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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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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BC 8세기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예언자.
(히). Yesha⁽yahu.

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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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이사야〉의 이름이 붙었다(전반부 39장 중 일부만 이사야가 쓴 것으로 봄). 이사야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승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BC 742년경에 예언활동을 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 시기는 아시리아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위협했는데, 이사야는 그것을 하느님이 믿음을 저버린 백성들에게 주는 경고라고 선언했다.

환상

이사야의 생애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사건은 오늘날의 〈이사야〉 6장에서 발견되는 예언하라는 부름을 받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BC 742년경에 있었다. 이사야를 예언자로 만든 그 환상(아마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본 것 같음)은 1인칭으로 기록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사야는 하느님을 보고서 그 영광과 신성함에 압도되었다. 이사야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낼 사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깨닫고서, 비록 자기가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면서도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면서 하느님의 일에 자기를 바쳤다. 이리하여 이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임무를 받았다. 그것은 가벼운 임무가 아니었다. 자기 백성을 정죄하고 자기 민족이 짓눌려 망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가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메시지를 대중 앞에 선포하게 되면 심한 배척과 악의에 찬 불신과 조롱을 겪게 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참아내려면 속마음이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사야는 이 모든 사실을 환상이라는 형식으로 받았고, 받는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한시도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개인사

이사야는 그 환상에서 의미를 발견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결정적 순간을 맞기 이전의 이사야의 생애를 좀더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행히도 직접적인 정보는 없고, 주로 성서 본문에서 추론해야만 한다. 때로 예언자 개인의 삶은 그가 대중 앞에 선포한 메시지를 적은 기록으로 아는 수가 있다. 한번은 이사야가 왕을 만나러갔을 때 왕에게 예언의 말을 훨씬 더 강력하게 전하기 위해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가진 아들을 데리고 갔다. 또 한번은 메시지를 기억하기 위해 '여예언자'(자기 아내)와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에게 그 메시지를 이름으로 붙여주었다.

그 메시지는 '마헤르 샬랄 하스 바즈'('노략품을 재빨리, 전리품을 잽싸게'라는 뜻)로서, 아시리아인들의 약탈이 임박했음을 가리켰다. 만일 이사야와 그 아내가 자기 아들들이 그 불길한 예언의 산 증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예언자의 아내와 그 아들들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사야 부모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 이름이 아모쓰라는 것밖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사야는 종종 왕들과 말을 했기 때문에 때로는 이사야가 귀족이거나, 심지어 왕족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모든 예언자들에게 다 적용할 수 있다. 다윗 시대의 나단을 비롯하여 예언자들은 왕들과 상대했고, 이사야처럼 공적인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이사야가 동정을 베푸는 대상은 궁정인들과 부자들이 아니라 주로 압제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또한 이사야가 의식상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다거나 그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사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제사장 집안 출신이라는 주장도 때때로 나온다.

하지만 그가 제사장들과 그들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정죄한 것을 고려하면 그다지 큰 증거가 되지 못한다.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이사야〉의 첫 장인 이 유명한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렇게 외친다.

위와 같은 논리라면 이사야가 예언자 집안의 자손이라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다(물론 아모쓰라고만 알려진 그의 아버지를 예언자 아모스와 혼동해서는 안 됨). 이사야는 예언 연설의 전통적인 형식과 언어를 철저히 훈련받았다.

그가 한 연설은 강렬하고 생생하며 최상급의 고전 히브리어를 쓴 훌륭한 연설이었다. 이사야는 특히 자기보다 약간 앞 시대 사람인 아모스에게 알려진 예언자 전승을 잘 알고 있다. BC 8세기 후반에는 아모스·호세아·미가·이사야 같은 4명의 유력한 히브리 예언자들이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에게 전력을 기울여 활동했다.

이상하게도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직접 알았다고 암시해주는 증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각각 떨어져서 활동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사야와 아모스는 본질상 같은 사상의 맥을 이루는데, 다만 아모스가 북왕국(이스라엘)에서 활동한 반면, 이사야는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이 두 예언자가 쓴 글은 문체와 내용이 기본적으로 동일한데,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이든 간접이든 영향을 주었음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또한 두 사람 모두 백성들이 다 알아들을 만한 이스라엘의 전승에 호소했다.

이사야는 계층간의 차이와 직업간의 차이를 몸소 경험했다.

