 동의어 비아이, Biai

요약 흑해 남동부와 카스피 해 남서부의 산악지역에 중심을 두었던 서남아시아의 고대국가.

우라르투(Urartu)

우라르투의 위치

ⓒ Citypeek / wikipedia | CC의 BY-SA 3.0

BC 13세기초의 아시리아 자료에 의하면, BC 9세기와 BC 8세기에 우라르투는 근동 지방에서 상당한 정치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BC 6세기 아르메니아인이 우라르투인의 뒤를 이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어 이름이다. 우라르투인 스스로는 자기 나라를 '비아이닐리'라고 부르고, 오늘날의 반에 위치한 그들의 수도를 투슈파(또는 투루슈파)라고 불렀다. 우라르투인의 정주지는 4개의 호수부근, 즉 터키의 칠디르 호와 반 호, 이란의 우르미아 호, 아르메니아의 세반 호 사이에서 주로 발견되며 유프라테스 쪽으로 갈수록 점차 드물어진다.

우라르투인과 중근동의 고대 민족 후르리인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민족의 언어가 아주 유사한 것으로 보아 동일한 선조로부터 나왔음에 틀림없다(아마 BC 3000년 또는 그 이전). 비록 우라르투인의 많은 문화유산은 후르리인에게서 계승한 것이지만, 그 이상으로 아시리아인의 덕을 많이 입었다. 이를테면 아시리아인으로부터 자모(字母)와 문학형식, 군사전략과 외교관습, 그리고 예술적 주제와 양식을 배워왔다.

아시리아인의 영향은 2단계로 나타난다. 첫번째 단계는 아시리아인의 침공에 우라르투인이 산발적인 저항 이외의 대응을 하지 못했던 BC 1275~840년이고 2번째 단계는 우라르투 왕국의 전성기인 BC 840~612년이다. 첫번째 단계는 아시리아인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로 이때 토착거주자들은 아시리아인에게 무자비한 약탈을 당하고 있었다. 이때 우라르투인은 아시리아의 수준높은 문명의 쾌적한 향취를 열심히 흡수·모방한 것처럼 보인다. 2번째 단계에서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인의 문화적 업적들에 상응하는 것들을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룩해냈다.

신왕국의 첫번째 세기에는 아시리아를 모방하여 군사작전에 치중하여 동쪽·서쪽·북쪽에 인접해 있는 국가들에게 가혹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 같다.

사르두리 1세의 통치(BC 840경~830)에 대해서는 반 지역에 약간의 비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슈푸이니의 통치(BC 830경~810)와 이슈푸이니의 아들 메이누아의 통치(BC 810경~781)에 대해서는 서쪽의 하(下)무라트 강 분지(엘라지 주변)에서 북쪽의 아라스 강(에르주룸에서 아라라트 산까지)과 남동쪽의 우르미아 호의 남쪽 해안에 이르기까지 비문이 광범위하게 퍼져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간접적으로 우라르투의 정복상태를 추측할 수 있다.

무사시르라 부르기도 하는 아르디니는 BC 1100년경 아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에게 한 번 정복당한 적이 있어 자신의 제사장 통치왕조 아래서 기술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당시는 우라르투 세력 범위의 일부가 되었다. 아르디니에 있는 할디 사원에는 우라르투의 역대왕들로부터 풍족한 기금이 증여되었으며 아시리아인 신자에게도 공개되었다.

종교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많은 우라르투 비문들은 메이누아가 공동섭정했던 때인 이슈푸이니의 통치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교가 이 왕들의 시대에 확립된 형태를 가지게 된 것 같고 우라르투의 만신전(萬神殿)에 있는 많은 신들의 계급 서열은 바치는 제물목록에서 분명해진다. 관개를 통하여 농지생산성을 증가시키려 했던 토목사업이 벌어졌던 최초의 증거는 메이누아 통치 시기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이것이 '메이누아 운하'인데 이 운하를 통해 담수를 약 28㎞나 떨어져 있는 풍부한 수원으로부터 반 지역 남단까지 끌어왔다.

지금도 이 하천이 남아 있다.

메이누아의 아들 아르기슈티 1세(BC 780경~756)와 손자 사르두리 2세(BC 755경~735) 통치시기부터는 비문 외에도 반 지역의 암석과 석판(石版) 위에 새겨진 일종의 연감 형식의 직접적인 역사자료도 있는데 이것들은 후에 인근지역으로 옮겨졌다.

이 왕들의 치하에서 우라르투는 서쪽으로 유프라테스 강의 굴곡 부분에 이르렀고 때로는 그 너머 멜리테네(지금의 말라티아)와 고대 시리아의 콤마게네 지역에까지 다다랐다. 따라서 아시리아인이 토로스 산맥 서부로부터 필요불가결한 철을 얻는 하나의 주요보급노선이 끊기게 되었다. BC 777년경 아르기슈티 1세는 사르두리 2세가 BC 750년대에 했던 것과 같이 멜리테네 힐라루아다를 정복했다. BC 745년경 사르두리 2세는 콤마게네 왕국의 쿠슈타슈피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토로스에 있는 타발 국의 왕 투아테의 영토 일부도 BC 777년경 아르기슈티 1세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짧은 기간 동안 우라르투는 말라티아로부터 콤마게네에 있는 할페티(고대의 명칭은 할파)에 이르는 유프라테스 서쪽에서 하나의 교두보를 마련했고 이 제국은 시리아 북부의 알레포에서 32㎞ 이내의 지방까지 확장되었다.

아르기슈티와 사르두리가 착수한 사업은 우라르투인이 행한 모험들 중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린 것이었다.

