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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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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아시리아 |
요약
아시리아의 왕(BC 680~669 재위)이자 사르곤 2세의 후예.
Essarhaddon이라고도 씀. 아시리아어로는 Ashur-Aha-Iddina.
특히 BC 671년의 이집트 정복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에사르하돈은 둘째아들이었지만 일찍부터 아버지 센나케리브에 의해 왕위계승자로 지목되었다. 센나케리브는 BC 689년 바빌론 시를 침략하고 나서 얼마 후 그를 이 도시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한두 명의 아들들이 왕권을 장악하고자 센나케리브를 암살했다(BC 681). 재빨리 서쪽에서 진군해온 에사르하돈은 하니갈바트(아시리아 서부)에서 반란군들과 마주쳤다. 반란군 대부분이 그에게 항복했으며 지도자들은 달아났다. 에사르하돈은 니네베까지 계속 진격하여 이곳에서 아무런 반대도 없이 왕위에 올랐다.
그동안 남부 바빌로니아에서는 칼데아족 지도자가 이 반란을 이용하여 우르에 있던 아시리아 총독을 공격했다. 이 부족장을 진압하기 위해 에사르하돈이 군대를 파견하자 그는 북동쪽으로 달아나 엘람에서 망명처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엘람의 새 왕은 즉시 그를 처형시켰다. 한편 이 반란자의 형제는 아시리아로 달아나 에사르하돈에게 항복했으며 에사르하돈은 그를 이미 죽은 그의 형제가 다스리던 지방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아시리아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이같은 자비로운 행동은 결과적으로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그가 에사르하돈 통치기간 동안 줄곧 충성을 바쳤기 때문이다.
센나케리브 통치하에서 모진 고난을 겪었던 북바빌로니아의 도시들은 에사르하돈의 통치 때 특별한 혜택을 누렸다. 추방당한 시민 중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토지를 되돌려주었으며 BC 678년 보르시파와 바빌론의 영토를 침범한 칼데아족에 대항해서 군사적 행동을 취했다. 멀리 북쪽지역에서는 킴메리족과 스키타이족이 점점더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다. 에사르하돈은 이 지역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스키타이족과 결혼동맹을 체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킴메리족의 압박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결국 에사르하돈은 북서부 주들 중 비중이 큰 실리시아와 타발을 잃게 되었다.
이집트가 페니키아 티레 시의 반란을 조장하자 에사르하돈은 이집트를 공격했다(BC 675). 그러나 BC 671년에 이르러 멤피스를 점령하고 이집트 왕 타하르카를 패주시킬 수 있었다. 타하르카는 나라 전체를 에사르하돈에게 넘겨주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에사르하돈은 메소포타미아 통치자로서는 처음으로 그의 왕실 칭호들 중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지니게 되었다(→ 이집트). 아시리아 군이 철수한 후 타하르카가 다시 나타나 상당수의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
에사르하돈은 BC 669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으나 죽고 말았다. BC 672년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왕위를 잇게 하라는 상세한 지시를 내린 바 있었다. 그가 죽고 난 후에 이 계승작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에사르하돈의 통치에 대한 연구서로는 리켈레 보르거의 〈Inschriften Asarhaddons, König von Assyrien〉(1956)과 D. J. 와이즈먼의 〈Vassal-Treaties of Esarhaddon〉(195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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