집안 환경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나, 이사야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의 실상과 부자들의 방탕을 알게 되었다. 그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과부들과 고아들, 돈도 없고 집과 땅도 없는 사람들, 돈많은 사람들이 세력을 쥐고 있는 법정에서 돈이 없어 희생당한 사람들이었다. 이사야는 또한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하는 재판관들, 땅을 불법으로 수탈하는 사람들, 사치스런 여자들, 도둑질한 돈으로 흥청망청 즐기는 사람들, 무책임한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 등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사야는 인간 사회의 불평등과 악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BC 8세기의 이스라엘 상황이었지만, 많은 비평가가 믿는 대로 20세기의 오늘날도 세계 거의 모든 곳의 상황은 그때보다 더 악하다.

신학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전승에 의존했으며 아모스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다. 이사야·아모스 당시 백성들은 이스라엘과 그 하느님을 특별하게 묶는 오래된 전승을 공유하고 있었다. 족장시대부터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엄숙한 '계약'이 계속되었다.

하느님은 그들을 선택하고 보호해주었다. 하느님이 그들의 안녕을 위해 얼마나 애써 왔는가! 그것이 바로 전승으로 내려오는 메시지였다. 이사야는 이 고대의 전승을 알았고 존중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이 계약이 백성들의 행동에 따라 결과가 좌우되는 조건적인 것이라는 아모스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모스가 사마리아에서 직접 본 행동과 이사야가 예루살렘에서 본 행동은 그 계약을 파기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그렇게 행동한다면 계약은 파기된다는 것이 〈이사야〉 5장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의 뜻이다. 거기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조심스럽고 부지런하게 포도원(이스라엘)을 가꿔온 농부에 비유하는데, 하느님은 포도를 수확할 때 불의와 폭력이라는 '들포도'밖에 거둘 것이 없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더이상 그들을 돌보고 보호하지 않겠다고 경고한다.

이사야가 아는 바로는 불의가 난무하고 그결과 고통이 만연한 BC 8세기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에게는 사람들이 문제가 되었다. 하느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드리는 의식들보다 사람들에게 있었다. 〈이사야〉 29장 13절과 1장 10~15절을 엄밀히 해석하면 하느님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갖고 있는 동기가 가증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바로 그것이 이사야가 그 글을 쓸 때 품고 있던 뜻이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거룩성을, 즉 사람과 전혀 다르심을 깊이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고기·곡식·아첨 같은 관례적인 선물은 하느님에게 어울리지 않거나 아니면 적어도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사야가 아모스처럼 절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위의 두 본문을 어떤 학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덜 엄격하게 해석하여 신앙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도덕적 행위를 의식 준수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사야의 신학은 하느님이 역사를 형성하고, 대대로 그 백성을 민족적인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무대에 들어온다는 위로의 관점도 때때로 포함한다. 그러나 이사야의 불안한 전망에 따르면 하느님은 바른 길에서 벗어난 자기 민족을 징벌하기 위해서도 개입할 수 있고, 그 목적을 위해 인간 대리자(예를 들면 침략자)를 쓸 수도 있다.

아모스는 그 인간 대리자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뒤 1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 이사야는 그 인간 대리자가 누구인지 좀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시리아였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때는 아시리아 제국이 비교적 잠잠히 있던 기간을 끝내고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BC 745~727 재위)의 뛰어난 지도력을 앞세워 서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하던 때와 대략 일치한다.

예언자는 당시의 사건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사야는 아모스처럼 그 징조들을 읽었던 것 같다. 그는 아시리아가 하느님의 진노의 도구라는 사실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나의 분노의 지팡이요, 나의 징벌의 몽둥이였던 너 아시리아, 배신한 민족을 치라고 너희를 보냈고……"(10:5~6).

예언적 사명

만일 이사야가 예언자의 길을 걷도록 만든 환상을 받을 만하게 전승과 삶의 훈련으로 준비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준비에는 위에서 말한 시대적 통찰력도 포함되었다.

6장에 따르면 우찌야 왕이 죽던 해(BC 742)에 이사야는 어떤 절기를 맞아 군중들의 틈에 끼어 예루살렘 성전에 와 있었다. 그때 이사야는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는 말씀을 듣고서 예언자가 되었다. 청년시절에 이사야는 거만한 부자들과 고통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아마 아모스를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에게서 민족과 신앙에 대한 전승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시리아의 위협을 내다보면서 좌절감을 가졌다. 이런 것들이 청년 시절 이사야의 삶을 형성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이 새롭게 그를 엄습했다. 이 모든 경험들이 이사야의 삶 속에서 한데 어우러졌다. 이사야는 하느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는 말씀을 자기에게 들려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나중에 회상으로 밝힌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사야는 백성들을 멸망의 벼랑에서 돌아오게 할 절박한 필요를 느꼈다.