그것은 정복과 그에 따른 아라스 강변지역의 농업 개발이었다. 아르기슈티 1세 통치시기에 마침내 디아우에히(Diauehi : '디아우의 아들들의 땅'이라는 뜻, 아시리아어로는 Daiaeni)는 습격을 받았고 아라스 강 상류와 중류의 유역은 건축·관개·농업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르두리는 칠디르 호와 세반 호를 획득했다. 더 나아가 서북쪽으로 진출하려다가 새로운 적 쿨라(그리스어로는 콜키스) 왕국에게 저지당했다.

해마다 치러진 전쟁에서 획득된 수만 명의 포로들(매년 3만 9,000명 정도)은 왕실장원의 경작과 농작물가공에 주요 노동력 공급원이었다.

아르메니아의 전설에 의하면 잔존한 우라르투의 건축물 중 대다수는 세미라미스 여왕의 업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태생으로 아시리아를 섭정했고(BC 810~806) 역사상 삼무 라마트라고 알려진 이 여왕은 우라르투의 내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한편 그녀의 남편·아들 그리고 손자들이 재위한 시기(BC 823~745)는 아시리아가 군사적으로 쇠락해갔던 때였다. 우라르투인은 이때 그들의 국경을 넓혀갔다. 이 시기의 우라르투 국왕들은 몇 차례씩이나 아시리아의 군대와 싸워 이겼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아르기슈티의 보고에 의하면 그가 섭정한 지 6, 7년째 해에는 자브와 우르미아 호 지역의 전투에서 아시리아인에게 승리했다고 한다. BC 753년경 사르두리 2세는 티그리스 강의 상류분지에서 아시리아 국왕 아슈르 니라리 5세와 싸워 이겼다.

BC 744경~715년 사이에 아시리아는 다시 확장되었다.

남아나톨리아와 북시리아의 많은 종속국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사르두리 2세는 기반을 점차 잃어갔다. BC 743년에 아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BC 744~727)가 할페티 부근의 콤마게네에서 사르두리 2세와 그의 동맹군을 격파했다. BC 735년 티글라트 필레세르가 투슈파 성으로 진군해 있을 때 궁정반란으로 사르두리의 아들 루사스 1세(BC 735~713)를 국가의 원수로 추대한 것 같다. 티글라트 필레세르의 아들인 아시리아의 국왕 사르곤 2세(BC 721~705)는 근동지방에서 경쟁국인 우라르투의 패권을 뺏는 데 성공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

BC 8세기에 활동한 아시리아의 왕, 벽화 모습

ⓒ LMFAO / wikipedia | Public Domain

우라르투는 북시리아의 봉국들이 도와줄 것으로 믿었지만 그들은 아시리아에 곧바로 복속해버렸기 때문에 기대는 무산되고 결국 BC 717년 카르케미시 지방이 아시리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금속광산이 풍부한 토로스 산맥에 있는 타발 왕국이 그리스 신화에서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프리지아의 왕 미다스와 루사스 1세의 잠재적인 동맹국으로 남아 있었다.

프리지아 왕국이 격파된 뒤 타발 왕국 또한 멸망하여 아시리아에 병합되었다. 같은 해 사르곤은 동방으로부터 우라르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2년간 대부분의 군사 작전은 서부 이란에 국한되었다. 거기에서 아시리아는 만나 왕국의 이익을 옹호하여 싸웠고 우라르투는 동방과 북방으로부터 만나 왕국을 침입해오는 이란의 각 부족을 지원하고 부추겼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첩보원들은 우라르투 전선의 후방에 잠입하여 우라르투에 대항하여 보다 더 큰 군사적 야심을 갖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아시리아를 유리하게 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제2전선의 개방이었다.

카프카스로부터 온 유목민족 킴메리인들이 BC 714년 바로 전에 우라르투를 침입했다. 루사스 1세는 어리석게도 북부의 몇 개 완충국가를 파괴시키는 맹공격을 감행했다. 어쨌든 루사스는 얼마 안 되어 자기 나라의 국경에서 키메리오스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겁없이 공격을 감행하여 큰 재난을 초래했다. 아시리아의 국왕 사르곤 2세는 왕자 센나케리브를 우라르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북방으로 파견했다.

사르곤 2세(Sargon II)

아시리아 제국 역사상 마지막 세기의 위대한 왕, 벽화 모습

ⓒ Jastrow / wikipedia | Public Domain

왕자 센나케리브는 그의 부왕 사르곤 2세에게 루사스는 이미 키메리오스의 영토 내에서 전군이 패퇴당해 루사스 자신도 그의 사령관들과 접촉도 하지 않은 채 우라르투로 도망갔다고 보고했다. 이 정보는 사르곤이 대망의 BC 714년 전투를 일으키는 데 용기를 주어, 결국 우라르투 국왕의 고향땅인 산악지역 밖을 향한 열망을 종결시켰다. 루사스가 이끄는 동맹국 연합이 아시리아에 대한 저항에 실패한 뒤 루사스는 서둘러 투스파로 돌아갔으며, 사르곤은 지혜롭게 이 도시를 포위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사르곤은 키메리오스와의 충돌은 피했고 대신 아르디니에 있는 우라르투 신전을 약탈하여 할디의 조상(彫像)을 빼앗아갔다. 이 3번째의 대재난에 낙망한 루사스는 자살했다.

루사스 1세의 군사적 좌절로 우라르투의 정치세력은 끝장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아르기슈티 2세(BC 712경~685)와 그의 계승자들은 자기 나라 천연자원을 발전시키는 왕실 전통을 이어갔으며, 우라르투의 문화는 정치적인 위축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은 계속 번창했다.

BC 7세기말 우라르투는 최종적으로 아르메니아의 침입을 받아 정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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