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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 명나라(1368~1644) 때의 회화예술.
명이 존속한 270여 년 간은 궁정회화와 문인화 모두가 상당한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화원제(畵院制)가 미정비된 초기에 전국 각지의 화가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인지(仁智)·무영(武英)·문화(文華) 등의 궁전이나 문연각(文淵閣)의 예인(藝人)으로 배치하기도 하고, 또는 금의위지휘(錦衣衛指揮)·진무(鎭撫)·천호(千戶)·백호(白戶) 등의 직함을 주어 대우했으므로 각지의 유명한 화가들이 일시에 궁정으로 모여들었다(명원파). 홍무연간(洪武年間 : 1368~98)에는 성저(盛著)·왕중옥(王仲玉)·주위(周位)·심희원(沈希遠)·진원(陳遠) 등이 궁정에 모였고, 영락연간(永樂年間 : 1403~24)에는 변경소(邊景昭)·장자성(蔣子誠)·조렴(趙廉)·등용형·상관백달(上官伯達)·탁적(卓迪) 등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덕연간(宣德年間 : 1426~35)·홍치연간(弘治年間 : 1488~1505)에는 황제가 그림을 특별히 좋아해 궁정화가가 수백 명에 이르렀고 명대 궁정회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오늘날 전해져오는 작품들 역시 이 시기의 것이 대부분이다(→명원파).
사환(謝環)의 인물화·수묵산수화, 상희(商喜)의 어용화(御容畵)·마화(馬畵), 대진(戴進)의 도인(道人)·승려·산수·화훼화(花卉畵), 석예(石銳)의 금벽산수화(金碧山水畵), 그리고 이재(李在)·주문정(周文靖)·오위(吳偉)·왕악(王諤) 등의 그림은 모두 일세를 풍미한 것들이다.
또한 손륭(孫隆)의 몰골법(沒骨法 : 윤곽이나 선을 그리지 않고 곧장 채색하는 화조화의 묘사기법 가운데 하나)을 이용한 화훼화, 임량(林良)·여기(呂紀)의 화조화(花鳥畵) 등도 모두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곧 문인화가 크게 일어나자 궁정회화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다만 만력연간(萬曆年間 : 1573~1619)·천계연간(天啓年間 : 1621~27)의 오삼(吳彬)이 독특한 산수와 불상(佛像)을 그려냈을 뿐이다. 이즈음 대진은 동료들의 시기 때문에 고향으로 쫓겨가게 되었으나, 남송의 마원(馬遠)·하규(夏珪)의 원체화(院體畵)를 숭상했던 그는 웅건한 기상이 담긴 필묵(筆墨)으로 궁정 안팎에 큰 영향을 끼쳐 '절파'(浙派)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진다.
명 초기의 명의(名醫)인 왕리(王履)도 역시 마하체(馬夏體)의 산수화에 능했으며, 왕불(王紱)·하창(夏昶)은 대나무를 잘 그려 명성을 얻었다. 강남(江南)의 경제가 회복되어가면서부터는 쑤저우[蘇州]의 문인화가들이 점차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유각(劉珏)·두경(杜瓊)·요수(姚綬) 등이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그뒤를 이어 심주(沈周)가 나타났다.
심주는 동원(董源)·거연(巨然) 및 원4대가(元四大家)의 화풍을 계승·발전시켰으며, 중년 이후에는 황자구(黃子久)와 오진(吳鎭)에 심취해 '오파'(吳派)의 창시자가 되었다. 쑤저우의 명사인 문징명(文徵明)과 당인(唐寅) 등도 모두 심주의 화풍을 이어받았다. 이후 오파는 궁정회화와 절파를 제치고 명대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문징명의 산수화·화훼화는 섬세하고도 온아(溫雅)하며 여유로운 기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화풍을 따른 화가들이 대단히 많았다.
그의 아들인 문팽(文彭)·문가(文嘉)와 조카인 문백인(文伯仁)이 모두 그의 화풍을 이어받았다. 제자인 진순(陳淳)·육치(陸治)의 산수화 역시 그의 화풍을 닮아 여유롭고 적막한 기풍을 담고 있으며 화훼화는 거의 실물에 가깝게 묘사했다. 서위(徐渭)는 화훼화가 특히 뛰어났는데, 마음 속의 정서를 꾸밈없이 담아내어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명 말기에는 동기창(董其昌)·진계유(陳繼儒) 등이 문인화 이론을 더욱 가다듬어 명말청초의 화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각 지방의 화가마다 서로 다른 필묵 취미에 따라 '운간'(雲間)·'화정'(華亭)·'소송'(蘇松) 등의 여러 파벌이 형성되었다. 인물화가로는 진홍수(陳洪綬)·최자충(崔子忠)이 명말 화단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남진북최'(南陳北崔)라 칭송되었다. 초상화가로는 증경(曾鯨)이 유명했는데, 그의 '중묵골'(重墨骨)은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파신화파'(波臣畵派)라 불리었다.
명대에는 조각과 벽화에서도 훌륭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밍샤오링[明孝陵] 및 스싼링[十三陵] 앞의 석각(石刻), 산시 성[山西省] 핑야오[平遙] 솽린 사[雙林寺] 나한당(羅漢堂)에 있는 〈십팔나한도 十八羅漢圖〉 등이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온다. 베이징 서쪽 교외에 있는 파하이 사[法海寺]의 제석범천(帝釋梵天) 벽화나 쓰촨 성[西川省] 신진[新津]의 관인 사[觀音寺] 벽화 등은 모두 고대 조각과 벽화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했다. 수공예 역시 높은 수준을 보이는데, 청화자기(靑花瓷器)·채색자기 및 투조(透雕)자기·조소(雕塑) 등에서 뛰어난 성과가 있었으며, 그밖에 칠기·경태람(景泰籃 : 銅器 표면에 무늬를 내고 파란 물감을 발라서 불에 구워낸 공예품)·견직물·금은세공 등도 명대 장인들의 높은 예술적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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