이때 이사야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이사야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즉시 그리고 명쾌하게 깨닫고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 경험을 담은 기록은 현존하는 세련된 형태로 보아 그 사건과 같은 시대의 것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6장을 써 내려갔다. 그 기록은 확신과 열정이 가득한 젊은이의 회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분노와 좌절로 시달려온 사람의 회상이다.

다른 장들에서 이사야는 백성들이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을 '거절했다'는 말을 3번 한다. 이사야가 6장에서 예언자로서 받은 임무를 말하는 것을 보면,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하는 불합리한 명령을 받은 것 같다. 이사야가 전해야 했던 소식은 나쁜 소식들과 반갑지 않은 정보였다. 이사야는 그 소식을 전할 때 뜻이 분명한 말을 썼고 도덕적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한 까닭에, 일반적으로 그런 말을 싫어하듯이 백성들도 그의 말을 배척했다. 백성들이 그런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은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이사야가 본 환상 자체와 그 기록 사이에는 큰 고뇌가 서려 있다.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묻는 이사야의 말은 매우 지친 사람의 표현이다.

만일 6장이 이사야가 예언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이라면, 22장에 예루살렘 정복에 대한 심판 예언은 이사야의 우울한 이야기를 맺는 부분이 될 것이다. 어쨌든 22장은 그 시기를 어느 정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가장 늦게 기록된 이사야의 글이다. 22장 마지막에 기록된 이사야의 말은 그의 메시지의 우울한 어조를 조금도 경감시키지 않지만, 이사야의 심정과 성격을 좀더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사야는 6장에서 환상 가운데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외친 다음에 1/10밖에 안 남은 백성들도 결국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선언을 들은 바 있다. 22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진멸함으로써만 민족의 죄가 씻겨질 것이라는 철저한 재앙을 확인하는 것으로 예언이 끝난다. "이 죄는 너희가 죽기까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6장과 22장은 이사야가 전한 메시지의 분위기와 그의 심정을 말해주며,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한 분위기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22장에서 이사야는 자기 심정을 가장 솔직하게 토로한다. 전혀 예상하지 않게 아시리아 군대는 포위를 거두고 떠났고, 이에 놀란 예루살렘 수비대는 환호하면서 축제를 벌였다. 이사야는 그들과 절기의 들뜬 분위기를 함께 나눌 수 없었다. 심판이 다만 연기된 것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에서 하느님이 아직 시온을 향해 쌓아두고 계신 패배와 혼돈의 날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사야는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나를 실컷 울게 내버려두어라. 내 백성의 수도가 망했다고 해서 나를 위로하려 하지 말라."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지

이사야의 글 여러 곳에 나오는 역사 이야기들은 〈이사야〉 첫 절과 일치한다.

그 절에 따르면 이사야는 유다 왕 우찌야, 요담, 아하즈, 히즈키야와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이사야는 자기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때를 정확히 '우찌야 왕이 죽던 해'로 기록한다. 적어도 7장의 일부는 에브라임과 시리아가 동맹하여 유다 왕 아하즈를 위협한 BC 734년의 사건을 가리킨다. BC 732년 티글라트 필레세르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는데, 이 사건은 이미 이사야가 예언했다. BC 722년 에브라임의 수도 사마리아가 아시리아 왕 사르곤에게 함락되었다.

이 사건 역시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었다. BC 701년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가 결국에는 철수했다. 1장 4~8절, 10장 27~34절, 28장 14~22장, 30장 1~7절, 31장 1~4절은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히즈키야가 미친 듯이 이집트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어려운 시절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왕들을 거의 위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22장을 설명하면서 보았듯이 적군들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사야가 주로 임박한 재난을 선포할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 것 같다.

자기 사회가 썩을 대로 썩었다는 것을 통절하게 느낀 이사야는 결국 그 사회가 몰락하고 말 것임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비극을 피할 길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 길을 제시했다. 그의 백성이 살아남는 길은 옛날의 도덕적 요구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 다시 돌아옴으로써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이사야의 계획이었다. 좀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이사야는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그의 목표는 그 백성들이 스스로의 행위로 멀어졌던 하느님, 그 하느님이 수용할 만한 길로 그들을 다시 이끌고 옴으로써 그들을 재난에서 구하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두려운 경고를 하면서 행동을 고치라고 호소했다. 이사야가 좌절했던 것은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사야가 보기에 그 백성들은 자멸을 향해가고 있었다.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그들의 운명, 바로 그것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불가능하게 보이던 이사야의 계획은 BC 701년의 위기 때 실현된다. 그동안 이사야는 시온을 포위하고 있는 아시리아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하러 갈 채비를 하고 있는 장군들과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사야는 동맹국도, 무장을 하는 것도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분이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이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들에게 안전을 허락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사야는 최선의 방어란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의 도덕적 요구에 마음을 돌이켜 순응하는 것이라고 과감히 주장했다. 안전이 위협당할 때 아무도 안전하지 못한 법이다. 하지만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쉴 때(안전을 누릴 때)가 되었다. 고단한 자는 안식을 얻어라."

백성들의 전멸만이 민족의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외치던 이사야가 어떻게 안식을 외치게 되었을까? 여기서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이 하나도 남지 않는 상태를 생각할 수 없어 벼랑에서 발길을 돌렸다는 이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궤변이다. 즉 백성들이 거절한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위임하여, 그것을 백성의 남은 자들을 교훈하기 위해 책으로 써서 보존했다는 것이다.

BC 8세기 이사야가 쓴 말들의 정확한 한계에 관해서, 또는 이사야가 비관적 논조를 얼마나 일관되게 유지해가는지 그 정도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그의 책을 보면 확실히 그의 성격은 완고하며 동시에 온유하여 종잡기가 어렵다. 큰 희망이 제시되는 본문에는 언제나 임박한 멸망의 분위기가 섞여 있다.

이사야의 아들 이름인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인 것 같은데, 그러나 이 말에는 희망이 울려퍼진다. 그것은 철저한 멸망이 아니고 살아 남을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유다가 이스라엘과 시리아에게 정복되지 않을 것을 상징하는 아기의 이름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은 하느님이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한 것 같다. 그외의 비슷한 확신들도 실제로 이사야가 직접 한 말들로서, 앞서 한 공격적인 말의 부담을 덜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대안이 되는 해결책이 있다.

비록 이사야는 당시 사람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지만, 약간의 추종자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제자들이 보는 데서……이 가르침을 봉인한다." 이들은 이사야의 이름과 가르침을 기록하거나 암기하여 잊지 않고 간직한 무리로서, 그 가르침의 핵이 전승을 통해 발전하여 〈이사야〉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은 세대들은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의 말을 경건하게 간직해가면서, 거기에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고통당하는 인류를 사로잡을 만큼 잘 짜여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희망의 메시지를 덧붙였다.

메시지에 대한 후기 해석

〈이사야〉는 묘하게도 이사야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그 위로의 말들 때문에 매우 널리 알려져 사랑을 받는다. 바빌로니아 〈탈무드〉(2권의 〈탈무드〉 가운데 하나로서,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 〈탈무드〉)의 한 부분에서는 심지어 〈이사야〉가 처음부터 끝까지 위로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쿰란(사해) 공동체의 기록보관소에 〈이사야〉 두루마리들이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무렵(BC 1세기경)에는 이사야가 자기 시대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일들에 대해서도 말했다는 주장이 유행했으며, 고통스러운 시대가 닥치면 사람들은 언제 구원이 임할 것인지를 배우기 위해 예언 부분을 연구했다.

그리스도교 시대 이전에 유대 학자들이 완성한 〈이사야〉 번역본(그리스어 70인역)에는 발전과정에 있던 해석 전승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임마누엘에 관한 구절(7:14)에서 히브리어 '알마'(젊은 여자)를 '파르테노스'(처녀)로 번역함으로써 그 뜻이 메시아를 시사하는 것과 가깝게 발전시킨다. 이제 그것은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처녀이다. 또 그 시대에는 단순히 일개의 왕을 넘어서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주목을 끌고 있었다. 〈신약성서〉 기사에 따르면 예수가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으려 할 때 사람들은 〈이사야〉 두루마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예수는 〈이사야〉 61장의 시작 부분, "주 야훼의 영을 내려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를 읽은 다음,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복음서들은 다른 어떤 예언서들보다 〈이사야〉에 크게 의존한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라는 구절이 나오는 〈이사야〉 2장은 교파를 초월하는 이상향이다. 이 내용과 〈이사야〉 뒷부분에 나오는 많은 희망적인 내용이 현 시대와 오늘의 문화에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날 '예언자'라는 말은 이사야가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과 정의를 민족의 안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는 것과 연관되는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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